헬렌 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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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로 알려진 앤 설리번 선생과 헬렌. 8세 때 찍은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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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헬렌 켈러
사흘만 세상을 볼 수 있다면 첫째날은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보겠다. 둘째날은 밤이 아침으로 변하는 기적을 보리라. 셋째날은 사람들이 오가는 평범한 거리를 보고 싶다. 단언컨대, 본다는 것은 가장 큰 축복이다.[3]
-사흘만 세상을 볼 수 있다면.The Story of My Life. Helen Keller. 1905[4]
세상은 고난으로 가득하지만, 고난의 극복으로도 가득하다.
'''장애는 불편하다. 그러나 불행하지는 않다.'''
1. 개요
Helen Adams Keller(1880년 6월 27일 ~ 1968년 6월 1일)
미국의 사회 운동가. 들을 수도 볼 수도 말할 수도 없었으나 이 3중고의 장애를 극복하고 장애인 인권 운동가, 사회주의자 등 다방면으로 활동한 거룩한 인물.
2. 생애
영문링크
2.1. 성장기
1880년 6월 27일 앨라배마주 터스컴비아에서 부유한 가정의 딸로[5] 태어나 자랐으나, 생후 19개월 때 앓은 뇌척수염으로 인해 시청각장애인[6] 이 되어, '''시각장애''', '''청각장애''', '''언어장애'''라는 3중고를 가지게 되었다.[7] 당연히 정상적인 교육이 될 리 없었고, 대여섯 살이 될 때까지도 물건을 던지거나 사람을 할퀴거나 때리는 정도로밖에 의사표현을 할 수 없었다. 6살이 되던 무렵에 부모는 볼티모어에 사는 유명한 안과 의사 줄리안 차이소름 박사가 장님의 눈을 뜨게 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헬렌을 치료할 수 있을까 해서 데려갔다. 그러나 시신경이 남김없이 모두 죽은 후라서 치료는 불가능했고,[8] 대신 교육을 충분히 시킬 수 있다는 의사의 말에 따라 장애인 문제에 관심이 많던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박사[9] 를 소개받는다. 그를 만난 부모는 "퍼킨스 맹인 학교"를 추천받고, 그 학교에 의뢰하여 가정교사를 부탁한다. 이때 온 사람이 유명한 앤 설리번[10] 이다.
앤 설리번은 응석받이로 자랐던 헬렌에게 극도의 인내심을 가지고 손바닥에 글씨를 쓰는 방식으로 언어를 가르치려 했다. 물 펌프에서 처음으로 'water'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에피소드는 매우 유명하다.[11] 이후 8살때 퍼킨스 맹인 학교에 입학하여 정식 교육도 받게 된다. 6년 후에는 뉴욕으로 가서 라이트 휴먼스 농아 학교를 다니고, 그 이후에는 호렌스 만 농아 학교를 다니는데, 이 학교의 선생인 새라 풀러가 목의 진동과 입의 모양을 만지고 느끼게 하는 방법으로 헬렌에게 말하는 법을 처음으로 가르친다. 이 방법으로 말은 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헬렌 켈러는 16세의 나이에 래드클리프 여대[12] 에 입학하고, 04년 졸업할 무렵에는 5개 국어를 습득했고 이후에는 활발한 사회, 봉사 활동(특히 장애인 인권 운동)을 했다.
하지만 '''어린이들에게 알려진 내용은 딱 여기까지다.'''
2.2. 험난한 일대기
언어를 깨친 이후로도 그녀의 성장 과정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그녀의 곁에는 항상 앤 설리번과 (그 후임인) 폴리 톰슨이라는 보조자가 붙어 손바닥에 모든 정보를 전달해주어야 했다. 그것을 수십년 동안 계속해온 탓에 톰슨의 오른손은 비정상적으로 커지고 핏줄이 튀어나올 정도였다고.
그리고 앤 설리번 역시 교육을 많이 받지 못한 사람이었고, 처음에는 일종의 밥벌이로 시작한 일이었지만 금전 감각이 부족하며 완벽주의적인 성격 탓에 후원자들과 마찰도 자주 빚어 공연 등으로 생계를 잇는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더군다나 헬렌의 집안마저 가세가 기울게 되자 헬렌의 후원금을 착복했다는 의혹도 있다.
다만 공연을 통해서 생계를 이었다는 부분은 앤 설리번이 그렇게도 원하던, 자신이 없어도 스스로 생활할 수 있는 헬렌 켈러가 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실제로 앤 설리번의 한 친구가 앤을 칭찬하기 위해서 "당신이 없으면 헬렌은 아무 것도 아니에요."라고 말하자 앤 설리번은 "그럼 내가 헛되이 산 게로군요."라고 답했다고 한다.[13]
실제로 이런 노력으로 헬렌 켈러는 앤 설리번이 죽고 나서도 32년을 더 살다가, 향년 87세로 사망했다. 그만큼 앤 설리번이 헬렌 켈러 스스로 살아가도록 노력했던 성과는, 어떻게든 빛을 봤다.
2.3. 사회운동가로서의 활동
장애의 극복 사례 및 장애인 인권운동가로만 알려진 것과는 좀 다르게, 그녀는 1909년(29세)부터 사회당에 가입한 사회주의자로 허버트 조지 웰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14][15] 그 외 작가로서의 저술 활동도 활발하고 여성 참정권, 인종차별반대, 장애인 복지, 노동자 보호 운동 등 사회 운동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허나 그녀가 열렬한 사회주의자였다는 것은 당시 매카시즘 때문인진 모르겠지만 미국 대중들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1차 대전 연간의 미국 사회주의 운동과 반전 운동을 보면 '''반드시 이름이 언급되는''' 사람이다. 사회주의자로서의 헬렌 켈러를 다룬 레디앙의 기사. 1912년의 대선에서 유진 뎁스가 패배하자 이후 사회당의 소위 개량주의 노선을 비판하면서 전투적 노동자 단체인 IWW(세계 산업노동자 동맹)에 가입했다. 이후에도 죽기 전까지 사회주의 관련 운동에 앞장섰다. 이러한 그녀의 행보 때문인지 한동안은 FBI에게 감시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서프러제트이기도 하다. 여성 참정권 운동에 참여했다. "고통을 감수하며 싸우지 않는 한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라는 말을 남겼고, 말년에는 이것과 더불어 사회주의 등의 정치적 성향을 드러낸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기도 했다. 링크 1, 링크 2
3. 여담
- 어릴 적 일만 널리 알려지고 정작 성인이 된 이후 활동들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이는 당시 심하게 반사회주의적인 미국 분위기 때문인 영향이 크며 역경을 이겨낸 삶의 전반기만 나오고 사회주의 활동을 한 중반기 이후는 그저 복지활동, 장애인 인권 운동[16] 을 했다는 말만 남기고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대부분 생략하는게 보통이다.[17] 실제 헬렌 켈러의 위인전 대다수가 설리번 선생과 함께 한 어린 시절이 내용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심한 경우 100페이지가 넘는 위인전에서 대학 졸업 이후의 활동을 한두줄로 때운 경우도 있다. 참고로 헬렌 켈러는 88세까지 살며 장수했다. 그리고 1960년대 후반까지 생존했기 때문에 그녀가 어른이 되고 나서의 활동을 한 사진이나 영상도 많이 남아있다. 본래 위인전이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만큼 해당 인물의 어린시절을 창작까지 과도하게 곁들이며 분량을 증가시키는데 헬렌 켈러의 위인전은 그러한 편성의 극치를 달린다. 국내에서도 헬렌 켈러 위인전이 처음 출간될 때가 냉전기였으니 만큼 당연히 페미니즘과 사회주의 활동을 한 부분은 철저하게 삭제되었고, 장애인이나 인권운동쪽으로 초점을 맞춘 정도의 내용으로 간략하게 나왔다. 이러다보니 어린이들 중에서는 헬렌켈러가 3중고를 이겨낸 건 알겠는데 그래서 뭘 한 거지?라며 의문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사실 어른들조차도 정작 헬렌켈러가 뭐 했는지 잘 모르는 경우가 대다수. 다만 인터넷이 보급되고 헬렌 켈러의 사회주의 행적이 어느정도 알려진 이후로는 헬렌이 성인이 된 이후의 활동들도 상세하게 다루는 위인전이 나왔다.
- 1937년 일제강점기 시절 한반도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서울(당시는 경성)에서 강의를 마치고 평양으로 향하는 기차가 개성에 잠시 정차했을 때 그 시간을 놓치지 않고 강연을 했다고 한다. 대구에도 방문했다. 그리고 이후 한국전쟁 때도 방한한 적이 있다.
- 헬렌 켈러와 설리반 선생의 일화를 그린 유명한 영화로 1962년작인
이 있다. 영화 <보니 앤 클라이드>[18] 의 감독인 아서 펜이 연출한 작품으로, 이 영화로 헬렌 켈러 역을 맡은 패티 듀크[19] 는 16살의 나이에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았고, 설리반 선생 역을 맡은 앤 밴크로프트[20] 는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설리반 선생이 헬렌 켈러에게 물 펌프를 통해 처음으로 'water'의 의미를 깨닫게 만드는 그 유명한 에피소드도 영화 속에서 등장한다. 특히 1962년작은 헬렌 켈러 역과 설리반 선생 역의 엄청난 연기로도 유명한데, 순정만화 유리가면에서도 이와 관련된 내용이 나온다. 무려 10분간이나 대사 없이 몸싸움만으로 이루어진 장면과 Water을 깨닫는 장면을 보면 그야말로 신내림급 연기력이 폭발한다. 2000년에 디즈니에서 이 영화를 리메이크했다.
- 오늘날에는 우연의 일치로 치부되지만 동화 표절설이 있다. 낙엽을 울긋불긋 칠한다는 내용의 <서리의 임금님>이란 작품이 한 작가의 <서리의 여신>과 유사하다는 것. 표절이다 아니다 여러 의견이 있지만 고의적인 표절이 아니라 잠재의식 속에 있던 내용을 무의식적으로 쓴 것 아니냐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고 한다. 무엇보다 이 소설은 헬렌 켈러가 학생 때 썼던 것으로, 학교에서는 '서리의 여신'을 표절한 것 아니냐며 다그쳤다고 한다. 이게 헬렌 본인에게는 어지간히 상처가 되었는지 헬렌 켈러의 후반부 생애를 다루는 전기에서는 이 에피소드가 꼭 언급된다.
- 헬렌 켈러가 어떻게 말을 배우게 되었는지 설리번 선생과 직접 시연하는 영상. 동영상을 보면 말하는 사람의 목젖에 손을 대고 입술을 손가락으로 만져 진동과 입모양으로 내용을 전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교육법으로 처음 가르친 사람이 호렌스 만 농아 학교의 교사 새라 풀러였고, 이후 설리번 선생도 이 교육법을 익혀 헬렌에게 가르친 것.
- 일본과도 상당히 인연이 있는데 1937년에 일본을 방문했고, 아키타현에 가서 아키타견 하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아키타견 1마리를 얻어가지고 와서 길렀다. 그 아키타견의 이름이 카미카제였는데 털이 부들부들했는지 헬렌 켈러가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일본 방문 당시 헬렌은 지갑을 도둑맞았는데, 이 사실이 알려지자 일본인들이 '일본을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달라'고 애걸하며 그녀 앞으로 돈과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참고로 같은해 일본은 난징대학살을 저질렀다(..)
- 중국도 방문하고 싶다고 본인이 몇차례 언급한 적이 있으나, 당시 중국의 상황이 군벌, 2차 세계대전, 국공내전등등으로 난장판이라 성사되지는 않았다.
- 레즈비언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다. 영어의 슬랭 가운데 헬렌 켈러와 앤 설리번 선생이 연인이었다는(...) 속설을 반영한 'Pulling a Helen Keller'라는 표현도 있다.
- 헬렌 켈러의 성 Keller는 독일 쪽의 성으로, keller는 독일어로 "저장고"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영어 단어 cellar와 같다. 헬렌 켈러의 조상은 독일이 아니라 스위스에서 왔다고 한다. 스위스의 국어 중 하나가 독일어이니 이상한 일은 아니다.[21]
- 다소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그녀는 스스로가 장애인 임에도 장애인을 열등하게 표현하는 우생학을 지지하며 이에 대해 찬동한 적[22] 이 있다. 지금 시점에서는 매우 충격적인 사실이지만 당시의 분위기와 지식인들의 풍조가 그러했으며 그녀가 살아있을 때는 아직 장애에 대한 개념이 명확하지 않던 시기였기 때문에 이러한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거기다 그녀와 인연이 있었던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역시 우생학에 찬동했기에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
[1] 헬렌 켈러는 당대 스웨덴의 개신교 영성가였던 스탠리보리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헬렌 집안의 전통신앙은 장로교회였다.[2] 명언을 보면 알 수 있다. https://brunch.co.kr/@visiondodream/369[3] 이 문구는 베가 No.6의 광고에도 쓰였다.[4] 영어 전문은 여기로[5] 아버지 쪽으로 보면 셋째 자식이자 첫딸이다. 전처에게서 두 아들이자 헬렌에게는 이복오빠인 제임스 심슨 켈러와 윌리엄 심슨 켈러가 있었기 때문. 헬렌에게는 친여동생 밀드레드 캠벨 켈러와 친남동생 필립 브룩스 켈러가 있었다.[6] 시각과 청각을 모두 잃은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한자로 줄여서 농맹인(聾盲人)이라고도 한다.[7] 병으로 말까지 못하게 된 것은 아니었지만 들리지도 않으니 말소리를 들을 수가 없고 눈도 안보여 글자를 볼 수가 없으니 말을 배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8] 이는 21세기 현재의 의학으로도 치료 불가능한 수준의 상태이다.[9] 전화기 특허를 취득한 그 사람이다. 이 사람의 어머니가 청각장애인이었기 때문에 벨 박사 자신도 장애인 문제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10] 고아였고, 어린 남동생이 있었지만 일찍 병으로 여의었고 그녀도 지독하게 눈이 나빠 엄청 도수가 높은 안경을 쓰고 다녔다고 한다. 원래는 맹인이었기 때문에 퍼킨스 맹인 학교를 다녔고, 이후 눈 수술을 받아 시력을 다시 얻게 된 것이다.[11] 이 일화는 헬렌 켈러의 성장기를 모티브로 한 인도 영화 Black에서도 묘사된다.[12] 1999년, 하버드 대학교에 완전히 통합되었다.[13] 출처 : 네이버캐스트.[14] 웃긴 건 헬렌 켈러는 인종차별을 극도로 혐오하는 개념인이었으나, 허버트 조지 웰즈는 백인 우월주의자였다.[15] 설리번은 스스로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지만 1905년 사회주의자인 존 메이시와 결혼했다.[16] 헬렌 켈러 본인이 장애인이었던 것도 있고, 무엇보다도 정치적 논란의 소지가 거의 없는 장애인 인권 운동과 달리 사회주의 활동과 여성 운동은 당시로서는 정치적 논란이 매우 클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다루기가 민감했다.[17] 다만 사회주의 활동만이 문제라기보다는 삼국시대나 조선시대 위인들이라도 비판 받거나 논란 있는 행적은 서술하지 않는 게 위인전의 특성이다.[18] 한국에서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라는 제목으로 개봉했던 영화다.[19]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샘와이즈 역할을 맡은 배우 션 아스틴의 어머니이다.[20] 영화 <졸업>에서 주인공인 더스틴 호프만을 유혹하는 로빈슨 부인으로 유명하다.[21] 현대 독일의 모태인 중세의 신성 로마 제국에는 스위스나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등이 포함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지역은 근대의 내셔널리즘 기준으로 보면 독일과 다른 정체성을 지니고 있지만, 언어나 종교 등 전근대로부터 내려온 문화적 특성은 많은 부분이 독일과 유사한 것이다. 다만 네덜란드는 신성 로마 제국과 스페인의 동군연합이 해체됨에 따라 스페인의 지배만 받게 되면서 점차 독일어권과 분리되기 시작했으며, 룩셈부르크는 근현대에 가까워질수록 점차 프랑스어가 독일어보다 더 많이 쓰이게 되면서 현재는 사실상 프랑스계 국가로 여겨지기도 한다.[22] <더 뉴 리퍼블릭>에 기고한 글에서 그녀는 "생명에 신성함을 부여하는 것은 행복·지능·능력의 존재 가능성인데, 열등하고 기형이며 마비되고 사고력이 없는 생명체에는 이러한 것들이 부재하다"고 했으며, 또한 "정신적 결함자는 범죄자가 될 가능성이 거의 확실하다"며 우생학적 이유로 장애 유아의 구명 수술을 거부하고 방치한 해리 J. 하이젤든을 지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