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동정치학원
강동정치학원(江東政治學院)은 월북한 간부급 남로당원들에 대한 정치 교육 및 훈련을 위한 기관이다."강동정치학원은 남한 빨치산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존재였다."
"강동학원 출신은 전시 빨치산에 있어서도 특별 취급을 받았고, 강동학원 출신이라는 이름만으로도 각 도당의 일급 간부로 올랐었다."
1. 개요
1947년 9월[1] , 현재는 평양직할시로 편입된 평안남도 강동군 승호면 입석리에 설립되었다. 학원 건물은 일제시대의 탄광사무소와 합숙소를 개수하여 사무실과 교실, 막사로 사용하였다.
나무 한 그루 없는 드넓은 구릉지대에 2km 간격으로 교사, 기숙사, 후방시설, 영화관등 4개 건물이 지어져 있었다.
남로당이 합법적인 시기에는 당 중견간부에 대한 훈련과 정치교육은 서울에 정치학교를 설치하여 단기 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38선 이남 지역에서 공산활동이 비합법화 되자, 남로당은 간부들을 양성하기 위해 중앙간부는 모스크바 고급당학교에 유학시키고, 그밖의 간부는 평남 강동군에 정치학원을 설치해 교육 시켰다. 이때까지만 해도 정치교육이 중심이었지만 49년 부터는 점점 유격훈련이 강화되어 남한에 파견되는 유격대의 훈련 기관으로 변모 되었다.
이태의 소설 <남부군>에는 1949년 학원을 신안주로 이전하였다가 1950년 6·25전쟁발발과 동시에 폐쇄되었다고 나오고, 양한모의 '남로당'(조선일보사) 219페이지에 의하면 49년 4월에 폐교 하였다고 한다. 이쪽 설이 맞으면 그 역할은 49년 5월부터 운영되는 회령의 제3군관학교가 이어 받은 것 같다. 이영식의 수기 '빨치산'에도 49년 봄 즈음 강동정치학원에서 제3군관학교로 전교한 뒤 보름 뒤에 강동정치학원이 폐교되고 금강정치학원으로 이름이 바꾸어 졌다고 서술된다.
여담이지만 이후 승호면에는 정치범수용소인 26호 관리소가 생겼지만 평양과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91년 1월 패쇄되었다. 남로당과 빨치산에게 강동정치학원이란 이름은 듣기만 해도 가슴 설레며 다가오는 거대한 존재였지만, 박헌영과 그 일당을 종간나 종파분자로 취급하는 북한에서 그자리를 남겨둘 리가...
2. 기능
원래는 남로당 중견간부에 대한 훈련과 정치교육을 위한 것이었다. 초기에는 각 도당 부위원장과 부장, 군당위원장, 부위원장 등을 입교시켜 3개월 정도의 강습과 훈련을 실시하고 다시 남파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런데 1948년 4월 전조선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2] 참석와 동년 8월 2일 해주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3] 에 참석하기 위한 남로당과 그밖의 좌익정당(근로인민당, 민족혁명당 등) 및 각 사회단체 간부급들이 대거 월북하게 되자, 이들을 입교시킴으로서 그 규모가 급속히 커졌다.
학원은 3개월반과 6개월반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1개반은 2부로 나누어져 제1부(60명)는 남로당 간부로서 앞으로 당공작만 할 학생들이었고, 제2부는 근로인민당과 그밖의 좌익정당•사회단체 간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1개반은 100명 내지 120명 정도였다. 제1부인 남로당 간부들은 일반 정치학습과 함께 군사훈련에 치중했으며, 제2부는 일반정치학습만을 했다. 당시학습내용을 보면 소련당사, 해방투쟁사, 인민투쟁사, 경제지리, 군사훈련 등이었다. [4]
그런데 1948년 하반기에 남북한 정부가 수립되고 10월에는 여순사건이 일어나 일부 지역에서 유격전이 벌어지면서, 이에 49년 경에는 기존의 당간부훈련소 로서의 목적만이 아닌 유격대원 양성기관으로 그 성격이 크게 변했다. 이로써 강동정치학원은 전문 빨치산 양성기관으로 탈바꿈 한 것이었다.[5]
이때부터 조직이 개편되었는지 자료마다 다소 상이한데 지하당 공작요원의 '정치반'과 게릴라 요원의 '군사반' 그리고 정치와 군사를 배합한 '혼합반'의 3개반으로 구분하고, 각 반을 중대, 소대, 분대로 편성했다. 1개 분대는 15명(여자는 4~5명), 8개 분대가 1개소대, 2~3개 소대가 1개중대였다. 통상 3~6개월이면 졸업하였다. 이밖에 3년 6개월 과정의 '특별전술연구반'이 있었는데 이 비범한 교육기간은 강동정치학원의 존속기간(3년)을 상회한다. 즉 실제로 이과정이 끝까지 유지 조차 못되었고 길어야 1년, 짧게는 2~5일 교육 받는등 그야말로 특별반이었다. 1949년 9월 기준으로 1,200명이 훈련을 받고 있었고 한 과목에 90분씩 오전 4시간, 오후 4시간을 교육받고 주 6일 수업에 일요일만 쉬었다.
훈련은 출신성분, 교육유무, 당내계급과 상관 없이 평등하였다. 누구나 가명을 썼고 복장도 통일했다. 광목으로 만든 항일유격대 군복과 같은 누런 학원복과 모자를 쓰고 발에는 지하족을 신었다.(바닥은 고무, 발등은 천을 댄 작업화) 이후 이러한 복장과 지하족은 빨치산의 상징처럼 된다.
원장은 소련 한인으로 32년 타슈켄트 사법대학을 졸업한 1906년생 박병률로 이른바 소련파에 해당한다. 소련파가 한인2세들을 차출해와 신생국가인 북한의 요직에 꼿아 놓고 소련의 하수인으로 썼는데, 박병률 역시 정확히 그런 경우이다. 소련 타슈켄트의 농촌청년학교(중학교급) 교무주임 겸 수학선생을하던 그를 차출해와 강동정치학원 원장에 임명하였는데 이후 행적을 봐도 바지사장에 가깝다. '빨치산의 아버지'라고 불리기도 하나 글쎄... 그래도 다른 소련파와 마찬가지로 숙청당해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간 상태라 국내 언론과 몇번 인터뷰를 하여 강동정치학원에 대한 가장 충실한 증언자가 되었다. 한국에는 박철언의 초청으로 1994년에 방문했다.
정치부원장은 박치우로 박순철이라는 가명을 썼다. 함북 경성고보 출신으로 지금의 서울대에 해당하는 경성제국대학 철학과 5회 졸업생이다. 남로당 중앙 위원으로 박헌영 직계에 해당한다. 경성제대 다닐때 조선일보 사장인 계초 방응모의 장학기금인 '계초장학생'으로 재학하였다. 이후 학원생 360명으로 제1병단을 편성하고 그 정치위원으로 남한내 유격대 활동을 갔다가 좆망하고 남도부의 제3병단에 편입되어 버린다. 그래도 공로가 인정되어 50년 6월 27일 박헌영에 의해 '남조선 8대열사'로 불린다.
군사부원장은 김일성과 함께 항일빨치산 활동을 한 서철이다. 1907년생의 함북 출신의 의사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의관(醫官)으로 항일운동을 시작하였다. 김일성이 제2군 제6사 사장이었을 때, 서철은 제2군 제3사 사장으로 있었다. 이후 만주에서 더이상 독립운동을 하기 어려워 김일성과 함께 소련으로 넘어가 조선인 빨치산 부대인 소련 88특별여단에서 함께 근무하였다. 이후 제1병단 참모장으로 남파 되었다. 58년엔 인민군 중장으로 군 총정치국장을 지냈고 최종적으로는 로동당 정치국원이라는 최고위직을 역임하고 92년에 사망하여 최고의 영예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장으로 장례를 치뤘다. 아들인 서동명 역시 빨치산의 후예로 로동당 후보위원을 지내는등 잘나가고 있다.
남로당의 간부학교임에도 불구하고 소련파와 남로당, 북로당계가 한명씩 요직에 배치되어 권력을 분점하는 제도였다. 전반적으로 볼 때는 원장인 박병률은 소련파이며, 박치우는 남로당계, 서철은 북로당계로 권력이 한쪽으로 쏠리지 않게 할려는 고심의 흔적이 보인다.
남로당의 최고위 거물인 이승엽과 조일명이 주1회 정도 검열을 나와 시사적인 남한정세를 강연하기도 했다. 이때 남로당의 간부학교인 만큼 "박헌영 만세!"를 외쳤다는 기록도 있고, 거기가 어딘데 말도 안된다며 "김일성 만세!"만을 외쳤다고 하는등 기록이 엇갈린다. 소련파 숙청으로 인해 소련 타슈켄트로 돌아가 거주하던 원장 박병률의 증언으로는 둘 다 외쳤다고 한다.
교관은 정치교원 30명, 군사교관 30명이 있었는데, 군사교관중에서 그 유명한 김달삼(제주 4.3 사건)과 남도부가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박헌영의 호위 책임자 정명식, 대구의전 출신의 서태환이 있었고 유일하게 여강사로 소련공산당사를 가르치는 김원주(가명 주경숙)이 있었다. 김원주는 강동정치학원 1기 졸업생이기도 한데 성혜림, 성혜랑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아들인 <북위38도선>의 주인공 성일기도 잠시 이곳에서 교육을 받았다.
훈련생들은 그야말로 남녀노소가 다 섞여 있어 여성만 해도 수백명이었고, 어린소년 부터 할아버지 까지 다양하였다. 박병률 원장 말로는 "처음에는 남로당의 추천을 받아 진보적 지식인들이 많았으나 나중에는 '성분'을 엄격하게 심사하지 않았다."라고 한다.
3. 출신인물
공산당이라고 하면 출신성분이나 계급이 어떻던간에 서로를 동무라고 부르며 동격으로 봐야하겠다. 그러나 실제로는 빨치산(조선인민유격대)의 경우 간부들과는 감히 겸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간부/비간부와 당원/비당원의 차이는 컸다. 그중에서 강동정치학원 출신이라면 이름만으로도 경외심으로 가득차서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따져보면 네임드급 인물 중에서는 강동학원출신 인물들이 없다시피 한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중앙당간부급들은 강동정치학원 대신 모스크바 당학교로 유학갔으며 바로 남로당 중앙당 사업을 하지 귀찮게 강동정치학원 따위를 다니지 않았다.
빨치산 문서에도 자세히 나와 있지만 한국전쟁이후 초기 3개월간 남한을 장악하기 위한 행정기관이었던 8도(+서울시당) 도당 위원장은 모스크바 유학 갔다온 남로당의 거물들이며[6] 각 도당 부위원장, 도당의 주요간부, 각 군당 부위원장들을 남한 행정을 장악하기 위해 북로당에서 파견된 인사들이다. 그외 각 도당의 고위간부들은 공산당의 비합법화 이후에도 월북하지 않고 목숨걸고 유격투쟁을 하며 전멸 직전에 빠진 각 도별로 한줌밖에 안남은 남로당계 인물들이 차지했기 때문에 강동정치학원 출신은 아예 여기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고위간부들은 애초에 강동정치학원을 가지 않았다. 학원 자체가 어디까지나 월북한 하급간부를 교육시키기 위한 기관이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강동정치 학원 졸업생들은 6.25 이전에는 수차례에 걸쳐서 수백명 단위로 집단 남파되었다가 38선 근처 군경에게 포착 되어 대부분 당한다. 이과정에서 도주한 일부가 지방 유격대에 합류하여 중급 간부정도로 임명되는 경우는 있었다. 당시 거의 유일하게 성공적으로 남파되어 작전한 것이 남도부 부대였는데, 6.25 이후 빨치산 활동중에서도 남도부 부대만은 강동정치학원 출신이 병력중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위키백과를 보면 "대표적인 강동정치학원 출신 인물로는 이현상과 맹종호가 있다. 이들은 유격전 훈련을 받은 뒤 남파되어 조선인민유격대 지도부를 구성했다."라고 나와있다. 이태의 소설 <남부군>에서는 "당시 중앙당의 고위간부는 강동학원에 들어가는 일이 없었다. 이현상의 경우는 아주 특이한 예다"라고 나와 있을 정도로 매우 이례적이었다. 이현상은 48년 여름에 입교해서 가을에 졸업하였다.[7] 원장 박병률에 따르면 "이현상을 특별히 모시도록 했습니다. 내무반도 독방을 사용하도록 배려를 해주었지요. 훈련도 되도록이면 따로 시키려고 했구요. 유격술연구원으로 배정했습니다."라고 하였다. 반면에 실록 <남도부>에서는 모든 교육생은 과거의 신분과 관계 없이 평등한 입장에서 교육을 받았다고 이현상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이현상 평전>에서는 남로당 간부부장인 이현상은 다른 간부들 처럼 모스크바 유학을 갈려고 했지만, 북로당 간부부장인 이상조와 술자리에서 박헌영과 김일성중 공산당의 진정한 지도자가 누구냐고 언쟁하다가 술상을 뒤엎어 버리는 사고를 쳤다고 한다. 이사건은 일파만파로 번져나가 이일 때문에 "이상조는 상업성 상업관리국장이라는 한직으로 좌천되었고, 이현상은 유학 대신 강동정치학원에 평교육생으로 들어갔다."라는 소문을 적어 놓았다. 그러면서 "야산대를 체계적으로 지도할 수 있도록 유격훈련을 받기 위함이며, 징계성이라는 소문이 돌정도로 이례적이다."라는 복선도 깔아 놓았다.
어쨌든 이현상의 경우는 일반적인 경우가 아니라 매우 특별한 경우로 처음부터 원장 혹은 그윗선의 인물이다. 이후 교육생인 이현상은 제2병단 사령관인데 비해 학원 부원장들은 1병단의 참모장, 정치위원에 불과하였다.(체육고등학교 신입생으로 도교육감이 입학한격) 이후 이현상은 여순사건의 국군 14연대 반란군을 지도하다가 2병단으로 재편한 후 사령관을 맡았고 한국전쟁 이후 '독립4지대장'(이후 남부군)으로 임명되었다.
맹종호는 일제시대때부터 무려 신간회에 참가한 좌익 운동가로 해방후 남로당 서울시 중구 위원장을 맡았던 인물이다. 강동정치학원 수료후 '독립10지대장'으로 오대산 일대에서 유격활동을 벌였는데, 이런 것보다는 역사책에서 1953년의 '''미제국주의 고용간첩 박헌영 리승엽 도당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전복음모와 간첩사건(...)'''때 이승엽과 함께 처형된 9명 중 한 명으로 봤을 것이다.[8] 어쨌든 맹종호도 강동정치학원 입교자 중에서는 이현상에 버금가는 고위간부이다. 동격인 독립지대장이기도 하고.
4. 남파
49년 8월 4일, 군사교관인 김달삼•남도부를 제3병단 사령관으로 하여 강동정치학원생 300명을 태백산 지구로 파견 시킨 것을 시초로,
49년 초순 1병단을 편성하여 사령관에 이호제, 정치위원에 강동정치학원 정치부원장 박치우, 참모장에 군사부원장 서철을 임명하여 원생 360명으로 오대산 지구로 남파 시켰다.
다만 이현상은 이미 48년 10월 19일에 일어난 여순사건을 지도하기 위해 남파되어 있었고 이후 제2병단으로 개편된다. 예하 부대원들은 국군 14연대 반란군 출신들과 여순 인근 좌익세력들이라 강동학원출신은 아니였다.
기타 강동학원 출신들은 백여명 단위로 10차에 걸쳐서 계속되어 부분적으로 남파 되었지만 점점 강화되는 38선에 가로 막혀 괴멸되었다. 한국전쟁중 1•3병단의 잔여세력이 중심이 되어 남도부를 사령관으로 한 제7군단이 결성되어 남파되어 경상도 동해안 지역에서 활동 하였다. 그외에도 소규모로도 몇명 혹은 몇십명 단위로 조금씩 남파되어 축차소모되었다. 그중 일부는 끝까지 살아남아 남한 현지의 빨치산에 합류되어 중견간부로 활동 하였다.
정리 하자면 남한에는 충남•북도당, 경남•북도당, 전남•북도당등 6개 도당 유격대와 이현상의 남부군, 남도부의 동해여단(제7군단 혹은 남도부 부대)이 있었는데 이중에서 강동학원 출신이 중심이 된 것은 남도부의 동해여단 뿐이었다. 다만 각 도당 유격대에는 더러 강동학원 출신이 섞여서 중견간부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들에 대하여 더 자세한 내용은 빨치산(조선인민유격대)과 남도부 문서를 참조.
5. 금강정치학원
강동정치학원의 후신. 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1951년 10월 94호 결정서에 따라 당간부 및 유격대 지도자들을 교육/훈련하기 위해 1천여 명의 인원을 훈련할 능력을 가진 간부훈련소로 황해도 서흥군 율리면 오동리에 설치되었다. 이러 남한 빨치산을 전담하기 위해 신설된 로동당 연락부에서 52년부터 남한의 각 지구당사업을 지원하기 위해 수백명의 금강정치학원 출신들을 남파시켰으나 대부분 실패로 끝났다.
교육생은 월북한 남한인으로 구성되었는데 최대 1500명에 달했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남한내 친김일성 세력을 키우기 위해 조직되어서 이전의 남로당의 산하단체 역할을 하였던 강동정치학원과는 설립주체가 틀리다. 워낙 네임드인 '강동정치학원'에 비해서 인지도가 듣보잡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로당숙청때 제거된 남로당 간부들의 죄목으로, 미국의 간첩으로 김일성 정부 전복을 꾀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 군사적 배후로 금강정치학원이 지목되었다. 그바람에 반역군사집단으로 의심당해 교육생들은 강제로 중앙당학교에 수용되었다.
이후 대남 방송등을 담당하는 기관인 '칠보산연락사무소'가 있는데 여기의 정치교육원이 바로 금강정치학원이라고 하는데, 이름만 동일한게 아닌가 추정된다. 일단 위치가 칠보산 연락사무소는 평양이다. 물론 월북한 남한인도 더이상 있을리가 없고.
6. 제3군관학교
비슷한 기관으로 함경북도 회령시에 있던 제3군관학교가 있다.[9] 관동군의 병영에 자리 잡은 월북한 남한청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유격대원(빨치산) 전문 양성소 였다. 1949년 5월 부터 교육을 시작하였는데, 1기생으로 300명을 4개월간 교육 시켰다.
시기적으로 강동정치학원이 폐교 또는 이전한 시기인 49년 4월과 정확히 맞어 들어간다. 그렇다면 제3군관학교를 강동정치학원의 후신으로 볼 수 있을꺼냐 하는 문제가 생기는데 강동정치학원은 남로당의 당원 교육기관이라는 성격이 있었고, 교관들도 남로당원들이었다. 그에 반해 제3군관학교는 인민군 소관이었기 때문에 교육 주체가 바뀌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빨치산을 키워낸다는 목적은 같지만 세부적으로 보면 강동정치학원의 후계자가 제3군관학교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따르고, 다만 북한 입장에서 강동정치학원을 견제하기 위한 대체제로 볼 수 있다. 성격은 비슷하지만 그 교육주체가 다르기 때문에 강동정치학원 문서와 연결되는 기관이라고 보기 힘들고 유사기관이라고 할 수 있지만 독립적인 문서를 만들만한 양이 안되어 여기다가 넣는다.
원장은 김일성과 함께 소련 88특별여단에서 근무했고, 김정일을 업어서 키웠다고 알려진 오진우 소장이며, 군사 부교장은 강동정치학원의 군사부장이었던 서철 대좌, 교무과장에는 김용택 소좌, 제1대대장 최충국 총위, 제2대대장 윤문언 대위등 모두 정규 인민군 군관들이었다.
주요교과는 군사전술, 제식훈련(총검술), 공병학(폭파학), 유격훈련(매복, 기습), 숙영(특히 은밀성 보장) 등 군사학과 소련 공산당 당사, 세계정치 지리, 군사규정 등 정치교육이었다. 입교하는 사람들은 모두 가명을 부여받았다고 한다.
이후 교장인 오진우는 한국전쟁 발발시 6월 24일경 약 1천명 가량 규모의 766부대를 만들어 동해안으로 상륙하여 유격전을 벌이는데 이 때 구성원들 중 일부 혹은 대부분이 3군관학교 출신이 아닌가 추측된다. 766부대와는 별도의 부대가 아닌가 추정을 하는 남도부 부대 역시 성일기 같은 일부의 제3군관학교 출신이 섞여서 766부대와 함께 동해안으로 상륙하여 유격전을 수행하였다.
[1] 자료마다 상이한데 여기서는 이태의 <남부군> 258페이지에 나온 자료에 따른다.[2] 김구와 김규식등이 참석한 남북연석회의의 정식명칭[3] 북한 입장에서의 남한의 대의원을 뽑기 위한 대회였는데, 인민대표 1080명중에서 교통사정과 월북중 체포된자 78명을 제외한 무려 1002명이나 참석하였다.[4] 놀랍게도 소련군을 통한 서구풍 유행인지 사교춤 과목도 있어서 댄스 연습도 했다고 한다. 남녀가 오락장에서 허리를 안고 트로트 춤을 배우거나 러시아식 탭댄스를 추었다.[5] 1949년 초에 월북한 모든 남한 청년들에게 빨치산 복무 의무가 주어지고, 의무를 마친 자만이 자기 진로를 갈 수 있다는 중앙당의 결정이 하달되었다는 증언도 있다.[6] 전북도당 위원장 방준표, 전남도당 위원장 박영발, 경북도당 위원장 박종근등이 모두 이에 해당한다. 전남도당 위원장 남충렬도 모스크바 유학 갔던 것으로 추정된다.[7] 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데 우파진영에서는 1948년 10월 19일에 일어난 여순사건을 북한에서 이현상을 보내 일부러 일으켰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현상만은 다른 교육생과 함께 교육하고 졸업 한 것이 아니라 잠깐 개인적으로 훈련 받다 간 수준이라 교육 동기들도 없고, 언제 졸업한지도 확실하지 않다.[8] 다만 1956년 8월 종파사건으로 박헌영이 처형되는데, 이 때 검사측 증인으로 참석한 후 처형되었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당시 피의자는 박헌영, 이승엽 등 13명이었는데 맹종호도 여기 안에 들어갈 만큼 남로당 내에서는 고위급이었다.[9] 제1군관학교는 평양시 사동에 있는 군사 지휘관 전문 양성소, 제2군관학교는 군내 정치간부 전문 양성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