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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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1997년까지 사용한 C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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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부터 1998년 퇴출 직전까지 사용한 마지막 CI.[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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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높은 빌딩이 경기은행 구월3동 본점. 1992년 당시의 전경이다.[1]
1. 개요
과거 경기/인천지역을 거점으로 했던 지방은행. 본점은 인천광역시 남동구 인주대로 585(구월동 1127-1)에 있었다.
2. 역사
1969년 경기도 지역을 영업 구역으로 하는 '''인천은행'''으로 창립했으며, 1972년에 증권거래소에 주식상장하며 '''경기은행'''으로 개명했다. 현재 기준으로는 인천에 본점을 둔 경기은행이라는 게 다소 특이해 보일 수 있지만, 당시에는 인천이 경기도에 속해 있어서 자연스러웠던 것. 인천시가 직할시 승격과 함께 경기도에서 분리된 것은 1981년이다.
설립 초기 경기도 자체가 사실상 서울특별시와 밀접한 관계였던 터라 서울에 본점을 둔 대형 시중은행들과의 경쟁에서 그다지 재미를 보지 못했다. 그렇다고 서울과 별로 접점이 없는 곳에서 잘 나간 것도 아닌 게, 이쪽은 낙후된 지역이 많은 데다가 지역농협 및 우체국이 버티고 있었다. 그래서 다른 지방은행들에 비해 지역에서 차지하는 점유율이 낮았다.
1976년 인천시 중구 사동 구 인천상공회의소 회관으로 이전 후 1988년 6월 경기은행장학회를 세우고 8월 총수신 1조 원을 달성했고, 10월 CD 공동망업무를 개시했다. 1989년 경인리스금융을 세우고 1992년 구월동 신사옥으로 이전하며 SWIFT 시스템을 가동 후 1993년 종합온라인시스템 'BANCS'를 구축한 뒤 신경기상호신용금고를 세웠다. 1996년 문서관리 통합사무자동화 시스템을 개발 후 경은경제연구소를 세워 세를 불려갔다. 이러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기업이 많은 인천광역시에서의 기업 여신과 고금리 신탁으로 근근히 영업하던 와중, 1997년 외환 위기로 직격탄을 맞았다. 기업들이 죄다 쓰러지면서 부실화된 채권이 급증했고, 신탁에 지급해 줄 이자는 많다 보니 손실이 엄청나게 불어난 것이다.
결국 1998년 6월 29일 퇴출은행으로 지정된 후 한미은행에 P&A로 인수되었고, 기존 법인은 청산절차를 거쳐 2012년 소멸됐다. 구월3동 본점 건물은 퇴출 후 성업공사가 소유했다가 1999년 6월 18일 매각대금 360억 원에 한미은행이 사들여 인천영업부로 개편되어 일반 지점보다 상위 점포로 분류되며, 전산센터 역시 이 곳에 개설되었다. 2004년 한국씨티은행 출범 후 2017년까지 영업했다.
금융결제원 홈페이지 금융기관 코드 조회를 하면 경기은행의 퇴출 당시 지점망이 그대로 뜬다.[2] 엑셀 파일을 다운받아 보면 경기은행 코드인 36번으로 시작하는 한국씨티은행의 지점들이 있는데, 이를 통해 경기은행의 퇴출 직전 지점 현황을 파악할 수 있고 해당 지점명을 홈페이지에서 검색했을 때 027 코드로 함께 뜨는 지점망을 보면 현재의 흔적을 얼추 알 수 있다.
과연 이름에 걸맞게 경기도 곳곳에 지점이 있었는데 한미은행과의 통합 과정에서 채산성이 안 맞다는 이유로 모두 폐쇄되었고[3] 그 결과 현 한국씨티은행은 해당 지역에 점포를 갖고 있지 않다. 현재 남아 있는 경기은행 출신 지점을 통틀어 봐도 인천광역시와 경기도 일부 대도시를 제외하면 정말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경기은행의 자취는 찾아보기가 어렵다.
금융결제원 홈페이지의 금융기관 코드 조회로 확인한 결과 인천 10개, 경기 13개 총 23개 지점이 경기은행 출신 지점으로 확인된다. 다만 이는 전화번호 혹은 주소가 일치하는 경우만 모아놓은 것이며, 저 지점들 외에도 한미은행 통합 이후 전화번호나 주소를 변경한 지점이 있을 수 있다.
서울특별시의 경우에는 종로, 여의도, 영등포, 역삼동, 강남역 5개 지점뿐이었으며 한미은행 점포가 바로 근처에 있는지라 죄다 폐쇄됐다. 따라서 서울 지역에는 경기은행의 흔적 자체가 없다.[4] 퇴출 당시 194개 점포 중에서 한미은행으로 정식 편입된 게 104개였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엄청나게 줄어들었다.
3. 기업정신
- 행훈: 인화와 단결, 성실한 봉사
- 행가: 작사는 한상억, 작곡은 최영섭이 맡았다.
4. 역대 은행장
- 이상윤 (1969~1971)
- 유제국 (1971~1976)
- 이문탁 (1976~1979)
- 이필선 (1979~1980)
- 성승모 (1980~1987)
- 이상호 (1987~1993)
- 주범국 (1993~1997)
- 서이석 (1997~1998)
5. 여담
- 본점이 두 번 이전되었는데, 첫 번째로 1976년 1월 5일 인천광역시(당시에는 경기도 인천시) 중구 사동 9-1번지에 입주했으나 원래 여기가 인천상공회의소 회관인 것을 일부만 분할 매입한 어정쩡한 형태였다. 이후 378억 원을 들여 1988년 6월 14일에 대지 3,315평, 연건평 14,348평, 지하 3층, 지상 20층, 옥탑 3층 규모의 본점 신축 공사를 개시, 1992년 1월 28일 남동구 구월동 1127-1번지에 직접 신축한 건물을 쓰게 된다. 참고로 옛 사동 본점은 경기은행 신포지점으로 전환된 후 한미은행을 거쳐 한국씨티은행 신포지점이 됐으나, 대규모 지점 통폐합을 거치면서 2017년에 끝내 폐쇄됐다.
- 강남역 1번 출구 뒷쪽 빌딩 1층에 강남역지점이 있었는데, 2007년경까지 간판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일단 인근에 한미은행 지점이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경기은행 강남역지점은 폐쇄되었고, 해당 건물이 장기간 임대되지 않아 그렇게 되었던 것. 2008년경부터 SK텔레콤 강남지점이 위치하고 있으며 다른 SK텔레콤 지점과 다른 입구나 창구 구조에서 은행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2019년 기준 이 자리는 스타벅스가 되었다.
- 부천대학을 비롯한 몇몇 학교에서 재학생들에게 적금통장을 만들게 하면서 더 이자를 준다든지 하며 손잡았다가 퇴출되면서 제대로 보상도 하지 않아 몇몇 재학생이 학교 측에서 시위하는 일이 있었다.
- 퇴출 직전까지도 이를 막기 위한 로비가 있었는데, 퇴출되기 불과 25일 전이었던 1998년 6월 4일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여당인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출마해 당선된 임창열 당시 경기도지사에게 서이석 경기은행장이 뇌물로 1억 원을 건네는 일까지 있었고 결국 두 명 모두 구속, 수감되었다. [5] 사실 퇴출시켜야 할 정도로 부실한 은행은 널리고 널렸었지만, 대형 시중은행을 퇴출시켰다가는 도저히 뒷감당을 할 수가 없었기에 당시 정권과 금융 당국은 비교적 만만한 지방은행들을 퇴출시키기로 방침을 정했었다. 그래서 퇴출설이 나도는 지방은행들은 하나같이 해당 지역의 유력 인사에게 로비를 했고, 이게 금융 당국으로도 전달이 되긴 되었었다. 하지만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은 청탁 자체를 죄다 무시했고, 그 결과 여당 소속인 임창열 경기지사가 구속되었던 것이다. 물론 청탁이 완전히 차단되었다고 보기도 애매한 게, 원래 퇴출 대상 5개 은행 리스트에는 충북은행이 들어 있었지만 막판에 충청은행으로 뒤바뀌었다. 둘 다 부실 정도가 심각해 도찐개찐이긴 했지만 일각에서는 한나라당을 탈당해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하여 당시 지방선거에서 당선된 이원종 충청북도지사를 배려해 충북은행을 살렸다는 설이 정가에 있었다. 임창열 전 경기도지사는 나중에 사면되었지만, 서이석 전 행장은 안양교도소에서 복역하던 중 2003년 8월 21일에 지병인 심근경색으로 옥사하였다.
여담으로 서이석 전 행장은 1974년 경기은행에 입행하기 전에 씨티은행 서울지점에서 근무한 바 있는데, 이후 경기은행이 한미은행에 넘어가고 한미은행은 씨티그룹에 넘어가는 아이러니한 일이 일어났다.
- 퇴출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직원들은 현재 한국씨티은행의 차장급 이상으로 재직 중인데, 특히 상고 졸업 후 바로 입행한 케이스도 상당수 있다.[6] 어찌 보면 1990년대 대한민국 경제의 마지막 수혜자.
6. 자회사
- 경기리스금융: 2000년 '썬캐피탈'로 명칭을 변경했다가 2002년 화인캐피탈로 매각된 후 2004년 그 회사와 합병됨.
- 신경기상호신용금고: 1998년 폐업.
- 경은경제연구소
[출처] 경기은행협의회(구 경기은행 해직자협의회)[1] 이 건물 바로 건너편에는 인천광역시에서 가장 큰 종합 공연장인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이 있다. 지금의 관교동과 구월동은 인천의 최대 번화가지만, 이 사진이 촬영됐던 1992년은 외곽 지역으로 분류되던 시절이다.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도 이 무렵에는 공사 중이었다. 이 당시 인천에서 종합문화예술회관의 역할을 하던 곳은 주안동의 인천시민회관이었다. 관교동과 구월동은 199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개발됐다.[2] 조흥은행(21), 서울은행(25), 구 씨티은행(53), 보람은행(82) 등은 여전히 코드가 살아있기 때문에 뜨는 거라지만 경기은행은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다. 또한 함께 퇴출된 은행 중에서 충청은행(33) 역시 하나은행 리스트로 뜨는 상황.[3] 한미은행이 경기은행을 즉각 통합한 게 아니라 일단 한미은행 이름을 내걸고 임시적으로 몇 달간 영업하다가 비로소 전산까지 통합되었는데, 바로 이 때 폐쇄된 것이다. 이런 점포의 경우 한미은행 코드가 아예 부여조차 되지 않은 관계로 금융결제원 코드 조회시 036 코드만 있는 것.[4] 단, 한 가지 해프닝이 있었는데, 이는 후술.[5] 허나 임창열 지사는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경제부총리를 지낸 인물이었다. 즉 정부 내 경제 관련 부처에는 상당한 영향력이 있으며 무엇보다도 집권 여당 공천으로 경기도지사에 당선될 정도면 충분히 경기은행 퇴출을 저지할 만한 구석이 있었다. 그래서 경기은행 측이 가장 먼저 로비 대상으로 삼았던 것.[6] 이 당시 남직원들의 경우 고등학교 졸업 직후 입행하여 약 1년 간 근무한 후 군 입대 휴직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개중에는 전역하고 와 보니 은행이 없어져 있고 고용 승계가 안 되어 있더라는 청천벽력같은 케이스를 경험한 경우도 있다. 퇴출 직전이었던 1998년 5월에 전역해서 복직한 고졸 직원들중에 상당수가 고용 승계되었고 그중에는 차장급까지 오른 케이스가 제법 있는걸 감안하면 그저 안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