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흥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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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은 옛 조흥은행 본점. 서울특별시 중구 청계천로 54 (삼각동)으로 청계천 광교 옆이며, 현재는 신한은행 광교영업부로 이용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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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옛 신한금융그룹 계열 시중 은행이자 '''대한민국 주식시장의 역사를 함께한 코스피시장 제 1호 상장기업(종목코드 000010)'''.[3] 현재는 신한은행과 합병하여 존속 법인으로 남아 있으나 명칭이 사라졌다. 공동망 번호는 살아 있어서, 구 조흥은행 지점에서 수표를 뽑으면 021번을 아직도 볼 수 있고 현재 발행 중인 신한은행의 직불카드에도 21번이 찍혀 나온다.
존속법인 명이 조흥은행일 적엔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으로, 기네스 인증까지 받았었다. 또한 2003년 이전까지 외국계 지분이 없는 '순수 토종은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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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페이지 주소는 www.chb.co.kr[4] / PC통신 명령어는 go chb였으며, 노조는 한국노총 금융노조 소속으로 신한은행으로 명칭이 변경된 후에도 한동안 존속하다가 2008년에 구 신한은행 노조와 통합했다.
2. 역사
1878년 다이이치은행 등 일본계 은행들이 조선에 진출해 일본의 경제 침탈이 우려되면서 한국인들은 "근대적 금융기관을 설립해 자국 상공업자를 보호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여왔다. 그리하여 1894년 조선은행, 제국은행, 한흥은행 등이 설립했으나 한 해도 못 가 단명했고, 1897년 한성은행이 설립되어 본격적으로 순수 민족 자본 은행으로 첫발을 내딛었다.
1903년 민영에서 공립으로 개편됐으나 1910년 한일합병 뒤 주인은 일본인들에게 넘어갔고, 1938년 해동은행 매수 후 1941년 경성합동은행, 1942년 동일은행[5] 을 각각 합친 뒤 1943년에 조흥은행으로 개칭했다.[6] 광복 후에는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민간 은행으로서 '''조상제한서''' 중에서 필두로 불리며 은행 업계의 최강자로 떠올랐다. 특히 광복 후에는 발권 은행의 자리까지 넘볼 정도였는데, 이게 만약 실현되었더라면 HSBC와 스탠다드차타드가 발행하는 홍콩 달러처럼 '''조흥은행권 대한민국 원'''이 존재했을지도 모를 일.[7]
해방 이래 본행은 구 동일은행계 민씨 가문과 구 대구은행계 정씨 가문이 지배하며 주도권 다툼을 해왔다. 1957년 3월 입찰에서 민씨 집안이 관계사 조선맥주, 계성, 휘문학원, 영보합명회사 및 민병도 전무 지분을 합해 7만 8천 주(40%)를 확보해 승리했으나, 조선맥주의 경영 위기로 조선제분 사장 윤석준에게 지분 5만 2천 주를 8천 환에 매각했다가 이병철 삼성물산 사장이 지분 55%를 인수했다. 그러나 1961년 5.16 군사정변 후 민간 주식이 정부로 환수되었다.
1963년 기존 본점 건물이 화재로 소실되어 1966년 새 건물을 신축했고, 1982년 장영자-이철희 사건 및 1983년 영동개발진흥 사건 2연타로 타격을 맞아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1982년 은행신용카드연합회 창립 멤버로 참여한 뒤 1983년 3월 정부 소유 주식을 매각해 민영화한 이후 1984년 구 영동개발진흥 계열사였던 태평양투자금융을 인수하면서 사업확장을 시도해 같은 해 조원상호신용금고를 설립하였고, 1985년 로고를 빨간 원이 세 개 쌓인 모양으로 변경했다. 1989년 조흥리스, 1990년 조흥시스템 등 자회사를 잇따라 설립하고 1992년에 영진투자자문을 인수했다. 1994년 조흥경제연구소, 1995년 조흥파이낸스를 각각 설립 후 그해 7월부터 철도 승차권 자동 발매를 개시하였다. 동년 11월에 한국기네스협회로부터 '국내 최고 은행 최고 법인 기업' 기록 인정서를 받았다. 1996년 창립 100주년을 앞두고 본점 옆에 '조흥 백주년 기념관'이란 빌딩을 준공하고 1997년 조흥백년재단 및 조흥금융박물관을 각각 설립했다.
위와 같은 무수한 공적에도 불구하고 1997년 한보사태로 우찬목 은행장이 구속되어 마가 끼기 시작했고, 결국 외환위기 때 자산 건전도가 심하게 떨어져 퇴출 은행으로 찍혀 버렸다.[8] 이후 1998년 조흥시스템을 청산하는 등 구조조정을 단행해 잘 수습해서 퇴출까지는 안 갔고,[9] 1999년 4월 충북은행, 9월에 강원은행 + 현대종금과 합병하면서 공적 자금 총 2조 7,000억 원이 투입되어[10] 그레이트 1단계 퓨전을 단행하며 5월 로고를 영문으로 변경했고, 6~7월 들어 조흥파이낸스와 조흥증권을 코미트창업투자와 대만 KGI그룹에 각각 파는 한편, 7월 은행권 최초로 인터넷뱅킹을 실시했다. 2000년 강은상호신용금고를 춘천상호신용금고에 팔고 베트남 퍼스트비나뱅크를 인수하며 '''공적 자금 수혜 대상 은행 중 유일하게 500억 원 대의 흑자를 기록하며 살아났다.''' 2001년 은행권 최초로 부실채권 정리를 위해 '배드뱅크'를 설립했다.
객관적인 지표로도 독자 생존이 가능했고 정부의 매각 방침 또한 점진적인 분할 매각이었기 때문에 조흥은행은 당연히 독자 생존할 것으로 굳게 믿고 있었는데, 2003년에 정부가 갑자기 신한금융지주에 매각해 버리면서 2006년 신한은행으로 이름이 바뀌었다.[11] 2002년 여름까지만 해도 외자 유치 및 일부 계열사 해외매각 등의 계획을 세우면서 경영 안정화를 꾀하고 더 나아가 계열사를 모아 금융지주회사를 만드는 방안을 모색했는데, '''2002년 10월 정부가 신한금융지주로의 매각을 밀고 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신한 말고도 몇몇 컨소시엄이 있긴 했으나 정부는 '''합병을 통한 대형화'''를 성사시키기 위해 혈안이 된 상태였고[12] 결국 신한금융지주로의 매각을 노골적으로 밀고 나간다.[13][14][15] 그 전에는 해외 매각이 여의치 않았던 서울은행을 아예 하나은행에 넘겨 대형화를 꾀한 일이 있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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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조흥은행은 노사 할 것 없이 난리났었다.[16] 노조의 파업은 일단 사측에서 표면적으로는 만류하긴 했으나, 실제로는 조흥은행에 대한 애사심은 노사 모두 한마음이었기에 인수 즉시 신한은행과 대등 합병하고 명칭을 조흥은행으로 할 것을 요구한 건 노사가 한목소리였을 정도. 이에 신한금융지주 측은 노조와의 협의를 거쳐 통합은행 명칭은 조흥으로 하되 '''통추위에서 결정한다'''라는 문구가 포함된 합의문을 발표하지만, 2005년 말 통추위는 저 밑줄친 부분만 갖고서 통합 은행 명칭을 신한은행으로 정해 버리며 그레이트 2단계 퓨전이 확정됐다. 진짜로 망했어요. 창립한 지 109년 만에 소멸된 셈.
'''그러나 역사만은 이어졌다.''' 존속 법인을 조흥은행으로 정하는 역합병을 했기 때문. 그러니까 법인으로 따지면 신한은행이 사라지고 조흥은행이 신한은행으로 사명을 변경한 것이 되었다. 비록 신한금융지주가 조흥은행을 인수하긴 했어도, 역사성만큼은 1982년에 설립된 신한은행이 조흥은행에 쨉도 안 되는 만큼 존속 법인은 조흥은행으로 정한 것이다. 때문에 현재 신한은행 홈페이지를 보면 조흥은행의 역사가 속속들이 다 나와 있다. 여지껏 은행 인수합병 사례 중에서는 피 인수 은행 역사가 비중 있게 다뤄진 유일한 케이스. 뿐만 아니라 조흥은행 본점이었던 현 신한은행 광교영업부에 가보면 신한은행 Since '''1897'''이라는 문구도 달아 놓았는데 이는 결국 현 신한은행이 조흥은행의 모든 역사를 이어받았다는 결정적인 근거가 된다.
은행연합회의 순서는 산은-농협-조상제한서-국책은행 코드순-후발시중은행 코드순-지방은행 코드순으로, 법인 계승과는 상관 없이 은행 합병 시 통합은행은 통합 주체 중 더 상석인 은행의 자리를 차지한다. 서울은행을 계승한 기존 법인을 걷어차고 외환은행을 존속법인으로 정하여 통합된 KEB하나은행이 서울은행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나 대외적으로는 얘기가 다른데, 현재 신한은행은 창립 기념일을 애매모호하게 통합 출범일인 2006년 4월 1일로 잡고 있으며, '''우리나라 첫 은행'''이라는 구호를 내세우는 우리은행[17] 에 별다른 대응을 안하고 있다.[18] 신한은행 홈페이지를 보면 조흥은행의 역사를 계승했음을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는데도 한편으로는 조흥은행의 역사를 어떻게든 외면하는 이중성을 보여주는 셈. 우리은행이 최초의 은행 구호를 내세우며 신한은행이 이에 대응을 하지 않는것도 신한은행이 역합병으로 역사를 거저먹은 격이라 최초 은행 운운하기 껄끄러운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은행은 이름만 변경되었을 뿐 역합병 없이 법인이 계속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는 점도 우리은행이 최초 구호를 내세우는 이유이기도 하다.
3. 역대 은행장
※ 1921 ~ 1928 / 1937 ~ 1951년까지는 '두취[19] ', 1928 ~ 1937년까지는 '대표취체역'이란 호칭으로 불렸음.
- 김종한 (1897 ~ 1903)
- 완순군 이재완[20] (1903 ~ 1909)
- 이윤용 (1909 ~ 1923)
- 한상룡 (1923 ~ 1928)
- 츠츠미 나가이치 (1928 ~ 1936)
- 이가 세이이치 (1936 ~ 1937)
- 하야시 시게키 (1937 ~ 1938)
- 노다 신고 (1938 ~ 1943)
- 구보 히게카즈 (1943)
- 이와츠보 토모유키 (1943 ~ 1945)
- 정운용 (1945 ~ 1947)
- 김한규 (1947 ~ 1949)
- 김교철 (1949 ~ 1956)
- 정종원 (1956 ~ 1961)
- 장용태 (1961)
- 이호상 (1961)
- 서병찬 (1961 ~ 1965)
- 문종건 (1965 ~ 1969)
- 박대진 (1969 ~ 1970)
- 문상철 (1970 ~ 1972)
- 고태진 (1972 ~ 1976)
- 심원택 (1976)
- 이동수 (1976 ~ 1979)
- 김용운 (1979 ~ 1980)
- 임재수 (1980 ~ 1982)
- 이헌승 (1982 ~ 1983)
- 송기태 (1983 ~ 1986)
- 김영석 (1986 ~ 1991)
- 이종연 (1991 ~ 1995)
- 우찬목 (1995 ~ 1997)
- 장철훈 (1997 ~ 1998)
- 위성복 (1998/1999 ~ 2002)[21]
- 이강륭 직무대행 (1998)
- 홍석주[22] (2002~2003)
- 최동수 (2003 ~ 2006)
4. 역대 슬로건
- 여러분의 조흥은행 (1953~1957/1965)
- 오래인 역사 새로운 운영 (1957~1959)
- 친절하고 신속한 조흥은행 (1964)
- 친절하고 신속한 여러분의 조흥은행 (1965~1969)
- 건실한 경영 친절한 서어비스 (1970)
- 행복과 번영을 약속하는 조흥은행 (1973~1985)
- 밝은 내일 힘찬 성장 (1985~1993)
- 좋은 만남 좋은 이웃 (1993~1999)
- 함께한 100년, 함께할 100년[23] (1993~1997)
- 백년은행 백년대계 (1995)
- My Bank (1999~2000)
- Cyber & Human Bank (2000~2001)
- 변화의 발상지 (2001~2002)
- 한국 금융의 백두산 호랑이 (2002~2003)
- 꿈을 이루는 은행 (2004~2006)
5. 기업정신
1993년 창립 96주년을 맞이해 확립되었다.
5.1. 기업이념
- 종합서비스금융을 통한 풍요로운 미래창조
5.2. 경영이념
- 고객중심의 경영, 미래지향의 경영, 인간중시의 경영
5.3. 행훈
- 인화견지, 행규완수, 책임완수 (1958~1993)
- 기쁨주는 우리, 앞서가는 우리, 함께하는 우리 (1993~2006)
5.4. 경영방침
2004년부터 제정되었다.
- 자율/창의경영, 책임/투명경영, 고객만족 경영, 경영혁신 추구, NEW BANK 구현
5.5. 조흥인의 행동규범
- 언제나 고객에게 물어보자
- 항상 새롭게 접근하자
- 지금 바로 시작하자
- 조그만 성과도 칭찬하자
- 내가 먼저 참여하자
6. 상징 노래
6.1. 조흥은행 행가
1948년 7월 24일에 제정되었으며, 작사는 육당 최남선, 작곡은 박태준이었다.
6.2. 조흥찬가(나의 사랑 조흥!)
작사/작곡은 김민식이 맡았으며, 1993년 2월 19일에 제정되었다.
7. 여담
- IMF 구제금융기간 당시 공적자금을 받은 숱하게 많은 은행들 중 회수를 제대로 한 은행은 조흥은행뿐이다. 조흥은행은 2조 7천 억 원만 투입하고도 1년 만에 흑자 전환에 성공했지만, 제일은행은 15조 원, 한빛은행과 서울은행은 7~8조 원을 투입하고도 빌빌거렸다는 점을 보면 그만큼 조흥은행이 공적 자금을 매우 효율적으로 활용했음을 알 수 있다.
- 신한금융지주에 조흥은행이 매각되면서 일부 대금은 신한금융지주 주식으로 지급되었는데, 이 주식의 가치가 계속 오르면서 2011년에 예금보험공사가 신한금융지주의 주식을 모두 매각한 결과 총 회수금액이 무려 4조 7,000억 원. 즉 공적 자금 2조 7,000억 원보다 무려 2조 원을 더 회수했고, 회수율도 174%에 달한다.
- 앞서 설명했지만 참 묘하게도 기념할 만한 년도에 영 좋지 않은 일을 겪었다. 가장 큰 이벤트라 할 수 있는 창립 100주년 기념일인 1997년 2월 19일은 한보그룹 문제로 시끄러운 와중이라 거의 행사를 축소해야 했고, 벼르고 별러 105주년을 맞이한 2002년 2월 19일에는 야심차게 105년 역사 편찬서까지 내놓는 등 나름 성대한 기념식을 벌였지만 불과 몇 달 만에 독자 생존이 좌절되는 비운을 맛봤다.
- 대한민국 은행 중 최초로 이니셜을 전면에 내세운 은행이다. 1999년 5월 3일 충청북도의 지방 은행이었던 충북은행과의 통합이 끝나고 공식 발족하면서 CHB 마크를 CI로 내세웠는데, 위 사진에서도 볼 수 있다시피 매우 단순한 디자인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면서 이후 여러 은행들이 이니셜 마케팅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신한은행은 은행 이름 앞에 이니셜을 붙이지 않고 있다. 관련 기사
- 1991 고성 세계 잼버리 대회 및 1993 대전 엑스포 공인 은행이었다.
- 자동화 코너를 대한민국 은행 중 최초로 설치한 은행이다. 1990년 7월 20일 명동 지점에 처음 설치한 이래 점차 확대해 갔고, 특히 지점에 딸린 게 아닌 단독 무인 점포(365 캐시로비)에 상당한 공을 들여서 2000년경 기준으로 전국 지점 수가 500여 개였는데 단독 무인 점포 수가 1,000여 개일 정도로 유독 무인 점포를 많이 보유하고 있었다.
- 現 신한은행 광교영업부인 서울특별시 중구 삼각동 광교 옆에 있는 옛 조흥은행 영업부(본점) 건물은 신축 당시 최신식 건물로, 1층과 2층에는 당시로서는 최신 문물[24] 인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되어 있었다. 은행 거래는 무조건 창구에서만 하던 시절이기도 하니 새로 지은 본점에 사람들이 많이 몰렸는데 은행에 오는 이유라는 것이 에스컬레이터를 타 보려고!였다고 한다. 지금도 남아 있긴 한데, 2층이 신한은행의 기업 금융 전담 지점으로 바뀌어서 타 보기 어렵게 되었다.
- 옛 삼풍백화점 B동에 한미은행과 함께 지점이 있었다. A동이 붕괴된 거라 지점이 있는 곳은 무너지지 않았지만, A동의 붕괴 사고 이후 B동도 사용 금지 처분이 내려저, 지점은 뺐지만 이 지점은 아직도 살아 있다! 옛 삼풍백화점 뒤쪽(삼풍아파트 후문)에 있는 신한은행 삼풍지점이 삼풍백화점에 있던 지점의 후신이다.
- 조흥은행에는 1995년부터 철도청의 지정공통승차권을 구매할 수 있는 ATM 기기를 설치하였다. 신용카드로 구입이 가능했으며, 일반적인 지정 공통 승차권과는 달리 감열지 방식의 전용 용지를 사용하였다. 현재는 ATM에서 철도 승차권을 발권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고, 공동망 CD기 회사인 한네트에서 고속버스 승차권을 발권 할 수 있긴 하다.
- 조흥은행 지점에 견본 양식으로 비치된 것들을 보면 이름이 김조흥과 이조흥이다.
- KBS[25] 와 롯데그룹, 신세계백화점의 주거래 은행이었다. 따라서 KBS 드라마에서 은행이 나오면 거의 조흥은행이었으며, 롯데백화점과 롯데마트[26] , 신세계백화점과 이마트 각 점포에 조흥은행 ATM을 1대 이상 설치하였다. 물론 두 곳 모두 지금도 신한은행이 대신 꿰차고 있다. 물론 신한은행 ATM이 없는 매장도 있으니 주의요망.
- 카드 없이 현금을 인출할 수 있는 기능을 최초로 도입하였다. 계좌번호를 암기한 채 이용할 수 있으며, 지갑을 잃어버렸다면 꽤 괜찮은 서비스다. 단, 사고 방지를 위해 최초 1일 한도는 30만 원으로 지정되었는데 신한은행으로 바뀌면서 물가상승 등을 감안하여 100만 원으로 올라갔다.
- 신세계백화점에서 신한은행의 직불카드로 결제하면 영수증에는 신한은행이 아닌 조흥은행 직불카드로 표기된다. 이는 조흥은행의 직불 시스템을 그대로 이용하기 때문이라고 한다.[28] 그래서 스마트원 K-Cash 직불카드에는 조흥은행의 코드를 붙여서 BIN이 900021번으로 시작한다. 이마트에서 신한은행 직불카드 이용시에는 영수증에 신한은행으로 표기된다.
- 본행 출신 퇴직자들은 1969년 '조흥은행 동우회'를 설립해 현재도 운영중이다.
- 뜬금없지만 여객선을 운항했기도 했다. 목포 - 완도 간 항로로, 70인승 철부선을 하루 2회씩 운행했다. 선명은 동일호로, 목포 지역의 향토은행이었던 호남은행이 동일은행에 합병당하고 이 동일은행이 조흥은행에게 넘어가서 계속해서 운항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선명이 동일호인것.
8. 자회사
아래 회사들은 2003년 신한금융그룹 매각 전 지닌 회사들이다.
- 조흥증권: 1999년 대만 KGI그룹에 매각됨.
- 조흥캐피탈: 2002년 그래닛창업투자에 매각됨. 현 CNH홀딩스.
- 강은상호신용금고: 2000년 춘천상호신용금고에 매각된 뒤 '홍천상호신용금고'로 명칭을 바꾸고 합병됨.
- 조흥상호신용금고: 2000년 (주)신안에 매각됨. 현 신안상호저축은행.
- 조흥파이낸스: 1999년 코미트창업투자에 매각된 후 2000년 '씨앤씨캐피탈'로 변경됐으나, 2002년 JKM에 합병됨.
- 조흥시스템: 1998년 청산.
- 조흥투자신탁운용: 2006년 'SH자산운용'으로 명칭을 변경했다가 2008년 신한BNP파리바자산운용에 합병됨.
- 조흥경제연구소: 1998년 폐업.
9. 관계사
- 조흥씨에치비즈: 구 경성흥산-조흥기획. 행우회 출자법인임. 현 신한서브.
- 조흥개발: 청소, 경비 등 용역/도급업체. 2001년 조흥기획에 합병됨.
10. 공익재단
- 조흥백년재단: 현 신한희망재단.
11. 스포츠
- 조흥은행 야구단 (1946~1950/1963~1964)
- 조흥은행 여자농구단 (1962~1964/1967[29] ~1984[30] )
- 조흥은행 여자배구단 (1962~1964)
- 조흥은행 축구단 (1969~1983)
- 조흥은행 사격팀 (1975~1998)
12. 관련 문헌
[1] 충북은행과 통합한 직후인 1999년 5월 3일부터 CHB라는 이니셜을 썼다.[2] 2004년까지는 상장회사였다.[3] 현재는 부채표 까스활명수 등으로 유명한 동화약품(000020)이 코스피 종목 코드 중 가장 앞서 있다. 해당 회사는 당연히 코스피 2호 상장기업이다.[4] 이 주소는 충북은행과의 합병 직후인 1999년 5월 3일부터 CHB라는 이니셜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시작되었으며, 그 전에는 www.chohungbank.co.kr(한국어) / www.chohung.co.kr(영어)을 사용했다. 2020년 현재도 접속해보면 신한은행 홈페이지로 연결된다.[5] 1931년 민영휘의 아들 민대식이 본가였던 조선한일은행과 호서은행을 합쳐 만들어진 민족계 은행.[6] 참고로 조흥이라는 이름은 '''조'''선을 '''흥'''하게 한다는 뜻이다.[7] 따지고 보면 홍콩 달러도 현지 금융 관리국의 통제 하에 HSBC, 스탠다드차타드(SC), 중국은행 등이 각각 할당량에 맞춰서 발매하는 형태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도 한국은행 혹은 관련 부처의 통제에 따라 조흥은행이 화폐 발행을 대행하는 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8] 공교롭게도 1997년은 조흥은행이 창립된 지 '''100주년'''을 맞이한 해였다.[9] 사실 수습을 잘 했다기보다는 퇴출시키기에 규모가 커서 그랬던 것이다. 조흥은행 외에도 상업/한일/제일/서울은행 등의 부실 은행은 널렸지만 이 은행들을 퇴출시켜 버리면 금융 시장 뿐만 아니라 경제 전체에 엄청난 혼란을 유발할 게 뻔했기 때문. 그래서 비교적 규모가 작거나 지방은행이었던 경기/대동/동남/충청/동화은행 5개가 퇴출된 것이다.[10] 여담으로 1998년 6월에 재미교포 기업가 김종훈 씨가 조흥은행에 투자하겠다는 의사를 방미중이던 김대중 대통령에게 전했고 실제로 한국에 와서 논의까지 했는데, 한국 정부와 자신이 각각 5억 달러씩 총 10억 달러를 투자하는 게 적절하다는 것이 김종훈 씨의 결론이었고 '''이 금액은 당시 환율로 약 2조원이었다.''' 만약 이게 현실화되었거나 혹은 김종훈씨 외에 다른 해외 투자처를 통해 총 2조원 가량을 투자받았다면 조흥은행의 위상은 달랐을 것이다.[11] 겉으로 보면 신한은행에 흡수된거지만 실제로는 구 신한은행 법인이 소멸되고 조흥은행 법인이 통합 신한은행으로 바뀐 것.[12] 정부의 논리는 한마디로 '''전세계에 내세울만한 대형 금융기관 육성'''이었는데 문제는 은행들의 자발적인 합병을 권장하는 차원을 넘어 대놓고 정부가 합병을 강요했던 거고 이 때문에 당시 금융권 노사 갈등이 매우 극심했다. 그나마 인수한 은행에서 피인수 은행 노조의 요구를 최대한 들어주는 양보를 하면서 잠잠했던건데 만약 이 때 노사 합의가 제대로 안되었거나 이행된게 시원치 않았더라면 '''은행권 총파업'''이 일어났을 수도 있다.[13] 실사 과정에서 신한 측이 매각 대금이 너무 높다는 이의를 제기하자 '''정부가 상당히 당황 해 했었다.''' 그러다가 내놓은 결론이 ''''신한금융지주의 주식도 매각 대금으로 받겠다.''''[14] 홍석주 당시 조흥은행 장은 2002년 가을 조흥은행 매각에 대한 인터뷰에서 '''"조흥은행을 현금으로 인수하려면 3조 원 가량 필요하다. 이 정도 금액을 한 번에 조달할 수 있는 금융기관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었는데, 다분히 신한금융지주를 겨냥해서 한 발언이었다. [15] 이에 대해서는 당시 임기 말이었던 김대중과 측근 호남 낙하산 인사들이 신한은행 주주인 일본계 자금으로부터 뒷돈을 받아 챙겼다는 의혹도 일부에 의해 제기되고 있으나, 당시 매각에 반대하던 노조의 일방적 주장에서 시작된 이야기로 사실 여부가 검증되지 않은 이야기이다.[16] 감정 싸움의 문제도 있었다. 애초 신한은행이 개설될 무렵 조흥은행의 인력을 빼가면서 생긴 앙금과 역사도 짧은 상대에게 합병당하는 것이 굴욕적이었던 것이다. 다만 조흥은행의 인력을 빼간 덕분에 시스템도 비슷한 부분이 많았고 (인포믹스라든지) 해서 전산 인프라의 통합이 수월한 부분도 있었다.[17] 1899년 1월 30일에 창립한 대한천일은행을 계승한 게 한국상업은행이고, 이 은행이 한일은행과 합병하여 1999년 한빛은행을 거쳐 2002년에 현재의 우리은행으로 이어진다.[18] 위에서도 언급했다시피 국내 최초의 은행은 조흥은행의 전신인 한성은행임이 공식적으로 인증되었으므로, 우리은행의 '''우리나라 첫 은행''' 구호는 명백한 허위 사실이다.[19] 頭取(とうどり). 일본에서 은행장을 부를 때 쓰인다.[20] 황족으로 고종황제의 사촌이다.[21] 1998년 8월 취임했지만 조흥은행의 부실에 대한 책임을 명분으로 11월 말에 갑자기 사퇴해버렸다가 1999년 4월 재취임했다. 훗날 본인이 밝힌 바에 따르면 금융감독위원회에서 물러나라는 요구를 했다는데 그 이유는 바로 조흥은행을 충북은행 및 강원은행과 합병하기 위해서. 애초에 위성복 행장이 전남 장흥군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취임 당시부터 매우 주목받는 실세 은행장이었는데, 이에 충북은행/강원은행쪽에서 "정부가 호남 출신 은행장 키우려고 지방은행을 죽이려 한다!"는 반발을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후 충북/강원은행과의 합병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고 심지어 흑자 전환까지 성공시킨걸 감안할 때 고향만 아니었어도 처음부터 조흥은행장에 적임이었던 셈.[22] 2002년 3월 만 49세의 나이로 조흥은행장에 올랐는데, 일선 지점장 경력조차 전혀 없이 외자유치 등의 경영기획 부서에서만 지내온 기획통이라는 특이한 이력으로 주목받았다. 심지어 은행장에 오를 당시 지점장인 선배들이 즐비했을 정도로 매우 파격적인 인사였고, 기획통 짬밥을 그냥 먹어온게 아니라는걸 반증하듯 앞으로의 경영 전략도 상당히 짜임새 있게 내놓으며 조흥은행의 독자생존을 진두지휘했으나 결국 신한금융그룹에 인수되는 것을 막지 못한 비운의 은행장으로 남았다. 특히 앞서 언급했다시피 신한금융그룹이 매각대금을 현금으로 전부 내놓지 못할거라는걸 정확히 예측했고, 재미교포 김종훈씨의 투자 계획에 따른 총 2조원 정도 자금이 조흥은행의 경영 정상화에 맞을 것이라는 보고를 내기도 했다. 만약 조흥은행이 신한금융그룹에 인수되지 않았다면 정말 어떻게 되었을지 모를 일.[23] 그런데 이 표어가 오티스 엘리베이터랑 많이 비슷하다. 참고로 오티스 엘리베이터의 경우 함께한 150년, 함께할 150년.[24] 최초였다는 소리도 있지만 실제로는 화신백화점에 최초로 설치되었다.[25] 참고로 MBC는 중소기업은행, SBS는 KEB하나은행이 주거래 은행이다.[26] 현재는 일부 지점을 제외한 신한은행 ATM이 대부분 철거되었으며, 대신 신한은행 제휴 롯데ATM으로 바뀌었다.[27] 특히 경북대학교. 제1금고를 맡고 있다. 본래 출장소로 시작했다가 격상된 조흥은행 경북대학교지점이었으며, 신한은행 ATM이 교내에 널리고 널려 있다. 글로벌플라자 1층에도 출장소가 있다. 거기에 복현오거리 롯데슈퍼 뒷쪽에 신한은행 복현동지점이 있는데, 여기도 조흥은행 출신의 지점이다. 따라서 경북대학교 일대는 신한은행의 천국. 경북대학교 복지관 건물도 1994년 조흥은행에서 기부채납해 주었다고 한다.[28] 이름만 살아있는 또 다른 경우로 한국주택은행이 있다.[29] 구 호남비료 여자농구단 인수.[30] 이 해를 끝으로 한국빠이롯드로 구단이 넘어갔으며 다시 대웅제약이 인수해 운영하다가 외환위기 때 해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