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종(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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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정치인, 전 정무직공무원. 박근혜 정부 대통령비서실장이었으며, 충청북도지사, 서울시장 등을 역임했다."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믿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처음에 저도 기사 봤을 때 실소를 감추지 못했습니다. (중략) '''봉건시대에도 있을 수 없는 얘기'''가 어떻게 그런 것이 밖으로 활자화 되는지 정말 개탄스럽습니다."
ㅡ 최순실이 연설문을 고쳐준다는 기사에 대해 반박하며
2. 생애
1942년 충청북도 제천시에서 태어났다. 제천고등학교, 국립체신대학 통신행정과, 성균관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하였다. 집배원을 하다가 우체국 서기보로 공직생활을 시작하였으며, 제4회 행정고등고시에 합격함으로써 무려 9급에서 5급 사무관으로 입부하면서 이후 주로 서울특별시청 공무원으로 근무하였다. 어린 시절의 역경을 딛고서 성공한 인물로 종종 소개된다.
1990년부터 1993년 초까지 관선 충청북도지사를 역임하였다. 임기 막바지인 1993년 1월 우암 상가아파트 붕괴사고가 발생하여 내무부에서 경고를 받았지만 사고 수습을 잘 했다는 평을 받으며#[3] 1993년 3월부터 1994년 10월까지 서울특별시장을 역임하였다. [4] 하지만 시장 재임 중인 성수대교 붕괴사고로 1994년 10월 서울특별시장직에서 경질되었다.[5]
이후 1996년 8월 청주 서원대학교 총장에 선출되었다가 1997년 12월 초 사퇴 후 한나라당에 입당했으나 직후 치러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가 패배하자 탈당했고, 3개월만인 1998년 3월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하여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치러 무려 74%가 넘는 득표율로 충청북도지사에 당선되면서 화려하게 재기했다.[6] 매우 무난한 행정으로 지지도가 높아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해[7] 58%가 넘는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했다. 이후 3선이 가능했으나 스스로 포기하고, 임기 말 무렵 행정수도 문제로 한나라당이 지역에서 비판받는 와중에도 탈당을 거부하다가 2006년 6월 말 퇴임했다.[8]
모교인 성균관대학교에서 국정관리대학원 석좌교수를 지냈다.
3. 대통령비서실장
이후 박근혜 정부에서 대통령 직속 지역발전위원장을 역임하다 2016년 5월 15일 대통령비서실장으로 임명되었다. 임명 당시의 나이가 무려 75세였는데, 참고로 그의 전임자인 김기춘 역시 70대 나이에 비서실장이 되었다.[9]
비서실장으로 임명된 날 청주시의 어느 개인택시 기사가 임명을 축하한다는 플래카드를 범퍼 쪽에 스티킹했다.(...)
임명될 때부터 실세라기보다는 '뒷바라지'형 인물로 알려졌고,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크게 증폭된 JTBC의 테블릿 PC 유출이 드러나기 전 까지는 일반인들에게는 관심 밖의 인물이었으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관련되어, 최순실이 연설문을 고쳐준다는 의혹에 대해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믿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처음에 저도 기사 봤을 때 실소를 감추지 못했습니다." 라며 "봉건시대에도 있을 수 없는 얘기"라고 잡아뗀 것이 JTBC의 취재 결과 사실로 드러나면서 실상을 몰랐거나 아예 거짓말을 했음이 드러났다. 실상을 몰랐다고 해도 대통령비서실장이 대통령의 행적과 청와대 내부 사정에 대해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는게 가당치 않다는 점에서 문제가 되고, 실상을 알았다면 알면서도 국정감사에서 위증을 한 셈이 되어 스스로 게이트의 공범임을 자인하는 꼴이므로 어느 쪽이든 심각한 일이다. 스스로 제 무덤을 판 꼴.
이후 본인의 발언에 대해 묻는 기자들에게 "내가 알면 그런 말을 했겠나"고 답하면서도, 지금이 봉건시대라고 생각하냐(즉 생각에 변함이 없느냐)는 질문에는 침묵했다.
또한 국감 중 안종범 수석에게 질문을 마친 박지원 의원과 잠깐의 설전이 오고 갔는데, 이 때 그에게 "국민의 지도자와 대표라면 이러한 일을 잠재워야지 왜 자꾸 증폭시켜서 국민에게 손해를 끼치고 국익을 해치느냐"며 은폐를 정당화하고 의혹 제기를 비난하는 발언을 하였다. #[10]
지난 2016년 10월 26일, 박근혜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를 한 다음 날 사표를 제출한 것으로 밝혀졌다. # 비서실장으로 왔을 때는 이미 우병우와 문고리 3인방 중심으로 청와대가 돌아가고 있어서 자리를 제대로 못 잡고 바지 비서실장만 하다가 사퇴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2017년 12월 22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조사 과정에 드러난 국정원 특활비 상납 사건으로 인해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 수사를 받게 된다. # 1심, 2심에서 모두 무죄 선고를 받았다. # 워낙 고령이기도 하고, 모양새도 딱히 좋지 않아, 이대로 공직생활을 마무리할 것으로 보인다.
4. 선거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5. 둘러보기
[1] 현 제천시 시내동지역[2] 현재 청주시에 있는 서남교회의 장로이다.[3] 우암 상가아파트 붕괴사고 당시 청주시장은 나기정(1937~) 시장이었다.[4] 전임 시장인 김상철은 임명된 직후에 그린밸트 형질변경을 이유로 7일만에 경질되었다.[5] 후임 시장은 우명규 경북지사가 임명되었으나, 우 신임 시장은 성수대교가 지어질 무렵에 '''서울특별시 건설본부장'''을 지냈던 이력이 있어, 구설수에 올랐고 결국 11일만에 사직했다. 후임이자 마지막 관선시장은 민주자유당 전국구 의원인 최병렬로 임명되었으나, 최 시장은 임기 마지막날에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를 겪으며 관선시장 잔혹사의 마침표를 찍었다.[6] 재미있게도 상대 후보였던 한나라당의 주병덕 지사는 직전 선거에서 자유민주연합으로 당선되었다가 불과 반년 만에 탈당한 뒤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한나라당에 입당했었다. 그래서 이원종이 한나라당에 입당했을 때는 충북지사 공천을 놓고 두 사람이 한나라당 경선에서 치열하게 맞붙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을 정도. 허나 결과적으로는 이원종의 자민련 베팅(.....)이 잿팟을 터뜨린 셈이 되었고, 반대로 주병덕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당적을 바꾸지 않고 쭉 유지해서 자민련 공천으로 재선을 노리는게 훨씬 나았을 상황 = 한나라당 베팅이 제대로 망한 케이스가 되어버렸다.[7] 자민련에 입당한지 4년이 채 안된 2002년 3월에 한나라당으로 가버렸다. 그렇잖아도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직후부터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 때까지 자민련 의원과 지방자치단체장 일부가 신한국당 - 한나라당으로 이적한 것 때문에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가 김종필 자민련 총재의 눈밖에 난 상태였는데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또 이런 일이 반복되는 바람에 그 해 말의 대통령 선거에서 김종필이 중립을 선언해버리기에 이른다. (...) 이회창과 노무현 두 후보중에 김종필과 성향상 맞는게 누군지는 너무나 자명한데도 저랬다는 것은 그만큼 이회창에 대한 김종필의 적개심이 엄청났다는 것을 반증.[8] 다만 지방선거에서는 한나라당 소속의 정우택 후보가 충북지사에 당선되었다.[9] 김기춘ㆍ이원종에 묻혀서 그렇지, 초대 비서실장인 허태열은 임명 당시 69살이었고, 이병기도 69살이었다. 후임실장인 한광옥은 이원종과 동갑으로 75살에 비서실장이 되었다.[10] 7분 35초쯤부터[11] 2002.3.19 탈당, 한나라당 입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