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헌재
1. 개요
한국의 경제공무원, 정치인.
2. 생애
1944년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났다. 8.15 광복 이후 귀국하여 성장하였다. 경기고등학교(58회),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였다.
1968년 제6회 행정고등고시에 합격했다.[1] 이후 재무부(현 기획재정부)에 발령받아 공무원으로 근무하였다. 박정희 정부 시절 청와대 대통령 경제비서실을 거쳐 재무부 금융정책과장 시절 8.3 사채동결조치를 입안했고, 1974년 제1차 석유 파동으로 인한 외환 문제 해결에 참여했다. 하지만 1979년 율산그룹 사태에 휘말려서 공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미국으로 유학가서 보스턴 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석사 과정을 졸업하고, 하버드 대학교 최고경영자 과정을 수료했다. 귀국 후 대우그룹에서 당시 김우중 회장을 보좌하며 상무이사, 대우반도체의 대표이사로 활동하였으나 한국반도체 인수 실패의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다.[2] 국내에서 처음 설립된 신용평가사인 한국신용평가 사장으로 옮겨갔다. 1991년에는 증권관리위원회 상임위원을 거치기도 했다.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조순 한나라당 총재와의 인연으로 이회창 후보의 경제특보가 되어서, 경제공약을 입안하였다. 그러나 대선에서 김대중이 승리하자, 그날 새벽에 고등학교, 대학교 동기동창인 정대철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를 찾아가 '''"줄 잘못 서서 망했다"'''며 소주잔을 함께 기울이기도 했다. 덕분인지 선거 일주일만에 김대중 당선자가 당시 1997년 외환 위기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 구성한 비상경제대책위원회에 기획단장으로 발탁되며 기업과 은행 구조조정을 진두지휘하게 된다.
내막을 보면 재미있는게, 당시 장성민 전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의 회고에 따르면, 당선 확정 1~2일 뒤 한 언론인이[3] 이헌재를 DJ에게 추천했는데, 이력서와 함께 그가 썼다는 보고서를 들고[4] DJ를 찾아갔더니 정무적 판단을 곁들인 그의 경제 보고서에 DJ가 큰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여기서 정무적 판단이란 'IMF 6개월 뒤인 98년 4월쯤 실업 사태로 전국적인 소요가 일어날 것'이란 식의 여러 변수들이 적힌 내용이었다고. 이후 재무부 출신으로 당시 공동여당인 자민련 몫으로 비상경제대책위원장을 맡았던 김용환 의원이 이헌재를 영입했는데, 김용환 의원의 회고에 따르면 자신이 천거하기 전 이미 DJ가 이헌재 발탁을 결심하고 있었다고 한다. DJ가 비대위 보고를 몇번 받으며 이헌재의 유능함에 감탄했다고. 기사1, 기사2.[5]
1998년에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면서 그 해 4월에 신설된 금융감독위원회(현 금융위원회)의 초대 위원장으로 발탁되었다. 그리고 2000년 1월부터 같은 해 8월까지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 장관을 역임하면서 총 2년 4개월간 국민의 정부 전반부의 구조조정을 이끌었다. 같은 해 5월 18일 박태준 국무총리가 부동산 명의신탁 파문으로 조기퇴진하자 1주일 동안 국무총리직을 대행하기도 했다.
실력을 인정받았는지 노무현 정부 때인 2004년 2월에는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에 임명되었고, 신용불량자 종합대책을 내놓기도 했다. 그해 고건 전 국무총리의 퇴임 후 신임 이해찬 국무총리 임명 전까진 총리직도 대신 수행했다. 허나 부인의 토지거래 관련 위장전입 의혹을 받자 2005년 장관직을 사퇴하였다.
2012년 18대 대선을 앞두고는 안철수 당시 무소속 대통령 후보의 '경제멘토'로 알려지기도 했으나, 이후 결별한 것으로 보인다.
2016년 설립된 싱크탱크인 재단법인 여시재에 이사장으로 합류했다.
2020년 논란이 된 옵티머스 판드사기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 이유는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와 양호 전 나라은행장이 옵티머스 측과 업무 차 만나며 실질적 고문역할을 해온 정황이 드러났기 때문.
3. 평가
호평하는 쪽에선 국민의 정부 전반기 금감위원장과 재경부장관을 지내며 당시 방만한 금융권과 기업에 대한 원칙적인 구조조정으로 한국경제에 생기를 불어넣어서 당시 IMF 극복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인물 중 하나라고 평가한다.
반면에 비판하는 쪽에선 소위 한국경제를 쥐락펴락하는 재무부 출신 경제관료인맥 즉 모피아(Mofia) 그룹의 대부로 신자유주의 비슷한 정책을 밀어붙여서 한국사회의 양극화를 초래한 주범 중 하나라고 비판한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일명 "왼쪽 깜빡이 켜고 우회전"시킨 인물 중 하나라는 것. 구조조정도 정작 외환위기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재벌에 대해선 특별한 조치없이, 일부 공기업과 대기업, 금융기관[6] 들만 외국자본에 무분별하게 넘겨주면서 대량 정리해고 사태를 촉발시켰다고 비판한다.
4. 여담
장인이 진의종 전 국무총리이다.
5. 저서
[1] 결혼으로 분주한 가운데에도 공부 5개월 만에 합격했다고 한다.(...)[2] 김우중 회장은 반도체 사업에 의욕을 보였으나 당시 대우전자의 자금난이 심각해지면서, 포기하였다. 참고로 당시 대우가 탐을 내던 구미의 생산공장은 금성사(현 LG전자), 한국반도체는 삼성전자가 인수했다.[3] 이연홍 당시 중앙일보 정치부 차장. 근데 이 만남도 사실 대학 후배인 장성민이 주선한거였다고 한다.[4] 원래 이헌재는 정대철한테 부탁을 받고 이 보고서를 쓴건데, 이연홍이 마침 연락을 해서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된다고 이쪽에 줬다고 한다.[5] 사실 이헌재가 비대위 기획단장, 금융감독위원장으로 처음 등장했을 때는 별 이야기가 없었으나, 외환위기를 조기 극복하면서 이헌재가 위기해결사로 명성이 높아지자, 여기저기서 "사실은 내가 추천했다", "내가 데려왔다" 투의 인터뷰가 쏟아져 나왔다.(...) [6] 1998년 전반기, "국제통화기금의 '''처방'''"으로 시중의 자금을 끌어들인다는 명분 하에, 시중의 금리를 연 29.5%까지 올렸다. 이로 인해 이자를 감당못한 중소기업의 도산이 잇따르고, 구조조정 후 창업으로 생존을 도모해야 하는 자영업자들까지 위기에 처하자, '''금융시장을 개방''' 즉 국내 금융기관을 인수하도록 허용할 테니 '''살인적인 이율'''을 낮춰달라는 사실상 항복선언을 하게 되었던 것.[7] 해당 저서에서 기득권이 일거에 해소될 때 비로소 새로운 체제로 나아갈 수 있는 전환을 맞게 된다며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한국 사회의 축복이라고 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