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궁 집희당

 



1. 소개
2. 이름
3. 역사
4.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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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궐도안》을 채색한 《서궐도》에서 묘사한 집희당

1. 소개


慶熙宮 緝熙堂
경희궁동궁으로, 왕세자가 머무는 처소이다. 쉽게 말해 왕세자의 .
위치경희궁 영역의 동북쪽이었다. 《서궐도안》에 따르면 장락전의 동남쪽, 경선당의 서쪽에 있었다고 한다.[1] 자리는, 확실하지 않으나 경희궁 2길과 경희궁길이 만나는 그 주변 언저리로 추정된다.

2. 이름


원래 이름은 채선당(綵線堂)이었으나 숙종 때 집희당으로 바꾸었다.#
'집희(緝熙)'는 ‘계속하여(緝) 밝게 빛난다(熙)’는 뜻이다. 영조는 자신이 직접 지은 ‘집희당시’에서 “이 전각은 옛날 세자의 집이라, 집 안에 훌륭한 작품들이 새롭구나. '''계속하여 밝게 빛나니''', 어진 이를 높이어 날로 더욱 친하도다.”라고 이름의 의미를 읊었다.#

3. 역사


처음 건립된 때는 정확히 모르나 1620년(광해군 12년)에 경희궁이 창건될 때 같이 지은 것으로 보인다.
기록에 처음 나타나는 것은 1691년(숙종 17년) 1월 22일의 《승정원일기기사이다. 이 때 내전은 흥태문으로, 세자궁은 채선당의 동문으로 들어가라고 한 것을 보아 세자의 정식 처소인 승휘전이 전소되기 전부터 동궁으로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승휘전이 불 타 사라진 후에는 경선당과 함께 정식 처소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간혹 들이 이용한 경우도 있었는데, 순조는 때때로 이 곳에서 묵기도 하였다.## 1829년(순조 29년) 10월에 경희궁 내전 일곽에 화재가 일어났으나 경선당은 거리가 멀어 무사하였다.
순조 이후의 집희당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1860년대 고종 시기 경복궁을 재건하면서 대부분의 경희궁 건물들의 90%를 헐어다 경복궁 중건의 자재로 쓸 때, 철거되었다.

서궐(경희궁) 내에는 숭정전, 회상전, 정심합(正心閤), 사현합(思賢閤), 흥정당만 남기고 '''그 나머지는 모두 헐었다.''' 목재를 가져오니 다수가 썩었다. 이 가운데 좋은 것을 골라서 (경복궁의) 나인간(內人間)과 각사의 건조에 사용하였다.

《경복궁 중건일기》


4. 특징


  • 《서궐도안》에 따르면, 동향을 하고 있다. 정면 5칸, 측면 1칸의 총 5칸으로, 가운데 3칸은 대청이고 좌, 우에 온돌방을 각각 1칸 씩 두었다. 지붕은 맞배지붕이고 용마루와 내림마루는 양성바름을 하였으며 치미를 올렸다. 그리고 건물 양 쪽과 앞, 뒤로 행각이 붙어있으며 서로 연결되어있다. 전체적으로 경선당구조가 비슷하다.


[1] 단, 《궁궐지》에 따르면, 경선당의 북쪽에 집희당이 있었다고 한다.(정확하게는 집희당의 남쪽에 경선당이 있다고 쓴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