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궁 장락전

 



1. 소개
2. 역사
3.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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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장락전 터 모습. 지금의 한국관광연구원 바로 위에 있었다.

1. 소개


慶熙宮 長樂殿
조선시대 궁궐 경희궁의 대비전(大妃殿)이다. 대비전은 궁궐의 동북쪽 영역에 두는 관례에 따라 장락전 역시 경희궁의 동북쪽에 있었으며 지형 특성 상 언덕에 놓였다.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장락(長樂)'이란 '오랜(長) 즐거움(樂)'을 뜻한다. 중국한나라 고조어머니을, 오랫동안 즐거우시라는 뜻을 담아 '장락궁(長樂宮)'이라 하였다. 이후 '장락'은 대비, 태후나 그 궁을 가리키는 단어가 되었다.

2. 역사


창건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궁궐지》에는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지냈던 곳으로 나와있다. 1693년(숙종 19년) 경희궁수리기록인 《경덕궁수리소의궤(慶德宮修理所儀軌)》[1]에는 나타나지 않는데, 인조가 지냈다는 그 전각이 나중에 장락전으로 이름이 바뀐 것인지, 아니면 그 이후에 새로 건립된 것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영조실록》의 이 기사에 1702년(숙종 28년)에 숙종의 세 번째 왕비 인원왕후가 이 곳에서 가례를 올렸다고 언급할 것을 볼 때 1693년에서 1702년 사이에 장락전이란 이름의 건물이 생긴 것은 분명하다.
영조인원왕후의 흔적이 서린 이곳에서 인원왕후를 많이 그리워했던 듯 하다. 비록 7살 밖에 차이나지 않는 계모이지만,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 데에 큰 도움을 준 은인이기 때문이었다. 1762년(영조 38년)에는 에서 이미 승하한 인원왕후[2]를 뵈어 이를 기록해 장락전에 부쳤다.# 또한 1767년(영조 43년) 9월에는 인원왕후의 생일을 맞아 인원왕후를 모셨던 상궁내시들에게 비단과 목면을 하사했으며 경종 시절의 내시들에게는 를 지급했다.#
이후 간택 장소로도 사용했다. 1819년(순조 19년)에는 효명세자세자빈을 여기서 간택했다. 이 때 간택된 세자빈이 바로 헌종의 어머니이자 고종의 양어머니인 신정왕후(조 대비)이다. 또한 1844년(헌종 10년)에 헌종의 계비 효정왕후도 이곳에서 간택했다.
경희궁 주요 영역이 1829년(순조 29년)에 대부분 불탔지만 곧 재건했는데 이 때 복구 내역을 기록한 《서궐영건도감의궤(西闕營建都監儀軌)》에 장락전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아 무사했던 듯 하다. 1834년(헌종 즉위년)에는 승하한 순조의 빈전이 되었고#, 1836년(헌종 2년) 종묘를 넓혀지을 때 역대 임금왕비신주를 이 곳과 광명전에 나누어 모셨다.#
고종 시기 경복궁을 중건할 때 경희궁건물들을 헐어다 자재로 쓰면서 사라졌다. 다만 1867년(고종 4년)에 대왕대비 신정왕후의 60세 탄신 기념 의식을 치루었다는 기록을 보아# 행사를 끝낸 직후에 철거한 듯 하다. 장락전을 고종 때 헐었다는 근거는 다음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서궐(경희궁) 내에는 숭정전, 회상전, 정심합(正心閤), 사현합(思賢閤), 흥정당만 남기고 '''그 나머지는 모두 헐었다.''' 목재를 가져오니 다수가 썩었다. 이 가운데 좋은 것을 골라서 (경복궁의) 나인간(內人間)과 각사의 건조에 사용하였다.

《경복궁 중건일기》


3. 특징


※ 현재 없는 건물이기 때문에 《서궐도안》과 경희궁 홈페이지에서 재현한 이미지를 토대로 추정했다.
※ 사실 현재 이 건물의 형태에 관해서는 학자와 연구가들마다 의견이 조금식 다르다. 서궐도안에서는 지붕이 이어져있는 것처럼 그려놓았고, 복도와 행랑이 이어져있는 것 처럼 표현하였기 때문. 정확한 조사는 발굴조사와 사진이 남아있어야지 가능한데, 현재 장락전이 있던 자리는 주택과 아파트가 들어섰기 때문에 답이없는 상황이다. 또한 흥선대원군 때에 경희궁의 건물 이건을 위해 그렸던 도면과 측량도였던 '서궐측량도'와 '서궐도량지첩'은 한국전쟁 당시 부산에서 소실되었고 '서궐측량도'는 각 건물의 크기와 칸까지 기록하였지만 사진자료와 이모본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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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궐도안》을 채색한 《서궐도》의 장락전 영역.
  • 평면이 ‘┏┓’ 자 형태이며 가운데 ‘一’자 형 1층 건물은 장락전 본채이고 본채 양 옆에 있는 건물이 장락전에 딸린 2층 누각이다. 좌측 누각의 2층은 용비루(龍飛樓)이며 1층은 경의헌(敬義軒)이다. 우측 누각의 2층은 봉상루(鳳翔樓)이며 1층은 백상헌(百祥軒)이다. 용비루와 봉상루 사이에 5칸 짜리 행각과 출입문 1칸을 두어 외부에서 장락전을 바로 볼 수 없게 하였다. 마당에는 네모난 연못을 두어 운치있게 하였다.
  • 장락전 영역, 즉, 장락전과 용비루, 봉상루는 모두 5단으로 높게 쌓은 기단 위에 올려 있다. 정면에 계단이 3세트를 두었고, 양 측면에는 하나씩 놓았다.
  • 장락전 본채는 정면 9칸, 측면 5칸의 총 45칸 규모로 동, 서, 남 쪽의 가장자리 칸의 외벽엔 , , 을 두지 않고 툇마루를 개방시켜 실질적인 실내 공간은 정면 7칸, 측면 4칸의 총 28칸이다. 지붕은 팔작지붕에 처마는 겹처마, 공포는 이익공 양식으로 공포 사이마다 장화반을 놓고 화반 사이마다 벽으로 마감했다.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는 양상바름을 하고 용두와 취두, 잡상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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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G로 재현한 장락전#
  • 윗 단락에서 말했지만, 장락전 영역 자체가 이미 높은 기단 위에 위치했는데 거기에다 장락전 본채는 따로 기단을 또 두어 굉장히 높게 지었다. 양 옆에 있는 2층 누각인 용비루와 봉상루와 높이를 맞추기 위해서인 듯 하다.
  • 용비루와 봉상루는 똑같은 모습이다. 지붕처마, 공포와 화반의 구조는 장락전과 같으나 이 두 누각은 화반 사이가 으로 막혀있지 않고 비어있는 것이 다르다. 정면 6칸, 측면 6칸의 총 36칸으로 동, 서, 남쪽 둘레에 밖으로 개방시킨 마루를 둘렀기에 실질적인 실내 구조는 정면 5칸, 측면 4칸의 총 20칸이다. 각 기둥 하단부에는 닭다리 모양의 난간인 계자각(鷄子脚)을 세웠다.# 1층 기단부에 아궁이가 있는 것을 보아 온돌도 설치되었던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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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G로 재현한 봉상루의 모습.# 용비루도 같은 형태이다.


[1] 경희궁의 원래 이름은 경덕궁이며, 1760년(영조 36년) 경희궁으로 고쳤다.[2] 원문에는 ‘자성(慈聖)’으로 적혀있다. 자성은 대비를 일컫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