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궁 경선당

 



1. 소개
2. 역사
3. 특징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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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궐도안》을 채색한 《서궐도》에서 묘사한 경선당

1. 소개


慶熙宮 慶善堂
경희궁건물로, 왕세자가 머무는 처소이다. 쉽게 말해 왕세자의 .
위치경희궁 영역의 동북쪽이었다. 지금의 경희궁 2길 주변 언저리이다. 《서궐도안》에 따르면 집희당의 동쪽에 있었다고 하나 《궁궐지》에서는 집희당 남쪽에 있었다고 기록되어있다.

2. 역사


처음 건립된 때는 모르나 1620년(광해군 12년)에 경희궁이 창건될 때 같이 지은 것으로 보인다. 1698년(숙종 24년) 원래 경희궁 동궁의 처소였던 승휘전이 불 타 사라진 후부터 집희당과 함께 세자의 정식 거소로 활용되었다.
동궁건물이지만 임금이 다른 용도로 활용한 경우도 많았다. 숙종은 즉위 직후 이 곳에서 3년 상을 치르면서 공부하고 신하들을 만나 나랏일을 보았다.# 그리고 특이하게 어린 영조연잉군 시절, 그러니까 세자가 아닌 일반 왕자였음에도 1712년(숙종 38년)에 출궁하기 전까지 머물렀다. 1717년(숙종 43년)에 사망한 세자빈 심씨(단의왕후)의 혼궁[1]을 여기에 설치하였다.
영조는 여러 대신들과 약방 제조들을 여기서 만나면서 만 1세의 사도세자를 데려와 보였고, 세자가 만 6세가 되었을 때는 내의원 에 명해서 세자를 진료하게 하였다.#. 순조는 기우제를 지낸 후 이 곳에서 하루 묵었었다.# 1829년(순조 29년) 10월에 경희궁 내전 일곽에 화재가 일어났으나 경선당은 거리가 있어 무사하였다.
헌종 연간에는 온돌수리하였다. 보수 공사 도중에 온돌을 깔고 바닥을 말리다가 기운이 연통을 통해 올라가 처마 끝 단과 풍판에까지 미쳤다. 다행히 즉각 을 꺼서 큰 피해는 없었다.#
이후의 경선당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2] 1860년대 고종 시기 경복궁을 재건하면서 대부분의 경희궁 건물들의 90%를 헐어다 경복궁 중건의 자재로 쓸 때, 철거되었다.

서궐(경희궁) 내에는 숭정전, 회상전, 정심합(正心閤), 사현합(思賢閤), 흥정당만 남기고 '''그 나머지는 모두 헐었다.''' 목재를 가져오니 다수가 썩었다. 이 가운데 좋은 것을 골라서 (경복궁의) 나인간(內人間)과 각사의 건조에 사용하였다.

《경복궁 중건일기》


3. 특징


  • 《서궐도안》에 따르면, 동향을 하고 있다. 정면 6칸, 측면 1칸의 총 6칸으로, 가운데 2칸은 대청이고 좌, 우에 온돌방을 놓았다. 가장자리 칸은 규모가 작은데 쪽방인지 툇간인지 확실하지 않다. 지붕은 맞배지붕이고 용마루와 내림마루는 기와로 쌓았으며 치미를 올렸다. 그리고 건물 양 쪽과 앞, 뒤로 행각이 붙어있으며 서로 연결되어있다. 전체적으로 집희당과 구조가 비슷하다.

4. 여담


  • 어린 시절, 이 곳에 살면서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영조는 경선당에 대한 마음이 애틋했던 듯 하다. 그래서 경선당에 대한 시를 몇 편 지어 부모추억하였고, ‘추모당(追慕堂)’이란 직접 쓴 현판을 걸었다. 그래서 영조 시기, 또는 그 이후에 그려진 것으로 알려진 《서궐도안》에는 ‘추모당’으로 나온다.

[1] 신위를 모시던 곳.[2] 고종 시기에도 경선당에 대한 기록이 나오지만, 그건 덕수궁에서 순헌황귀비 엄씨가 머물던 곳으로 이름만 같을 뿐, 전혀 다른 건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