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양군

 



'''조선 세종의 왕자'''
'''계양군
桂陽君'''

'''군호'''
계양군(桂陽君)[1]
'''시호'''
충소(忠昭)
'''본관'''
전주(全州)
'''이름'''
증(璔)
''''''
현지(顯之)
'''부왕'''
조선 세종
'''생모'''
신빈 김씨(愼嬪 金氏)
'''부인'''
정선군부인 청주 한씨(淸州 韓氏)
'''자녀'''
4남 4녀
'''묘소'''
경기도 남양주시 일패동
'''생몰
기간
'''
'''음력'''
1427년 미상 ~ 1464년 8월 16일
'''양력'''
1427년 미상 ~ 1464년 9월 17일
1. 개요
2. 생애
3. 가족과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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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전기의 왕족. 세종의 8남이다. 서자로서는 차남이며 아내는 좌의정 한확의 차녀로 인수대비의 언니이고 전주이씨 계양군파의 파시조이다.

2. 생애


세종대왕의 총애가 지극했다고 하며, 학문을 즐기고 글씨에 능하였다.
단종 재위 당시 한명회와 한확 등과 함께 세조의 일파가 되어, 안평대군이 지지기반을 잃고 힘이 약해진 틈을 타 그를 무고하여 유배보냈다. 안평대군은 교동도로 유배당하고 그곳에서 쓸쓸히 사사당하였다. 그의 나이 36세였다. 계양군 이증은 그 공으로 1456년(세조 2년) 좌익공신 1등에 책록된 뒤부터 세조의 측근에서 서무(庶務)의 출납을 맡아 크게 신임을 얻었다.
1460년 당시 세자였던 예종장순왕후와 혼인할 때 가례도감 제조를 겸하였다. 4년 후 1464년 사망하였다.

3. 가족과 후손


계양군은 영원군, 강양군, 부림군, 방산수 등 4남 4녀를 두었는데 차남 강양군은 막내 숙부 담양군에게 양자로 갔다. 장남 영원군은 아들이 없어 셋째 아우 부림군의 차남 도안군을 양자로 맞이했다. 서장남 방산수는 본처가 있는 상태에서 태강수 이동[2]의 아내 어우동과 간통하여 탄핵받았다.

[1] 군호는 경기도 부천의 옛 이름 계양(桂陽)에서 유래했다.[2] 효령대군의 손자로, 서로 6촌 형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