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군(1439)

 


'''조선 세종의 왕자'''
'''담양군
潭陽君'''

'''작호'''
담양정(潭陽正) → 담양군(潭陽君)[1]
'''시호'''
회간(懷簡)
'''본관'''
전주(全州)
'''이름'''
거(璖)
'''부왕'''
조선 세종
'''생모'''
신빈 김씨(愼嬪 金氏)
'''부인'''
[2]
'''자녀'''
1남[3]
'''묘소'''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금파리
'''생몰
기간
'''
'''음력'''
1439년 1월 8일 ~ 1450년 3월 10일
'''양력'''
1439년 1월 22일 ~ 1450년 4월 21일
1. 개요
2. 생애
3. 사후
4. 가족과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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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전기의 왕족. 세종의 18남이자 서10남이며 막내아들로, 어머니 신빈 김씨에게는 6남이다. 전주 이씨 담양군파의 파시조이다.

2. 생애


1445년(세종 27년)에 담양정(潭陽正)에 봉해졌고 이듬해에 담양군(潭陽君)으로 승격되었다.#

3. 사후


아버지 세종승하한지 3주 뒤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11세.[4]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금파리에 있다.

4. 가족과 후손


중추원부사 남경우의 딸과 약혼했으나 결혼 직전에 담양군이 사망하여 혼사는 없었던 일이 되었다.

이 때 남경우의 딸이 상복을 입을지 말지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예조에서는 남경우의 딸은 이미 납채[5], 납폐[6], 친영[7]하는 날까지 정했으니 당연히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공조판서 정인지는 날만 정했을 뿐, 납채와 납폐를 행하지 않았으니 상복을 안 입어도 괜찮다고 주장했다. 결론은 남경우의 딸은 상복을 입지 않는 것으로 났다.#
남경우의 딸은 문종의 명으로 다른 사람과 혼인하는 것을 허락받았다. 남경우의 딸은 훗날 소헌왕후의 아버지 심온의 증손자 심미와 혼인하였다.
담양군의 상례 때는 태조의 장남 진안대군의 증손자인 강음령 이은생(江陰令 李銀生)이[8] 상주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잠시 상주를 맡았을 뿐, 담양군의 양자가 되지는 않았다.
정식 양자로는 담양군의 친형 계양군의 2남인 강양군 이숙(江陽君 李潚)이 지명받았다. 강양군은 적 · 서자 합쳐서 5남 4녀를 두었고#, 이들의 후손이 번성하여 오늘날의 전주 이씨 담양군파를 형성하고 있다.

[1] 군호는 전라도 담양군(潭陽郡)에서 유래했다.[2] 본문 참조[3] 친형인 계양군(桂陽君)의 차남 강양군(江陽君)[4] 세는나이 13세.[5] 納采. 전통혼례에서 남자집에서 혼인을 하고자 예를 갖추어 청하면 여자집에서 이를 받아들이는 혼례 의식.[6] 納幣. 납채 뒤 정혼의 성립을 나타내기 위해 신부집으로 서신과 폐물을 보내는 혼례 의식.[7] 親迎. 신랑이 신부집에서 신부를 맞아와 자신의 집에서 혼인을 진행하는 혼례 의식.[8] 훗날 가음령(嘉音令)을 거쳐 가음정(嘉音正)으로 승격 개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