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소 남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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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姑苏蓝氏
Gūsū Lánshì
BL 소설 마도조사에 등장하는 현문 세가. 가문 상징은 권운문(卷云纹). 시조는 남안(蓝安).[1] 가훈은 우아하고 올바르다는 뜻의 '아정(雅正)'. 규훈석에 가규 4천여 줄이 새겨져 있다.
사일지정 이전 기산 온씨가 현문 세가들의 세력을 억누를 때 공격받아 운심부지처가 전소되었다가 사일지정이 끝난 이후에 난릉 금씨에게 금전적인 지원을 받아 복구한다. 작중 시점 기준으로 종주는 청형군/남계인(종주 대리) → 남희신(현).
2. 특징
선문 세가마다 각자 장점이 있는데, 고소 남씨는 음률에 능한 것으로 유명하며, 퉁소나 고금 같은 악기를 사용한다. 그 때문에 남가의 수사들은 고금을 다루는 금수가 많으며, 고금을 타며 영혼과 대화하는 문령에도 일가견이 있다. 가문 특유의 술법으로 현살술[2] 과 금언술[3] 이 있다.
남씨 자제들은 길게 늘어뜨려지는 말액을 둘러 이마를 가리는데 이는 '자신을 구속'하라는 뜻이고, 객경이나 문하생처럼 남씨에 위탁한 외성 수사는 말액에 권운 문양이 없다. 소설 상에서는 말액을 푸는 것은 오직 은애하는 사람의 앞에서만 가능하다고 서술되어 있다.
하얀 옷을 입기 때문에 신선 같은 풍모라고 평가하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위무선은 남씨의 옷차림이 피마대효 같다고 욕했다.
미남자가 많이 배출되기로 유명하다. 특히나 작중 시점에서 당대의 고소 쌍벽인 남희신과 남망기는 남달리 출중해 형제가 각각 선문 세가 공자 용모 순위 1위와 2위에 올랐다. 시조 남안부터 시작해 대대로 순애보에 로맨티스트인 듯하다.
작중 언급에 따르면 평균적으로 근력이 매우 센 걸로 보인다.[4] 바로 하단의 '금욕적인 생활'이라는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고소 남씨는 채식 위주로 식사하기 때문에 단백질 반찬을 찾기가 어렵다. 그런것 치고는 근력이 상당한 것으로 봐서 가문 자체가 괴력을 타고 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원래도 기본적으로 강한 근력이 위무선 사후 13년 후에는 가규를 어기면 물구나무를 서서 아정집을 베껴 쓰는 벌로 한층 더 강화되며 자연스럽게 근력 단련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
2.1. 금욕적인 생활
규칙이 매우 엄격해 일과 휴식 시간을 정확하게 지킨다. 남씨 자제들은 묘시(아침 5시∼7시)에 기상해 해시(밤 9시∼11시)에 취침하는데, 위무선이 남망기와 함께 모계산 도륙 현무 동굴에 갇혔을 때 남망기가 자고 일어나는 걸 보면서 현재 시간이 얼마나 됐는지, 그리고 얼마나 시일이 흘렀는지를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몸에 배어 철저하다.
식사도 채소 위주이며 자극적인 향신료는 피하고 간을 강하게 하지 않으며, 평소 먹는 식사뿐만 아니라 가연을 열 때도 연회 음식이 간소하다. 식사 전에 주어지는 맑은 국물 요리는 위무선이 '약탕'이라고 부를 정도로 맛이 없는 것[5] 으로 묘사된다.
남녀유별에 엄격해 남자 수사와 여자 수사의 학습 구역과 휴식 구역이 철저하게 분리되었고, 야렵에 나갈 때도 남자끼리 아니면 여자끼리 나가지 혼성으로 가는 일은 없다. 아예 다른 성별의 수사를 만날 기회 자체가 없다보니 소년 시절의 위무선은 고소 남씨에는 여성 수사가 없는 것으로 착각했으며, 십여년동안 유일하게 본 고소 남씨의 여성 수사가 대범산에서 자신에게 사과를 줬던 둥근 얼굴의 낭자였을 정도다.
2.2. 4천 줄 가규
가문마다 각기 가훈이 있지만 고소 남씨는 다른 세가들보다 훨씬 많고 길다.
중복되는 규정은 하나도 없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위무선이 소년 시절 운심부지처에 수학하러 왔을 때는 규훈석에 새겨진 가규가 3천여 줄이었는데, 모현우의 몸에 헌사된 후 남망기에게 잡혀 운심부지처에 다시 왔을 때는 10여년 사이에 4천여 줄로 늘어나 경악한다. 남씨의 이런 가규를 정리한 책이 <아정집>으로, 남계인이 수정해서 문집으로 엮었음에도 매우 두껍다. 작중에서 등장한 순서대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해당 가규의 조항이 언급된 경우 괄호 안에 표기.
- 야간 통행 금지
- 음주 금지
- 경내 살생 금지(제3조)
- 사적인 싸움 금지
- 음란 금지
- 밤놀이 금지
- 여자 수사를 놀라게 하지 않는다(제7조)
- 소란 금지
- 빨리 걷기 금지
- 이유 없는 비웃음 금지
- 단정하지 않은 앉는 자세 금지
- 밥 세 그릇 이상 금지
- 위험에 처한 사람을 보면 구한다
- 식사 시 금언
- 교만과 거만 금지
- 취침 시 금언
- 음식은 가리지 않고 남기지 않는다
- 뒤에서 남의 험담을 하지 않는다
- 거짓말하지 않는다
- 사악한 무리와 어울리지 않는다(제52조)
3. 선부(仙府)
선부는 고소(姑苏, 지금의 장쑤성 쑤저우시)성 밖 깊은 산속에 있는 운심부지처(云深不知处).[6] 정자가 엇갈리게 배치된 운치 있는 원림은 적송과 교목 등 숲이 울창하고, 꽃도 목련, 치자, 하얀 국화처럼 청초하고 우아한 품종만 조금씩 있다. 운심부지처에는 긴 누창 담이 있어 일곱 걸음마다 벽에 투조로 도안을 조각한 창이 있는데, 이는 남씨 조상들의 일생을 묘사한 것으로 그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누창은 시조 남안의 일생을 묘사한 '가람', '습악', '도려', '귀적' 네 개이다. 경내에 있는 그밖의 장소는 아래와 같다.
- 한실: 고소 남씨 역대 가주의 거처.
- 정실: 남망기의 거처. 그동안 다른 사람들이 함부로 출입하지 않았기에, 대범산에서 모현우의 몸에 헌사된 위무선을 끌고 온 남망기가 정실로 데려가라고 하자 남씨 자제들이 놀란다.
- 난실: 자제들을 교육하는 공간.
- 명실: 초혼 전용 각루. 사면의 벽을 특수 소재로 만들고 전서로 주문을 써놓았는데, 안에서 초혼 의식을 진행하던 사람에게 문제가 발생하면 명실의 종이 스스로 울려 비상 상황임을 알린다.
- 장서각: 수만 권의 고서적과 악보를 모아놓은 건물. 기산 온씨의 종주 온약한의 장남 온욱이 운심부지처를 포위한 후 장서각을 포함한 선부 전체를 불태우라고 위협했을 때 대대로 전해온 장서가 전부 소실되는 것을 막기 위해 남가 사람들이 그 중 일부를 남희신에게 맡겨 도망치도록 했다. 사일지정이 끝나고 난릉 금씨의 지원을 받아 운심부지처를 재건할 때 원래 구도와 똑같이 만들고 장서각 밖에 있던 목련까지 같은 위치에 다시 심었다. 내부 지하에는 금서실이 있다.
- 냉천: 이름 그대로 차가운 물이 흘러 고인 노천탕. 여러 특효가 있어 남씨의 남자 자제들이 이용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성정을 깨끗하게 해주며, 허열을 다스리는 등 특효가 있다.
4. 구성원
남망기의 형장. 동생 남망기와 함께 고소쌍벽으로 불린다. 선문 세가 공자 용모 순위 1위. 현 시점 고소 남씨의 종주이다.
남희신의 동생. 본작의 주인공(功). 선문 세가 공자 용모 순위 2위.
- 청형군(青蘅君)(Qīnghéngjūn)
남희신과 남망기의 아버지이자 남계인의 형. 고소 남씨의 전대 종주. 어린 나이에 시대를 풍미한 명사로 이름을 날렸다. 젊은 시절 야렵을 나갔다가 한 여인을 만나 첫눈에 반했지만, 여인은 청형군에게 관심이 없었던 데다가 청형군의 스승까지 죽인 터라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한참 고민했다.[7] 끝내 그 여인을 비밀리에 운심부지처로 데려와 가문 사람들과 한마디 상의도 없이 혼례를 치르고 아내를 손대려거든 나부터 거치라 선언한 후, 집을 두 채 마련해 각각 아내와 자신을 폐관시키고는 약관의 나이에 바깥 출입을 끊고 다시는 세상사에 관여하지 않았다. 남희신과 남망기가 태어나자 다른 사람에게 양육하도록 하고 동생에게 두 아들의 교육을 맡겼다. 남망기가 6세가 되던 해에 아내가 죽은 후에도 홀로 남아 유폐 생활을 이어가다가 기산 온씨가 운심부지처를 공격할 때 중상을 입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고소 남씨의 대대적인 순애보를 보여준 인물이긴 하지만, 그 방식이 매우 무책임하기 때문에 평이 좋지 않다. 본인의 양가 감정을 충족시키겠다는 이유로 자신이 해야 할 한 가문의 종주, 한 사람의 형, 두 아이의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포기한 것은 성인으로서 성숙한 태도가 아니다.[8] 결정적으로 자신의 아내에게 한 일은 객관적으로 보면 범죄다. 다소 극단적인 의견으로 둘째 아들이 그의 연인에게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결말이 바로 청형군이 했던 일을 되풀이하는 것이라는 의견이 있을 정도다.
고소 남씨의 대대적인 순애보를 보여준 인물이긴 하지만, 그 방식이 매우 무책임하기 때문에 평이 좋지 않다. 본인의 양가 감정을 충족시키겠다는 이유로 자신이 해야 할 한 가문의 종주, 한 사람의 형, 두 아이의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포기한 것은 성인으로서 성숙한 태도가 아니다.[8] 결정적으로 자신의 아내에게 한 일은 객관적으로 보면 범죄다. 다소 극단적인 의견으로 둘째 아들이 그의 연인에게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결말이 바로 청형군이 했던 일을 되풀이하는 것이라는 의견이 있을 정도다.
- 남 부인(蓝夫人)(Lán fūrén)
청형군의 아내이자 남희신과 남망기의 어머니. 좁은 집[9] 에 갇혀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생활을 하면서도 한 달에 한 번 만나러 오는 아들들 앞에서는 그런 내색을 전혀 하지 않고 학업의 성취에 대해서도 묻지 않았다. 남망기를 자주 놀렸다는 남희신의 묘사로 보아 감금당한 상황 속에서도 밝은 성격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소 남씨에서는 남 부인의 지병이 심하다는 소문을 퍼뜨려 한 세가의 종주 정실부인이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상황을 무마하려 했다. 남망기가 여섯 살이 되었을 때 세상을 떠났으며, 그 후로 남망기는 점점 더 내성적으로 변하여 위무선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가족을 제외한 주변인들과의 교류를 거부해버린다.[10]
고소 남씨의 문하생으로 의탁했다가 난릉 금씨에게 가서 금광요의 심복이 되었다. 이후 말릉 소씨를 세워 종주가 된다.
5. 관련 문서
[1] 승려였으나 한 여인과 사랑에 빠져 환속 후에 악사가 되었다. 그 여인이 죽자 다시 속세와 인연을 끊고 절에 들어가서 도를 닦다가 생을 마쳤다.[2] 3대 가주이자 시조 남안의 손녀이고 유일한 여성 가주인 '남익'이 만든 술법. 고금줄을 휘둘러 상대를 순식간에 베어버리는 기술로, 바위도 단번에 베여질 정도로 강력하다. 정적 암살용으로 만들어져 고소 남씨 내에서도 이 술법에 의견이 분분하다고 한다.[3] 상대방이 말을 하지 못하게 입을 막아버린다. 남씨 사람만이 풀어줄 수 있으며, 일정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술법이 풀리나 억지로 술법을 깨면 목이 쉬어버린다.[4] 소설 4권에서 남망기가 시체 두 구가 들어있는 관, 그 위에 있는 관음상, 관음상 위에 있는 위무선까지 '''한 손으로''' 무리 없이 지탱한다. 심지어 이 상태로 오른손으로 고금 줄을 다루기까지 하였다. 아직 소년 시절이었을 때에도 성인 남성 넷이서 간신히 들어올린 막사 천장을 혼자서 들어올리기도 했다. 형인 남희신도 빨래할 때 손에 잡히는 옷마다 찢겨져 나갔다고...[5] 파랗고 누런 채소 잎과 나무껍질, 풀뿌리 들어있으며 씁쓸하고 알 수 없는 약간의 달큰한 맛이 난다고 한다.[6] 퇴고의 고사로 유명한 당나라 때 시인 가도(賈島)의 시 <심은자불우(尋隱者不遇, 은자를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함)>에 나오는 구절에서 유래.
松下問童子(송하문동자, 소나무 아래에서 동자에게 물으니)
言師採藥去(언사채약거, 스승은 약초 캐러 가셨다 말하네)
只在此山中(지재차산중, 다만 이 산 속에 계시나)
'''雲深不知處'''('''운심부지처''', 구름이 깊어 계신 곳을 알지 못한다네)[7] 여인을 그냥 사랑하면 스승의 복수를 할 수 없고, 스승의 복수를 하면 여인을 사랑할 수 없게 되기 때문.[8] 고소 남씨가 권력욕과 다소 거리가 있는 가문이고 남계인이 자리 욕심 없이 자기 역할을 다 했으니 망정이지, 조금이라도 다른 마음을 먹거나 남계인 같은 역할을 해줄 어른이 없었다면 남희신과 남망기는 지금보다 더 불행한 삶을 살 수도 있었다. 당장 옆 동네만 하더라도 후계 1순위의 외동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보호자가 없는 상태에서 숙부가 종주 자리에 오르는 바람에 방계한테 치이며 살았던 소년의 사례가 있다.[9] 주위에 용담꽃이 피어있는 작고 외딴 집이다. 원작 마도조사 내용과는 다르게, 드라마 진정령에서는 그냥 정실에 갇혔다고 나온다.[10] 아직 어머니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한 남망기는 '내가 잘못해서 어머니가 나를 보러 나오지 않는 것이다'라고 생각하여 어머니가 살던 집 앞에 무릎을 꿇고 한없이 기다리기도 했다. 진정령에서는 눈이 오고 숙부와 형의 만류에도 고집을 꺾지 않고 계속 좌선하고 있어 주변 어른들의 안타까움을 산다.
松下問童子(송하문동자, 소나무 아래에서 동자에게 물으니)
言師採藥去(언사채약거, 스승은 약초 캐러 가셨다 말하네)
只在此山中(지재차산중, 다만 이 산 속에 계시나)
'''雲深不知處'''('''운심부지처''', 구름이 깊어 계신 곳을 알지 못한다네)[7] 여인을 그냥 사랑하면 스승의 복수를 할 수 없고, 스승의 복수를 하면 여인을 사랑할 수 없게 되기 때문.[8] 고소 남씨가 권력욕과 다소 거리가 있는 가문이고 남계인이 자리 욕심 없이 자기 역할을 다 했으니 망정이지, 조금이라도 다른 마음을 먹거나 남계인 같은 역할을 해줄 어른이 없었다면 남희신과 남망기는 지금보다 더 불행한 삶을 살 수도 있었다. 당장 옆 동네만 하더라도 후계 1순위의 외동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보호자가 없는 상태에서 숙부가 종주 자리에 오르는 바람에 방계한테 치이며 살았던 소년의 사례가 있다.[9] 주위에 용담꽃이 피어있는 작고 외딴 집이다. 원작 마도조사 내용과는 다르게, 드라마 진정령에서는 그냥 정실에 갇혔다고 나온다.[10] 아직 어머니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한 남망기는 '내가 잘못해서 어머니가 나를 보러 나오지 않는 것이다'라고 생각하여 어머니가 살던 집 앞에 무릎을 꿇고 한없이 기다리기도 했다. 진정령에서는 눈이 오고 숙부와 형의 만류에도 고집을 꺾지 않고 계속 좌선하고 있어 주변 어른들의 안타까움을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