쑤저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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쑤저우 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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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행정구역
3. 교통
4. 지리
5. 경제
6. 역사
7. 볼거리
8. 자매결연도시
9. 세계문화유산
9.1. 한산사(寒山寺)
9.2. 창랑정(滄浪亭)
9.3. 유원(留園)
9.4. 사자림(獅子林)
9.5. 졸정원(拙政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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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Suzhou, 蘇州(소주), 苏州
인구
10,549,100(2012년)
면적
8,488㎢
중국 장쑤성 남동쪽에 위치한 도시로, 면적은 8,488㎢이며 인구는 약 1,000만 명이다. 장쑤성의 '쑤'가 이 도시의 이름을 딴 것으로, 역사적으로 장쑤성과 강남지역을 통틀어 중요한 역사도시였다.[1]
과거 춘추전국시대 당시 오나라의 수도였다. 그 이후에도 지역 행정 중심지로 수나라대운하가 완공된 후 강남에서 생산된 의 수송 거점으로 성장하였다. 저장성의 성도 항저우와 '천상천당 지하소항(天上天堂 地下蘇杭)'[2]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현대에는 중국을 대표하는 관광도시로 성장하였다.

2.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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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의 구와 4개의 현급시로 구성되어있다.

3. 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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쑤저우역
시외교통으로는 난징상하이를 잇는 후닝고속선 상에 있는 쑤저우역을 이용하면 상하이, 난징등 주요 대도시에 30분~1시간 내외에 도착할 수 있다. 또한 베이징과 상하이를 잇는 징후고속철도상에 있는 쑤저우베이역이 있다.
철도교통 외에도 버스교통도 발달해있다. 쑤저우항은 중국 내에서 유명한 항구이다.
버스는 여름, 겨울철에는 2 또는 3위안이고 냉난방이 없는 계절에는 주로 '''1위안'''이라 중국의 여느 도시와 비슷하게 매우 저렴하다. 쑤저우 지하철은 4개의 노선이 있으며, 5~7호선이 건설 중이다.
은근 대도시임에도 공항이 없어 공항 떡밥이 자주 도는 동네이기도 한다. 하지만 주변에 큰 공항이 3개가 존재하는데다 교통도 나쁘지 않아 공항이 지어질 가능성은 적어보인다. 현재까지는 항공을 이용하려면 인근 대도시인 상하이 또는 가까운 공업도시인 우시로 가야한다. 대부분 더 규모가 큰 상하이로 간다.

4. 지리


아열대기후를 띠고 있으며, 여름에는 덥고 습하며 겨울에는 춥다. 화베이 평원의 동서쪽에 위치하여 작은 구릉을 끼고 있는 평지도시이다. 도시의 북쪽으로는 양쯔강이 흐르고 있으며, 도시 주변에는 타이호, 양청호, 진지호 등 여러 개의 크고 작은 호수들을 끼고 있다. 인근 도시로는 동쪽으로는 상하이, 북서쪽으론 난징, 전장, 창저우, 우시 등이 있으며, 남쪽에는 후저우, 항저우 등이 있다.

5. 경제


상하이에서 고속도로로 1시간 거리에 위치해 있어서 관문 역할을 하고 있어 경제력이 장쑤성의 성도인 난징과 비슷한 수준이다. 관광산업과 공업이 발달되어 있다.

6. 역사


상고시대[3]에는 월족의 일파인 백월족(白越族)의 땅이었다.[4] 상나라 말기에는 희성 주씨의 수령인 고공단보(古公檀父)의 아들인 태백(泰伯)과 중옹(仲雍)이 현명한 계력(季歷)에게 양보하고자 섬서성 기산의 주원을 떠나 남쪽으로 달아나 장강 이남의 고소(姑蘇) 땅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니 그 나라가 구오(勾吳) 혹은 공오(工吳)라고 칭해지는 오(吳)나라다.
세월이 흘러 주간왕 15년(기원전 585년), 춘추시대에 이르러서는 오나라 군주인 수몽(壽夢)이 칭왕을 하고 패권을 다투던 초(楚)나라를 견제하려는 진(晉)나라의 지원을 받아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면서 수도로서 기능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와신상담의 주인공인 부차가 다스리던 그 오나라가 맞다. 춘추전국시대까지만 해도 개발이 더디고 생산력이 낮은 곳이었다. 어쨌든 주영왕 12년(기원전 560년), 수몽의 아들 제번 대에 이르러 성벽을 쌓기 시작했다. 주경왕 6년(기원전 514년), 합려가 즉위하면서 고소성을 새롭게 고쳐 쌓았다. 주원왕 3년(기원전 473년), 월왕 구천이 오나라를 멸하고 그곳을 차지해 월나라의 영역에 들었다.
주현왕 35년(기원전 334년), 초위왕(楚威王)이 월나라를 멸하고 옛 오나라와 월나라 땅을 모두 초나라가 차지해 초나라가 망할 때까지 초나라의 영역이 되었다.
초고열왕 원년(기원전 262년), 초나라의 재상인 춘신군 황헐(黃歇)이 강동에 분봉 받아 춘신군의 봉지의 일부가 되었다.
진시황 24년(기원전 223년), 진(秦)나라의 노장 왕전(王翦)이 초왕 부추를 사로잡고, 창평군항연[5]이 끝까지 저항했으나 끝내 패해 모두 죽고 진시황이 그 자리에 초군(楚郡)을 설치해 그 곳에도 군현제가 실시되었다.[6] 그리고 초군은 훗날 구강군, 장군(鄣郡), 회계군으로 분할되었다.[7] 진시황 21년(기원전 221년), 진시황이 천하통일[8]을 이룩해 전국을 36개 군과 그 하위의 현으로 분할해 다스렸다. 그리고 고소 땅은 회계군에 속하게 되었고, 훗날 고소 땅에는 오현(吳縣)이 설치되었다.[9]
이세황제 원년(기원전 209년), 항연의 아들과 손자인 항량항우 숙질은 이곳에서 진(秦)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거병했다. 진나라를 멸한 뒤 초한쟁패기에 항우의 봉토인 서초에 속했다.
한고조 5년(기원전 209년), 한고조 유방이 초나라를 멸하고 장수 관영(灌嬰)을 파견해 그곳을 차지했다. 그 뒤 한 고조가 한신(韓信)을 초왕에 봉했다가 회음후로 강등시키고 그 친척 형인 유가를 형왕에 봉했으나 경포가 유가를 죽이고 그곳을 차지하였으나 곧 진압 되었다. 한고조 11년(기원전 196년), 옛 서초 땅을 아들인 유비(劉濞)를 보내 오왕에 봉해 고소를 도읍으로 삼게 했다.
한문제 대에 장군이 회계 군에 편입되고 장군으로 옮겨졌다. 7년 뒤 오현이 되었다. 한경제 대에 유비가 반란을 일으키고 죽자[10] 오나라가 폐지되고 다시 회계군이 되었다. 한무제 대에는 양주를 설치해 양주 회계군 오현이 되었다.
서기 9년, 왕망전한을 멸하고 신나라를 세우면서 태덕현으로 이름을 고쳤다.
서기 25년, 후한의 시조 광무제가 태덕현에서 오현으로 복구시켰다. 한순제 대에 회계군에서 오군 소속으로 바뀌었다.[11] 한헌제 흥평 2년(195년), 손책(孫策)이 엄백호(嚴白虎)를 쳐서 쫓아낸 뒤 주치(朱治)에게 오군을 다스리게 해 손책의 영토가 되었다.
그 뒤 후한이 망하고 삼국시대에 이르러 손권오나라를 세우면서 강남이 개발되었고 쑤저우의 경제도 발전하였다. 특히 양쯔강 일대의 비옥한 환경, 동서남북 모두 수자원이 풍부하기 때문에 벼농사에 유리했다. 손권의 손자인 손호 대에는 오흥군 소속이 되었다.
서진(西晋)의 황제 사마염이 천하를 통일한 뒤 단양군 소속이 되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해우현을 설치했다. 동진 대에 사마연이 사마악을 오왕으로 삼아 그 봉지가 되었다가 그 뒤 낭야왕으로 옮겨져 다시 동진의 영토가 되었다. 송나라 때에는 다시 오군이 되었고 교주(僑州)[12] 소속이 되었다. 그리고 교주에서 남서주 소속이었다가 다시 양주 소속이 되었다. 양나라 대에는 신의군이 설치되고 거기에 신현을 두었다. 훗날 오주가 되었다. 진(陳)나라 대에는 오주 오군 오현이 되었다.
수나라가 진(陳)나라를 멸한 뒤 고소의 이름을 따 소주가 되었다가 오주를 거쳐, 다시 오군이 되었다.
당나라 대에 이름이 소주가 되어 그것이 고정되었다. 그리고 강남도에 속하게 되었고 훗날 강남동도 소속이 되었다. 특히 당나라에서 송나라가 들어설 때 쯤이면 이미 경제력으로는 중국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가 되었다. 입당구법순례행기에 의하면 이 도시에도 규모가 큰 신라방이 있었던만큼, 강남지방을 대표하는 국제적인 도시가 되어있었다.
오대십국시대 때에는 전류오월왕이 되면서 오월의 영토가 된다.
북송 대에 강남로 소속이 되었다.
원나라 대에는 강회 행성을 두어 다루가치가 다스렸다.
원나라가 망하고 명나라가 들어설 때 쯤 장사성이 이곳에 거점을 세우고 개겼지만 주원장에게 털렸다. 주원장은 이곳의 잠재력을 두려워해서 강남성 소속으로 두고 막대한 세금을 매기고 부유한 가문을 난징이나 다른 도시로 이주시키는 등의 방법을 사용했지만 이미 발달할 대로 발달한 도시의 경제를 죽일 수는 없었다. 쑤저우의 명성은 그대로였고 이건 과거시험에 합격한 사람의 출신배경만 봐도 알 수 있다. 오늘날로 치면 강남 8학군. 당시의 경제력을 보면 다른 도시와 단위가 다른 수준의 압도적인 경제력을 보여준다. 명나라 때 수도였던 베이징이나 난징의 인구가 100만에서 120만 언저리에서 왔다갔다 했다면 쑤저우의 인구는 200만에서 240만 수준이었다.
청나라가 이곳을 차지하고서는 강소성 소속이 되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청나라 말기 태평천국 군대가 이곳을 점령하였다가 나중에 진압되는 과정에서 도시의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다.

7. 볼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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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http://irene-travelogue.com/tag/suzhou-street/
도시 내부를 가로지르는 운하 때문에 동양의 베네치아라고도 많이 알려져 있으며, 베네치아와 다른 동양적인 풍경이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사실 천국에 빗댄 속담까지 있을 정도로 유명하지만 중국식 급속 개발로 현대건축물이 많이 오르고 많은 운하가 매장당해 쑤저우의 운하는 안타깝게도 옛 정취가 많이 사라진 편이다. 론리플래닛에서도 이에 대해 엄청난 혹평을 써놨다. 그러나 쑤저우 근교에는 좀 더 원형을 보존한 퉁리, 저우장 등 운하도시들이 몇 있어서 옛 정취를 찾아보려는 사람들은 근교로 찾아가기도 한다.
도시 내부의 운하 말고도 옛 관료·지주들이 꾸민 정원들도 많이 있어 정원의 도시라고도 불린다. 대표적인 정원들은 쑤저우 4대 정원(창랑정, 유원, 사자림, 졸정원)으로 불리며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어있다. 그 외에도 4대 정원과 같이 세계유산에 등재된 한산사 등 오래된 도시답게 명승고적들도 많다고 한다.

7.1. 대표 마천루


오래된 유적말고도 현대적인 건물도 유명하다. 대표적으로 쑤저우 동쪽에 위치한 진지호(金鸡湖) 호반에 조성된 공업원구(工业园区)라는 신도시에 밀집해있는데, 이 중 높이 302m, 66층 규모의 마천루동양의 문(Gate of the Orient)이 특이한 모양으로 유명하다.[13]
동양의 문 외에도 공업원구에는 수많은 마천루가 건설중 또는 계획중인데 대표적으로 중난 센터(Zhongnan Center)가 있다. 중난 센터는 2021년 완공을 목표로한 초고층 빌딩이며 높이 729m, 138층 이다. 완공되면 중국에서 제일 높고 세계에서 3번째로 높은 마천루가 될 예정이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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쑤저우 동양의 문. 사진 출처: http://news.xinhuanet.com/photo/2013-10/23/c_125583211.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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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난 센터 예상 조감도.

7.2. 전시장



8. 자매결연도시


대한민국
전주시, 영주시, 화성시, 태백시
일본
오사카부, 카나자와시, 다이센, 아야베, 센다이시, 나바리
호주
타운즈빌
뉴질랜드
타우포
이탈리아
베네치아
캐나다
빅토리아
미국
포틀랜드

9. 세계문화유산



'''유네스코 세계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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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한국어
쑤저우 전통 정원
영어
Classical Gardens of Suzhou
중국어
苏州古典园林
프랑스어
Jardins classiques de Suzhou
국가·위치
중국 장쑤성 쑤저우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1997년[15]
등재기준
(i)[16], (ii)[17], (iii)[18], (iv)[19], (v)[20]
지정번호
813
과거 춘추전국시대때 부터 명나라때 까지 긴 기간 수백개가 넘어가는 정원들이 만들어 졌으며 그 중 몇몇 유서깊고 아름다운 정원들은 역사성과 미적 기준을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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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한산사(寒山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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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에 등재된 남북조 시대에 창건한 한산사. 사진 출처: http://www.ivsky.com/tupian/hanshansi_t13808/

9.2. 창랑정(滄浪亭)


쑤저우에서 제일 오래된 정원이며 1천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2000년에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9.3. 유원(留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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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원 사진. 사진 출처: http://www.ivsky.com/tupian/suzhou_liuyuan_v12199/pic_314870.html
쑤저우 고성 서북쪽에 위치해있으며, 쑤저우를 대표하는 정원이다. 명대에 조성되었으며 1997년도에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9.4. 사자림(獅子林)


원나라때 천여법사의 제자들이 만들었으며, 2000년도에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9.5. 졸정원(拙政園)


졸정원 사진. 사진 출처: http://www.ivsky.com/tupian/suzhou_zhuozhengyuan_v12200/pic_314936.html
51,950 m²의 면적으로 쑤저우에서는 가장 큰 정원이다. 강남지방에서 제일 아름다운 정원으로 평가받기도 하였다.

[1] 장쑤성 명칭은 '''장'''닝(江寧/강녕. 난징시의 옛 이름 중 하나)과 '''쑤'''저우(蘇州/소주)에서 한 글자씩 딴 것이다. 장쑤성을 한 글자로 줄여쓰는 약칭은 소(蘇).[2] 혹은 상유천당 하유소항(上有天堂 下有苏杭).[3] 주나라 이전 시대.[4] 아마 이들이 후대 춘추시대 말기를 주름잡던 오(吳)나라의 구성원들의 조상으로 여겨진다.[5] 패왕으로 유명한 항우의 친할아버지다.[6] 엄밀히 말하면 초나라에도 군현제 비슷한 제도는 실시되고 있었지만, 보다 강력하게 중앙집권적으로 실시된 것은 진(秦)나라가 그 시작이다.[7] 즉 옛 초나라 땅을 초군으로 분류했다가 행정 편의를 위해 3분할한 것이다.[8] 당시에는 일통천하(一統天下)라고 했다.[9] 한나라 시대의 오군 오현의 시조.[10] 그 반란의 이름이 오초칠국의 난이다.[11] 훗날 삼국지엄백호허공의 근거지가 된다.[12] 지금 베트남과 광서, 광동성에 걸친 교주(交州)가 아니다.[13] 네티즌들이 바지랑 닮았다는 이우로 큰 바지(大裤衩)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본래 쑤저우 전통 정원의 다리를 형상화하여 디자인했는데 실물이 영 좋지 않게 나왔다고 한다. 처마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가 망한 서울시청, 첨단 기술을 과시하려다 디자인이 괴상하게 된 중국 중앙 텔레비전 베이징 본사와 비슷한 케이스.[14] 대기가 안좋을때는 꼭대기만 휑하고 사라진다...[15] 2000년 등록확장[16]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17]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18]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19]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20] 특히 번복할 수 없는 변화의 영향으로 취약해졌을 때 환경이나 인간의 상호 작용이나 문화를 대변하는 전통적 정주지나 육지·바다의 사용을 예증하는 대표 사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