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시장
1. 개요
부산광역시 중구 대청동3가, 신창동2가, 신창동3가, 신창동4가, 창선동2가에 있는 재래시장이다. 부산의 또다른 대형시장 자갈치시장이나 깡통시장, 근래 유명해진 보수동 책방골목 등과도 길 하나 가운데 두고 마주보고 있다. 다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이기 때문에 관광을 왔다면 한꺼번에 봐주는 게 좋다.일가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이 내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
금순아 보고 싶구나 고향꿈도 그리워진다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
굳세어라 금순아(1953년 作) 中, 2절
2. 역사
일제강점기 당시 이 곳은 일본인 구역이었으며 조선인 구역은 지금의 동구 일대였다. 일본인 구역이라서 조선인은 출입금지까지는 아니었지만 일제강점기의 한반도 대도시들은 이렇게 주 활동구역이 민족별로 나눠진 경우가 많았다. 가령 서울의 경우 중구 명동, 충무로(혼마찌도오리) 일대가 일본인 구역이었고 야인시대 등에서 그 분위기가 묘사된다. 그러다가 8.15 광복과 함께 수만 명의 일본인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면서 생겨버린 도시 중심부의 빈 공간에 자연스레 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도떼기시장'''이라는 이름이었다.[2]
6.25 전쟁이 터지고 부산이 임시수도로 지정되면서 전쟁에서 안전한 유일한 곳이 되자 전국에서 엄청난 피난민과 미군 구호물자, 밀수품이 부산항으로 유입되었고 물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시절에 국제시장은 구호품을 빼돌려 팔면서 그야말로 뭐든지 구할 수 있는 곳이 되었다. 외제품을 주로 취급하던 흔적은 지금도 이웃인 깡통시장 등에 남아있다.
- 이런 외제물건 수입하는 점포들은 국제시장 외에도 서울(남대문)[3] , 여수시, 마산 등 미군부대가 주둔한 곳이라면 어디든 상권을 형성했다. 이들 상권들은 미군 원조가 줄어든 후에는 일본으로부터의 밀수입한 생필품 등도 취급하며 70년대 말까지 그 명맥을 유지했다. 개중 서울 남대문이나 부산 국제시장은 상권이 살아남아 변화한 케이스에 해당.
- 이 때 한국전쟁통에 얼마나 해먹었냐면 미군 하역 물자의 10% 내외가 빼돌려져 망실처리될 정도였다.[4] 한국전쟁 휴전 후에는 미군의 물류체계 시스템이 바뀌어버렸는데 그게 바로 CAU, 즉 컨테이너 시스템이다(...). 원래 2차대전 영화에서 보던 것처럼 크레인으로 물자를 일일이 내리던 것을 거대한 철제깡통 상자에 넣고 봉해서 실어버린 것. 현대 해운의 효시는 바로 한국전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미군의 CAU화는 세계 여러 항구의 암시장 경제에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그리고 이제는 밀수되는 품목은 아니지만 아직도 미군 전투식량(C-Ration)들이 깡통시장 구역에 공급되어 판매되는 중이다(...).
- 전성기 국제시장의 경우 그야말로 '없는게없는'걸로 이름높은 서울 청계시장과함께 마굴로 이름높은 동네기도 했다. 이웃의 부평깡통시장은 그냥 국제시장과 하나로 묶어서 취급해도 될 정도로 붙어있는데다가, 옆동네인 남포동은 국내 최대 수산시장인 자갈치시장이 자리잡은 부산최대번화가였고, 여기에 보수동 책방골목도 길 건너에 인접해있는 정신나간 상권을 자랑했다. 현재는 전성기에 비하면 굉장히 많이 죽은 상태지만 어디까지나 '전성기에 비하면'일 뿐이다.
1953년 1월 30일에 일어난 국제시장 대화재로 큰 피해를 입었다.
이후 일본 제품이나 한소수교 이후에는 러시아 보드카 등 항구를 통해 들어오는 물건들을 다양하게 취급하는 곳이 되었다. 그리고 부산이 관광지가 되며 조금씩 알려지다가 동명의 영화가 히트를 친 이래 전국에 알려져 방문객 수가 늘었다고 한다.
3. 대중교통
부산 도시철도 1호선 남포역, 자갈치역에서 내려 도보로 10분 정도면 찾아갈 수 있다. 다만 자갈치역이 더 가깝다. 중앙역에서 내려서도 갈 수 있지만 제법 거리가 있다. 꽃분이네를 기준점으로 잡는다면 자갈치역에서 가는 게 제일 좋다.
그 밖에도 국제시장을 직접 경유하는 15번, 40번, 81번, 86번, 126번, 186번 등을 타면 올 수 있다. 이 중 국제시장을 양 방향 경유하는 노선은 40번과 81번, 86번과 186번[5] 뿐이니 이 점 참고해야 한다.
4. 관련 문서
[1] 원래 '영신'이라는 가게였으나 영화 촬영으로 인해 바꾼 듯 하다.[2] 광복직후 일본으로 돌아가는 일본인들 상당수가 귀국하는 배에 오르기 전 가방이나 물품등을 한국인들에게 압수 당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압수된 물건들을 경매로 파는 곳이 당시 도떼기시장 지금의 국제시장이다.(그 밖에 장물이나 밀수품도 많았다) 도떼기 란 말은 일본말 돗따(取った, Totta)에서 나왔는데, 챙겼다, 땄다, 잡았다는 뜻으로 경매시장에서 물건을 낙찰받기 위해 사람들이 '돗따'라고 외치는 데서 유래했다.[3] 전쟁 중에는 신세계백화점 본점 전체가 숫제 미군PX이던 시절도 있었다.[4] 보통 빼돌려지는 망실률이 1~5% 정도였다는데 최소 그 두 배 이상을 해먹은 셈. 그런데 한국의 경우는 워낙 사람이 많고 못 살았기 때문에 빼돌려지는 것을 알고도 일선 차원에서 눈감아 주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5] 이들 두 노선은 국제시장 경유 후 중구청, 메리놀병원으로 올라가서 산복도로를 타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