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녹수

 


1. 소개
2. 외모와 특징
3. 생애
3.1. 입궐 이전
3.2. 권세를 얻다
3.3. 중종반정 이후
4. 대중 매체에서
4.1. 소설
4.2. 사극
4.3. 영화
4.4. 노래
5. 관련 문서


1. 소개


張綠水, ? ~ 1506년
조선 연산군후궁.

2. 외모와 특징


노래를 잘해서 입술을 움직이지 않아도 소리가 맑아서 들을 만하였으며, 나이는 30여 세였는데도 얼굴은 16세의 아이와 같았다.······얼굴은 보통을 넘지 못했으나, 남모르는 교사(巧詐)와 요사스러운 아양은 견줄 사람이 없었다.······왕을 조롱하기를 마치 어린아이같이 하였고, 왕에게 욕하기를 마치 노예처럼 하였다.

연산군일기, 연산 8년(1502년) 11월 25일 2번째 기사

외모는 평범하여 그다지 미인이 아니었다. 엄청난 동안으로, 30살이 넘은 나이에 16세 정도 소녀로 보였다. 연산군이 원하는 것을 알아 비위를 잘 맞추어 주었다.
연산군에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어머니에 대한 애정갈구가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장녹수와 연산군을 다룬 작품에서는 장녹수가 연산군을 어린아이를 대하듯 달래주거나 연산군이 장녹수에게 어머니처럼 애정을 갈구하는 모습이 많이 나온다. 장녹수는 연산군보다 연상이었을 것이 확실하다. 연산군이 사망했을 때 나이가 31세였다.
연산과 장녹수 사이에는 딸 하나가 있었다. 연산군이 정실인 폐비 신씨와 사이에서 요절한 자식까지 더하면 총 9명의 자식을 낳았던 것과 대조된다.

3. 생애



3.1. 입궐 이전


아버지 장한필은 충청도 문의현령을 지냈으며 언니는 내수사의 공노비였다. 집이 가난해서 몸을 팔아 생활했고, 시집을 여러 번 갔다. 제안대군 집 가노의 아내가 되어 아들을 하나 낳았다. 이후 춤과 노래를 배워 창기가 되었다. 연산군이 소문을 듣고 불러들였다. 처음에는 종4품 숙원에 봉해졌고 후에 종3품 숙용이 되었다.

3.2. 권세를 얻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만을 적으면 다음과 같다.
연산군이 총애함이 날로 융성하여 장녹수가 말하는 것은 모두 좇았다.
부고(府庫)의 재물을 기울여 모두 장녹수의 집으로 보냈다. 금은주옥의 보물을 다 주어서 장녹수의 마음을 기쁘게 했다. 장녹수 집의 노비·전답·가옥을 이루 다 셀 수가 없었다.
왕이 비록 몹시 노했더라도 장녹수만 보면 반드시 기뻐하여 웃었으므로, 상주고 벌주는 일이 모두 장녹수의 입에 달렸다.
이쟁이 형제와 노비 송사를 하다가 이기지 못할까 두려워 장녹수에게 뇌물을 주었다.·····이쟁의 아내가 남몰래 장녹수와 결탁하여 전민(田民)을 뇌물로 많이 주었으므로, 왕이 이쟁 부부를 매우 후하게 대우했다.
연산군이 김효손을 사정으로 삼았다. 김효손은 장녹수의 형부이므로 현달한 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이후 실록에 김효손을 승진시키고, 신하들이 이러면 안된다고 하고, 무시하고, 또 승진시키고 하는 내용이 계속 나온다.

이극균에게 전교하기를 "·····재상(宰相)으로서 재능 없이 제수된 자가 또한 어찌 김효손과 같은 사람이 없겠는가? 그런데 말하기를 이와 같이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오?"

연산군일기 48권, 연산 9년 1월 14일

연산군이 김수말을 승진시켰다. 김수말은 제안대군의 장인이었는데 제안대군의 여종 장녹수가 궁중에 들어와 총애받았기 때문이다. 한 달 후 사도시정으로 승진시켰다. 왕이 이때 한창 장녹수를 사랑하여 그 말이라면 모두 따랐기 때문에 특별히 승서하였다.
연산군이 궁녀 전향과 수근비를 능지형으로 사형시켰는데, 사관들이 국문에 참여하지 못하여 이유와 과정을 듣지 못했다. 연산군은 둘이 왕에게 불손했다고 이유를 말하고 이 둘의 삼족을 멸하라고 전교했다.

이는 장녹수(張綠水)가 참소(讖訴)하였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모습이 고와서 녹수가 마음으로 시기하여 밤낮으로 왕에게 참소하여, 두 사람의 부자 형제(父子兄弟)를 하루아침에 다 죽였다.

연산군일기 54권, 연산 10년 6월 9일

연산군은 모든 관리에게 전향의 머리를 효수한 곳에 가서 쭉 서서 보게했다. 수근비의 사지를 사방으로 보내 전시하고 둘의 머리를 궁인들에게 보였다. 연산군은 수근비의 일가를 불에 달군 인두로 고문하는 낙형을 써서 국문하라고 명령하였다. 연산군은 삼족을 다 능지형으로 사형시키고 싶었지만 낙형을 써도 다들 모르는 일이라고 하자 추관들이 '형벌에 차등을 두는 것이 어떨지 감히 여쭙습니다'라고 하였다. 연산군은 일가친척들을 장 80~100대를 때리고 외방으로 추방하였다.
홍귀달은 당대에 평판이 엄청나게 좋은 사람이었다. 경연 때 여러 번 간언하여 연산군에게 미움을 사고 있었다. 경영의 창고지기가 되고 싶었던 사람이 장녹수를 통해 청탁하여 연산군이 홍귀달에게 비밀리에 부탁했는데 홍귀달이 듣지 않았다. 그러자 연산군은 손녀를 궁에 데려오라했을 때 말이 공경하지 못했다는 이유를 들어 홍귀달을 사형시켰다.
사신은 논한다. 왕이 음탕이 날로 심하여······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문득 장녹수 및 궁인을 시켜 누구의 아내인지를 비밀히 알아보게 하여 외워 두었다가 이어 궁중에 묵게 하여 밤에 강제로 간음하며 낮에도 그랬다. 혹 4, 5일토록 나가지 못한 사람으로서······의 아내 같은 사람들이 추문이 있었다.
연산군이 어서를 내리길 "성터를 살펴볼 때에, 친히 대사동(大寺洞) 조성하는 곳을 보았는데, 일이 매우 거칠고 느렸다. 그리고 제도가 추졸하니, 당해관을 국문하게 하라. 금년 가을 전에 만들기를 마칠 것이니, 승지는 왔다갔다 독역하면서 군인과 장인은 계속해서 제역하지 말게 하고······" 하였으니 바로 장녹수의 집이다.
무뢰한 무리들이 전비와 장녹수에게 다투어 붙어 족친이라고 하는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주인을 배반한 호활한 무리와 시정의 모리배들이 모두 들어가 붙어 경향에서 횡포를 부리므로 사람들이 매우 괴롭게 여겼다.

3.3. 중종반정 이후


연산군일기에는 중종반정 열흘 전 연산군이 변고가 일어날 것을 예감하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나온다.
왕이······읊기를 마치자 두어 줄 눈물을 흘렸는데, 여러 여자들은 몰래 서로 비웃었고 유독 전비와 장녹수 두 여자는 슬피 흐느끼며 눈물을 머금으니, 왕이 그들의 등을 어루만지며 이르기를, "지금 태평한 지 오래이니 어찌 불의에 변이 있겠느냐마는, 만약 변고가 있게 되면 너희들은 반드시 면하지 못하리라." 하며, 각각 물건을 하사하였다.
결국 중종반정이 일어나 연산군이 몰락하자 장녹수는 반정세력에 의해 연산군의 또다른 후궁인 전비, 백견 등과 함께 군기시 앞, 오늘날 서울시청 광장이 있는 지점에서 참수형을 당했다. 그녀의 시신은 처형된 그 자리에 그대로 버려졌고 분노한 군중들이 장녹수와 전비 시신의 성기에 돌을 던지면서 "나라의 고혈이 모두 여기로 빨려들어갔다!"라고 외쳤으며 군중들이 던진 돌에 순식간에 돌무덤이 되어버렸다고 한다. 실록의 기록은 이렇지만 생식기에 돌을 던지는 게 충격적이라서, 관련 드라마나 소설에서는 그냥 시신에 돌을 던졌다고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

4. 대중 매체에서


버라이어티한 연산군 시대를 한층 더 드라마틱하게 만든 인물. 연산군을 다루는 사극에서는 반드시 주요인물로 등장할 뿐 아니라 타이틀로 직접 나선 적도 있다. 워낙 캐릭터의 이미지가 강하기 때문에 연산군의 정실 부인인 폐비 신씨조차 제치고 연산군의 진짜 아내처럼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다만 연산군과 중전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 실록에 의하면 중전이 연산군에게 간언을 할 때 연산군이 듣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화를 내진 않았으며, 폐비 신씨는 강화도로 유배를 떠나는 연산군과 함께 자신도 유배지로 보내달라며 울부짖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연산군도 유배지에서 죽어가면서 “중전이 보고 싶다.” 라는 유언을 남기기도 했다.
연산군 시대가 워낙 사극화가 많이 된 만큼 연산군과 단짝인 장녹수도 사극에 많이 출연했는데 어째서인지 최후를 실록 그대로 그려낸 사극은 단 한 편도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는 정식 절차를 밟아 사형이 집행되고 시체가 거리에 전시된 이후에야 백성들이 몰려들어 돌을 던졌는데 어째 사극에는 장녹수가 살아있는 상태에서 돌 맞고 죽는 걸로 묘사되거나 아니면 반정군이 그 자리에서 척살해버리는 식으로 처리되는 게 대부분이다. 더불어 전향, 수근비[1], 옥지화 등의 사건은 극적인 요소가 충분함에도 사극에서 배제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묘사(보통의 외모, 연산군보다 많은 나이, 동안)와 달리 사극에서는 항상 연산군 역 배우보다 연하이면서 성숙한 외모인 미녀 배우가 장녹수를 맡는다.

4.1. 소설


숨덕부의 저자인 오버정우기가 정사와 야사와 작가의 상상력을 더해서 장녹수의 삶을 녹수별곡이라는 제목으로 그려냈다. #
슈타인호프#s-4대체역사소설 '명군이 되어보세!' 에서는 연산군에 빙의한 현대인 주인공이 장녹수와 엮이면 안 좋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냥 초대가수 형식으로 잔치 때 불러서 가무를 감상하기만 하지 궁에 들이거나 가까워지지는 않는다. 녹수는 연산군을 유혹해보려고는 하나 안되자 재위 9년차 쯤에는 거의 포기한다. 그래도 여기서는 주인공이 빙의한 덕에 연산군이 폭군 연산이 아닌 명군 무종으로 생을 마쳤고, 녹수도 왕과 특별히 얽힌 점이 없었기 때문에 무종 사후에도 큰 기복 없이 살다가 천수를 누리고 갔을 듯.

4.2. 사극


조선왕조오백년(설중매) 에서는 이미숙이 맡았다.
박지영이 연기한 드라마는 해당 문서로.
인수대비(드라마)에서는 전소민이 출연하였다.
역적 : 백성을 훔친 도적에서는 이하늬가 출연, 본인의 국악 솜씨를 잘 보여주었다. 본 항목에서 언급된 실제 장녹수에 관하여 기록된 모습들이 극 중에서 구현되었다. 이 드라마에서는 장녹수(이하늬)가 백성들의 돌에 맞아 죽는 것으로 나온다.
7일의 왕비에서는 손은서가 연기하였으며, 본 드라마에서는 임사홍과 함께 진성대군 측을 견제하는 정치적인 인물로 묘사되었다.

4.3. 영화


영화 왕의 남자 에서 배우 강성연이 연기했다. 기자 간담회에서 이준익 감독이 "연산군을 홀린 여자이니 요염하게 등장할 것" 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래서인지 영화 중간중간마다 요부 같은 연기를 잘했다는 호평도 있었다.
2014년 민규동이 감독한 간신(영화)에서 뮤지컬 배우이자 가수 차지연이 연기했다. 극중 창소리를 곁들인 나레이션도 이 사람. 영화 자체는 흥하지 못했지만 차지연의 연륜 있는 장녹수 연기는 호평 받았다. 나이대도 실제 장녹수와 비슷하기도 하고.

4.4. 노래



사극 장녹수의 주제가. 작사 박성훈, 작곡 임택수, 노래 전미경.
사극 사상, 아니 아마도 한국 드라마 사상 가장 큰 인기를 누린 주제가 중 하나일 것이다. 드라마 방영 당시에 그야말로 미칠 듯한 인기를 누렸으며 드라마가 종영한 지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노래방 인기가요 리스트 등에 이름을 올릴 정도.[2] 드라마 장녹수를 못 본 사람이라도 웬만하면 이 노래는 알고 있거나 최소한 어디서 들어보긴 했을 것이다.#
애절하면서도 한국 전통적인 멜로디 탓인지, 색소폰 연주자들에게 유독 인기가 많은 곡이다. 나이 지긋한 연주자가 공원이나 지하철 역 등에서 이 곡을 연주하는 광경을 목격한 위키러들도 많을 것이다.

5. 관련 문서



[1] 사극 장녹수(드라마), 왕과 비에서는 등장하긴 하는데, 역사와는 달리 장녹수의 모함으로 죽기는 커녕 연산군이 유배될 때도 따라가 임종까지 지키는 역할로 나온다.[2] 확인 결과 2020년 노래방 인기가요 리스트에도 포함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