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엄 영

 



[image]
[image]
1962년 체포 당시(14세)
1972년 체포 당시(25세)
1. 개요
2. 어린 시절(1차 범행기)
3. 청년 시절 ~ 사망(2차 범행기)
4. 여담
5. 어록


1. 개요


1947년 9월 7일 ~ 1990년 8월 1일
'''그레이엄 영(Graham Young)'''은, 영국 최연소로 (정확히는 탈륨)을 이용해 사람을 죽인 연쇄살인자이다. 탈륨 화합물을 찻잔에 묻혀서 동료들에게 건네주는 식으로 범행을 저질렀기 때문에 별명이 'Teacup Poisoner(찻잔 독살자)'였다고 한다.

2. 어린 시절(1차 범행기)


[image]
어린 시절
[image]
약 8살 때 그레이엄 영(가운데)이 사촌인 산드라, 친구와 찍은 사진이다.
[image]
약 8살, 그레이엄 영(아랫 쪽 가운데)이 사촌인 산드라와 그레이엄의 누나 위니프레드 영, 친구와 찍은 사진이다.
[image]
체포 되기 전 학창 시절
태어난 지 3개월 만에 어머니를 잃고 이모 손에 컸다. 그러다 2살(1950년 4월 1일) 때부터는 재혼한 아버지와 함께 살았는데 훗날 정신과 의사들은 "정서 발달이 가장 중요한 시기에 어머니가 없었기 때문에 인간적인 온정이나 동정심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인간으로 성장했다"고 진단했다. 그러나 영국 저술가인 안소니 홀든(Anthonly Holden)의 저서 St. Albans Poisoner에 의하면 그레이엄이 3살 때 새엄마가 모형 비행기를 부숴버리고 동네 사람들에게 그레이엄이 나쁜 애라는 식으로 말하고 다니거나 심지어 지갑에 돈이 없어졌다며 그레이엄에게 누명을 씌우는 등의 아동학대를 저질렀고, 이것이 원인을 제공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독약에 대한 집착은 어릴 때부터 나타났다.[1] 학교 친구들이 운동선수나 가수를 우상으로 삼았다면, 그레이엄은 '''영국의 악명높은 독살자 할리 크리픈'''을 우상으로 삼았다.[2] 특히, 빅토리아 여왕 시대 때 아내장모를 독살하여 1855년 글래스고에서 교수형을 당한 살인범, 에드워드 프리처드를 가장 좋아했다. 게다가 아돌프 히틀러를 존경하였고, 히틀러의 절대적인 권력을 부러워했다.
14살에는 약국에서 학교 과학 숙제를 핑계로 나이를 속여 안티모니 타르타르산염을 구한 뒤 늘 품에 지니고 다니며 그 약병을 자신의 작은 친구라고 불렀다. 그 후 학교 과학 실험실의 청소 당번을 자진하여 학교 과학 실험실을 드나들게 된 후로는 화학 실험에서 사용하는 독극물을 자유롭게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도서관에서 독학만으로 대학원 수준의 화학 지식을 습득한 것도 14세 때의 일이다.''' 그리고 며칠 뒤 약병에 든 독약을 학교 친구와 가족들을 상대로 실험을 시작했다. 그레이엄은 아이들이 먹는 샌드위치에 안티모니 타르타르산염을 섞고 그 양에 따라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지 지켜봤다. 약을 먹은 친구들은 구토를 하고 복통을 앓는가 하며, 심하면 경련이 일어나기도 했다.
1962년 15세의 그레이엄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의붓어머니를 독살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레이엄이 화학 시간에 이상한 실험을 제안하는 것을 보고 학교의 화학 교사가 의구심을 가졌다. 방과 후에 그레이엄의 책상을 조사한 화학 교사는 안티모니 타르타르산염이 든 독약병과 죽어가는 사람들을 그린 그림, 유명한 죄수들과 독약에 대한 수필, 독약의 효능 및 치사량을 적은 종이를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조사를 받게 된 그레이엄은 가족과 친구들을 상대로 독약을 실험했다는 사실을 털어놨고, 의붓어머니를 살해한 혐의로 감옥에 갇힌 동안 넥타이로 자살을 시도했는데 자살시도의 이유가 수치심 때문이 아니라 '''독약 없이는 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962년, 15살의 그레이엄은 유죄를 선고받았지만 정신 이상 판정을 받아 브로드무어 정신병원에 위탁되었다. 그러나 그레이엄의 미치광이 행각은 거기서도 멈추지 않았다. 독극물에 대해 워낙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병원 정원에 있는 관상용 월계수와 나뭇잎에서 청산가리를 추출할 수 있을 정도'''였고, 병원 직원과 동료 수감자에게 독극물을 먹여서 그 중 1명은 사망하게 만들었다. 9년 뒤에는 석방되어 나오는데, 후에 정신과 의사 보고서를 보면 그 당시 완전히 치유된 것으로 나왔지만 그것은 오진이었다.

3. 청년 시절 ~ 사망(2차 범행기)


[image]
그레이엄 영이 직장동료에게 쓴 편지
[image]
그레이엄 영이 다녔던 보빙턴에 위치한 회사 'John Hadland'
그레이엄은 정신병원에서 퇴원한 뒤 보빙턴 마을로 이사가서는 사진기 회사의 창고 일을 맡았는데, 회사에 들어갈 때 사장에게는 사랑하던 의붓어머니가 죽은 뒤 신경쇠약에 걸려 오랫동안 병원 신세를 졌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진기를 생산하는 회사에 취직한 이유부터가 독극물 살인에 필요한 탈륨을 훔치기 위해서였고, 취직한 다음 날에는 시내에 나가서 수백 명을 죽게 할 수 있는 양의 독약을 구해왔다. 그 뒤로 거의 70명이나 되는 회사 근로자들이 설사, 경련, 요통, 멀미 등 증상을 겪기 시작했다. 몇몇은 입원을 했고, 그중 2명은 고통을 겪다가 죽고 말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병을 사람들은 ‘보빙턴 병’이라 불렀다. 처음에는 아무도 그레이엄이 가져다준 커피와 차를 마시고 나면 병에 걸린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나 결국 공장의 누군가가 동료들에게 독약을 먹인다는 의혹이 불거져서 수사가 이루어졌다. 그레이엄은 경찰 조사를 받는 동안 자신의 뛰어난 화학 지식을 자랑하지 못해 안달을 냈다. 그레이엄은 수수께끼의 질병이 탈륨에 의해 나타나는 증상으로 보인다고 말했고, 이는 경찰의 의심을 사기에 충분한 발언이었다.
경찰이 그레이엄의 과거를 조사해보자 소름 끼치는 진실이 밝혀졌고, 그레이엄은 살인 혐의로 즉시 체포됐다. 그레이엄의 아파트에서는 탈륨, 안티모니, 아코니탄 같은 독약이 발견되었고, 히틀러와 그 추종자들의 액자 사진도 나왔다. 그레이엄의 일기장도 나왔는데, 거기에는 여러 독약이 사람들에게 끼친 결과가 자세하고 객관적으로 적혀 있었다. 그레이엄은 일기장에 기재한 내용이 단지 소설을 쓰기 위한 기록이라고 주장했지만, 결국에는 범행 사실을 모두 털어놓았다. 그레이엄에 따르면 사람들의 목숨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어서 저지른 범행이라고. “마음만 먹었으면 전부 다 죽일 수 있었어요. 그렇지만 내가 살려준 거죠.”라고 그레이엄은 형사에게 자랑했다. 1972년 6월 바로 재판이 시작되었고, 모든 혐의를 인정했기에 재판은 10일 정도로 짧게 진행됐다. 배심원은 그레이엄에게 법정 최고형인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선고했고, 그레이엄이 항소하지 않아 확정되었다.
그레이엄은 18년 가량 교도소에서 무어 살인마(Moor Murders)중 한 명인 이안 브래디(Ian Brady)와 함께 친하게 지내면서 조용히 복역하다가 1990년 8월, 자신의 감방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향년 42세였으며, 사인은 심장마비이다.

4. 여담


2005년 일본 시즈오카현에서 그레이엄 영에 심취한 여고생이 어머니를 대상으로 탈륨을 실험하는 사건을 저질러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 피해자인 어머니는 입원 도중 상태가 악화되어 혼수 상태에 빠지는 등 여러 우여곡절 끝에 구사일생했다. 소녀는 후에 자살을 기도했으나 실패했고, 나중에 정신검사를 해본 결과 아스퍼거 증후군조울증까지 앓고 있는 상태로 밝혀졌다. 여담으로 이게 일본에서는 굉장히 유명한 사건이라 "탈륨 소녀의 독살일기"라는 제목으로 영화까지 만들어졌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2013년 9월 8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언빌리버블 스토리에서 방송되었다. 서프라이즈에서는 여학생의 이름은 요코이며, 비참한 현실에서 관심을 받을 유일한 방법이었기에 범행을 저질렀다고 소개했다.

5. 어록


'''It grew on me like a drug habit, except it was not me who was taking the drugs.'''

'''그것은 마약처럼 습관이 되어갔다. 내가 약을 먹는 당사자가 아니었다는 것만 빼면 말이다.'''[3]

'''"What I feel is the emptiness of my soul."'''

'''내가 느낄 수 있었던것은 속이 텅 빈 내면일 뿐이었다.'''[4]

[1] 그러나 본격적으로 이 길로 빠지게 된 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받은 그레이엄에게 아버지가 과학 실험도구들을 사준 것이었다고 한다. [2] 할리 크리픈은 1910년에 아내를 죽여 지하 석탄 창고에 매장한 뒤 자신의 비서와 도망친 살인범이다.[3] 영어로 (일반적인) 약물과 마약 모두를 drug(s)로 지칭할 수 있다는 것을 이용한 문장. 다만 언어유희를 유도했는지는 알 수 없다.[4] 체포후 본인의 살인 행적에 대해서 후회, 반성하는 마음을 느끼는지에 대한 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