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먀시
1. 제원
2. 개요
그리먀시 (러시아어로 "천둥 같은"이라는 뜻) 는 2차 세계 대전 당시 사용된 소련 해군의 구축함급인 프로젝트 7형 구축함 중 여섯번째로 진수된 함이다. 규모가 많이 위축되어 있던 소련 해군에서도 이름난 전투함 중 하나이다.
3. 역사
3.1. 대전 전반기
진수와 취역은 발트함대 소속으로 치뤘으나,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고 취역 직후인 1939년 9월에 발트 해를 떠나 백해-발트해 운하를 통해 10월 8일 북해에 도착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리먀시가 북방함대 소속으로 변경된 것은 1941년의 일이다. 핀란드와의 겨울전쟁 에 동원되어 초계와 수송선 호위를 전전하면서 직접적인 함대전은 겪지 않았다. 1940년 10월부터 1941년 5월까지 그리먀시는 수리에 들어갔고, 이 때 히틀러의 공격 준비도 거의 끝나가는 상태였다.
1941년 6월 22일 새벽 1:30, 함대에 경계 1호가 발령되고,[2] 그리먀시는 계획에 따라 바엔가 만으로 대피하여 개전 이틀째에 독일 항공기들을 상대로 대공방어를 실시했다. 8월 중순까지 그리먀시는 바엔가에 머물며 20차례의 공습을 성공적으로 막아냈고, 7월 15일에는 해안포대와 합작으로 폭격기 하나를 격추해 첫 승리를 따낸다.
8월 18일 그리먀시는 대공무장 강화를 위해 무르만스크에 입항하여 첫 개장에 들어간다. 45mm와 37mm 대공포의 교체가 이 때 행해졌다. 한참 개장 중이었던 24일, 독일 폭격기들의 공습으로 그리먀시는 8발의 지근탄을 맞아 대공포대와 거리계, 식수관, 통신장비 등에 손상을 입었으나, 부상자는 단 한 명도 없었고, 그리먀시도 상태가 양호하고 구축함 하나하나가 귀한 시점이라 그 자리에서 개장을 겸해 긴급수리를 받는다.
4일 뒤인 28일, 그리먀시는 개장을 마치고 얼마 안 되어 급한 연락을 받는다. 보급함 "마리야 울랴노바"가 독일 잠수함의 어뢰를 후미에 맞아 대파되어 구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에 그리먀시는 자매인 그롬키(Громкий), 오르페이급의 우리츠키(Урицкий), 쿠이비셰프(Куйбышев)와 함께 현장으로 달려간다. 1차대전 시절의 낡은 구축함인 우리츠키가 울랴노바를 간신히 견인하게 되어 기동성이 심각하게 떨어진데다, 독일의 폭격기들이 또 날아와 무려 4시간 동안 이들을 괴롭혔다. 그리먀시는 회피기동과 동시에 대공화망을 펼쳐, 이전까지 급강하폭격기를 상대한 경험이 없었음에도 45mm 대공포로 1대의 Ju 88을 격추하는 성과를 올린다.[3] 이 날 그리먀시는 76mm 55발, 45mm 138발, 37mm 265발, 12.7mm 328발을 소모했다.
상황이 급해진 소련은 3월에 미국이 통과시킨 렌드리스법을 이용해 도움을 받아보고자 했다. 연합군이 생각해낸 소련을 위한 렌드리스 방법은, 아이슬란드나 스코틀랜드 북부에서 수송선단을 집결시켜 그린란드 해와 바렌츠 해를 지나 최전선인 무르만스크와 아르항겔스크에 바로 닿는 항로를 이용하는 보급이었는데, 수송선 1척당 대략 1만 톤의 화물을 적재한다 치면 1척만 해도 중형전차 260대 혹은 트럭 425대가 들어가는 수준이다. 이 정도 물량은 소련 육군의 5개 기갑사단 분량이나 되는데다, 이런 화물선을 10척에서 30척까지 한 선단에 편성하기로 계획하고 있었기에, 선단 하나하나가 소련에게는 그야말로 피같은 존재였다. 영국에서 소련으로 가는 함대는 PQ, 소련에서 돌아오는 함대는 QP로 코드명이 정해졌다. 문제는 이렇게 많은 수송선을 어떻게 호위하느냐였다. 당시 소련 북방함대에는 구축함 8척이 수상전투함의 전부였던데다 이것들을 전부 선단호위에 몰빵해 버리기도 부담스러웠으므로, 영국이 순양함과 구축함 몇 척을 지원했고, 소련은 구축함 3-4척 가량을 편성했다. 바로 이 구축함들 중 하나가 그리먀시. 이 때만 해도 독일도 영국이 소련을 이런 식으로 도와주리라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처음 몇 번의 수송선단은 발각당할 위험을 감수하고도 순조롭게 소련 영토를 찍고 돌아갔다.
3.2. 중반기
하지만 이 상황은 오래 가지 못해 1942년 봄이 되면서 루프트바페의 뇌격기 대부분이 북쪽으로 작전지를 옮기고, 잠수함이 더 자주 출몰하는 등 독일도 낌새를 알아차리고 대응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고, 설상가상으로 북쪽의 낮 길이가 길어지면서 더 긴 시간 동안 넓은 범위에 선단이 노출되게 되었다. 선단들은 뇌격기에 끊임없이 시달렸으며, 낮은 고도로 접근해 오는 뇌격기들을 상대하기 위해 그리먀시는 대공포는 물론이고 주포까지 동원해 수면에 고폭탄을 쏴 물기둥을 만들어 제압했다.
그리먀시를 비롯한 소련 해군의 구축함들은 항속거리 문제로 공해상에서 영국 구축함들로부터 수송선단을 인계받아 소련 영토까지 호위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이 문제는 이후 위급상황에 대응하는 데에 큰 차질을 빚었는데, 1942년 4월 30일, 영국으로 돌아가는 수송선단 QP 11의 기함이었던 타운급 경순양함 HMS 에든버러가 7형 유보트 U-456의 어뢰에 피격당하는 사건이 터졌다. 그리먀시의 호위 하에 긴급수리를 위해 무르만스크로 돌아가고자 했으나, 연료가 떨어진 그리먀시는 재보급을 위해 5월 1일 호위대를 떠난다. 다음 날 에든버러에게 합류하려 했는데, 그 때 에든버러는 이미 침몰하고 난 뒤였다.
이후 한동안 그리먀시는 대지포격과 보급을 반복하며 잠시 호위임무에서 빠졌는데, 그리먀시가 참여하지 않은 17번째 수송선단(PQ 17)은 독일의 정찰기에 의해 발각되어 잘 구성된 Ju 88 뇌격기 편대의 공격을 받는다. 그럼에도 선단이 계속 꾸려져 소련으로 향하자 독일도 가만 있을 수는 없었기에 앞으로 소련으로 계속 들어가는 물자를 필사적으로 저지하기 위해 티르피츠까지 꾸역꾸역 올려보내면서 본격적인 함대전의 분위기마저 조성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후드(순양전함)가 격침된 이후로 독일 군함만 봤다 하면 눈이 뒤집어지는 영국이 수송선단을 호위하던 함선들까지 불러내 미친개마냥 쫓아가는 바람에 티르피츠를 북해로 보내는 계획은 무산되었다. 여기에다 '''티르피츠가 북해에 얼씬도 못 하게 하겠다'''는 각오로 영국 해군과 코만도가 합작으로 프랑스 생나제르 항의 도크를 폭약을 꾹꾹 눌러담아 개조한 구축함 HMS 캠벨타운(Campbeltown)으로 '''들이받아 통째로 날려 버리면서''' 북해 근방에서 정비받을 만한 도크가 사라져 티르피츠의 북해에서의 작전능력은 사실상 없어지고 말았다. 이 때 영국이 날뛰지 않았다면 수송선 때려잡으러 올라온 티르피츠를 그리먀시와 자매함들이 상대해야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들 북방 수송선단에게는 독일의 위협도 위협이었지만, 기상조건 자체도 위협적이었다. 한여름에도 기온이 고작 영상 4도를 찍는데다, 부서진 파도에서 날리는 바닷물이 얼어 온 선체에 달라붙는다. 이것들을 제때 제거하지 못하면 항력이 증가하는 건 둘째치고, 무게중심이 자꾸 올라가 결국에는 함선이 뒤집어지는 불상사까지 생길 수 있었다. 즉 얼음을 제거하는 일 자체가 생사가 달린 문제였고, 수병들도 그걸 알고 있었기에 북해의 거친 파도를 몸으로 맞아 가면서 얼음을 각종 연장으로 일일이 깨부숴 함선을 유지했다.
이 공적을 인정받아 그리먀시는 소련에 "친위(Гвардия)" 칭호 제도가 생긴 뒤 1943년 5월 16일에 친위함 칭호를 수여받았다. 북방함대 소속 군함들 중 유일하게 수여받은 것이었으며, 이 기록은 소련이 붕괴할 때까지 깨지지 않았다.[5]
3.3. 대전 후
렌드리스 호위 임무에서 빠진 1943년 이후에도 그리먀시는 계속해서 각종 지상지원과 호위, 적 선단 추적 등의 임무에 투입되었고, 1944년 12월 그동안 함체에 쌓인 손상을 보수하기 위해 몰로토브스크의 402번 공장에 올려진다. 이후의 행적은 확실하게 남겨진 기록이 없다.
3.4. 최후
퇴역 후 1957년에는 OS-5 (ОС-5)로 이름이 바뀌어 실험함이 되었고, 10월 10일, 노바야 제믈랴 주변에서 행해진 핵실험[6] 에 자매함 그로즈니(Грозный)와 라즈야룐니(Разъярённый)와 함께 동원되었다. 그로즈니는 폭심으로부터 240미터, 라즈야룐니는 450미터, 그리고 그리먀시는 650미터 떨어진 곳에 배치되었다. 그로즈니는 폭발로 일어난 파도가 잦아들기 전에 이미 침몰했고, 라즈야룐니는 폭발 4시간 후에 가라앉았지만, 그리먀시는 폭발을 오른쪽으로 받았는데 왼쪽 함수 쪽으로 기운 상태로 떠 있었다. 심지어 일부 시설은 작동 가능했다고. 6시간 뒤 그리먀시는 얕은 물로 예인되어 모래바닥에 올려졌고, 잠수부들의 조사로 함저는 심각하게 손상된 것이 확인되어 자침된 것으로 간주하고 그 자리에 버려졌다.
그리먀시의 함체는 지금도 수면 위로 남아 있어 위성지도로 확인이 가능하다. 구글 어스 위성사진상의 위치. 작은 함은 오르페이급의 자비야카(Забияка)이고, 조금 더 큰 것이 그리먀시. 일단 지금도 이 주변은 러시아가 실험장으로 갖고 있어서 민간인의 접근은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먀시 잔해 사진이 인터넷에 돌지 않는 이유.
역사가 되어 함대에서 사라진 후에도 그리먀시는 소련 해군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수훈함 중 하나로 기억되었으며, 1982년에는 군함 시리즈 우표 중 하나에 올랐고 1996년에는 러시아 해군 300주년을 기념하는 100루블 주화에 프로젝트 7U형 구축함인 "소브라지텔니(Сообразителный)"와 함께 등장했다.
4. 대중매체에서
전함소녀에 의인화되어 등장한다. 그리먀시(전함소녀) 참조.
벽람항로에도 의인화되어 등장한다. 그리먀시(벽람항로) 참조.
월드 오브 워쉽에 가장 먼저 출시된 프리미엄 함선들 중 하나였으며, 최초로 추가된 소련 함선이었다.[7] 월드 오브 워쉽/소련 테크 트리/프리미엄 선박 참조.
[1] 러시아어를 잘 모르는 서방에서는 그레먀시치 (Gremyashchy) 라는 기괴한 독음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щ를 shch로 풀어쓰다 보니 생긴 폐해. 이를 그대로 수입한 일본에서도 구레먀슈치 (グレミャーシュチ), 구레먀시치 (グレミャーシチイ) 등으로 독음이 정형화되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독일어는 원어와 비슷하게 그레먀쉬 (Gremjaschij) 라고 부르고 있다. 강세가 없는 е는 "이" 소리에 가깝고, щ는 현대 러시아어에선 얕은 "샤" 소리에 가깝다.[2] 스탈린은 경계 발령을 금지하고 있었지만 니콜라이 쿠즈네초프 아래 군함들은 쿠즈네초프의 지휘에 따라 발령을 받았다. 실제로 영토가 공격받고 나서야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스탈린은 크게 화를 냈지만 해군의 피해가 타군에 비해 상당히 적었다는 것을 듣고는 칭찬했다고 한다.[3] "고작 1대"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물론 항공기 격추가 주 목표이지만 이 당시의 대공포는 화망을 형성하여 제압하는 효과가 더 컸던데다 수병들의 숙련도도 낮았다. 컴퓨터 따위가 없던 시절임을 감안하자.[4] 안톤 이오시포비치 구린 (Антон Иосифович Гурин). 그리먀시의 첫 함장이었다. 원래 3등함장 (Капитан 3-го ранга, 소령과 동급) 이었으나, 이후 1등함장 (Капитан 1-го ранга, 대령과 동급) 으로 진급하여 1942년 12월 16일부터 북방함대 제1구축대의 지휘를 맡았다.[5] 나머지 함선들은 대부분 적기훈장을 수여받았고, 그 외에도 85명에 달하는 수병들이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6] 32 킬로톤급 핵폭발을 일으켜 지상 건축물과 선박에 끼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목적이었다. 쵸르나야 구바(Чёрная Губа)라는 섬 해안에서 100미터 떨어진 곳에 15미터짜리 탑을 세우고 그 위에 폭탄을 올렸다고 한다.[7] 초창기에는 미국과 일본 테크 트리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