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나제르

 



'''생나제르(Saint-Nazaire)'''
1. 역사
2. 2차 세계 대전
2.1. 채리엇 작전
2.2. 결사 항전
3. 종전 후


1. 역사


프랑스 북서부, 페이드라루아르 레지옹에 속해 있는 항구 도시로 루아르 강 어귀에 위치하고 있다. 낭트의 외항으로 대서양에 직접 나설 수 있는 좋은 위치 때문에 어업과 조선업 분야에서 오랜 전통이 축적되어 왔다.
대규모 촌락은 고대 갈리아인이 건설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코르빌로(Corbilo)라는 지명으로 역사가 시작된다. 코르빌로라는 촌락 이름은 고대 그리스의 지리학자이자 탐험가로 위도 측정법을 처음 고안한 피테아스(Pytheas of Massalia)가 남긴 기록에도 갈리아 해안선을 따라가면서 마실라(Massilia)[1] 다음으로 큰 촌락이라고 분명히 언급되고 있다. 선사 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디시그냑 봉분(Tumulus de Dissignac)이나 그보다 더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고인돌 같은 고대 유적이 남아있는 것으로 유추해보면 골족이 정착하기 전부터 오랜 세월 인류의 생활 터전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생나제르가 역사책에서 처음 언급되는 시기는 중세 시대로, 브리타니아 공국과 브르타뉴 가문의 왕위 계승 전쟁에서 전장이 되었다. 17세기에 이 도시는 위그노의 위협에 노출되어 상당 부분 파괴되었으나 재건되었고, 18세기에는 아귈리옹 공에 의해 바다 쪽에서 공격을 막기 위한 요새가 건설되었다.
해운이 발달한 근대에 들어서서 생나제르는 항만 도시로 발전을 계속했다. 1930년대, 프랑스는 68,000톤급 호화 여객선 SS 노르망디(SS Normandie)의 건조를 위한 새로운 도크와 부두가 건설되었으며, 이후부터 정부로부터 대형 선박을 짓는 조선소로 선정되었다.

2. 2차 세계 대전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해와 한 달 만에 패배를 눈앞에 보게 된 1940년 6월 17일, 생나제르 항구는 영국 원정군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진군해오는 독일군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영국 본토로 철수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큐나드 해운의 여객선 랭커스트리아(RMS Lancastria)는 정원의 6배가 넘는 9,000명이 우격다짐으로 올라타 도버 해협을 건너고 있었으나 루프트바페제30폭격항공단 소속의 융커스 Ju 88 폭격기에게 덜미를 잡혀 3발의 폭탄을 맞고 침몰해 무려 4,000여명의 병력들이 단숨에 익사하고 말았다. 이것은 영국 해운 사상 굴지의 참극이었지만, 윈스턴 처칠 수상은 이 참사를 언론에 숨겼고 대규모 철수 작전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사고 정도로 잊혀졌다. 곧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하자 생나제르 항구는 크릭스마리네의 중요한 근거지가 되었고, 이와 동시에 연합국 측의 전략 목표가 되었다.

독일군은 생나제르를 점령한 후 짧은 기간 동안에 현지 주민을 포함한 많은 인원을 강제동원시켜 유보트를 수용할 수 있는 잠수함 벙커를 건설했다. 이 벙커의 규모는 폭 300 m에 길이 130 m, 높이는 18 m이며 연면적은 39,000 m² (11,798평)이나 된다. 천장은 공습에 견디기 위해 4중 구조에 9미터 두께나 된다. 가장 상단에는 두께 3.5 m의 강화 콘크리트, 그 밑에는 35 cm 두께로 화강암 원석을 깔고 그 아래는 1.7 m의 강화 콘크리트를 또 덧대었다. 가장 아래, 즉 벙커의 천정에 해당되는 층은 두께 1.4 m에 강철 빔으로 보강된 콘크리트를 타설하여 당시 사용되는 모든 항공 폭탄을 견딜 수 있게끔 설계되었다. 14척의 유보트를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이 벙커는 그 견고하기 짝이 없는 구조 때문에 수 차례의 공습을 받아 폐허가 되었으면서도 완전히 철거하기에는 너무 많은 비용이 필요해 현재까지도 도시에 그대로 남겨져 있는데, 오늘날에는 도시를 방문하는 여행자라면 꼭 보게 되는 관광 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독일의 잠수함 기지는 생나제르 외에도 로리앙브레스트, 라로셸에도 있었지만 생나제르가 특별한 이유는 또 있었다.
30년대 건설된 여객선 노르망디를 위한 드라이 독은 당시 서방 최대의 규모였으므로 생나제르는 독일 해군 최대의 군함인 비스마르크급 전함을 수용할 수 있는 유일한 항구였다. 연합군의 목을 죄어오는 유보트 기지이자 독일 해군의 머리가 쉬는 항구 생나제르. 이것이 생나제르가 2차 대전 동안 추축국과 연합국 모두에게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항구가 된 배경이다.

2.1. 채리엇 작전


1942년 3월 28일, 이 항구를 파괴하기 위한 특공대를 편성한 영국 해군은 '''채리엇 작전(Operation Chariot)'''을 발동해 생나제르 조선소에 대한 과감한 육박 공격을 시도했다. 영국 해군은 타운급 구축함 중 하나인 HMS 캠벨타운(HMS Campbeltown)[2]을 자폭함으로 개조했다. 함포대공포, 폭뢰 투사기 같은 필요 없는 무장을 전부 제거하고, 함수에는 4.5톤의 폭약을 실었다. 이렇게 개수한 캠벨타운은 헌트급 구축함(Hunt-class destroyer) 타인데일(HMS Tynedale)과 애더스톤(Atherstone), 그리고 두 척의 고속정으로 꾸려진 엄호부대와 함께 돌입시켜 봉쇄된 항구의 입구를 돌파하고 드라이 독을 파괴하는데 성공했다. 물론 이들이 육박 공격에 성공을 거둔 것은 톰슨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3개 그룹으로 나뉘어 각각 발전기와 대공포, 해안포대를 침묵시킨 코만도 부대의 공도 매우 컸다.
이 기발하고도 용맹과감한 작전으로 비스마르크나 티르피츠가 들어갈 도크는 파괴했지만 잠수함 벙커는 건드리지도 못했다. 따라서 유보트들은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아 여전히 생나제르를 거점으로 대서양에서 무차별 통상 파괴전을 펼쳤고, 이에 연합군은 공군력을 동원해 정기적으로 공습을 가해는 것으로 응수했다. 오폭으로 인한 민간인 사상자를 최소화하기 위해, 미영 공습부대는 생나제르의 발달된 철도망을 이용하는 방안을 고안했다. 1943년 영국과 미국 폭격기들은 3일 후에 소이탄에 의한 대규모 공습이 계획되어 있다고 시민들에게 경고하는 비라를 살포했다. 전단지가 뿌려지고 예고된 대로 3일 후 대공습으로 인해 도시 전체가 연기로 가득 했다. 시민들은 연합군 전단지를 보고 대부분 기차를 타고 교외나 안전한 지역으로 탈출했기 때문에 오폭에 의한 피해자는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도시는 완전히 파괴되어 시민들은 더 이상 돌아갈 집이 없어져버렸고, 유보트 기지를 비롯한 군 시설이 집중된 항만을 제외하면 도시 구획은 종전까지 그대로 방치되었다.


2.2. 결사 항전


1944년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성공을 거두자 프랑스의 여러 도시는 차례 차례로 해방되었지만, 생나제르에 남아있던 독일군은 항복을 거부했다. 마찬가지로 유보트 기지가 있는 라로셸과 로리앙에 있던 독일군도 백기를 올리지 않았다. 도시에 널린 폐허를 엄폐물로 삼고 도사린 독일 육군은 전의를 불태우며 항전을 다짐했지만 연합군 입장에서는 이제 유보트의 손발을 옭아매둔 탓에 전략적 가치를 잃은 돌무더기에 애꿎은 병사들을 진격시켜 피를 흘릴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본국에서 이어지던 보급이 끊긴 독일군들은 전황을 좌우할 능력이 더 이상 없다는 것이 명백했기 때문에, 연합군 최고사령관 아이젠하워 장군은 이 항구들을 포위하는데만 그치고 주력 부대는 독일 본토로 계속 진군하게 했다. 1945년 5월 8일 모든 독일군이 무조건 항복하라는 명령이 전달되었고, 생나제르와 라로셸, 로리앙에서 굶주림에 시달리며 남아있던 독일군들은 항복했다.

3. 종전 후


무너지고 파괴된 생나제르는 전쟁이 끝나고 1940년대 후반부터 현대적이고 미니멀한 스타일의 도시로 재건되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폭격 때문에 철거 비용을 크게 아낄 수 있었다. 독일 해군이 남긴 잠수함 기지는 1945년부터 1948년까지 프랑스 해군 잠수함 부대에 의해 사용되었다. 그런 다음에는 민간에 넘겨져 화학 회사와 조선업체의 소유가 되었다. 2016년부터 프랑스 해군에서 퇴역한 나발급 잠수함 에스파동(S637 Espadon)이 벙커 구획 중 하나에 정박되어 있고 일부 기능은 다시 사용하고 있다. 생나제르의 유명한 관광상품이 된 잠수함 투어는 몇 군데 구역만 제외하면 모든 관광객에게 개발되어 있으며, 가끔은 영화나 뮤직 비디오 촬영지로도 대여된다.
1961년에 66,000톤급 여객선 SS 프랑스(SS France)가 건조된 것을 마지막으로, 콤파그니 제네랄레 트란살아틀랑티크(Compagnie Générale Transatlantique) 해운사는 수에즈 운하의 폐쇄로 바틸루스, 벨라미아, 피에르 기요마트, 프레리알 같은 대형 유조선을 건조하기 시작했다. 1,000,000톤 이상의 초대형 유조선 건조를 위해 새로운 드라이 도크(Basin C)가 계획되었지만, 수에즈 운하가 다시 열리면서 이 계획은 취소되었다.

[1] 현재의 마르세이유 항구[2] 원래는 1차 대전 당시 미 해군이 취역시킨 윅스급 구축함 DD-131 뷰캐넌이었으나 처칠의 구축함 요청에 따라 루즈벨트 대통령이 제공한 50척의 중고 구축함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