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비수사
1. 개요
1978년 부산광역시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인 정효주 유괴 사건, 그 중에서도 1차 유괴 사건에서 모티브를 따 온 영화.
일본에서 2016년 6월 25일과 7월 2일에 각각 시네마트 신주쿠와 신사이바시에 2주간 한정 개봉 했다.
2. 예고편
3. 시놉시스
4. 등장 인물
4.1. 주역
4.2. 조역
4.3. 특별 출연
5. 평가
기존 수사물에서 자주 등장하는 총과 칼 같은 무기, 선혈이 난무 하는 장면 등 자극적인 요소를 거의 배제 하여서 부담 없이 볼 수 있다는 것이 장점 중 하나로 꼽힌다. 곽경택 감독 특유의 한국적 정서의 이해와 표현이 잘 드러난 수작이라는 평이 중론.
6. 사실과 다른 점
- 극중 형사와 도사의 이름은 실제 이름을 그대로 따왔으나, 유괴당한 여자아이와 여자아이가 다니던 학교는 가명을 썼다. 피해자의 신변보호를 위함인 듯.[1]
- 김중산 도사는 부산광역시 출신이지만, 영화에서는 자연스러움을 살리기 위해 배우 유해진이 편한 충청도 사투리로 연기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극 중의 김중산 도사는 충청도 출신인 것으로 나온다.
- 부산에 극비로 차려진 수사본부는 예식장이었으나, 작중 시대배경을 드러내기 위해 극장 지하로 바뀌었다. 70년대 영화 포스터 등이 주변에 널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미술팀이 수고 좀 했다고.
- 서울의 수사본부도 소방서였던 건 맞는데, 영화 속처럼 소방차가 있는 공간은 아니고, 평범한 사무공간 내에 있었다고 한다. 이 경우 미장센을 위한 변경으로, 등장인물들의 대화 장면에서 배경에 보이는 소방차 등의 빨간색으로 긴장감을 조성하기 위해서 바꾸었다고 한다.[2] 비슷하게 미장센을 연출한 장면이 부산 형사들과 서울 형사들의 옷차림. 부산 형사들은 캐주얼하고 후줄근해 보이는, 색도 제각각인 옷차림이지만 서울 형사들은 머리모양이고 옷차림이고 다들 말끔하고, 특히 얼룩 한 점 없는 새하얀 와이셔츠로 통일된 것이 특징이다. 대비를 주기 위해 그렇게 정했다고 한다.
- 서울 형사가 여의도에 방송국이 집결해 무선전파에 혼선이 많다고 공길용 이하 부산 경찰들에게 주의를 주는데, 1978년 당시만 해도 여의도에 방송국이라고는 KBS 뿐이었다.
- 피해자 가족들이 아이가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며 방생을 하는 장면은 실제로 있었던 일인데, 당시 장어를 풀어주었기 때문에 제작진들도 그대로 하려고 했지만 물고기들이 너무 빨리 흩어져버려서 그림이 안 나와 결국 줄돔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 영화 예고편에도 나오는, 김중산이 "해가 뜨고 나서 찾으면 아이를 죽어서 찾게 됩니다. 33일을 넘기면 안 돼요!"하고 소리치는 장면도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갑자기 튀어나와서 다짜고짜 못 알아들을 소리를 치는 바람에 당시 공길용 형사는 깜짝 놀랐다.
- 사건 마지막에 아이가 발견된 곳은 만화방이었으나, 영화에서는 이발소로 나온다. 감독은 이곳의 세트를 매우 마음에 들어했다고 한다.
- 범인이 잡히는 장면에서 아이가 아버지의 동료 아저씨를 못 알아봐서 범인한테 달려가 안기는 장면이 있는데, 실제로 체포 당시 있었던 일에 기반한 장면이었다고 한다. 당시 체포현장에서 피해자는 경찰들에게 "우리 아저씨 왜 잡아가요!"라고 소리쳤다고... 왜냐하면 매석환이 유괴한 동안 아이에게 먹을 것과 옷을 사주는 등 잘 대해주었고, 처음 납치 때 아버지의 친구라고 소개했던 것을 진짜로 믿고 있었을 수도 있다.
7. 여담
- 영화의 주 배경이 부산광역시인만큼 주연 김윤석[3] 을 비롯해 이정은, 윤진하 등 실제 부산광역시 출신 배우들을 대거 캐스팅 했다. 그래서 극 중 등장인물들의 사투리가 비교적 자연스럽다. 단 비교적 자연스럽다는것이지 실제 부산 사람들 입장에서는 어색한건 어쩔 수 없다.
- 공길용 형사가 2010년 경에 제주도로 이사를 했는데 김중산 도사가 '제주도에 있으면 70살 초반에 세상에 이름을 떨칠 일이 생길 것'이라는 예언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곽경택 감독이 공길용 형사 취재를 위해 제주도를 갔을 때 공길용 형사의 연세가 70살 초반이었다. 그 이후 영화가 개봉되며 공 형사의 공로가 빛을 보게 된다.#
- 극 중 김 도사가 꿈에서 범인이 두 명으로 보인다며 혹시 공범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하지만 범인은 한 명이었는데, 이는 영화 엔딩 크레딧 전의 설명에도 나오듯 실제 당사자인 정효주 양이 약 7개월 후 또 납치를 당한 사실을 어렴풋이 알려주는 일종의 맥거핀으로 보인다.
- 정효주양 어머니 인터뷰에 따르면 가족 중 누구도 영화화에 동의해준 적이 없다고 한다. 공길용과 김중산을 제외한 피해자 가족들은 전부 가명으로 나오는 것도 그런 이유인 듯. 기사 '잊힐 권리'를 주장하는 효주 양 가족은 이 영화를 연출한 곽경택 감독을 상대로 자신들의 정신적 피해에 대한 배상을 요구하는 민·형사 소송을 제기하겠다고 했다. 승소할 경우 배상금을 실종·유괴아동 찾기 운동에 기부하고, 영화 상영 수익금도 같은 명목으로 기부하라고 요구할 계획이라고.
- 언론보도로는 1979년 4월 효주 양을 두 번째 납치했던 범인 이원석 씨가 효주 양 집의 기사였다고 보도했으나, "이 씨는 탈영병이었고, 다른 곳에서 트럭운전 일을 했던 사람"으로, 효주 양 집의 운전기사는 납치 유괴와는 아무 관계가 없었고, 지금도 이웃에서 함께 잘 지내고 있다고 한다. 아버지의 성격 역시 전혀 다르다고 한다.
- 36분경에 잠깐 단역으로 등장하는 이비인후과 의사는 배우가 아니라 실제 현직 이비인후과 의사이다. 곽경택 감독의 사촌 형 곽정택 씨가 특별출연했다.
- 김중산이 아이의 어머니와 고모에게 예언해주는 장면에서 방에 있는 부적, 기타 등등 역술가다운 물건들은 실제 김중산 도사의 집에 있는 것들로, 제작진이 잠시 빌려왔다고 한다.
- 김중산이 모래바닥에 나뭇가지로 '所信(소신)'이라고 쓰는 장면이 있는데, 감독이 이걸 한자를 몰라서 못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봐 한글로 쓰는 걸로 바꿀지 말지 고민했었다고 한다.
- 사건 종결 후 공길용의 아들[4] 이 아버지가 영웅으로 나오는 내용의 그림을 그린 장면이 나오는데, 사실 감독이 왼손으로 그린 그림이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