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렌 호들

 


'''글렌 호들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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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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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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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트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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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렌 호들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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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러보기 틀 모음'''
'''팀 수상'''




'''개인 수상'''




'''베스트팀'''
1979-80 · 1981-82 · 1983-84 · 1985-86 · 1986-87


''' 잉글랜드의 축구감독 '''
''' 이름 '''
'''글렌 호들'''
'''Glenn Hoddle'''
''' 출생 '''
1957년 10월 27일 (66세) /
영국 미들섹스 주 헤이스
''' 국적 '''
[image] 잉글랜드
''' 신체 '''
183cm
''' 직업 '''
축구선수(미드필더/ 은퇴)
축구감독
''' 소속 '''
''' 선수 '''
토트넘 홋스퍼 FC (1975~1987)
AS 모나코 (1987~1991)
스윈던 타운 FC (1991~1993)
첼시 FC (1993~1995)
''' 감독 '''
스윈던 타운 FC (1991~1993 / 선수 겸 감독)
첼시 FC (1993~1996 / 선수 겸 감독)
잉글랜드 대표팀 (1996~1999)
사우스햄튼 FC (2000~2001)
토트넘 홋스퍼 FC (2001~2003)
울버햄튼 원더러스 FC (2004~2006)
''' 국가대표 '''
53경기 8골(잉글랜드 / 1979~1988)
1. 개요
2. 선수 시절
2.1. 토트넘 시절
2.2. 모나코 시절
3. 국가대표 경력
4. 감독 시절
4.1. 스윈던 타운 시절
4.2. 첼시 시절
4.3. 잉글랜드 축구 대표팀 시절
4.4. 사우스햄튼 시절
4.5. 토트넘 시절
4.6. 울버햄튼 시절
5. 은퇴 후의 삶
6. 수상
6.1. 선수 시절
6.2. 감독 시절
6.3. 개인


1. 개요


잉글랜드축구선수 출신 감독. 2001년부터 2003년까지 울버햄튼 원더러스 FC 감독을 맡았다.
1970~80년대 토트넘과 모나코의 레전드. 토트넘 역사상 최고의 선수였다. 잉글랜드 선수로서는 드물게도 화려한 개인기를 선보였고 토트넘이 국제 대회에서 훌륭한 성적을 거두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선수 시절 개인기로 먹고 살았는데도 감독을 맡은 뒤에는 잉글랜드가 오랫동안 추구하는 킥 앤 러시 전술을 그대로 사용한 한계가 있었고 치명적인 실언을 하는 바람에 경력에 오점을 찍고 말았다. 현재는 방송에 종종 출연하여 축구 평론가로서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울버햄튼 시절 설기현을 지도한 것으로 유명하다.

2. 선수 시절



2.1. 토트넘 시절


[image]

호들은 런던의 구역 중 하나인 헤이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왓포드의 유스팀에 입단하여 아카데미를 이수했다. 그는 학교팀에서 45경기에 출장했는데, 그를 지켜본 한 스카우터는 그가 개처럼 경기장 전역을 활개치는 것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스카우터는 곧바로 소속팀에 호들을 영입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이 스카우터가 소속된 팀은 다름아닌 토트넘 핫스퍼였다. 이리하여 1974년 4월, 호들은 17세의 나이에 토트넘에 입단했다.
호들은 10대 초반에 겪어야 했던 무릎 문제를 성공적으로 극복하고 1975년 8월 노리치 시티와의 경기에서 교체 출전함으로서 데뷔전을 치뤘다. 이날 토트넘은 2:2 무승부를 거두었다. 또한 1976년 2월에는 스토크시티 전에 선발 출전하여 훗날 잉글랜드의 레전드가 될 피터 쉴튼 골키퍼를 개인기로 농락하며 골을 넣어 세간의 주목을 끌었다.
이후 토트넘은 1976-77시즌에 강등되고 말았지만, 호들은 자신의 진가를 마음껏 발산하며 팬들의 마음을 달랠 수 있었다. 토트넘은 1977-78 시즌에 승격을 달성했는데, 호들은 리그 41경기 동안 12골을 기록하며 팀의 핵심 선수로 거듭났다. 호들은 이 활약으로 올해의 영 플레이어 상을 수상했다. 1981년, 호들은 FA컵에서 9경기 출장하여 2골을 기록하였고 비록 공격포인트로 기록되진 않았지만 절묘한 킬패스를 배급하여 골을 만들어내고 탁월한 개인기로 상대 수비수들을 농락하는 등 훌륭한 활약을 펼쳐 토트넘이 구단 역사상 여섯 번째로 FA컵을 우승하는데 기여했다.
이듬해인 1981-82 시즌, 호들은 FA컵에서 7경기 3골을 기록하며 팀의 FA컵 2연패에 견인했고 리그컵에서도 팀을 결승전까지 진출시켰지만 팀은 리버풀에게 3:1로 패하고 말았다. 또한 UEFA 위너스컵에서는 탁월한 경기력을 과시하며 팀을 4강까지 진출시켰다. 호들은 이후 3시즌 동안 부상에 시달려 전체 126 리그 경기 중 76경기만 출장했다. 하지만 그는 출전할 때마다 탁월한 경기력을 선보여 팀의 호성적을 이끌었고 1983-84 유로파 대회에서도 훌륭한 활약을 선보였고 팀을 결승전까지 올려놓았다. 특히 1983년 10월 페예노르트를 상대로 훌륭한 경기력을 선보이며 6:2 완승을 이끌어낸 것은 그의 토트넘 생활 중 최고라 할만 했다. 그러나 그는 정작 부상 때문에 결승전에 참여하지 못했고 동료들이 유로파 대회에서 우승하고 기뻐하는 것을 멀리서 지켜봐야 했다.
1984-85 시즌, 호들은 팀을 리그 3위로 끌어올렸고 UEFA 대회에서는 4강까지 올랐으며 FA컵 준우승도 차지했다. 이렇듯 호들은 1975년부터 1987년까지 377경기 동안 88골을 기록했다. 이후 호들은 자신의 장기인 개인기를 해외에 선보이고 싶었고 헤이젤 참사로 유럽 대회 출전이 금지된 잉글랜드를 벗어나 유럽 대회에서 활약하고자 1987년 모나코로 이적했다.

2.2. 모나코 시절


[image]
호들은 모나코로 이적한 후 팀 동료인 조지 웨아와 환상적인 호흡을 맞춰 1987-88 시즌 리그앙 우승을 달성했다. 이로서 호들은 프로 데뷔 이래 처음으로 리그 우승컵을 차지했다. 그는 1988-89 시즌엔 모나코를 유로피안 컵 4강까지 진출시키는 등 훌륭한 활약을 선보였고 프랑스 축구 협회가 선정한 '베스트 외국인선수상'을 수상했다. 당시 모나코의 감독이었던 아르센 벵거는 이렇게 대단한 선수가 잉글랜드에서 그다지 높게 평가받지 못했다는 것에 놀라워했다. 그러나 모나코에서 절정의 기량을 선보이던 호들은 1990년 11월 무릎 부상을 입어 시즌아웃되고 말았다. 그후 호들은 1990-91 시즌을 통째로 날려버리고 계약이 만료되자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후 호들은 선수 생활을 사실상 정리하고 스윈든 타운에서 선수 겸 감독을 맡아 감독 인생을 시작했다.

3. 국가대표 경력


1979년 11월 2-0으로 승리했던 불가리아 전에서 첫 골을 넣으며 대표팀 신고식을 마쳤다. 그는 1980년 5월 31일 3번째 출전 경기인 오스트레일리아와의 평가전에서 두번째 골을 기록했고 5번째 출전 경기인 1981년 3월 25일 스페인과의 친선경기에서 3번째 골을 기록했다. 그는 국가대표 데뷔 이후 3년만인 1982년 4월 27일 웨일스와의 경기에 국가대표로서 10경기 출전을 달성했고 이날 네번째 골을 기록했다.
호들은 1982년 월드컵과 1986년 월드컵 스쿼드에 모두 포함되었다. 하지만 1982년 월드컵에서는 단 한경기도 뛰지 못했고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8강전에서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 출전하여 마라도나를 대인마크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마라도나는 손으로(...) 한 골, 수비수 6명을 제친 후 발로 넣은 한 골 등 총 2골을 꽃아넣으며 잉글랜드를 침몰시켰다.
호들은 1980년과 1988년 유로 대회에도 포함되었고, 유로 1988에서는 선발로 나오기도 했다. 그는 국가대표로서 53경기에 출전하여 8골을 기록했고 1986년 4월 23일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스코틀랜드를 상대로 마지막 골을 기록하여 팀의 2:1 승리를 이끌어낸 후 스윈던 타운으로 건너간다.

4. 감독 시절



4.1. 스윈던 타운 시절


[image]
호들이 감독 커리어를 처음으로 시작한 스윈든 타운은 그가 올 무렵엔 다 망해가는 구단이었다. 당시 스윈든은 1989-90 시즌에 재정 관리를 엉망으로 하는 바람에 1부 리그에서 강등되고 말았고 갈수록 재정 상황이 심각해지자 주요 선수들을 모조리 팔아치웠다. 그 바람에 스윈든은 3부리그로 강등될 위기에 몰려 있었다. 호들은 이런 팀을 맡아서 스윈든의 강등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후 1991-92 시즌, 호들은 리그 22경기에 출전하여 선수들을 진두지휘했고 최종 순위 9위를 기록하며 망해가던 팀의 분위기를 전환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1992-93 시즌, 호들은 리그 45경기를 모두 뛰는 열정을 발휘하며 스윈든을 승격 플레이오프에 진출시켰고 결승전에서 레스터 시티를 상대로 친히 첫번째 골을 기록하는 활약을 선보이며 4:3으로 격파하고 팀을 EPL로 승격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36세의 젊은 감독은 당대 잉글랜드 최고의 젊은 매니저로 손꼽혔고 많은 빅클럽들이 앞다퉈 그를 섭외하려고 애썼다. 그러다가 1993년 6월, 호들은 첼시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첼시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4.2. 첼시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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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들은 첼시에서도 1993년부터 1995년까지 선수 겸 감독 생활을 하다가 1995-96 시즌엔 선수 생활을 정리하고 감독으로서의 임무에 전념했다. 그는 첼시에서의 첫번째 시즌에 FA컵 결승전까지 진출했지만 맨유에게 4:0으로 패하고 준우승에 그쳤다. 하지만 맨유는 그해 리그 우승을 차지해 챔피언스리그에 진출했고, 그 덕분에 유로파 대회 진출권은 준우승팀인 첼시에게 전달되었다. 이후 첼시는 1994-95 시즌에 유로파 대회에서 4강까지 진출했고 전력이 한수 아래로 여겨지던 레알 사라고사와 맞붙었지만 홈원정 합계 1:0으로 패하고 말았다. 호들은 1995-96 시즌에 FA컵 준결승에 진출했다. 하지만 첼시는 이 무렵 리그에서는 11위에 그쳤고 호들은 리그 부진의 책임을 지고 상호협의 하에 팀을 떠났다.

4.3. 잉글랜드 축구 대표팀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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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들은 1996년 5월 2일,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그는 잉글랜드를 1998 월드컵에 진출시키는 임무를 떠맡았다. 그는 첫 경기에서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로 원정가서 이탈리아와 0:0 무승부를 거둬 비교적 좋은 출발을 보였다. 그러나 그는 당대 잉글랜드 최고의 테크니션으로 손꼽히던 폴 개스코인을 스쿼드에서 제외시키는 조치를 단행하는 바람에 비난을 한 몸에 받았다. 그래도 잉글랜드는 월드컵에 진출할 수 있었고 1998 월드컵에서 16강에 진출했지만, 아르헨티나에게 패하고 말았다. 경기 패배 직후 호들 감독과의 불화설에 시달리던(이라기보다는 당시 영국 국민들은 호들 감독이 일방적으로 미워하여 기용하고 있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폴 개스코인이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본 영국 국민들은 분노했고[1], 호들 감독에 대한 여론은 갈수록 나빠졌다. 이후 호들은 유로 2000 대회 지역 예선에서 실망스러운 경기력을 보였다. 사람들은 킥 앤 러시만 고집하고 개인기를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게 만드는 그의 전술이 시대착오적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던 1999년 1월 30일, 호들은 영국 언론인 타임스지의 기자 맷 디킨슨과 인터뷰를 가졌다. 그는 대표팀의 경기력을 비판하는 평론가들로부터 자신을 변호하려고 애썼다. 그러던 중 그는 그만 해서는 안 되는 발언을 하고 말았다.

영혼이 새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수천년 동안 돌아오는 것이라는 내 신념은 지난 8년 또는 9년간 강화되었다. 주변에 너무 많은 부당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당신과 나는 선천적으로 두 팔과 두 다리, 그리고 그럴듯한 두뇌가 주어졌다. 몇몇 사람들은 이러한 것들 없이 태어났는데 '''이는 전생에 지은 과오 때문이다'''. 업보는 다른 생애로 계속 전해진다. 이는 단지 신체적 결함이 있는 사람들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당신이 뿌린 만큼, 당신은 거두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그는 장애인들은 전생에 지은 죄로 인해 그렇게 된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2] 호들의 이러한 발언은 당연히 수많은 사람들의 지탄을 받았다. 심지어 영국 수상이었던 토니 블레어까지 그를 맹렬히 비난했다. 더 가디언에서는 호들의 이 발언을 가지고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지성을 갖고 있는지 상상도 할 수 없다'''고 드립쳤다. BBC의 여론 조사 결과, 90%에 달하는 응답자들은 호들이 잉글랜드 감독 직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부 사람들은 그는 종교적인 신념을 밝힐 권리가 있으며 그를 경질하는 것은 종교적 탄압을 가하는 짓이라고 주장했다.
호들은 이에 대해 자신은 사임할 생각이 없으며 자신의 말이 잘못 해석되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자신은 장애인을 돕는 기관에 기부한 적이 있음을 강조하며 자신은 결코 장애인들을 모욕할 생각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1999년 2월 2일, 잉글랜드 축구협회는 호들을 해고했다. 이 결정은 장애인 협회의 환영을 받았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은 호들이 마녀사냥에 당한 것이며 그의 경질은 영국의 관용과 발언의 자유가 훼손된 슬픈 일이라고 주장했다. 호들은 장애인 단체에 연일 사과의 뜻을 밝히고 자신은 결코 그들을 모욕할 생각이 없었다고 밝혔다. 이후 세월이 지나 그에게 씌워진 '장애인 차별주의자'라는 꼬리표는 사라졌지만, 그의 명예는 다시는 회복되지 못했다.

4.4. 사우스햄튼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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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들은 2000년 여름 사우스햄튼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당시 사우스햄튼은 전임 감독인 데이브 존스가 아동을 학대한 혐의로 경찰에 소환되는 바람에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나중에 존스가 아동을 학대한 일이 없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존스는 결국 사우스햄튼으로 복귀하지 못했고 호들은 계속 사우스햄튼의 감독으로 일했다. 그는 사우스햄튼이 프리미어리그에 잔류하는데 기여했고 성적을 10위로 고정시켰다. 그러다가 2001년 3월, 그는 토트넘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4.5. 토트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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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토트넘은 실망스런 부진에 휩싸여 있었다. 토트넘은 1990년 이래 2001년 호들이 부임할 때까지 단 한번도 5위 안에 들지 못했고 단지 1991년에 FA컵 우승을 차지하고 1999년에 리그컵 우승을 차지한 것 외에는 별다른 업적을 세우지 못했다.
그는 공격진 보강에 주력해 핵심 선수들의 능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애썼고 그결과 첫 시즌에는 팀 성적이 좋아졌고 FA컵 4강까지 진출했지만 아스날에게 2:1로 패하고 말았다. 2002년 2월, 토트넘은 첼시를 5:1로 격파하고 리그컵 결승전에 진출했지만 블랙번 로버스에게 2:1로 패하고 말았다. 한편 리그에서는 지난 시즌과는 달리 부진에 휩싸였고 결국 토트넘은 11위에 그치고 말았다. 2002-03 시즌, 토트넘은 좋은 경기력을 보여줬고 호들은 2002년 8월 리그 1위를 기록하여 이달의 감독에 선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수비가 부진해 얼마 안가 DTD 행보를 보여 62골을 내줬고, 결국 10위로 마무리했다. 결국 호들은 2003년 9월 즈음 팀이 부진에 빠지자 안 그래도 그의 킥 앤 러시 전술에 불만을 품어왔던 보드진에 의해 경질되었다.

4.6. 울버햄튼 시절


[image]
2004년 12월 7일, 호들은 챔피언십 구단인 울버햄튼 원더러스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울버햄튼은 호들 부임 이후 25경기 동안 한 번만 패했지만, 15경기를 비기는 바람에(...) 승격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 못했다. 이후 2005-06 시즌을 맞이할 무렵, 전문가들은 울버햄튼이 6위 안에 들어서 최소 승격 플레이오프를 치를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그러나 그들은 2005-06 시즌에 고작 50골을 기록하여 빈곤한 공격력을 보였고 결국 승격 플레이오프를 치를 수 있는 6위와 승점 8점차인 7위를 기록하며 승격에 실패했다. 호들은 왓포드와의 시즌 마지막 홈 경기에서 팬들의 야유를 받았다. 보드진은 호들을 계속 신임했지만 그는 2006년 6월 1일 자진해서 감독직을 내려놓았다. 그가 울버햄튼에서 집권하던 2시즌 동안, 울버햄튼은 76경기 중 34경기를 비겼다.(...)

5. 은퇴 후의 삶


2008년 1월, 호들은 스페인에 글렌 호들 아카데미를 설립했다. 이 아카데미의 목적은 어린 선수들이 프로 선수로 자라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었다. 현재 왓포드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케치 안야가 호들이 설립한 이 아카데미가 처음으로 배출한 선수다. 한편 호들은 자신이 감독 제의를 26번이나 받았지만 아카데미가 스스로 운영할 때까지 감독에 복귀할 생각이 없다고 밝혔다.
2014년 4월, 호들은 당시 토트넘의 감독이었던 안드레 빌라스보아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나는 다니엘 레비와 그의 클럽에 대해 대화를 가졌다. 보아스는 약간의 어드바이스를 원했고 건전한 보드진을 원했다.

나는 "만약 당신이 시즌이 끝날때까지 나에게 그 임무를 맡긴다면 할 의향이 있다. 나는 그럴 준비가 되어있다."라고 말했다.

나는 토트넘 이외의 다른 구단과 계약할 생각이 없다. 이건 단지 내 DNA다. 나는 다른 구단들도 정말 좋아하지만 나는 8살 때부터 토트넘 서포터였고 그 결과 내 피엔 토트넘의 그것이 흐르고 있다.

하지만 그는 결국 토트넘으로 복귀하지 못했고 2014년 8월, QPR해리 레드냅 감독의 부름을 받고 1군 코치로 부임했다. 하지만 2015년 2월 3일, 레드넵이 사임하자 호들 또한 클럽을 떠났다. 이후 그는 스카이 스포츠의 축구 평론가가 되어 방송계에서 활동하고 있다.
2018년 10월 27일 (현지), BT Sport 스튜디에서 녹화를 준비하던 중 쓰러져서 '''위독한 상태로''' 입원했다고 한다. 다행히 호전중이라고. 하지만 같은 날 레스터 시티 구단주도 불의의 사고를 당하면서 축구계에 충격을 선사하는 중.

6. 수상



6.1. 선수 시절


  • 토트넘 핫스퍼

  • 유로파 우승: 1984년
  • FA컵 우승: 1981년, 1982년
  • 커뮤니티 실드 우승: 1981년
  • 커뮤니티 실드 준우승: 1982년
  • AS 모나코
  • 리그앙 우승: 1988년
  • 프랑스컵 우승: 1991년

6.2. 감독 시절


  • 스윈든 타운

  • 챔피언십 승격 플레이오프 우승: 1993년
  • 첼시

  • FA컵 준우승: 1994년

6.3. 개인


  • 올해의 영 플레이어 선정: 1980년
  • 2부리그 올해의 팀 선정: 1978년
  • 1부리그 올해의 팀 선정: 1980년, 1982년, 1984년, 1986년, 1987년
  • 리그앙 올해의 외국인 선수 선정: 1988년
  • 잉글랜드 명예의 전당 헌액: 2007년
[1] 다만, 개스코인은 평소 잦은 음주를 포함한 자기관리 실패도 있었음도 고려해야 한다.[2] 실제로 호들이 저 말을 한 건 카르마를 설명하기 위해 나온 예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