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쉴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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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잉글랜드의 前 축구선수. 포지션은 골키퍼였다. 고든 뱅크스와 함께 잉글랜드 역대 최고의 골키퍼로 손꼽히는 선수로, '''축구 역사상 가장 많은 공식 경기에 출전한 선수이다.'''[4] 또한, 이스트미들랜즈 라이벌 3팀 팬들 모두에게 존경받는 몇 안되는 선수 중 한명이다.
2. 클럽 경력
레스터 출생으로 레스터 시티 FC의 서포터였다. 레스터 시티의 유스 팀에 입단했을 때 팀에는 고든 뱅크스라는 레전드 골키퍼가 있었고 쉴튼은 그를 동경하며 성장했다. 1965-66 시즌 막판, 에버튼 FC와의 경기에서 프로 데뷔전을 치렀고 1966-67 시즌에는 뱅크스의 서브로 4경기에 출장했다.
시즌이 끝나고 고든 뱅크스가 스토크 시티 FC로 이적하자 쉴튼은 약관의 나이가 되기 전에 레스터 시티의 주전 골키퍼가 되었고 그 시즌 사우스햄튼 원정에서 장거리 골을 기록하기도 했다. 1968-69 시즌에는 FA컵 결승전에 진출하기도 했으나 맨체스터 시티 FC의 닐 영에게 골을 얻어맞고 석패했다. 리그에서는 22개 팀 중 21위로 강등당했다.
쉴튼은 팀에 잔류했고 2시즌 만인 1970-71 시즌 2부 리그에서 우승하며 다시 1부 리그로 승격했다.
1974년, 쉴튼은 뱅크스가 그랬던 것처럼 스토크 시티로 이적한다. 이적 첫 시즌 쉴튼은 리그 25경기에 나섰으며 팀은 리그 5위를 기록했다. 1975-76 시즌에는 리그 전경기에 출장했으나 스토크 시티의 경기장이었던 빅토리아 그라운드가 태풍 피해를 입어[5] 이를 보수하기 위해 여러 선수를 내보내야 할 처지가 되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가 쉴튼의 이적료를 합의했으나 주급에서 이견이 있어 결렬되었고, 쉴튼은 1시즌을 더 뛴다. 스토크 시티는 2부 리그로 강등당했고, 쉴튼은 승격 팀인 노팅엄 포레스트 FC로 이적했다.
노팅엄 포레스트는 브라이언 클러프의 지도하에 막 승격한 클럽이었는데, 쉴튼의 영입은 그야말로 신의 한 수였다. 첫 시즌부터 37경기에 나서 18골만을 허용한 쉴튼의 맹활약에 힘입어 노팅엄은 충격적인 우승을 달성했고, 리그 컵에서도 우승했다. 노팅엄에서의 2번째 시즌인 1978-79 시즌에는 리그 준우승과 리그 컵 우승, 그리고 유러피언 컵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1979-80 시즌에는 함부르크 SV를 꺾고 유러피언컵 2연패를 달성했고 유러피언 슈퍼컵에서도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쉴튼은 도박 중독에 빠졌고 노팅엄은 타이틀 수집에 실패한다. 게다가 쉴튼은 음주 운전으로 벌금을 무는 등 구설수에 휘말리며 분위기를 타개할 필요가 있었고, 아스날 FC 등의 관심이 있었으나 1982년 사우스햄튼 FC로 이적한다.
쉴튼은 사우스햄튼에서 1983-84 시즌 리그 준우승에 기여하는 등 쇄신에 성공했다. 쉴튼은 1987년 더비 카운티 FC로 이적했고 1992년 플리머스 아가일 FC의 감독 겸 선수가 되면서 사실상 은퇴 상태가 되었다. 1994년 이후 윔블던, 볼튼, 코벤트리 시티 등에서 플레잉 코치로 활동했고 1996-97 시즌 레이튼 오리엔트 FC에서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3. 국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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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부터 1990년까지 국가대표로 뛰었으며, 125경기로 잉글랜드 역사상 최다 출장 기록을 보유한 선수이다. 동독을 상대로 A매치 데뷔전을 치렀으며, 이른 나이에 고든 뱅크스의 서브 골키퍼 역할을 맡게 되었다. 1972년 뱅크스가 교통사고로 국가대표에서 은퇴하자 레이 클레멘스와 경쟁 체제를 형성했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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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서독 월드컵 예선 최종전에서 저지른 실수는 굉장히 유명한데, 폴란드전에서 공을 흘리며 어이없는 선제골을 내줬다. 쉴튼은 자서전에서 이 실책을 20년 동안 대표팀에서 저지른 유일한 실책이라고 말했다.[7] 1970년대 잉글랜드 대표팀은 암흑기였고 쉴튼의 메이저 대회 데뷔는 UEFA 유로 1980이었다. 그러나 레이 클레멘스에게 밀려 이탈리아전을 제외하곤 출전하기 못했다.
노팅엄에서의 성공으로 쉴튼은 클레멘스를 완전히 밀어내고 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 주전 골키퍼로 출전했다. UEFA 유로 1984에는 잉글랜드 자체가 예선에서 탈락했고 쉴튼은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 출전했다. 그리고 8강 아르헨티나전에서 디에고 마라도나에게 월드컵 역사에 남을 2골[8] 을 허용하며 패배했다. UEFA 유로 1988에서는 A매치 100경기 출전 기록을 달성하였다. 그러나 잉글랜드는 이 대회에서 아일랜드의 레이 휴튼에게 결승골을 허용하고 네덜란드의 마르코 판바스턴에게 해트트릭을 얻어맞는 등 갖은 굴욕을 맛보며 3전 3패로 탈락했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주전 골키퍼로 활약했으며, 잉글랜드의 4강 진출에 기여했다. 4강 서독전에서는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 끝에 탈락했고[9] 3·4위전 이탈리아전에서는 어이없는 실책으로 로베르토 바조에게 선제골을 내주는 굴욕을 당했다. 이 대회를 끝으로 쉴튼은 국가대표에서 은퇴했다.
4. 플레이 스타일
뛰어난 반사 신경과 위치 선정을 기반으로 엄청난 슈퍼 세이브를 많이 보여 주었다. 이와 같이 훌륭한 선방 능력을 갖췄을 뿐 아니라 발기술도 좋았다.
[1] 1990년 수훈, 4등급 대영제국 훈장 Officer of Order of the British Empire[2] 여성 이름으로 더 잘 쓰이는 이름들도 원래는 '''남성''' 이름인 것들이 많다- 레슬리, 켈시, 애슐리, 린지, 테일러 등이 대표적인 예.[3]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역사상 최다 출장자.[4] 프로 경력만 30년이며 50세가 거의 다 될 때까지 현역 생활을 지속했다. 소속팀에서 1249경기, 국가대표팀에서 125경기에 출장해 총 '''1374경기'''를 소화했다.[5] 여담으로 EPL을 자주 봤다면 알겠지만, 스토크 시티의 경기장은 강풍으로 유명하다.[6] 레이 클레멘스도 대단한 월드클래스 골키퍼였는데, 역사상 최고의 팀 중 하나로 꼽히는 1970년대 리버풀 FC의 수문장이었다.[7] 하지만 밑에서 보듯이 몇 개 더 있다(...).[8] 흔히 축구 역사상 최악의 골과 최고의 골이라고도 표현한다.[9] 경기가 120분의 혈투 끝에 무승부로 마감되자,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피터 쉴튼을 보유한 잉글랜드의 우세를 점쳤으나 당시 신인이었던 서독의 골키퍼 보도 일그너는 1개를 선방했고 쉴튼은 1개도 막지 못했다. 물론 당시 서독 키커들의 킥이 대부분 정확하고 날카로웠다.
분류
- 1949년 출생
- 잉글랜드의 축구선수
- 골키퍼
- 잉글랜드의 축구감독
- 1966년 데뷔
- 1997년 은퇴
- 레스터 시티 FC/은퇴, 이적
- 스토크 시티 FC/은퇴, 이적
- 노팅엄 포레스트 FC/은퇴, 이적
- 사우스햄튼 FC/은퇴, 이적
- 더비 카운티 FC/은퇴, 이적
- 윔블던 FC/은퇴, 이적
- 볼턴 원더러스 FC/은퇴, 이적
- 코번트리 시티 FC/은퇴, 이적
-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은퇴, 이적
- 레이턴 오리엔트 FC/은퇴, 이적
- 잉글랜드의 FIFA 월드컵 참가 선수
- 1982 FIFA 월드컵 스페인 참가 선수
-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 참가 선수
-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 참가 선수
- UEFA 유로 1980 참가 선수
- UEFA 유로 1988 참가 선수
- FIFA 센추리 클럽 가입 선수
- 득점 기록이 있는 골키퍼
- 대영제국 훈장 4등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