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5고지-406고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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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강원도 화천군 칠성전망대 인근에 있는 전투 상황도.
출처: 국가보훈처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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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원은 425고지, 우측은 406고지 칠성전망대에서 바라본 두 고지들 - 출처
1953년 7월 20일[1] 강원 철원군 원남면 일대에서 제7보병사단 8연대 1대대가 425고지에서, 그리고 3연대 2대대가 406고지에서 중공군 135사단과 180사단을 맞이해 4일간 벌인 국군 한정[2] 한국전쟁의 마지막 전투.
참고로 425고지 쪽이 워낙 치열했기에 매체에서는 보통 425고지 쪽만 다루고 명칭도 '425고지 전투'로만 부르지만, 406고지 역시 휴전선을 정하는데 중요한 건 마찬가지였다.
2. 전투 전 상황
정전 협정이 임박하자 김일성은 화천 수력발전소를 절대 넘겨줄 수 없다며 탈환[3] 에 혈안이 돼 있었고, 이에 중공군도 15개 사단을 2군단 전면에 투입하는 7.13 총공세에 돌입해 우선 금성 전투를 벌여 금성천 북쪽을 손에 넣었다.
한편 이승만 대통령 역시 남한 전력 수요의 30% 가량을 생산할 수 있는 화천발전소를 절대 사수하라 명령하고는 7월 19일 2군단 사령부를 방문해 독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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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그리고 전투의 무대가 된 425 고지와 406 고지는 '''주변 지형과 비교하면''' 거의 나즈막한 언덕이나 다름없어 우주방어 수준의 진지공사와 화력을 준비하지 않는 한 순식간에 돌파, 피탈당하기 딱 좋은 곳이라 방어에 적합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는 서쪽의 602 고지와 연계된 8연대의 금성천 (별우지구) 주 방어선의 일부였기에 만약 여기를 잃을 경우 방어선이 붕괴돼 군사분계선이 화천발전소가 있는 파로호까지 밀려나거나[4] 심할 경우 화천발전소를 포기해야 했을 것이다.
7월 19일 밤 11시, 국군 7사단 3연대는 8사단과 임무교대했고, 이 과정에서 8사단 출신 이규학[5] 대위의 6중대가 406고지로 이동했다.
한편 8연대도 11사단 13연대와 임무교대 후 김한준 대위의 1중대가 425 고지로 이동해 인수인계 및 진지공사를 시작했다.
3. 425 고지 전투 (7.20 ~ 7.22)
참고 자료1 참고 자료2
7월 20일 밤 10시 진지공사가 끝나고 대략 30여분 뒤 적의 공격준비사격으로 보이는 포화가 30분간 이어졌고, 이에 8연대 1중대 장병들은 자신들이 파놓은 참호 안으로 뛰어들어 견뎌냈다. 그 뒤 3개 중대 혹은 대대급 1파가 사방[6] 에서 몰려왔고, 이에 1대대장은 연대장에게 보고하는 한편, 고지 위로 조명탄을 쏘아 피아 식별이 가능하도록 지시한다. 그리고는 포병들[7] 에게 차단사격[8] 지시를 내려 적들을 패주시킨다.
7월 21일 새벽 2시 15분경 중공군 2파가 몰려왔는데, 이번엔 1중대의 425고지와 인접 2중대 능선 사이 협곡으로 침투해 425 고지 앞마당[9] 인 돌출고지에 수류탄을 마구잡이로 던져가며 주 진지 20~50야드 앞까지 접근해왔다. 이에 1중대장 김한준 대위는 2소대와 각지의 박격포, 중화기반들의 화력을 협곡으로 집중시키는 한편, 중대본부 6,7명과 함께 협곡의 중공군과 백병전을 벌이는 2소대를 지원하며 난전을 펼치다 정신을 잃게 되지만, 남은 중대원들의 분투에 의해 새벽 4시경 격퇴하는데 성공한다.
7월 22일 자정, 공격준비사격과 함께 중공군 3파가 몰려왔고, 이에 1대대장은 화기중대에게 조명탄 발사 지시 및 1,2 중대에게 최후 저지사격 지시를 내린다. 그러나 중공군들이 돌출고지 정상을 향해 맹렬하게 기어올라 백병전을 벌이자, 일단 그곳의 2소대를 철수시킨 뒤 돌출고지 진지에 TOT 진내사격을 지시해 적들을 우왕좌왕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이들의 기세는 꺾이지 않아 새벽 4시 50분경에는 주 진지에서도 백병전이 치열하게 전개됐고, 그렇게 피말리는 40분이 경과된 5시 30분 경 적들이 패주했고, 6시경엔 돌출고지까지 다시 확보했다.
하지만 적들은 포기하지 않고 이번엔 3연대 6중대의 406 고지를 노리기 시작했다.
4. 406 고지 전투 (7.23 ~ 7.24)
7월 23일 밤 10시, 406고지의 3연대 6중대가 고지로 올라오는 중공군 소대를 상대로 쟁탈전을 벌여 격퇴했다.
7월 24일 오전 3시 10분, 공격준비사격 후 중공군 대대 병력이 후속 공세를 펼쳤고, 이 과정에서 이규학 6중대장이 중공군 포격에 전사하고 만다.[10]
오전 4시경 우측의 1소대 진지가 피탈당했고, 나머지 소대들도 위태로웠다. 그리고 오전 4시 30분, 버티기 힘들어진 6중대는 후사면에 집결해 병력을 수습한 뒤 7중대의 엄호 속에 철수했다.
오전 5시경 6, 7중대의 엄호 속에 1대대 2중대가 탈환을 개시했는데, 그나마 다행히 일출이 시작되면서 포격 지원이 용이해졌고 무엇보다 중공군의 추가 증원도 없었기에 격퇴할 수 있었다.
5. 그리고 휴전까지... (7.24 ~ 7.27)
406고지를 끝으로 정전 협정 때까지 이렇다 할 공세는 없었으나, 정전 협정 과정에서 군사분계선이 두 고지 한가운데를 가로지르게 됐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이에 장병들은 탄식과 분노의 눈물을 흘리며 내려와야 했다고 한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 승리로 인해 휴전선이 35km나 끌어올려졌고, 댐을 포함한 파로호를 온전히 우리 땅으로 지켜낼 수 있었기에 난전 중 사망한 160여명의 죽음이 헛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6. 여담
- 이영선 국방일보 기자에 따르면 영화 고지전은 이 전투를 모티브로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11] 로 상당 부분이 각색되었는데, 일례로 악어중대는 3연대 1중대이나 국군에 존재하지 않는 10사단 예속이다. 또한 중공군 대신 북한군을 자주 상대한다. 게다가 현실에선 악착같이 사수하다 정전 협정 결과에 피눈물을 쏟으며 내려와야 했으나, 영화에선 정전 협정 때 한 명을 빼면 모두 사망한다.
- 이 전투의 주역인 8연대 1중대장 김한준 대위는 1947년 국방경비대에 입대한 뒤, 부사관이 되어 3연대 10중대의 행정과 보급을 담당하게 되었으며 여순 사건 진압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후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맞서 싸우나 6월 30일 허벅지를 관통당해 제3육군병원으로 후송된다. 이후 8연대로 와 이승만 대통령이 지시한 평양 전투[12] 에 참여한 뒤 평안남도 개천 비호산에서 중공군과 11월 내내 격전한다.(개천-비호산 전투) 이 과정에서 지휘 능력을 인정받아 1950년 11월 15일 소위로 현지임관한다.[13]
그리고 다음 해인 51년 1월엔 영월지구 전투의 적 병참선 차단작전에 참가한다. 하지만 5월 국군의 6.25 내 최대의 흑역사인 현리 전투(...)에서 포로로 잡히는 수모를 겪게 되는데, 북송되기 전인 6월 25일 다른 포로들과 함께 미 24사단 지역으로 탈출한다. 이후 원대복귀해 1대대 작전교육 담당으로 있다 양구 백석산 전투[14] 에서 1중대장이 전사하자 그 후임으로 1중대를 지휘한다. 이후 6월에 벌어진 M-1고지 전투에선 938 (선우)고지 쪽을 맡았으며, 7월에 이 425고지를 인계받아 전투를 하게 것이다.
그 뒤 정전 협정이 채결되고 몇 달이 지난 53년 12월, 김 대위와 용사 9명은 경무대로 초청받아 태극무공훈장을 수여받았으며, 56년 대위로 예편한 뒤 2012년 4월 노환으로 별세했다. 이에 육군은 육군장 후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해 그의 공적을 기렸다.#
그리고 다음 해인 51년 1월엔 영월지구 전투의 적 병참선 차단작전에 참가한다. 하지만 5월 국군의 6.25 내 최대의 흑역사인 현리 전투(...)에서 포로로 잡히는 수모를 겪게 되는데, 북송되기 전인 6월 25일 다른 포로들과 함께 미 24사단 지역으로 탈출한다. 이후 원대복귀해 1대대 작전교육 담당으로 있다 양구 백석산 전투[14] 에서 1중대장이 전사하자 그 후임으로 1중대를 지휘한다. 이후 6월에 벌어진 M-1고지 전투에선 938 (선우)고지 쪽을 맡았으며, 7월에 이 425고지를 인계받아 전투를 하게 것이다.
그 뒤 정전 협정이 채결되고 몇 달이 지난 53년 12월, 김 대위와 용사 9명은 경무대로 초청받아 태극무공훈장을 수여받았으며, 56년 대위로 예편한 뒤 2012년 4월 노환으로 별세했다. 이에 육군은 육군장 후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해 그의 공적을 기렸다.#
- 또한 406고지에서 전사한 이규학 3연대 6중대장을 기려 3연대 2대대는 2016년 3월 이규학 대대로 명명식을 가졌다.
- 이 전투를 소재로 한 단편 웹툰이 국립대전현충원 공모전에 출품, 입상했다.
[1] 이는 금성 전투가 끝난 다음날이다.[2] UN군까지 합하면 24~26일 임진강변에서 미 해병대와 호주군(영연방군)이 중공군 1개 사단과 격돌한 3차 후크 고지 전투(사미천 전투)가 마지막이다. 참고로 52년에 벌어진 2차 후크 고지 전투는 고왕산 전투로 별칭한다.[3] 38선으로 분단될 당시 화천 지역은 북한 땅이었다.[4] 비록 정전을 앞두고 있었다지만 이는 양측 모두 합의해야 가능했고, 협정 역시 맺어질 듯 하다가도 한쪽의 반발이나 까다로운 조건으로 2년여간 늘어져 왔기에 이것만 먹으면 휴전해 주겠다는 식으로 장기화될 가능성은 충분했다.[5] 낙동강 전선 영천 전투에서 소대장으로 있다 다리 관통상으로 후송된 뒤 1952년 7사단으로 배치돼 교육대 시범중대장을 거쳐 전방 중대장까지 됐다.[6] 1개 중대급은 고지 서북쪽의 구릉으로, 2개 중대급 무리는 동북쪽에서 왔다.[7] 20포병대대, 미 176 포병대대.[8] 적의 통과를 저지하거나 방해, 방어를 무력화하기 위해 하는 일제 포격으로, 탄막 사격과의 차이점은 한번 쏜 뒤 다음 블록으로 재조정해 쏜다는 점이다.[9] 정확히 말하자면 1중대 본진인 425고지와 100야드 정도 떨어져 있는 별개의 전방 고지지만, 본진 바로 앞에 있기에 RTS에서 말하는 앞마당이나 다름없었다.[10] 이후 소령으로 추서되었다. 하지만 그의 시신은 직후 시작된 난전으로 수습할 수 없었고, 정전 후에도 군사분계선 때문에 발굴할 수 없어서 국립현충원엔 그가 생전에 남겨놓은 머리카락과 손톱만 안장된 상태다.#[11] 여러모로 문제가 많은 악어중대를 현존하는 특정 부대 소속으로 할 경우 생길 명예훼손 문제, 몰입도 등.[12] 인천상륙작전 후 북진이 이어지던 때 국군 제1보병사단이 미 1기병사단과 평양 돌입을 다투고 있었는데, 마음이 놓이지 않은 이승만 대통령이 보험삼아 평양에 가장 근접한 황해도 수안까지 진격한 7사단에 평양으로 방향 전환하라는 특명을 하달해 8연대의 중대 하나가 평양으로 진격한 것이다.[13] 그리고 이 무렵 "전투는 상하간의 신뢰로 이루어진다. 지휘관은 부하를 믿고 신뢰해야 자신을 사지로 몰아가는 명령이라 해도 부하는 따르게 된다. 또한 지휘관은 전투에 전념하고 집중해야 승리를 쟁취할 수 있으며 희생을 최소로 줄일 수 있다"는 신조를 스스로 세우고 이를 지키고자 여기저기 선두로 나다니게 되었는데, 이에 따른 불만도 생기기도 했다.[14] 7사단과 8사단이 백석산 일대를 장악한 북한 12, 32사단과 2개월간 벌인 고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