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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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김성애(金聖愛)
출생
1924년 12월 29일
출생지
평안남도 강서군
사망
2014년
본관
전주 김씨 [2]
국적
북한
남편
김일성
학력
평양여자사범학교 중퇴
1. 개요
2. 생애
3. 사망
4. 가족관계
5. 이력
6. 대중매체에서


1. 개요


북한의 국가 주석이었던 김일성의 2번째 아내
자신의 아들 김평일을 김일성의 후계자로 내세우려고 했고, 북한의 퍼스트레이디로써 지미 카터김일성의 회담 등 공식 석상에 자주 나타났다. 그러나 김일성 사망 후 김정일에게 모든 권력을 빼앗기고 은퇴 상태로 살았다.

2. 생애


원래는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농사꾼의 딸로 출생했고, 사범학교에도 진학했다고 추정된다. 무학이 많고 문맹률도 70%대에 달했던 일제강점기 기준으로는 고학력자였다.. 김일성과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은 1947년 군에 입대하면서부터였는데, 공교롭게도 김성애를 발탁한 인물은 김정일의 생모 김정숙이었다고 한다.
6.25 전쟁 시절 2번이나 포로로 잡힌 적이 있었다. 그것도 같은 사람에게.
첫번째는 개전 3일째인 1950년 6월 28일 서울 미아리 고개에서 행군 중 소변 보러 쳐졌다가 후퇴 중 뒤쳐져 있던 한국군 이기봉에게 붙잡혔다. 소속은 4사단 18연대 문화부 소속이며 계급은 없고 분대 선전지도원이라고 밝혔고 따발총과 함께 군인증과 공산주의 정치 선전문, 김일성 개선기, 김일성 유격대 전사초 따위의 소책자를 갖고 있었다. 이때 자신의 고향은 평안북도 강계시이며 외가가 있는 평안남도 순천시 순천여자사범전문학교 재학 중 조국해방전쟁에 참여하였다는 말도 하였다. "군인증과 김일성 소책자를 돌려 달라"고 하다가 안 된다고 하니 "그럼 안녕하라요, 그리구 기 책 잘 간직하구 수령님 항일혁명 투쟁사 깊이 연구하라요!"라고 하며 그대로 산속으로 도주하였다.
2번째는 인천상륙작전 이후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에서 이기봉이 10여명의 포로를 잡았는데 그중 하나가 한쪽 어깨에 피를 철철 흘리던 김성애였다. 그러나 이천극장에 수용 중 새벽 2시쯤 변소를 가는 척 하다가 복도 경비를 맡고 있던 치안대 한 사람의 옆구리를 칼로 찌르고 달아 났다.[3]
휴전 후 북한 호위국 여비서로 발탁되었다가 김일성과 지속적인 애정관계를 가졌고, 김평일임신하여 1957년 김일성과 결혼했다. 그 후 1963년 조선민주여성동맹 부위원장, 1971년 의장까지 맡는 등 계속 권력의 정점에 서 있다가 1973년 벌어진 인민대학습당 사저신축사건으로 권력이 축소되고 몰락하고 만다. 여맹조직 역시 김성애의 권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세포조직들을 해체하여, 김성애가 가질 수 있는 권력은 없어지고 야인이 되게 된다.
인민대학습당 사저신축사건의 내막을 자세히 설명하자면 이렇다. 1973년 김성애의 아들들을 나락으로 몰아내는 사건이 터지는데, 김일성이 해방 직후부터 아껴두고 또 아꼈던 인민대학습당을 건설하려던 부지를 김일성이 방문했는데 호화로운 저택이 지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김일성이 놀라서 "뭐이야, 이게? 누구네 집이야?"라고 묻자 저택을 지키던 보초가 "해군사령부 정치위원 당비서, 김성갑[4] 동지의 집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것이 곧 '인민대학습당 사저 신축 사건' 으로 번졌다. 김일성은 대노했고 당사자 김성갑을 불러서 매우 혹독하게 비판하고 질책했다.
그날 밤 지친 김일성이 관저로 돌아가서 김성애에게 "밥이나 먹자."라고 하자, 한성깔하는 김성애는 김일성을 구슬러도 모자랄 판에 바가지를 긁었다. 그녀는 "당신 가시어머니(장모님)가 그런 집에서 한번 살면 당신 뭐 잘못되는 거 있어?"라고 소리 지르면서 밥상을 뒤엎었다. 난데없이 뜨거운 국과 밥을 다 뒤집어 쓴 김일성은 폭발했고, 그날 밤 둘이서 미친 듯이 싸웠다고 한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김정일은 '''김성애와 그녀의 친족들, 친지들, 그리고 김성애의 아들인 김평일의 비리'''를 김일성에게 낱낱이 보고했고[5], 다시 강도 높은 검열과 사상검증을 실시했다. 그 결과로 이들 대부분은 숙청되어, 권력의 변두리로 밀려나거나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다고 한다.
그러나 1977년 상설회의 의원으로 복귀한 뒤 1983년부터 여성동맹 위원을 다시 지내는 등 북한 상층부에서 요직을 지내며 해외 우방국가 원수들의 북한 방문시 김일성과 함께 영접에 나섰으나 김정일의 지시에 의해 보도용 사진이나 영상에서는 나오지 않는 굴욕을 겪게 되었고, 이는 김일성이 맞은 마지막 외국 귀빈인 지미 카터 부처의 방문 때도 이어졌다. 이후 김일성이 사망하였을 때 장의위원회에 "미망인 김성애 동지"로 이름을 올렸으며 1995년 오진우의 장의위원에 임명된 것을 마지막으로 김성애의 이름은 사실상 북한 정계에서 사라지게 된다. 그나마 공식석상에 마지막으로 등장한 것은 1997년 김일성 사망 3주기 추도식이었고 그 이후 그야말로 이름도 찾기 힘든 신세로 전락했다.
1998년 여성동맹 위원장직에서 해임되어 북한을 떠들썩하게 한 '여맹 비서'직을 내려놓았으며 2010년 중앙위원회 위원에서 해임돼서 완전한 야인으로 전락했고 이후로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신세가 되어 완벽히 잊혀졌다[6].

3. 사망


그러다가 2014년 이후로 사망설이 나돌기 시작했지만 북한의 특성상 확인하기가 어려웠으며 정부 기관도 이를 확인해주지 않았다. NK지식인연대에 의하면 2014년 8월 말-9월 초 정도에 사망했다고 한다.#
2018년 12월 12일을 기해서 대한민국 정부는 김성애를 사망한 인물로 간주하기로 결정하였으나 그 구체적 시기나 사인에 대해서는 최근에 사망한 것은 아니라는 말과 함께 아직 협의가 필요하단 이유로 밝히지 않고 있다.#
이후 통일부에서 발간한 북한 주요인물정보에 의하면 2014년에 사망했다. #

4. 가족관계


'''남편'''
김일성
'''아들'''
김평일, 김영일
'''딸'''
김경진
'''오빠'''
김광협[7]
'''남동생'''
김성갑, 김성호

5. 이력


  • 평안남도 평양여자사범학교 중퇴
  • 조선인민군으로 6.25 전쟁 참전 [8]
  • 북한 국가주석 영부인 자격으로 조선민주녀성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 역임
  • 1998년 조선민주녀성동맹 위원장 직에서 해임
  • 2010년 중앙위원회 위원에서 해임.

6. 대중매체에서



[1] 북한 외부에 알려진 김성애의 사진은 매우 희귀하다. 이 사진은 1994년 6월 15일~18일 지미 카터 미 전 대통령이 방북해서 김일성을 만났을 때 사진인 것으로 보인다. 사진 촬영일은 1994년 6월 15일.[2] 김일성도 전주 김씨이다. 다만, 북한에서는 동성동본의 혼인 금지가 1948년 없어지긴 했다.[3] 이기봉, <서울이 울던 밤> 에서 발췌.[4] 김성애의 남동생.[5] 김정일은 무척이나 북한의 수령이 되고 싶어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온갖 권모술수를 부렸는데 남일 장군을 차로 박아 죽였다는 의혹도 있는데 이복동생인 김평일의 뒷조사를 안했을 리가 없었으며 꾸준히 김성애와 김평일 모자의 뒷조사를 해두었던 내용들을 이 때 김일성과 김성애의 사이가 나빠진 틈을 타서 보고했다.[6] 실성설(...)도 있었다.[7] 6.25 전쟁 당시 조선인민군 제2군단장을 역임했다. 하지만 낙동강 방어선을 뚫지 못한 죄로 강등 후 6.25전쟁에 계속 참전했으나 6.25전쟁이 끝난 이후 여동생 덕으로 대의원이 되었다. 그러나 김일성이 인민대학습당을 만들려고 따로 떼어놓은 부지에 남동생 김성갑이 호화저택을 짓는 바람에 온가족이 다같이 숙청당했다.[8] 복무기간은 1950-1953년. 최종계급은 상사. 복무지는 북한 국가원수 집무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