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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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45년 12월 27일 출생. 김해진영중학교, 마산공업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사법학과 졸업.[1]
재야 노동 운동가로 오랜기간 활동했으며 현재는 정치인이다. 국회의원은 14대부터 18대까지 계속 도전했지만 모두 낙선했으며 다시 제21대 총선에 출마했지만 역시 낙선. '''영원한 재야(在野)'''라는 별명이 있다.
2. 생애
2.1. 재야 운동가
1960년대 학생운동을 시작으로 꾸준히 노동운동,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일선에서 싸워온 재야운동가였다.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학생회장이었으며 전태일의 분신자살 이후 노동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시신이 안치된 성모병원으로 찾아가 어머니(이소선 여사)를 만났다. 당시 이 여사는 “우리 태일이가 그토록 대학생 친구 갖기를 바랐는데 죽고 나서야 나타나느냐”라면서 서울대 법대 복학생 신분이던 그를 두고 한탄했다고 한다. 서울대학교에서 전태일의 학생장을 치러주었다.
그는 민주화운동, 노동운동으로 9년을 감옥에서 지냈고, 12년의 수배생활을 보냈다.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을 비롯해서 여러 번 복역과 가석방, 석방을 거쳤는데 위 사진도 그 당시 가석방 되며 찍힌 사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화 유공자 신청을 하지 않았으며 일절의 배상금도 받지 않았다고 한다. 국민된 도리, 지식인의 도리로서 할 일을 한 것일 뿐이고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
2011년 7월 8일 이소선 여사가 쓰러지기 전 가족을 제외하고 마지막으로 통화한 사람이 그였다고 한다. 이소선 여사가 평소에 “하원이 아버지가 좀 잘돼야 할 텐데”라고 했을 정도로 걱정과 격려를 많이 했다고 한다. 이소선 여사는 “기표는 내가 만난 사람 중에 가장 진실하고 바르게 살려는 첫 사람이자 나에게는 영원한 스승이었다”고 기억했다. #
이때부터 1980년대까지 꾸준히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선봉에 서서 활동했다. 6월 항쟁 이후로는 재야 세력의 핵심으로 떠올랐는데, 모든 재야세력이 결집했던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약칭 전민련)을 주도하는 40대 4인방(이부영, 이재오, 장기표, 김근태)의 일원으로 많은 관심을 받았다.
당시 재야운동의 한계를 느끼고 전민련의 정치세력화를 주장했으나, 독자정당 창당안이 1989년 전민련 대의원대회에서 부결되자[2] 장기표, 이재오 등의 독자정당추진파들과 함께 민중정당[3] 창당에 나서면서 본격적으로 정치에 입문한다.[4]
2.2. 정치 활동
민중의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부르짖던 장기표, 이재오, 이우재는 노동운동의 상징이었던 김문수와 손잡고 1990년 대중적인 진보정당을 기치로 민중당을 창당하였다. 그러나 1991년 지방선거에서 저조한 투표율로 강원도 의회에서 딱 1명만 당선시키는 데 그쳤고, 1992년 14대 총선에서는 아예 1명의 당선자도 못 내며 처참하게 실패하였다. 장기표도 서울특별시 동작구 갑에 출마해서 21%를 득표했지만 3위로 '''1번째 낙선'''한다. 민중당은 총선에서 당선자를 내지 못하면서 자동해산되었다.
1993년 집권한 김영삼이 여당(민주자유당) 물갈이를 염두에 두고 이우재, 김문수, 이재오 등을 영입하였으나, 장기표는 이들을 따라가지 않고 통합민주당에 합류하여 1996년 15대 총선에서 다시 동작구 갑에 출마했지만 '''2번째 낙선'''한 후 '''탈당'''한다.
이후 재야운동, 제도권 정치와 거리를 두고 "신문명정책연구원"을 만들어서 저술과 강연활동에 몰두한다.
2000년 16대 총선을 앞두고 홍사덕과 함께 인터넷 정당을 선언했지만 홍사덕이 신한국당 선대위원장으로 가면서 무산되었고, 느닷없이 김윤환, 이기택, 조순, 이수성 등 신한국당 공천탈락자들과 함께 민주국민당을 창당한다. 민국당 전국구 3번으로 출마했지만, '''3번째 낙선'''하였고, 총선 이후 민국당이 새천년민주당/자민련과 3당연대를 형성해서 공동내각을 꾸리자 반DJ를 주장하면서 '''탈당'''한다.
2002년에는 8월 재보선을 앞두고 정권말기 현상으로 집권세력인 새천년민주당의 지지율이 급락하자 김근태 인재영입위원장의 권유로 새천년민주당에 입당해서 서울 영등포구 을[5] 지역구에 출마했으나, 2위로 '''4번째 낙선''' 했다. 역시나 선거 패배 직후 곧바로 '''탈당'''한다.[6]
2004년에는 17대 총선을 앞두고는 한국노총과 한국사회민주당[7] 의 대표를 맡았다가 녹색정치를 주장하던 녹색평화당과 합당해서 녹색사회민주당을 창당하고 공동대표를 맡았다. 녹색사회민주당 후보로 다시 동작구 갑에 출마했으나 득표율 4.8%, 5위라는 안습의 성적으로 '''5번째 낙선'''하였다. 녹색사민당은 비례득표율 미달로 자동해산되었다.
2012년 19대 총선을 앞두고 다시 정치권에 등장한다. 이번에는 보수이론가로 유명한 박세일[8] 교수와 손잡고 개혁적보수와 합리적 진보가 함께하는 국민생각 창당을 준비했지만[9] , 국민생각을 탈당한 장기표는 녹색통일당이라는 독자 정당을 창당하고 이후 이 당이 확대 개편된[10] 정통민주당 비례대표 1번으로 출마했지만 역시나 '''6번째 낙선'''하였다. 정통민주당은 민주당계 지지층의 표를 분산시켜서 새누리당에게 총선 승리를 안겨주는 역할만을 하고 단 한 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한 채 자동 해산되었으며, 야권단일 후보였던 홍희덕, 천호선까지 낙선시켜서 한화갑. 한광옥 등 정통민주당원들과 함께 민주통합당 지지자, 당원들뿐만 아니라 통합진보당의 구 민주노동당계, 참여계 지지자들로부터 욕을 먹었다.[11] 특히 18대 국회에서 3년 연속 국정감사 우수 의원으로 뽑히기도 했던 홍희덕 의원의 낙선은 19대 국회에서 노동, 인권 관련 입법활동을 멈추게 하여 더 부정적인 평가를 얻었다.
제19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 선언을 했으나 결국 출마하지 못했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국민의소리 시민단체를 만들어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광화문집회를 주도했다.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는 "박근혜에겐 최순실이 한명, 문재인에겐 최순실이 열 명"이라고 하기도 했다.#
제21대 총선을 앞두고 국민소리당 창당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이후 자유한국당, 새로운보수당 등이 구성한 보수통합 논의 기구인 혁신통합추진위원회에 참여했다. # 나름 파격적인 결과로 미래통합당 창당준비위원장이 되었다.
미래통합당 김해을 당원협의회에서 "전략공천된 장기표 후보 사퇴하라" 라는 기자회견이 있었으나, 제21대 총선에서 그의 고향인 김해시 을 지역구에 단수공천을 받았다.
김해시 을 국회의원 후보자 토론회에서 김정호 후보의 트램 공약에 대해 토론하는 중, 트램 노선 구간을 김해시 갑 지역과 혼동 하고 선고 공보에 주촌면과 진례면를 아래의 사진과 같이 잘못 표시하는 등 실수를 범했다.
결국 41.6%의 득표율을 거두면서 2위로 패배, '''7번째 낙선'''이라는 성적표를 받아들였다. 40% 득표율을 올리며 전혀 기반이 없는 지역구였던 김해 을에서 선전하긴 했지만 미래통합당으로 입당하면서 진보 진영에서 전향했다는 욕을 먹어가면서까지 노린 국회의원 도전에서 결국 결실을 거두지 못하고 정계은퇴 수순을 밟을 것으로 보이며, 장기표의 주요 공격대상이었던 더불어민주당 지지자들뿐만 아니라 그의 행적으로 인해 피해를 본 정의당, 민중당 등 진보정당, 한국노총, 민주노총 지지자들에게서도 조롱받았다. 실제로, 과거 녹색사회민주당과 한국사회민주당 창당에 참여한 한국노총의 경우 장기표가 아닌 더불어민주당을 지지하였다.
낙선 후엔 유튜브에서 간간히 등장하긴 하지만 조회수는 잘 나오지 않는다. 그런 와중에 공식 트위터 계정이 해킹당해 업소 광고가 달리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3. 평가
1970년대~80년대에 민주화 운동의 선봉에 서면서 높은 평가를 받았으나 1990년대 이후로는 계속 제도정치권 진입에 실패했다. 낙선을 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안 되었지만 낙선 이후에 당에서 탈당해 버리는 것이 문제였다. 오랫동안 정치에 도전하면서 그의 정치관에 공감하는 지지자들이 있었지만, 2000년대 이후로는 여러번 낙선을 거듭하면서 당적을 바꿔 젊은 세대들에게는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다. 잦은 당적 변동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는데 지난 조국 사태 때 한 인터뷰 중 당적을 옮기는데에 입장을 밝힌 것이 있다. # 21대 총선에서는 이 문제가 공론화되면서 과거 행적으로 인해 비판를 받았다.
민중당, 민주국민당, 녹색사민당, 정통민주당 등 여러 신당을 창당해서 선거에 도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선거 이후에 정당법에 의거한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21대 총선을 앞두고는, 국민소리당 창당을 준비하다가 통합신당 창당준비위원회에 참여했다. 통추위에서는 처음에 당의 쇄신 부진을 이유로 불참입장을 표명했다가 결국 다시 합류하기로 했다.
#미래통합당 김해을 당원협의회에서 "전략공천된 장기표 후보 사퇴하라" 라는 기자회견을 하였으나, 결국 미래통합당 소속으로 21대 총선에 출마하게 된다.[12]
4. 저서
1. 통일 초코파이(한반도 통일전략), 2016년, 도서출판 꿈과 의지, ISBN 9788983010513
2. 지못미 경제(청소년 경제 교과서), 2009년, 도서출판 시대의 창, ISBN 9788959401703
3. 불안없는 나라 살맛나는 국민(자아실현정치론), 2016년, 도서출판 구사, ISBN 9788996818519
4. 참된 진보정치를 선언하며(녹색사회민주주의), 2015년, 도서출판 글통, ISBN 9791185032160
5. 지구촌시대 민족발전전략, 1995년, 백산서당, ISBN 9788973271078
6. 한반도 통일과 중국, 2013년, 사회와 연대, ISBN 9788989097457
7. 문명의 전환 새로운 비전, 2013년, 백산서당, ISBN 9788973274857
8. 장기표의 신문명 국가비전, 2007년, 밀알, ISBN 9788941802587
9. 대통령님 나라 팔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1999년, 신문명, 절판
10. 새벽노래(에세이), 1988년, 미래사, 절판
11. 신문명 국가비전, 2001년, 신문명, 절판
12. 신문명 경제시론, 2001년, 신문명, 절판
13. 한국 경제 이래야 산다, 2006년, 도서출판 명상, 절판
14. 북한 위기의 본질과 올바른 대북정책, 2007년, 신문명, 절판
15. 부부사랑 그 지혜로운 행복(에세이), 2007년, 도서출판 밀알, 절판
16. 구국선언, 1998년, 신문명, 절판
17. 문명의 전환, 1997년, 미래 M&B, 절판
18. 우리 사랑이란 이름으로 만날 때, 1998년, 형성사, 절판
19. 사랑의 원리, 1996년, 한길사, 절판
20. 해방의 논리와 자주 사상, 1988년, 도서출판 친구, 절판
21. 민중 시대의 정치와 운동, 1991년, 한길사, 절판
22. 80년대의 상황과 실천, 1991년, 한길사, 절판
23. 대통령 대 국민, 2004년, 신문명, 절판
24. 한국사회개혁론(사랑의 정치를 위한 나의 구상 1), 1991년, 한길사, 절판
25. 지배의 논리와 해방의 논리 1,2, 1991년, 한길사, 절판
26. 창살의 노래 햇살의 노래, 1991년, 한길사, 절판
27, 우리 사랑의 기쁨으로(에세이), 1991년, 한길사, 절판
28,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세이), 1991년, 한길사, 절판
5. 소속 정당
창준위 포함 무려 20개의 당적 보유 경력을 가지고 있어 2010년 이후 활동한 정치인 중에서 '''가장 많은 당적'''[20] 을 보유하고 있다. 그리고 정치 활동 중 보수정당, 민주당계 정당, 진보정당을 모두 거쳐갔다. 그러면서도 단 한번도 당선되지 않았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점.
6. 선거 이력
[1] 1966년 입학했으나 학생운동 등으로 인해 1995년에야 졸업했다.[2] NL세력들이 결사반대했다.[3] 1980년대, 1990년대 초반에는 '''노동자/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약칭:노민독정)라는 구호를 사용했기 때문에 주로 민중정당이라고 불렀다. 진보정당, 진보진영이란 표현은 민중당이 실패한 이후에 노회찬이 <진보정치연합>을 만들면서 등장한다.[4] 당시 전민련으로 결집한 재야 세력은 제도정치와 대선전략에 대해서 세가지 입장으로 나뉘어졌다. 첫째는 이부영이 주장하던 보수야당 경유론/김대중 비판적 지지론으로 일단 김대중이 주도하는 민주당계 정당에 입당해서 김대중으로의 정권교체를 도운 다음에 실력을 키워서 나중에 독립하자는 견해였다. 실제 이부영을 포함해서 수많은 재야인사들이 이런 논리로 대선을 앞두고 1990년대 초반 민주당에 입당했다.(하지만 이렇게 들어간 사람중에 나중에 실제 진보정당 창당을 추진한 사람도, 진보정당으로 돌아온 사람도 아무도 없다. 사실 이 논리는 그 이전부터 무수히 많이 나왔던 이야기로 1987년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 진영에 합류했던 이해찬이나, 1988년 총선에서 김영삼의 영입제안을 받고 부산에 출마했던 노무현도 모두 진보정당을 하기 위해서 간다고 약속했었다.) 둘째는 김근태가 주장하던 민족민주전선론/김대중 비판적 지지론으로 지금처럼 모두가 단결해서 순수한 재야운동을 지속해야 한다는 것. 하지만 이 입장에 서있던 사람들도 결국 1990년대 중반에 가면 모두 민주당계 정당에 입당해서 제도권 정치인이 된다. 셋째가 당시의 보수야당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고 있던 노동운동 세력 일부와 이재오, 장기표 등이 주장하는 독자정당 창당/독자후보 대선 출마론이었다. 하지만 정권교체를 지상과제로 여기고 있던 재야세력 내에선 독자세력화는 분열이라는 반발이 극심했다. 이 때문에 장기표와 이재오는 노동운동의 상징이었던 김문수와 손잡고 민중당 창당에 나서고, 여기에 지하조직 활동을 정리하고 공개활동에 나선 노회찬 그룹이 합류한다.[5] 김민석이 서울시장 선거 출마를 위해서 사퇴한 지역구.[6] 사실 따지고 보면 해당 재보궐이 장기표의 30년 정치인생 중 가장 당선에 가까웠던 순간이었다. 여의도를 포함한 영등포을이 한나라당의 텃밭이고 권영세 후보도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지만 이후의 당랑거철에 비한다면야... 불과 2년 뒤인 17대 총선까지 이 지역구를 지키는 것은 결코 불가능하지 않았으며,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으로 갈린 상황에서 어느 한쪽 당으로 공천을 받는건 어렵지 않았다. 이후 물론 16대 대선과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의 대 격변 속에 역마살의 노정객이 버틸 수 있었을지...는 다른 문제다. 실제로도 곧바로 탈당했으니.[7] 민주노총과 노회찬이 주도해서 2000년 창당한 민주노동당이 4년간의 꾸준한 활동 끝에 17대 총선에서 원내진입이 유력시 되자, 경쟁관계였던 한국노총이 선거 직전에 급조한 정당이었다. 당시 민주노동당은 꾸준히 연대를 제안했지만 민주노총과의 경쟁심리 때문에 한국노총은 독자 정당 창당에 나선 것이다.[8] 서울대학교 법경제학 교수로 김영삼 대통령의 수석비서관으로 일하면서 세계화 선언을 기초하고, 국내에 본격적으로 신자유주의 노선을 도입한 인물이다.[9] 장기표는 자유무역협정(FTA), 특히 당시에 시끄러웠던 한미 FTA와, 역시 시끄러웠던 제주민군복합형관광미항 및 제주 해군기지 건설에 부정적이었다. 반면 박세일은 보수 스탠스에 충실해 한미 FTA와 제주해군기지에 긍정적이었고 그의 입장이 당론으로 관철되었다. 이런 식으로 장기표 입장에서는 계속 본인의 신념이 배치되는 당론이 형성되니 회의감을 느꼈는지 결국 국민생각 창당준비위원회를 떠났다. 그 결과 국민생각은 그냥 별 특징 없는 보수 성향 군소 정당이 돼 버렸고, 전여옥을 영입해 잠시 원내 정당이 되었지만 총선에서 폭망해 사라졌다. 장기표보다 3세 연하였던 박세일 교수도 5년 뒤인 2017년 세상을 떠났다.[10] 민주통합당 공천에서 탈락한 동교동계를 중심으로 이 당에 추가로 합류하였다.[11] 실제 정통민주당 후보들은 지역구마다 3~5%를 득표하면서 군소정당 치고는 제법 많은 득표를 얻었는데, 이보다 근소한 차이로 당선자가 결정된 곳이 태반이었다. 특히 수도권.[12] 독재에 항거한 대표적 재야인사라 평가되는 사람이 군부독재 시절 여당인 민정당에 뿌리를 둔 정당에서 국회의원 후보로 나온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당시 민정당과 현재의 통합당을 동일시하는 것 또한 인적 구성이나 당의 지향점 등을 보면 무리가 있다.[13] 총선 득표율 저조[14] 민주당과 신설 합당[15] 당내 노선 차이[16] 녹색평화당과 신설 합당[17] 총선 득표율 저조[18] 당내 노선 차이[19] 총선 득표율 저조[20] 이인제(18개), 김한길(18개)보다도 당적이 많다. 게다가 자의적 당 이동만 따지면 그리 횟수가 많지 않고 중도~중도우파 성향 정당 내에서 활보한 이인제나 민주당계 정당, 그리고 제3지대 정당 안에서만 활보한 김한길과는 달리 3번을 제외하면 모두 자의적으로 옮겼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더 대단한 셈. 비슷한 케이스로는 안영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