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화

 



'''정승화의 역임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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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22대 육군참모총장
정승화[1]
鄭昇和 | Jeong Seung-hwa
'''
'''출생'''
1929년 2월 27일
경상북도 김천군 봉산면 신동 봉계마을#
(現 경상북도 김천시 봉산면 신리 봉계마을)
'''사망'''
2002년 6월 12일 (73세)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동 세브란스병원
'''본관'''
연일 정씨
'''호'''
송산(松山)·벽옹(碧翁)
'''복무'''
대한민국 육군
1948년~1979년
'''재임기간'''
제22대 육군참모총장
1979년 2월 1일 ~ 1979년 12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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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d0000> '''배우자'''
신유경
'''자녀'''
슬하 3남 1녀
'''종교'''
불교천주교 (세례명: 베드로)
'''학력'''
봉계공립보통학교 (졸업)
광신상업학교 (졸업)
'''임관'''
육군사관학교 (5기)
'''최종 계급'''
대장[14]
'''최종 보직'''
육군참모총장
'''주요 보직'''
육군제7보병사단장
육군제3군단장
제1야전군사령관

1. 개요
2. 생애
3. 대중매체에서
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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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군인. 제22대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했다.

2. 생애


고향의 봉계공립보통학교(현 봉계초등학교)와 광신상고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 5기로 임관했다. 초반에는 상관 복이 없었으며 처음으로 자대 배치를 받았는데 하필 강태무와 표무원 소령월북해버리는 사건이 터져 버렸다. 1950년 6.25 전쟁 당시 3사단 예하 대대장으로 참전하였는데 당시 군단장유재흥 장군이었고 바로 현리 전투였다. 이때 중공군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한 일도 있었으며 탈출할 때 화전민의 도움을 받았는데 이후 보답으로 여러 편의를 봐주었다고 한다. 1953년 휴전 후 1956년 대령으로 진급했으며 이 때 나이가 스물일곱이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당시에는 방첩대장(현재의 군사안보지원사령관)을 역임했다. 회고록에 따르면 이후에 원수지간이 되는 노태우와 인연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노태우는 방첩대 정보과에 있었는데 방첩대의 특성상 정치 분야에 관여하는 일이 잦았다. 이에 대해 정승화는 '너무 그쪽(정치)에 열중하지 마라. 군인이라면 야전에서 일하는 게 더욱 군인답지 않겠나'라고 가볍게 충고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5.16 군사정변 이후 1961년 8월 11일에 준장으로 진급했는데 이 때 나이가 32살이었다.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 2군단 작전과장, 방첩부대장, 7사단 참모장, 국방부 인사국 부국장, 1군단 참모장, 7사단 부사단장, 1군단 부군단장, 육군본부 특전감, 3군단 참모장, 3군단 부군단장을 지냈다. 1966년 11월 소장으로 진급하여 제7보병사단장, 국방부 인사국장, 대한체육회 이사, 문교부 체육심의위원, 육군본부 인사참모차장, 육군 종행교장, 1군 참모장, 육군본부 기획참모부장, 육군본부 정책기획부장 등을 지냈다. 1973년 3월 6일 중장으로 진급하여 제3군단장, 육군사관학교 교장, 제1야전군사령관을 지냈으며 이후 1979년 2월 육군참모총장으로 영전했다. 당시 정승화는 김대중에게 부정적이라 김대중이 당선되어도 용인하지 않겠다는 편파적 발언을 하기도 했으나 직접적으로 정치에 개입하는 시도는 없었다.
1979년 정승화의 인생에서 큰 사건이 터지는데 10.26 사건으로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정승화에게는 인생의 전환점이 된다. 10.26 사건 이후 계엄사령관이 되어 사건 수습을 진행하다가 당시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인 전두환12.12 군사반란신군부 측에 납치당하고 만다. 박정희가 피살된 10.26 사건 당시 궁정동 안가 '가'동(피살 장소는 '나'동이었음)에 있었다는 점을 조사하겠다는 명목으로 전두환의 부하 허삼수 대령 등에게 강제 연행되어 군사 재판에 회부되었다. 10.26 사건 당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박정희 연회가 있으면서도 육군참모총장 정승화에게 저녁을 같이 하자고 궁정동으로 불러냈다. 물론 김재규는 박정희와의 연회가 있었기 때문에 정승화와 함께하지 못했고 정승화는 김재규가 보낸 중앙정보부 2차장보 김정섭과 저녁을 먹던 중에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김재규의 치밀한 계략인지, 순간적인 기지인지, 본능적인 직감인지는 이제 알 수 없게 되었지만 당시 피살 현장에서 매우 가까이 있으면서도 김재규의 암살 시도를 눈치채지 못했고[2] 김재규와 같은 차를 타고 육군본부에 갔으며 육군본부에 도착한 이후에도 박정희가 저격에 의해 피살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이를 숨긴채 노재현 국방부장관에게 박정희가 죽었으며 자세한 경위는 중앙정보부장에게 물어보라면서 사건 경위를 축소하여 보고하였고 경호실장 차지철이 지휘했던 수도경비사령부불법적으로 장악하려 시도하는 등 김재규의 정권 장악 시도에 암묵적으로 동조하는 듯한 행보를 보인 사실은 정승화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된다.[3] 이에 대해 정승화는 청문회 등에서 평소 차지철의 행보와 당시 상황의 급박함으로 인해 박정희를 암살한 범인이 차지철이라고 오판해서 수도경비사령부 병력을 장악해 차지철을 제압하려 한 것이라고 자기를 변호하였다.
사실 정승화도 김재규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처지였음에도 김재규의 관계에 대한 전두환의 의심이 깊어졌는데 그 이유는 264일의 쿠데타 1권 192-193쪽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김재규는 압송된 후 "정승화는 내 심복이다. 왜 그날 저녁 남산으로 가지 않고 육본으로 갔겠느냐? 당장 내일 아침이면 계엄사령관이 너희들 대장인 전두환을 적절히 조치할 것이다."라고 주장하며 자신과 정승화의 연관 관계를 계속 들먹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조사를 계속하던 중 김계원을 통해 진실을 알게 되어 김재규를 체포하라 했을 때 "안가에 정중히 모셔라"라는 말로 확신을 얻었다고 주장하며 이 사실을 이용하여 정승화를 사실상 김재규와 권력을 찬탈하려 했다는 혐의를 뒤집어 씌웠다.[4]

▲ 정승화 대장(左)과 장태완 소장(右)
10.26 사건 후 계엄사령관이라는 막강한 직책에 있으면서도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은 전두환에게 약점을 잡혔고 전두환의 월권 행위도 효과적으로 견제하지 못하고 오히려 거꾸로 당하고 말았다. 모진 고문 후 결국은 석방되었지만 이미 모든 실권은 전두환에게 넘어간 뒤였다.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과 정병주 특전사령관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연행 사건에 대해 크게 분노를 하고 신군부를 제압하려고 계획을 세우지만 그들만으로 신군부 세력들을 막을 수 없었고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과 정병주 특전사령관마저 믿었던 부하들에게 잡히고 만다. 신군부가 권력을 잡은 후 기소되어 국군보안사령부 서빙고분실에서 대장으로서의 체면을 지키지 않고 온갖 고문을 동반한 수사를 받았다. 국방부 계엄보통군법회의(재판장 정원민 해군 중장, 심판관 최갑석 육군 소장·김재봉 해군 소장·김인기 공군 소장, 법무사 심한준 육군 중령)의 판결에 의해 대장에서 이등병으로 자그마치 17계급이나 강등당하는 굴욕적인 처분을 받으며 불명예 전역(강제 예편)해야 했다. 한평생 뼛속까지 군인으로 살아온 그에게는 최악의 처분이자 수치였으며 그간 받은 장교 급여분도 이등병으로 동일 기간을 복무할시 받을 을 제외하고 전부 몰수당하고 군인연금 수혜 권리도 박탈되어 경제적인 위기도 겪었다. 수감 기간 중 한미연합 사령관 존 위컴 장군생일 케이크와 축하 카드를 보내 준 것에 큰 힘을 얻었다고 한다.
이후 남한산성에서 형기를 채우다 형집행정지로 출옥하여 조용히 지내다가 세간에 등장하게 되는 계기가 생기니 1987년 대선이다. 1987년 6월 항쟁의 결과로 직선제로 치러지게 된 제13대 대통령 선거에는 야당김영삼과 김대중이 후보 단일화에 실패했고 재야 진보 진영에서 백기완까지 출마하면서 야당표의 분산으로 노태우 당선(당시 김영삼과 김대중 등 2명이 하나로 단일화만 됐어도 노태우가 대선에 당선될 일은 없었을 것이라는 말도 있으나 그렇지 않다는 평가도 많으며 노태우는 어부지리로 청와대에 무혈 입성)이 유력하였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김영삼의 삼고초려 끝에 1987년 대선 직전 통일민주당의 상임고문 겸 부총재로 영입되어 정계에 전격 등장했다. 공식 선거 운동 시작 직후 김영삼이 정승화를 통일민주당 부총재로 영입하자 김영삼의 지지율이 1위로 치솟았다. 그러나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이 터지고 선거 전날 김현희김포국제공항에 도착하면서 엄청난 북풍이 불었고 결국 제13대 대통령 선거 결과는 노태우 36%, 김영삼 28%, 김대중 27%, 김종필 8%[5]여당민주정의당 대표 노태우의 당선으로 마무리되었다. 노태우가 당선되자 정치에서 손을 떼었으며 그 후 이등병으로 강등된 예비역 장군들의 계급 복권 대상에 포함되어 이규광, 강문봉 등과 함께 정승화도 예비역 육군 대장의 자격을 되찾았고 몰수됐던 급여와 군인연금 수급권도 돌려 받았다. 1988년 시작된 5공 청문회에서는 12.12 군사반란 당시의 피해자이자 증인으로 청문회에 출석하여 사태의 전말을 직접 증언했다.
1993년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 김진기 육군본부 헌병감, 하소곤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등 12.12 군사반란 당시 육군본부 진압군 측 장군들과 함께 전두환, 노태우 등 당시 신군부(하나회) 출신 인사들을 검찰에 군사 반란 혐의로 고발했으나 당시 검찰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모종의 이유를 들어 고발된 인사들을 기소유예 처리했다. 기세등등해진 신군부 출신 인사들은 자신들을 검찰에 고발한 정승화를 포함한 육군본부 측 장군들을 되려 군사 반란, 무고 혐의 등으로 역고소하는 추태를 보이기도 하였으나 이 무고 혐의 역시 기각됐다. 1995년에는 대한민국 전직 대통령 구속 사건이 1987년 제정된 헌법 이후 최초로 발생하자 증인으로 채택되어 증언하였다. 전두환이 대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으면서 평생의 한을 푸는 듯 했으나 1997년 12월 22일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의 합의에 따라 전두환과 노태우가 특별사면 혜택을 받아 풀려나자 "반성도 하지 않는 사람들을 그래도 풀어준다니 이 나라가 진정으로 법치주의 국가입니까?"라며 분노를 표시했다. 1999년 육해공군 및 해병대 장성 출신 모임인 성우회 제6대 회장에 당선되어 쿠데타 피해자 출신 예비역들의 권익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으나 임기 중이던 2002년 6월 12일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향년 74세로 사망했다. 사후 국립대전현충원에 예비역 대장 자격으로 안장되었다.

3. 대중매체에서


  • MBC 드라마 제4공화국에서는 MBC 성우 정승현씨가, SBS의 드라마 코리아게이트에서는 MBC 성우 최병학 씨가,[6] 제5공화국에서는 배우 박인환 씨가 정승화 역을 맡았다. 영화 그때 그 사람들에선 정종준 씨가 분했다.[7] 영화 자체가 블랙코미디이다 보니 꽤나 우유부단하고 코믹하게 나오는데 육군본부 앞에서 자신을 못알아보는 초병에게 내가 육군참모총장이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씬은 이 영화의 백미. 영화 속 설정상 여자에는 사족을 못 쓰는 것은 덤.
  • 제5공화국에서는 1987년 대선 국면에서 김영삼의 제안을 받고 돌아오는 길에 집앞에서 후배 고명승이 정치에 개입하지 말라는 말을 하자 "전두환이가 보내서 왔나? 가서 전하게. 그렇잖아도 고민 중이었는데, 결심하게 해줘서 고맙다고. 이만 가보게." 라고 말하는 간지나는 장면이 나왔으며, 해당 대사로 인해 평소 서민들의 아버지 역할로 자주 출연했던 박인환의 연기력이 재평가 되기도 하였다.[8]
  •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서는 장승호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김민상 씨가 분했다. 여담으로 김계원[9]역을 박지일 씨가 맡았는데, 두 배우가 조회시간에 마주보고 앉아있는 장면을 보면 기분이 묘해진다.

4. 기타


  • 세간에서는 한국 현대사를 관통한 사건(12.12 사태)과 관련지어 정승화 장군을 기억하지만, 원래 군부에서 기억하는 정승화는, 휘하 장병들의 사격술 향상에 매우 공을 들이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정승화 장군이 거쳐간 부대는 사격자세라던가, 격발 등 사격 기본이 탄탄하게 갖춰졌다는 참군인 중의 군인이라는 후문.
  • 10.26 당시 자신을 몰라보는 육군본부의 초병에게 "나 참모총장이야!!" 하니 그 초병이 대답하기를 "뭔 총장?? 대학교 총장 말인가요?"라고 한 일화는 정승화 회고록에도 나와 있는 사실이다.[10] 궁정동 안가의 연회에 참석할 때 정승화 대장은 군복이 아닌 사복, 즉 정장 차림이었고, 자신의 관용차가 아닌 김재규의 차를 타고 온 상황이었다. 육본의 초병도 "한밤 중에 갑자기 민간 차량을 타고 나타난 사복 차림의 중년 남성"이 설마 육군참모총장이라곤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행히 곧 다른 장교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알아보고 무사통과시켰다고.[11]
  • 가족으로는 아내인 신유경[12], 3남 1녀가 있다. 자녀 중 셋째인 정이열은 아버지처럼 육군사관학교(육사 38기)를 나와서 장교로 복무하다가 대령으로 예편 및 전역했다.
  • 소설 리턴 1979에선 최규하의 둘도 없는 군부 파트너로, 군부 내 2인자 장태완과 함께 '유신 체제를 이용한 국정 개혁'의 한 축이 된다.
  • 대체역사 판타지 소설인 리턴1212에선 장정화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시작 배경이 12.12사태이기도 하고, 이름도 저작권 및 명예훼손 관련 문제 때문에 변경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누가 봐도 정승화 및 그 아들(여기선 아들이 주인공)이다.
  • 대한불교조계종 36대 총무원장을 지낸 승려 원행이 쓴 논픽션 <탄허 대선사 시봉 이야기>나 <10.27 법난>에 따르면 정승화 참모총장이 불교 신자였던 당시 오대산 월정사에서 머무르고 있던 탄허를 종종 찾아뵙고는 했는데, 탄허는 평소 정 총장이 자신을 찾아올 때면 "당신은 너무 우유부단하니 본분에만 충실하면 된다. 나와 그렇게 약속할 수 있느냐?"라고 말하고는 했는데, 10.26 사건이 벌어진 다음날 탄허는 제자인 원행을 시켜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에게 전화 좀 걸어 보라고 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자 원행을 직접 서울로 보내 정 참모총장을 만나서 "오대산에 한 번 다녀가던지 전화를 한 통만 해 달라"고 전하고 오게 했고, 원행은 참모총장 공관 앞에서 군인들에게 막혀 만나지 못하고 돌아와야 했으므로 끝내 정 총장은 탄허를 만날 수 없었다. 12.12 사태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전두환에 의해 국군보안사령부 서빙고분실로 강제 연행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승화는 자신의 측근이었던 군법사 한 명을 월정사로 보내 "감옥에서 공부하고 싶으니 탄허가 강의한 화엄경을 보내 달라"고 탄허에게 부탁했지만, 탄허는 "그 사람은 내 책을 읽을 자격이 없다. 가서 그 사람더러 '왜 나와 한 약속을 지키지 못했느냐'고 내가 묻더라고 전하라. 그는 이미 실기(失機)[13]했다."고 거절하며 돌려보냈다고 한다. 이후 10.27 법난이 벌어졌고, 정승화 전 총장은 불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

[1] 아명은 정팔만(鄭八萬)#[2] 다만 뭔가 수상쩍다는 건 느꼈는지 차 안에서 김재규가 "목이 마를텐데 이거라도 좀 드십시오."하면서 준 사탕을 바로 바닥에 버렸다고 한다. 본능적으로 자신도 암살당할지도 모른다는 위협을 느꼈다고 한다. 영화 그때 그사람들에서는 사탕 대신 을 준다.[3] 훗날 노태우는 회고록에서 박정희의 죽음을 현장에서 막지 못한 죄인이니 마땅히 물러나야 하는 사람인데 뻔뻔하게도 자리를 보전하길래 의로운 마음으로 들고 일어났다고 주장했다.[4] 이 지시에 대해 전두환은 이 지시가 김재규와 정승화가 사실상의 공모 관계였다는 근거라고 주장하나 정승화는 1990년대 무죄 판결 당시에 이 지시를 김재규가 총을 가지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의미였다며 반박했다.#[5] 보면 알 수 있듯이 삼김이 단일화만 했어도 노태우는 절대 당선될 수 없었다.[6] 이후 제5공화국에서는 12.12 직후 신군부의 지지로 국방장관이 되어 5.17 내란에 동조한 공군참모총장 출신의 주영복 역할로 출연했다.[7] 아이러니하게도 정종준은 1995년 코리아게이트에서는 정승화 체포령을 내린 전두환 역으로 출연했다.[8] 그 외, 정승화에 욕을 하고 고문을 했던 준사관 '신동기' 역은 배우 윤용현이 맡았는데, 잔혹한 악역 연기에 충실한 것뿐이지만 배우 본인이 너무 찝찝했는지 드라마가 끝난 뒤, 소주 한 병과 담배 한 갑 들고 대전 현충원의 묘소에 찾아가 "죄송합니다. 제가 이런 역할을 했습니다"라고 사과하며 절을 올렸다고...[9] 작중에서는 김계훈으로 등장한다.[10] 이에 대해 정승화는 대통령 저격이라는 비상사태가 일어났으니 이런 일도 있을 수 있다'라고 평가하고 있다.[11] 영화 그때 그사람들에서 나온다. 당시 초병역할은 홍록기가 맡았다. 심지어 영화에서는 입구에서 홍록기가 참모총장이라는데요? 라고 선임에게 말하자 그 선임이 참모총장한테도 들리게 "까는 소리하지말고 빨리 가라 그래!" 라고 외친다. 참모총장한테 까는 소리하지말라고 하다니.. 군필자에게는 상상만해도 소름돋는 ㅎㄷㄷ한 장면이다. 심지어 정승화는 니들 나중에 죽는다! 라고 분노로 부들부들 떠니 작중의 홍록기와 그 선임은 군생활 종쳤다고 봐야 할 듯.... 대학교 총장 발언은 김재규의 부하로 분한 김상호(배우)의 대사로 바뀌었다.[12] 남동생이 중앙고속 대표이사를 지낸 신대진 예비역 소장(육사 15기)이다. 12.12 사태가 벌어진 당일 그날은 신대진 대령의 준장 진급 발표날이었는데 처가에 직접 소식을 전하러 가기 전 공관에 들러 환복하려다 허삼수와 우경윤의 보고를 받게 됐다. 우경윤이 '이번에 진급시켜 주실 수 알았는데 그렇지 않아 서운합니다'라는 말을 대놓고 한 건 덤.#[13] 기회를 놓쳤다는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