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철

 



고인 영정과 망월동 묘역내 묘소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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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사자 검시 보고서. 자세히 보면 사망한 날짜가 1980년 5월 19일 새벽 3시라고 명시돼 있다.
1952년 8월 11일 전라남도 광주부 ~ 1980년 5월 19일 전라남도 광주시 광주 적십자 병원(향년 28세)
1. 소개
1.1. 5.18 민주화운동 이전까지의 일생
1.2. 사망
1.3. 희생 왜곡
1.4. 증명자료들
2. 대중매체에서
3. 관련 문서

광주의 첫 희생자는 시위대도 학생도 아니었다. 장애인 김경철 씨였다. 들을 수 없고 말도 잘하지 못하는 그의 죽음은 소요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내려왔다는 계엄군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말해주는 것이었다.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엄마와 못다 한 정에 울고 있을 나의 아들아! 한보다 더 짙게 새겨진 그리움을 뉘게 말할 쏘냐! 내 생이 끝나는 그날. 자랑스러운 네 모습 볼 수 있을 날 기다린다. -애미가-

아빠! 늘 어디서든 저와 함께 계신다는 믿음은 있지만 가슴 저미게 뵙고 싶을 때가 많아요. 단 한번이라도 아빠 얼굴보고 아빠를 불러보고 싶은 이 소망 아실런지. -딸 혜정이가-

망월동 묘역 홈페이지에 남겨진 유족들의 메시지


1. 소개


대한민국의 시민이자 5.18 민주화운동의 첫번째 희생자. 청각장애인이었으며, 생전에는 제화공이었다.

1.1. 5.18 민주화운동 이전까지의 일생


태어났을 때는 건청인이었으나, 6살이었던 어릴 때 바위에서 놀다 떨어져 심하게 다친 것이 화근이 되었다. 3개월 넘게 치료를 받은 후 경철 씨 어머니는 의사에게 항생제(마이신) 주사 놓는 법을 배워 집에서 경철 씨에게 주사를 놓았다. 그런데 하루에 한 번씩 반 병을 놓아야 하는 것을, 어머니가 빨리 낫게 하고 싶은 마음에 그만 하루에 두 번, 한 병을 다 놓았다. 당연하지만 약물 남용으로 인한 심각한 부작용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경철 씨는 뇌막염을 앓다가 후유증으로 끝내 청각장애인이 되어버렸다.[1] 귀가 들리지 않다보니 결국 말도 못하게 되고 말았다.
김경철 씨는 자라면서 제화기술을 배웠고 서울에 올라가 양화점에 취직해 기술을 익혔다. 광주에 돌아와서는 본격적으로 시내 다방과 사무실을 돌아다니면서 주문을 받고 구두를 수선하는 일을 했다. 28살이 되던 1980년엔 같은 처지인 여자를 만나 결혼했고 둘 사이에 딸이 태어났다.[2] 얼마후 딸의 백일잔치를 했고 며칠 뒤에 가족모임을 가졌다. 처남이 영암에 간다기에 배웅을 나갔다가, 함께 일하는 친구들과 점심을 먹었다. 그런데.... 그날은 하필 5월 18일이었다.[3]

1.2. 사망


막 두들겨서, 곤봉으로 두들겨서. 경철이는 너무 많이 맞아 갖고. 악을 쓰다가, 얼마나 두들겨 버렸던가. 수 쓴다고, 거짓말한다고, 어떻게 두들겼는가. (시신을)볼 수가 없는데, 그것을 맞고 죽어버렸나봐요.(울먹이며)

임금단(고 김경철 씨 어머니)(2013, 뉴스타파)

5월 18일 7공수여단은 무차별 살육작전에 나섰다. 시위했던 전남대 학생들뿐만이 아니라 시위 안 한 학생이나 학생이 아닌 시민까지 무차별로 군홧발로 차고 진압봉으로 두들겨 패고 끌고갔다.[4]
그런 상황에 김경철씨 역시 휘말렸다. 소리를 들을 수 없어서 상황 파악을 하지 못했던 경철 씨는 7공수여단 부대원들에게 붙잡혀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받았고, 연행된 직후 국군통합병원을 거쳐 적십자 병원으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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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사인명들을 그래픽으로 옮긴 것이다.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그는 얼마 가지 않아 숨을 거두었다. 진료비 청구서의 금액이 2100원이었다는 것을 보면 제대로 손써 볼 틈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5]
고인의 사인명은 후두부찰과상과 열상, 뇌안상검부열상, 우측상지전박부타박상, 좌견갑부관절부타박상, 진경골부, 둔부와 대퇴부타박상이었다. 쉽게 말해 뒤통수가 깨지고 눈이 터지고 팔과 어깨가 부서지고 엉덩이와 허벅지가 으깨진 것이다.[6][7]
이후 시신은 상무대로 옮겨졌으며, 또 다시 101사격장에 암매장되었다가 며칠 뒤 겨우 발견될 수 있었다. [8]
이런 기막힌 죽음을 당한 후 그의 가정은 파탄이 났다고 한다. 아내는 울기만 하다가 갓난아기인 딸도 놔두고 친정으로 떠나버렸으며, 결국 김경철 씨의 하나뿐인 딸은 할머니 손에서 자라게 되었다.

1.3. 희생 왜곡


김경철 씨 사망을 부정하는 역사왜곡세력이 있다. 그 세력에 따르면 김경철 씨가 계엄군에 맞아죽었다는 증거는 없으며 박인갑이라는 사람이 증언했는데 이 사람 증언은 믿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런데 박인갑이라는 사람 증언이 근거로 쓰였던적 없다. 김경철 씨 사망은 엄연히 보안사가 작성한 광주사태 검시참여 보고에 똑똑히 기록됐고 국방부장관한테 보고된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왜곡 주장은 5.18 최초 희생자는 김경철 씨가 아닌 버스에 압사당한 경찰관 4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김경철 씨는 1980년 5월 19일 새벽 3시에 사망했고, 극우선동가들이 말하는 경찰관 4명은 금남로 차량시위 도중, 1980년 5월 20일 오후 8시 10분에 사망한 사람들로, 시간 차이가 크다.
최근에는 극우 측에서 김경철 씨가 계엄군에 의해 사망한 것이 아니라 시민들의 인민재판으로 숨졌다는 다소 악질적인 허위 선동을 펼친 사례도 있다. 그러나 명백히 검시 자료에도 계엄군에 의해 사망한 것이 기록되어 있기에 이는 허위 사실이며 특히 이 부분은 단순 민주화 운동 폄하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개인에 대한 고인모독, 사자에 대한 명예훼손이 될 여지가 충분하기 때문에[9] 어디가서도 떠들지 않는 편이 좋다.

1.4. 증명자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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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6월 보안사령부가 검시하고 작성한 '광주사태 검시참여 보고'라는 검시 자료엔 사명경위가 '계엄군-병실'이라고 분명히 나와있다.
주영복 국방부 장관은 공수부대원들이 진압을 하다 김경철씨가 사망했다는 사실을 보고 받았다.

蔡검사=공수부대원들이 그날 금남로에서 시위를 해산하며 강경진압을 하다 김경철이 최초로 사망했는데 그 사실을 알고있나요.

周피고인=19일 밤에 들었습니다.

1995년 검찰 보고서에도 이는 명백히 드러나 있다.

(3) 5월 18일 상황

...(중략)...

시위 진압 과정에서 부상을 입은 김경철(남, 28세, 제화공)은 통합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후두부 찰과상 및 열상으로, 5.19. 03:00 사망하였고, 이종남(남, 27세) 등 광주 시민 수십 명이 부상을 입었음.(64쪽)

(5) 5월 20일 상황

...(중략)...

20:10경 노동청 쪽에서는 부근 주유소를 점거한 시위대가 기름을 차량에 부어 불을 붙인 후 대치하고 있던 경찰 쪽으로 밀어 붙였으며, 그 와중에서 고속버스 1대가 상무관 부근 경찰 저지선으로 돌진하여 경찰관 4명이 버스에 깔려 사망하고, 5명이 부상을 입었음.(84쪽)

5·18 관련 사건 수사결과(1995), 서울지방검찰청·국방부검찰부

뿐만 아니라 전두환 정권 시절인 1985년에 작성된 국가안전기획부 자료 94쪽에도 5월 20일에 고속버스 압사로 인한 두개골 파열로 함평경찰서 출신 경찰관 정충길(38), 박기웅(37), 강정웅(37), 이세홍(38)이 사망했다고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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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중매체에서


5.18 최초의 희생자인지라, 그를 조명한 문학 작품은 꽤 여러 개 있다.
<오월 일기예보>
-서해성
그 5월은 더웠다.
평년보다 얼마나 더 기온이 상승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타살된 시신이 썩기에는 더 없이 알맞은 날씨들이었다.
그리고 벙어리가 죽었다.
도청 분수대에서 저녁부터 횃불성회가 있었다.
계엄령을 해제하라!
분수대에서는 물기둥 대신 인간 함성이 뿜어 올랐다.
기온이 오르지 않아서였을까.
그날은 아무도 죽지 않았다.
5월 17일은 맑은 토요일이었다. 20.9°C. 손목을 채운 수갑의 차가운 느낌을 느끼기에 딱 좋은 온도였다. 비상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고 예비검속으로 사람들은 끌려갔다.
벙어리는 양화점 가게에서 가죽을 잘라내고 구두를 기웠다.
헬리콥터가 도시 밤하늘을 오래 비행했다. 그 때문이었을까. 이튿날 도시는 기온이 급상승했다.

그날은 구름이 짙었는데도 기온은 섭씨 25.1°C였다.
일요일이었고, 5월 18일이었다. 광주광역시 1980년이었다.
오전 10시 전남대학교 정문을 막고 있는 계엄군과 투석전을 벌이던 학생들은 교문을 밀치고 시내로 밀려나가 계엄령 철폐를 요구하면서 도심에서 시위를 벌였다. 시민들이 조심스럽게 섞여 들었다. 그 과정에서 4백명 넘게 체포되어 끌려갔다.
오후 4시 공수부대원은 벙어리를 낚아챘다. 구두를 만드는 스물여덟 살 먹은 제화공. 김경철은 말 못하는 벙어리였다. 그는 농아신분증을 꺼내보이면서 손짓 발짓으로 살려달라고 했지만 그걸 희롱하는 걸로 알아 들은 공수부대원은 군화발로 얼굴을 짓이기고 몽둥이를 입에 쑤셔 넣고 말을 하라고 했다.
구호 한 마디 외칠 수 없었던 벙어리는 맞아 죽었다.
그는 그해 5월 첫 타살자였다.
그는 침묵의 비명으로 타살되었다.
밤 9시 광장에 모인 6천 명을 헤아리는 사람들은 벙어리 대신 꺼이꺼이 외쳤다.
이튿날 새벽 3시
월요일, 5월 19일 벙어리는 광주적십자병원에서 죽음을 확인했다.
가랑비 5.6MM가 뿌린 낮 최고 기온은 섭씨 22℃였다.
벙어리가 죽기 좋은 온도가 따로 있는 건 아니었다. 36.5℃였던 그의 몸은 22℃로 썩어가기 시작했다.
죽은 그는 국군통합병원으로 실려 갔다.
화요일 5월 20일에는 낮비가 제법 내렸다. 12MM였고 비 때문에 온도가 내려가 17.5°C였다. 그래도 더웠다. 알 수 없었다.
해가 질 무렵 저녁 7시에 2백여대 택시와 버스가 경적 시위를 했다. 한 시간 뒤 3공수부대에게, 11공수부대에게 실탄이 분배되었다. 밤 10시 궁동에 있는 방송국이 불타올랐다[10] 밤 11시 공수부대가 광주역에서 총기를 난사했다. 구경 5.56MM짜리 소총 탄환은 날아가면서 보았다.
도청 앞에서는 10만 명이 밤을 새워 집회를 벌였다.
그들이 부른 노래는 ‘애국가’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었다.
그 밤, 그들이 사랑해야 할 조국은 그들에게 총알을 퍼부었고, 그들은 더 오래 노래 불렀다.
어머니는 통합병원에서 죽은 아들을 보았다.
처치 받은 것은 포도당, 삐콤, 타치온이 전부였다.
벙어리의 몸은 통합병원 영안실에서 이따금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말하고 싶다. 나는 맞아죽었다.
5월 21일 수요일은 휴일이었다.
부처님 오신 날이라서 부처님도 쉬었다.
틀림없이 쉬었다.
그날 낮 12시 55분경 도청 앞에서 탄환은 애국가 후렴 ’대한 사람 대한으’와 ‘로’ 사이에서 발사되었다.
계엄군의 총알은 ‘애국가’를 꿰뚫고 갔다.
찢어진 애국가 사이에서 이런 말이 들려왔다.
개새끼들아, 왜 조준사격 안 하는 거야!
탄약을 나눠주면서 외치는 중대장의 질책은 죽음을 재촉하는 저승사자의 기도소리였다.
모른다.
부처님이 방금 발사된 뜨거운 탄피 사이에서 수도중이었는지도.
부처님이 쉬고 있던
그 오후에 사람들은 대신 무기고로 달려갔다.
도시 밖으로 연결된 전화를 포함한 모든 통신이 차단되었다.
저녁 7시 반쯤에 도로가 끊겼다. 계엄군은 그 경계선까지 물러나 있었다.
바깥 세상과 절연된 도시의 밤은 피 흘린 채 고요했다.
종일 맑은 그날 온도는 26.1°C였다.
얼마나 고요한 온도인가.
밤새 남도의 도시에서는 더 많은 감꽃이 흰 옷을 입고 떨어져 내렸다.
그 중에는 벙어리 몫인 감꽃도 들어 있었다.
계엄군이 시내에서 철수한 걸 안 건 다음날이었다. 구름이 많이 끼었고 5월 22일 목요일 최고 온도는 28°C였다.
사람들은 몰려나와 밥을 나누고 살아있음을 서로 확인했다.
일상이 너무도 평온해서 난리가 나고 학살이 일어났다는 게 도리어 기이할 지경이었다.
벙어리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기 몸이 썩어가고 있는 걸 믿을 수 없었다.
5월 23일은 날이 흐렸다.
미니버스를 탄 사람들이 주남마을을 지나고 있을 때 총소리가 들려왔다. 18명 중 15명이 현장에서 사살되었다. 생존자 3명 중 2명을 뒷산으로 데리고 올라가 즉결처분했다. 손목에 총상을 입고 혼자 살아남은 여고생은 군인들 무전기로 주고받는 말을 들었다.
왜 귀찮게 데리고 오냔 말이야!
저승 사자들은 한국말을 사용했고 군복을 입고 있었으며, 너무 일상적인 어투였다. 그들의 이름은 11공수여단 62대대 4지역대다. 소녀가 그 말을 듣고 있을 때 기온은 섭씨 25.8°C였다.
25.8°C는 너무 뜨거운 온도였다.
토요일날에 군인들은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고 총질을 해서 쏴죽였다. 탄환은 구경 5.56MM이거나 7.62MM였다.[11]
탄환은 12.6MM 비가 내린 5월 24일 섭씨 26.8°C의 허공을 갈랐다.
죽은 벙어리는 더웠다.
그가 말없이 썩어가고 있었으므로 남도는 더웠다.
두 번째 일요일인 5월 25일 이틀째 낮비가 뿌렸다.
누군가 도청 벽에 미국 항공모함 2척이 한반도를 향해 오고 있다는 대자보를 붙였다. 아직까지 항공모함에 민주주의가 실려온 적은 없었다.[12] 강수량 26.1MM 비가 내린 이 도시만 예외일 리 없었다.
낮 온도는 23.3°C였다. 벙어리의 몸이 마저 문드러지기에 알맞은 온도였다.
5월 26일 월요일은 비 끝에 온도가 떨어져 19.1°C였다. 여전히 죽은 자들의 몸은 썩고 있었고, 썩고 있었으므로, 한없이 더웠다.
자정까지 도청을 떠나라는 최후 통첩 때문에 시신은 더 빨리 부패하고 있었다.
오후 5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항쟁 지도부가 외신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벙어리의 몸은 잠시 썩는 걸 멈추고 대변인 윤상원의 목소리에 들리지 않는 귀를 기울였다.
헬리콥터가 하늘에서 투항 권고 삐라를 뿌렸다.
가두방송 차량이 광주를 지켜달라고 애원하면서 밤길을 내달려갔다.
아무도 잠들지 못하는 침묵의 새벽이 골방마다
벙어리처럼 울었다.

5월 27일 새벽 8°C 기온 속에 계엄군 20,317명이 도청을 향해 1만여발의 사격을 가했다. 남아 있던 시민군은 157명이었다. 그 아침에 26명이 사살되었다. 핼리콥터는 도청 일대를 비행하면서 탄환을 쏟아 놓았다. 5.56MM와 3inch 탄환이었다.
태양은 스물여섯 명의 피를 머금고 아무렇지도 않게 떠올랐다. 안개도 끼질 않았다.
진압이 끝난 낮 온도는 22°C였다.
물청소를 마친 금남로 도로는 오가는 차 한 대 없이
말끔했다.
날도 맑았다. 화요일이었다.
너덜거리는 벙어리의 시신이 트럭에 실려갔다.
가슴을 대검으로 찔려 죽은 여성[13]도 트럭에 실려갔다.
트럭에 실려가지 못한 채
살아있던 사람들의 살이 어디선가 썩어가고 있었다.
그러므로 5월은 더웠다.
실제로는 평년 기온과 그닥 차이가 없었다.
그래도 더럽게 더웠다.
이것이 인간이 5월을 기억하는 방식이다.
벙어리의 몸이 썩고 있는 도시는 덥다.
산 자가 썩어가는 모든 대지는
덥다.
2007년 개봉된 영화 화려한 휴가에도 그를 모티프로 한 장면이 나온다. 금남로에 저지선을 치고 주둔하는 계엄군에게 장애인이 몰매를 맞아죽고, 다음날 리어카에 실려 길가에 버려진 그의 시신에 아버지가 태극기를 덮어주며 흐느끼는 장면이 등장한다. 다만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은 말을 할줄 아는 지적장애인이었고 계엄군들 앞에서 군인 흉내를 내며 방탄모를 빼앗아 쓰는등 어그로를 끌다가(...) 리미터가 풀린 군인들에게 맞아죽는지라 어떻게 보면 고인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었다. 사실 화려한 휴가는 미흡한 연출 문제로 비판을 많이 받았었다.
2017년 개봉한 택시운전사에서도 김경철의 사망일자 대사가 나온다.

3. 관련 문서



[1] 즉 후천적 청각장애인이다. 이런 사람을 중도실청자(中途失聽者)라 한다.[2] 딸은 건청인이라고. 이런 사람을 코다#s-10라고 한다.[3]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17~18쪽[4] 김영택 동아일보 기자 증언.[5] 당시 물가를 감안해 보면 진료비 2100원은 오늘날의 25000원 가량인데, 사망시간이 5월 19일 새벽 3시인 것을 보면 사실상 응급실로 후송된 것으로 보인다. 응급실이 예나 지금이나 비보험에 간단한 의료행위가 주업무인 것을 생각해 보면 정황상 접수만 했을 뿐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못했다는 뜻이다. 아니면 치료를 해보기도 전에 사망했거나.[6] 출처: 광주사태 사망자 검시결과 보고, 408쪽, 12.12•5.17,•5.18 국방부 보고서 70쪽, 국방부 장관 증언, 5·18 '충정명령'은 무차별진압 작전[7] 5.18 자유공원의 입구에는 이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다. 매우 참혹한 모습이다.[8] 그렇다. 가족의 동의도 없이 시신을 가져다 묻어버린 것이다.[9] 고인의 모친과 딸이 현재 생존해 있다.[10] 많은 사람들이 항쟁 당시 MBC만 공격을 받은 것으로 알고있지만, KBS광주방송총국역시 사옥이 시민군의 방화공격을 받아 전소되었다. KBS광주방송총국이 전소된 것은 5월 20일 낮, 광주문화방송 사옥이 공격을 받은 것은 5월 21일 밤에 일어난 일이었다.[11] 위 대목은 5월 24일 광주시 남구 송암동에서 벌어진 전교사 보병학교 교도대와 11공수여단 인원들 간의 오인총격전을 묘사한 것이다. 긴장하고 있던 광주 보병학교 인원들이 11공수의 KM900장갑차를 시민군이 탈취한 장갑차로 오인하고 쐈다는 주장이 있다.[12] 당시 한국에 와 부산항에 정박한 항공모함은 미드웨이급 항공모함의 3번함 코럴시(CV-43 Coral Sea)였다. 이 소식이 투사회보 등 대자보를 통해 전해지자 광주 시민들은 민주주의의 국가 미국이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는 광주를 도우러 왔다고 생각했지만, 코럴시의 임무는 급변하는 한국 상황을 대비해 북한의 남침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한 무력시위와 유사시 한국 내에서 철수하는 미국 민간인에 대한 수송 업무였고, 당연히 두가지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니 부산항에 잘 정박해 있다가(...) 항쟁진압후 한국을 떠났다. 당연히 이는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미군의 방관/조장 논란을 가속화시켜서 80년대 국내에 반미감정을 일으키는 계기가 된다.[13] 5월 21일 사망한 손옥례씨를 묘사한 것이다. 당시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준비하다가 아버지로부터 외출이 너무 잦다는 이유로 꾸지람을 듣고 집을 나갔다가 시위에 휩쓸려 변을 당했다. 이후 아버지는 딸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으로 충격을 받고 쓰러져 이듬해 사망했고, 병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남동생도 군인들에게 폭행을 당해 정신질환자가 되었다. 신군부가 기입한 그녀의 사인은 좌유방부 자창, 우측흉부 총상, 하악골 총상, 좌측골반부 총상, 대퇴부 관통총상, 우흉부 관통총상이었는데, 바꿔 말하면 총알을 5발씩이나 맞고 대검에 왼쪽 가슴을 찔려 사망했다는 뜻이다. 그녀의 죽음은 민중가요 오월의 노래에도 언급이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