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태(재야사학자)

 

한국의 역사왜곡자유사역사학자
백지원
김대령
이덕일
이주한
김상태
문정창
1. 개요
2. 상세
3. 문제
3.1. 비판방식
3.2. 학자들에 대한 편견
3.3. 학계왜곡
3.3.1. 학계가 기존설을 떠받든다?
3.3.3. 한사군에 대한 학계연구 폄훼
3.4. 한사군 문제
3.5. 사례
3.5.1. 주보돈 교수의 인용 곡해
3.5.2. 박원순을 비롯한 역사비평사 편집위원들 매도
3.5.3. 송호정 박사의 "인용"을 "표절"로 소개
4. 그나마 나은점(?)들
4.1. 학계의 대중화 노력 지적
4.2. 이덕일 세력 비판
4.3. 환빠 혐오와 초록불 긍정
5. 그외


1. 개요


한국의 재야사학자이자, 2012년 새로 등장한 유사역사학자. "주류강단학자들은 식민학자니 응징하겠다"는 그릇된 정의감을 지닌 남자. 다만 환빠는 혐오한다. 거기다 초록불의 책을 인정하는 면을 보였다. 이덕일이나 김대령과는 태도가 다른부분. 그래서인지 그 둘과는 다르게 의도는 없고 무지한 것뿐이라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아래 사례부분을 보면 알겠지만 김상태도 그 둘처럼 인용 곡해를 해서 실제 내용과 다르게 쓰는 짓을 한다.

2. 상세


서울대학교 수학과를 졸업했으며 역사학과와는 무관한 재야사학자이다. 이 사람은 일단 다른 재야사학자하고는 다르다. 대개 이런 류의 책을 보면 소위 '환단고기 신봉자'들이라던가 '재야사학계의 인물'이 자신들의 논리에 입각하여 한국 고대사학계를 이른바 '강단사학계'라 칭하며 과거 일제가 심어놓은 식민사학의 잔재를 이어가고 있다고 하며 비판하는 식으로 주장한다. 그런데 이 사람은 '환단고기 신봉자'들이나 '강단사학계'를 모두, 동시에 비판하고 있다. 스스로를 '환단고기 신봉자'와는 다르다며 확실히 선을 긋고 있으며, 또한 나름대로 과학적이고 실증적이며 객관적인 시각으로 주류 사학계를 비판해보겠다는 포부를 드러냈다.
근데 이 사람도 객관적인 시선으로 한국 고대사계를 비판하지는 못한다. 게다가 그 비판하는 모양새도 대개 근거없는 낭설을 늘어놓는 수준이다. 또한 저자는 '강단사학자'들의 논문을 읽고나서는 '당최 이해하기 힘들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데, 말그대로 저자는 그 논문의 내용을 심도있게 이해하지 못하고 내용과 결론 부분만 대강 파악하고 이에 대해 비판하는 티가 많이 나는 편이다. 저자는 해당 학자의 설에 대해 비판하면서도 이해하려 노력하지도 않았다.

3. 문제



3.1. 비판방식


김상태는 나름대로 근거를 들어 '강단사학자들의 학설을 논파한다'고 하는데 실상은 구조상 문제가 많은 편이다. 작중 저자가 '강단사학자'의 학설을 비판한다는 부분들이 이상하다. 학자들이 낸 논집 중에 문제가 될만한 부분을 발췌하고 후에 윤내현의 설을 제시하고, 윤내현의 이러한 설이 비하면 저 학자의 설은 얼마나 '식민사관적인가', 혹은 '근거가 없는가' 하는 투로 비판을 하는데 그게 다다. 어떠한 제대로 된 근거나 논리적 정당화를 못 하고 있다.

3.2. 학자들에 대한 편견


또한 자신의 책에 특히 근거없는 낭설을 여러 개 늘어놓고 있다. 《엉터리 사학자 가짜 고대사》 라는 책만 해도 그렇다. 예로 '이병도-이기백-노태돈'의 3대 식민사학 계보라던가, 한국 고대사학계가 스승의 설만 붙들고 늘어지며 이에 반하는 학설은 죄다 가지를 쳐내는 기득권집단이라던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병도는 이미 30년대에 기자조선을 세운 기자가 중국에서 건너왔다는 이른바 기자동래설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또한 위만을 조선인으로 보는 학설을 발표한 바 있으며, 일본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을 실증주의적 논거로 비판하기 위해 한국계 국사학자들과 더불어 진단학보를 창설하는 등, 오늘날의 기준에서 보면 오히려 민족사학자 면이 강한 행보를 남겼다.
물론 이병도가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린 것은 사실이나, 이는 이병도가 딱히 어떤 친일행위를 해서 그랬다기 보다는 일제 강점기 시기에 정부 주도로 편찬한 <조선사> 편찬 작업에 참여했기 때문인 것이다. <조선사> 편찬 자체에는 일본 식민사학자들이 관여한 이상 내용적인 한계도 분명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나, 당시 이병도를 비롯한 한국계 학자들 또한 편찬 작업에 참여한 덕분에 각종 사료와 학설을 종합하여 고찰해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로 인하여 해방 이후의 한국사학의 기틀을 잡았다. 이병도의 경우는 이광수(소설가)같은 골수친일파가 아니라 소극동조자에 속한다. 물론 이병도의 학설이 식민사관에 영향 받은 점이 분명 있긴 하다. 예로 이병도는 일본인 스승의 설을 그대로 수용해 <삼국사기>의 초기 기사를 전면적으로 불신하는 등 식민사학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한계도 있다. 그런점은 비판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이병도의 학설 자체가 식민사관보다는 당대의 학풍이었던 실증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학계성과를 묵살할만한큼 친일경력이 있는 건 아니다. 친일파 문제가 왜 단순하지 않은가는 친일인명사전만 봐도 알 수 있다.
또한 더불어서, 이병도는 진단학회에서 활동할 당시에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내용의 글을 쓰고 이를 발표했던 행적이 명백하다.
이기백으로 말할 것 같으면 오산 중학교를 설립했던 독립운동가 이승훈의 종손(從孫)으로, 출신 부터가 친일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며 본인도 오산중학교를 졸업하였다. 더욱이 이기백은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징집되어 전선에 병사로 투입되었기에 친일은 커녕 친일에 관련된 생각도 해볼 틈이 없었다. 한편 이기백이 와세대 대학에 진학했다거나, 혹은 창씨개명을 하였다고 친일파라고 비난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일본 유학을 위해 창씨개명을 했던 시인 윤동주도 친일파라고 할 수 있는가?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은 마찬가지로 친일인명사전이라도 읽어보자.
놀랍게도 저자는 이러한 학자들의 내력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자신이 서문에서 비판했던 '환단고기 신봉자'들이 이병도 라인을 식민사학자로 몰아가던 논리와 별 다를바 없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이는 스스로 객관적이기를 거부한 것이며, 무엇보다 이 3인의 학자들에 대한 이해가 극도로 부족한 것이다.

3.3. 학계왜곡



3.3.1. 학계가 기존설을 떠받든다?


김대령을 비롯한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서 역사를 왜곡하려는 세력이 잘 쓰는 수법중 하나가 5.18 좌파사관설, 좌편향설이다. 논쟁이전에 기존 연구자체를 좌파라고 원천봉쇄의 오류를 저질러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기존학계에서 좌파사관을 비판했고 현재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인식과 해석은 90년대에 학자들이 좌파 운동권 세력을 많이 무너트린 후의 모습이다. 이런 걸 부정하고 좌파사관이라는 왜곡을 벌이는 것이다.
김상태는 이런 김대령과 유사한 수법을 쓰고 있다. 주류사학계를 스승의 설이라면 무슨 종교라도 되는 양 떠받들고 신봉한다며 비판을 늘어놓는데 실제 한국사학계의 분위기와 풍토와는 전혀 맞지 않는 주장이다. 애초에 저자가 강단사학의 거두라며 그토록 비판했던 이병도나 이기백의 설도 오늘날에는 대개가 낡은 학설로 취급되어 논문을 쓸때 참고자료 정도로 쓰일지언정 정설로 보지 않는 학자들이 대다수다. 물론 한국 고대사학계의 기틀을 마련했던 두 사람의 업적 자체는 인정받는 편이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낡고 잘못된 설마저 눈가리고 아웅하며 받아들일만큼 한국 고대사학자들이 염치없고 학문적으로 쇠락하지는 않았다. 또한 김상태는 노태돈이 학설을 발표하면 후배 사학자들이나 젊은 역사학도들이 그 것을 무슨 진리라도 되는냥 의심없이 믿고 받아들인다는 투로 말하고 있으나, 이 역시 왜곡이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한국사학계는 스승이나 선배 학자의 설이라고 해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도 거의 없고, 애초에 학계에서 발표되는 대다수의 논문들은 기존의 연구성과에 뿌리를 두면서도 한편으로는 기존의 학설이나 통설을 비판하는 경우도 굉장히 많다. 이는 진지한 태도로 논집 몇편만 잘 읽어본다면 알 수 있다.
이러한 발상 자체는 저자가 한국 고대사학계의 실상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악의가 담긴 선입견을 지녔거나 혹은 그런 편견을 조장하려는 의도로 만든 학계왜곡이다. 김상태가 책을 쓰기 전에 최소 6개월~1년 동안 한국 고대사학계에서 해마다 발표되는 논문을 분야를 가리지 않고 골고루 읽어본 후에, 직접 사학자들의 세미나에 참여하여 그들의 논지를 몇번 들어본다거나 해도 이러한 오해는 금방 사라질 것이다. 물론 고의로 벌인 것이면 소용없겠지만 말이다. 특히 학술토론 중에 저가가 무슨 학계에서 대단한 추앙이나 신봉이라도 받는 것마냥 비아냥댄 주류 사학자들이 후배 학자들이나 다른 학자들과 치열하게 논쟁하는 것을 직접 보게 된다면 한국 고대사학계는 특정 학설에 대한 맹신과 추종보다는 지속적인 토론과 의견 교류로 지탱되고 또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3.2. 동북아역사재단 폄훼


한편 중국의 야욕어린 동북공정에 맞서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동북아역사재단이나 적지 않은 학문적 성과를 거둔바 있는 한국 고고학계마저 주류 사학계와 한통속이며 곧 식민사학의 잔재들이라고 비판하는 부분이 있다. 과연 김상태는 동북아역사재단의 책들을 제대로 읽어본 걸까? 동북아역사재단 사이트에 가면 총서들과 논문들을 공짜로 볼 수 있다. 그런것들을 정말 읽어봤을까?
물론 동북공정에 대항하기 위해 한국 사학계가 낸 대책도 그리 큰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못하는 실정이지만, 이는 중국 사학자들의 주장을 논파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동북공정 연구회 측에서 아예 한국 사학계와의 대화를 거부하고 귀를 틀어막고 있는 독단적 태도를 보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중국은 독재국가다. 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과는 당연히 상황이 다르다. 제대로 된 논쟁은 힘든 것이다.

3.3.3. 한사군에 대한 학계연구 폄훼


또한 저자는 서문에서 "신채호 이후 '대고조선론'과 '한사군 한반도 부재론'은 주류 고대사학계에서 비과학적이고 비실증적인 이론으로 치부되어 왔다. 그러나 놀랍게도 주류 고대사학계의 위와 같은 입장은 학문으로 전혀 검증된 바 없으며 심지어 변변한 논문 하나조차 제출된 적이 없다."라고도 하고 또 윤내현의 학설을 제대로 된 근거를 대며 비판하는 논문도 없다고 언급한 바 있는데, 이는 최근까지도 발표되고 있는 낙랑군 관련 논문을 무시한 것이다.


3.4. 한사군 문제


김상태는 한국고대사학계에서 낙랑군이 한반도에 있었음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하는 평양 출토의 낙랑 유물을 모두 조작된 것이라 보고, 주류사학계에서도 이를 알기에 만리장성 늘이기같은 수법으로 자신들의 학설을 지키려 했다고 주장다. 그 많은 평양계 낙랑군 유적들이 모두 조작이라면 아직까지도 평양에서 출토되고 있는 유물들도 모두 중국인들이 조작한 것이거나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옮겨다 묻었다는건가? 애초에 역사를 조작한답시고 파도 파도 끝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양의 가짜 유물을 매장한다거나 옮겨 묻는다는 것인가?
또한 북한에서 발굴되었다는 단군릉을 남한 사학계에서 불신하였다는 점을 저자가 비판하며 무슨 '빨갱이 때려잡기' 운운하며 이를 정치적으로 해석하려는 부분을 보았는데, 이는 저자가 당시 북한 사학계의 실정을 제대로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북한 사학계가 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식민사관 잔재의 청산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국가에서 앞장서서 훌륭한 학자들을 양성하며 학술 토론을 활발히 진행하였으며 중국 측과의 공동 발굴 작업 등으로 인해 동아시아 고대사학계에서는 일본 학계와 더불어 상당히 큰 성과를 거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북한 사학계는 70년대 말~80년대 초에 접어들면서 사실상 김씨 정권의 하수로 전락하여 그들의 입맛에 맞는 어거지 학설이나 발표하는 어용 학계 신세가 되어버렸다.
북한학계의 실정을 보려면 이종석, 북한의 역사 2 (주체사상과 유일체제 1960-1994), 역사비평사, 2011 부터 보고오자. 이것만 봐도 북한 주장이 왜 믿기 힘든지 알 수 있다.

3.5. 사례



3.5.1. 주보돈 교수의 인용 곡해


주보돈 교수는 역사비평사의『한국 전근대사의 주요 쟁점』에서 이종욱 교수를 이렇게 비판한 적이 있다.

신라 사회의 발전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핀 이종욱(李鍾旭)은 경주 지역에 최초로 정치체가 출현한 것은 지석묘 사회로서 기록에 보이는 6촌 단계인데, 이를 치프덤으로 간주하여 삼국사기 등 문헌에 보이는 용어를 이용하여 추장(酋長)사회로 번역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신라의 국가형성 발전과정은 6촌 단계에 이어 소국 단계(사로국), 소국 연맹 단계, 소국병합 단계를 계기적으로 거친 것이라고 이해했다. 이는 성읍국가론에다가 치프덤론을 접합하여 만든 그의 독특한 국가형성 과정론이라고 하겠다. 그는 이러한 체계가 기존의 인류학과 고고학의 발전단계론에서는 찾아낼 수 없는 새로운 모델로서, 인류학 이론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이론이라고 과감하게 자평했다.- 주보돈, 2002, 「초기국가 형성론」, 『한국 전근대사의 주요 쟁점』, 서울;역사비평사, 22쪽.

이에 대해 이종욱은 자신의 주장은 말할 것도 없고 취프덤론 일반에 비판적인 견해를 대상으로 반론을 펴면서 자신의 주장을 적극 옹호하고 나섰다. 그는 비판자들이 대체로 자신의 주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비판을 하며, 문헌사 전공자들은 물론이고 인류학 전공자들조차 인류학 이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국가 형성 발전에 대한 충분한 이해 없이 인류학 이론 적용 여부를 논하고 있는 것이 문제라고 논단했다. 그러나 이러한 반비판을 시도하면서 기준으로 삼는 유일한 잣대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통설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설(自說)일 따름이었다. 이런 접근방법을 취할 경우 결국 순환논리에 빠질 수 밖에 없으므로 논의가 더이상 진전되기란 불가능하다. 따라서 자설을 설득력 있게 고수하려면 객관적인 기준과 방법에 입각한 반론을 전개할 필요가 절실하다고 판단된다.- 주보돈, 2002, 「초기국가 형성론」, 『한국 전근대사의 주요 쟁점』, 서울;역사비평사, 24쪽.

그런데 김상태는 이걸 이렇게 인용했다.

이 논쟁들은 시간이 지나 흐지부지되고 현재는 부체제 문제만 남았으면 이 부체제 개념이 앞으로 초기국가 형성과 발전사를 체계화해 갈 것으로 본다. 그리고 이 논쟁 중에서 제일 한심한 사람은 서강대학교의 이종욱이다. - 김상태, 2013, 『한국 고대사와 그 역적들』, 서울;책으로보는세상, 148쪽

주보돈 교수가 "자설에 근거한 순환논리에 빠질 수 밖에 없으니 설득력있게 고수하려면 객관적인 기준과 방법에 입각한 반론을 전개해야한다."는 평가를 "제일 한심한 사람은 서강대학교의 이종욱이다"고 인용했다.
물론 김상태 교수는 이것이 "인용한 것이다."고 말하진 않았다. 다만 주보돈 교수의 결론은 이렇다면서 인용방식으로 썼으며, 다른 아무 설명 없이 "일반 독자들은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른다"고 써서 주보돈 교수가 실제로 한 말인 것처럼 썼을뿐이다.

3.5.2. 박원순을 비롯한 역사비평사 편집위원들 매도


역사비평 편집위원회 중 고대사 연구자는 없었다. 대신 고대사학계에서 학문적으로 인정을 받는 주보돈 박사와 송호정 박사에게 집필을 맡겼다. 역사비평사는 자기들만의 주관적인 사상보다는 학계에서 인정받는 학자들에게 집필을 맡겼다. 그러나 김상태는 이러한 편집위원들을 "문학연구자는 있어도 고대사연구자는 없다"며 "고대사에 무지한 자들"이라는 이중잣대를 보였다. 더구나 이부분은 주보돈 교수의 인용을 곡해하던 부분이였다.

2002년 역사비평사는 <한국 전근대사의 주요 쟁점>을 출간했다.

이 책의 저자는 '역사비평 편집위원회'로 되어 있다. 주요 쟁점 중 고대사에 관한 부분은 주보돈과 송호정이 집필했다. 당시 역사비평 편집위원회 구성원들은 박원순을 포함한 10여 명인데, 이들 중 문학 연구자는 있어도 고대사 연구자는 없다. 그러니깐 버릇과 관례대로 고대사 분야는 주루 고대사학계에 의탁한 것이다. 이 가운데 송호정의 논문은 더 거론할 것이 없다. 당시 10여 명의 역사비평 편집위원들이 얼마나 무지했는지를 보여주는 희극일 뿐이다.

문제는 주보돈의 논문<초기국가 형성론>이다. 이 논문의 내용은 부족국가, 성읍국가 등 고대국가 형성론을 둘러싼 논쟁을 약술한 것이다. 결론은 이렇다.

|{{이 논쟁들은 시간이 지나 흐지부지되고 현재는 부체제 문제만 남았으며 이 부체제 개념이 앞으로 초기국가 형성과 발전사를 체계화해 할 것으로 본다. 그리고 이 논쟁 중에서 제일 한심한 사람은 서강대학교의 이종욱이다.|}}

일반 독자들은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른다. 내 추측으로는 당시 역사비평 편집위원회는 물론 현재의 진보사학자 대부분도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김상태, 2013, 『한국 고대사와 그 역적들』, 서울;책으로보는세상, 148쪽

물론 역사비평 편집위원회 들은 저런 문장을 당연히 이해 못할 것이다. 왜냐면 주보돈 교수는 저런 말을 한 적이 없으니깐. 그래놓고 역사비평사 편집위원들보고 "무지하다"는 비판(???)을 했다. 제대로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를 보여줬다.
참고로 이덕일도 역사비평사를 비난한 적이 있는데, 정병설교수의 논문을 실은 것을 보고 그랬다.[1] 학술적으로 문제없는 논문을 실었는데 유사역사학자들에게 비난을 받은 것이다.

3.5.3. 송호정 박사의 "인용"을 "표절"로 소개


김상태는 송호정도 표절을 했다며 이런 글을 썼다.

표절의 근거라는 것, 어릿광대의 촌극

윤내현이 리지린을 표절했다는 이형구의 근거는 16가지다. 매 항목마다 리지린의 저작과 윤내현의 저작에서 발췌한 인용문을 나란히 나열해놓고 거기에 간간히 자신의 의견인 비고란을 덧붙여 이를 표절이라고 주장했다. 여기서는 이 16가지 중 세가지 구경하겠다. 구경이 끝나면 그걸로 충분하다는 걸 알게된다.

다음은 《역사학보》146집 308쪽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우선 중국 문헌자료에서 고조선 위치를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1. 《관자》23권 <규도>에서는 조선을 해내의 지역…, <경중갑>에서는 고조선이 제나라에 8천리가 된다고 한 것은 다만 멀다는 뜻을 표시한 막연한 수자임을… (12쪽)

윤​ 조선이라는 명칭이 가장 일찍 나타난 중국문헌은 《관자》다. (……) 그뿐아니라 <규도>에서는 고조선이 해내에 있었던 것으로…(125쪽), <경중갑> 편에서는 제국으로부터 8천 리 떨어진 것으로 말하고 있다. 여기서 8천리는 실제 거리가 아니라 멀다는 뜻이 되겠는데…(126쪽)

이형구의 세 번째 근거다. 짧아서 먼저 인용했다. 인용은 이형구의 논문에 쓰여 있는 그대로다. 말줄임표나 중략 표시도 이형구 자신이 삽입한 것이다. '리'는 리지린의 책에서 인용했다는 것이고, '윤'은 윤내현의 책에서 인용했다는 뜻이다.

이형구의 말인즉 리지린과 윤내현이 <구도>와 <경중갑>이라는 동일한 사료를 인용했고 그 결론도 같기 때문에 표절이라는 것이다. 역사논문에 익숙하지 않은 일반 독자가 보기엔 그럴 듯 하다. 가령 이것이 창작소설이었으면 틀림없는 표절이다. 그런데 역사논문도 그런가? 아래를 보라.

'조선'의 존재가 처음으로 명확하게 나타난 기록으로는 앞서 말한 《관자》23권 <경중갑> 편과 <규도> 편을 들 수 있다. 그중 <규도> 편에서는… 제에서 8000리 떨어진 곳에 있다고 하였다. 8000리라고 하는 것은 그만큼 거리가 멀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실제거리가 8000리가 안되거니와…

_송호정, 《한국 고대사 속의 고조선사》, 59쪽

이것은 위 리지린과 같은 윤내현이 사용한 사료와 그로부터 유추한 결론, 양자에 걸쳐 완전히 동일한 내용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름 아닌 송호정 곧 노태돈의 제자이자 한국 주류 고대사학계의 총아 송호정의 얘기다. 그럼 송호정도 표절인가? 말이 되나? 이형구는 왜 송호정은 표절자로 고발하지 않는 걸까?

김상태, 2013, 『한국 고대사와 그 역적들』, 서울;책으로보는세상, 219~220쪽.

그런데 정작 실제 글은 출처가 적힌 인용이었다.
  • 원문에서 주석으로 적힌 부분은 주석번호와 함께 문장 오른쪽에 썼습니다.

연의 경계, 요하=난하설의 오류

여기서 반그시 검토해야 될 또 하나의 사항은 요하에 대한 해석이다. 기원전 8~7세기 고조선연나라의 경계로 기록된 요하가 현재의 요하가 아니고 북경 동북쪽에 위치한 난하라는 주장이 있다.(37:리지린, 1963 앞 책; 사회과학출판사, 1989 《조선전사》2, 90쪽.) 이것은 북한 학계의 기본적인 견해인데, 남한 학계에서는 윤내현이 따르고 있다.

 난하를 요수로 보는 주장은 《산해경》<해내동경>의 "요수는 위고(衛皐)의 동쪽에서 나와 동남으로 흘러 발해에 물을 대고 요양에 들어간다"는 기록과 《염철론(鹽鐵論)》'험고' 편의 "연은 갈석으로 막혀 있고 여러 계곡을 끊고 요수를 둘러싸고……"라는 기록에 의거한다.

 이 기록을 그대로 보면 동남으로 흐르면서 갈석이 있는 강이 요수인데, 현재 산해관(山海關)과 갈석산(碣石山)이 위치한 곳에 난하가 있으므로 지금 북경 근처의 난하를 요수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북경 근처의 현 만리장성을 연나라 장성으로 보아 북경 동쪽의 난하를 요수로 볼 수 있는 여지도 있다.

 그러나 이 주장에서 먼저 유념해야 할 것은 요서 지역을 고조선의 영역으로 보고자 하는 선입관이 깔려 있다는 점이다. 이 주장은 강의 흐르는 방향만을 근거로 요수의 위치를 고증하여 요수나 갈석이 바로 고조선과 경계 지역이라는 논리이다. 그러나 《산해경》에 나오는 강의 방향만을 갖고 난하를 요수라고 주장하는 것은 단순한 정황 논리일 뿐이며 대릉하(大凌河)나 요하(遼河)도 같은 방향으로 흐른다는 점에서 주장의 신빙성이 떨어진다. 또한 《염철론》에 기록된 갈석은 꼭 '요수' 근처에 있는 것으로만 해석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주장대로라면 고조선은 처음부터 북경을 중심으로 한 연나라와 대립하면서 요서 지역에 위치한 것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요수나 갈석이 연의 장새(鄣塞) 근처에 위치하나 그것이 꼭 고조선과 경계 지역이라는 증거가 없고 산융(山戎)·동호(東胡)와 경계한 지역일 가능성이 오히려 높다. 무엇보다도 일차적인 문제점은 만일 기원진 8~7세기경 현 난하가 요수였다면, 그 당시의 요하는 또 어느 강이고 왜 현재의 요하가 열수로 불리지 않게 되었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그리고 기원전 4세기(전국시대) 이후 요하로 불리는 강을 모두 현재의 요하로 규정하게 된 이유와 과정을 입증해야만 그 주장에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38:이순근, 1990 <고조선의 성립과 사회성격> 《북한의 한국사인식》[1], 한길사, 90~91쪽.) 이 주장에 대한 비판은 중국 고대 지리서의 하나인 《수경주(水經注)》의 기록을 검토하는 것으로 대신하겠다.

"대요수는 장새의 바깥 위백평산(衛白平山)을 나와 동남쪽으로 장새에 흘러 들어가고 요동의 양평현(襄平縣) 서쪽을 지나며 또 동남쪽으로 방현(房縣)의 서쪽을 지나고 동쪽의 안시현(安市縣)을 지난다."

"또 현도 고구려현에는 요산이 있는데 소요수가 나오는 곳이다. (소요수는) 서남쪽으로 흘러 요대현에 이르러 대요수에 들어간다."(39:"大遼水出塞外衛白平山 東南入塞 過遼東襄平縣西 又東南過房縣西 又東過安市縣 西南入於海" "又玄菟高句麗縣有遼山 小遼水所出 西南至遼隊縣 入於大遼水也"(《水經注》卷14 小遼水條).)

 위 내용을 정리하면 요수는 장새 바깥의 위백평산(현 지석산)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흘러 장새 쪽으로 들어가고, 양평현(현 요양시)의 서쪽을 거쳐 동남쪽으로 흘러 방현의 서쪽을 지나며, 다시 동쪽으로 흘러 안시현의 서남쪽을 거쳐 바다로 들어간다. 또 세주(細註)에 보면 소요수(小遼水, 현 혼하)가 양평현 부근에서 '못[淵]'을 이루었는데, 309년(영가 3) 무렵 물이 말랐다가 다시 양평현을 거쳐 요수에 합류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수경주》에 디록된 요하와 혼하(渾河)의 흐름에 대한 설명은 현재의 요하와 혼하의 흐름과 거의 일치한다. 물론 요하 중·하류 지역의 경우 시대에 따라 해로가 달라지며 포하(蒲河)와 대릉하 하류가 합쳐져 한대 이래 요하의 본류가 되었다.(40:孫守道, 1992 <漢代遼東長城列燧遺蹟考> 《遼海文物學刊》92-2, 13~32쪽.) 하지만 요하의 기본적인 위치는 북한 학계나 남한 학계 일부의 주장처럼 변하지 않았다.

 이상의 《산해경》과 《수경주》의 기록은 전국시대(기원전 4세기) 이전 조선의 존재와 대략적인 위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다만 위 두 사료는 모두 기록 자체에 대한 비판적인 이해가 필요하기 때문에, 이를 바탕으로 구체적인 논의를 전개하기는 어렵다.

 '조선'의 존재가 처음으로 명확하게 나타난 기록으로는 앞서 말한 《관자》권23 '경중갑'편과 '규도'편을 들 수 있다. 그중 '규도'편에서는 제나라(기원전 685~기원전 643)와 조선 등과의 관계를 논하면서 조선의 특산물, 즉 호랑이 가죽과 모피로 만든 옷과의 교역을 언급하고 있다. 또 조선은 제(지금 산동반도에 위치)에서 8,000리 떨어진 곳에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8,000리라고 하는 것은 그만큼 거리가 멀다는 뜻이다.(41:리지린, 1963 앞 책; 학우서방, 1989 재발간, 12쪽.) 왜냐하면 실제 8,000리가 안 되거니와 오월(吳越)·우씨(禺氏)·곤륜(崑崙) 등 다른 지역과의 거리도 모두 동일하게 8,000리라고 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의미상 멀다는 표현일 뿐이므로, 이를 가지고 고조선과 제나라의 거리를 생각해서는 안된다.

 처음으로 역사 무대에 등장한 고조선은 중국에서 매우 멀어진 곳으로 짐승 가죽과 그것을 이용한 특산물을 생산하는 '지역'으로 묘사되어 있다. 요서 지역에 조선이 위치했다는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관자》의 기록을 통해 고대 중국인들이 이미 기원전 4세기(전국시대) 이전부터 조선이라는 존재를 알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 송호정, 2003, 『한국 고대사 속의 고조선사』, 서울;푸른역사, 56~60쪽.

이걸 보면 이덕일이나 김대령같은 유사역사학자들과 별 차이없는 사람이다. 유사역사학자들에게 인용곡해와 왜곡 기술이 필수요소일지도 모른다.

4. 그나마 나은점(?)들



4.1. 학계의 대중화 노력 지적


다만 김상태의 비판에 유일하게 합리적인 점이 있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김상태는 역사학자들이 쓴 책이 "어려워서" 이해하기 힘들다는 걸 지적하고 있는데, 실제 고대사 관련 논문들이나 책들이 읽기가 더럽게 힘든 건 사실이다. 역사대중화의 실패는 학계 잘못도 있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것도 어폐가 있는것이, 서양 학계의 역사학 관련 학술서나 논문 역시 읽기 힘든건 마찬가지다. 그쪽에서도 대중들이 보는 책은 소위 Popular historian이라고 불리는 대중 역사저술가들이 쓴다. 간혹 대중서를 내는 학자들도 있으나, 그 수가 많지 않고 그들도 학술서를 쓸때면 대단히 어렵게 쓴다. 한국과의 차이는, 서구권은 아마추어 대중서 저자들의 수준이 상당히 높은 경우가 많고(물론 아닌 경우도 있다), 그 층이 탄탄하다는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지 않고 학계만 질타하는 것 역시 불합리한 면이 있다고 하겠다. 실제로 학계에서도 해당 부분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하고, 팩션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등 대중화의 의향은 있다. 그리고 학계에서 대중화를 못하고 있다고 단정짓는 표현이 많은데, 역사학자들은 생각보다 많은 교양역사서와 쉬운 개설서를 내놓고 있다. 문제는 사람들이 읽지를 않는다는 것인데, 이것은 학자들이 쉬운 내용을 어렵게 써서가 아니다. 대다수 대중들의 입맛에 맞는 것은 소설같이 흥미진진한 이야기나, 자극적인 스토리, 혹은 명쾌하고 직선적인 해석인데, 역사학에 최소한의 조예가 있다면, 극단적인 단순화를 하지 않는한 그렇게 쓸수 있는게 얼마나 적은지 실감할 것이다. 실제 인간의 역사는 상당히 복잡하며, 이걸 최소한의 학문적 스탠다드를 지키면서 쓴다면 아무리 쉽게 쓴다 한들 한계가 있다. 그러다보니 대중에 대한 호소력에서 어렸을때부터 주입받은 민족주의적 감수성에 호소하는 유사역사가들의 자극적인 글에 상대가 되지를 않는다. 따라서 역사대중화 문제에 있어서는 학계 탓만 하면서 쉽고 재미있는 역사책을 쓰지 못한다고 비난만 해서는 안될 문제다. 무조건 쉬운 글, 입맛에 맞는 자극적인 이야기만 찾는 세태도 큰 문제다.

4.2. 이덕일 세력 비판


또한 이덕일그 세력을 굉장히 비판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주한은 1980년대 이후 주류 고대학자들 논문 한 편도 제대로 읽을 수 없는 사람이다."

"이주한과 관련하여 이것은 이덕일 자신에 대한 이야기나 다름없다. 이제까지 출간된 이주한의 두 권의 책은 이덕일의 술이부작이다."

"이덕일은 정말로 죽었다.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 이 구절들에 관한 논쟁을 구경하면 입이 딱 벌어진다. 한문에 박식하고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 실로 장관이다."

"또 이덕일은 이미 별세한 수십 년전의 인물 이병도만 상대할 뿐 당대 주로 고대사학계의 인물이나 저술은 거론하지 않는다."

《한국고대사와 그 역적들》중
다만 한사군노태돈같은 학자들을 공격하는 방식은 이덕일보다 낫지는 않다.

4.3. 환빠 혐오와 초록불 긍정


비록 유사역사학자지만 이 사람은 환빠를 혐오하고 초록불을 높게 평가한다.

"이문영이 내놓은 <만들어진 한국사>의 위력은 굉장하다. 이 책으로 인해 환빠의 논리가 정리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뿐 아니라 환빠의 논리가 얼마나 허황되고 잔인하며 폭력적인가도 선명히 보여준다. 이 점에서는 가히 보물같은 책이라고까지 말하고 싶다."

"재미있는 것은 이 책으로 인해 건강한 재야사학계의 대고조선론마저 거의 논파되었다는 사실이다. <만들어진 한국사>의 비판에서 살아남은 대고조선론자는 윤내현 그리고 방금 전에 말한 재야사학계의 성삼제, 박병섭 정도 뿐이다."

《한국 고대사와 그 역적들》중
그러나 2017년 '고조선 논쟁과 한국 민주주의'라는 책에서 초록불을 재야사학계(!!)로 몰아 까대면서 재야, 진보, 주류 사학계를 모두 까댄다! 자신들만 옳다고 생각하는 유사역사가들도 이런 짓을 하진 않았다. 한마디로 "마음에 안들면 다 까버려!"
잘 알려져있지 않으나 이는 웬만한 유사역사가들 보다 훨씬 수준 떨어지는 행위다.

5. 그외


참고로 김대령의 책을 내놓은 비봉출판사는 우파계열 출판사이다. 그리고 김상태의 책을 내놓은 책보세는 좌파계열 출판사이며 천안함 음모론 책도 내놓은 곳이다.
도올 김용옥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이다. 2007년에 펴낸 책 "도올 김용옥 비판"에서는 도올 김용옥을 유사철학자로 간주하고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2]
심지어 2014년엔 '일본 사라지거나 해방되거나'라는 책을 내며 일본을 대차게 까댄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일본을 까게된 이유가 윤내현의 한국열국사연구 와 학계를 식민사학으로 몰아가는 책을 보고 오히려 '대체 일본은 뭐하는 나라인가'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고한다.
웬만한 유사역사가들이 사학계를 식민사관으로 몰아서는걸 넘어서 아예 일본을 까댄것이다! 동시에 유사역사학 사상 일본 자체를 까댄 첫 사례이자 유일한사례다.

[1] 이덕일,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 250년 만에 쓰는 사도세자의 묘지명, 2011, 역사의 아침, 들어가는 글_누가 사도세자를 두 번 죽이는가[2] 기존 학계에 대해 날을 세우면서도 정작 제대로 된 비판을 하지 못하고 자신의 비판자들을 인신공격조로 매도함으로써 스스로를 변호한다는 점에서 도올 김용옥 같은 유사철학자나 이덕일 등 유사역사학자들이나 유사과학 신봉자들이나 비슷한 행태를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