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수
1. 개요
대한민국의 야구인.'''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이게 기적이고, '미라클'이다. 선수들에게 고맙다. 뒤는 생각하지 않겠다. SK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팀이라는 이미지가 각인됐으면 좋겠다. 내가 없더라도, 다른 감독이 오시더라도 그 트렌드는 정착됐으면 좋겠다.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미련은 없다.'''
2014 시즌 넥센 히어로즈와의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前 삼성 라이온즈의 야구선수이자 SK 와이번스의 감독. 현재는 MBC 스포츠+의 야구 해설위원이자 KBO 야구발전위원회의 부위원장. 그리고 라오스 최초의 야구팀인 라오 J 브라더스를 만든 창립자 중 한 명이자 라오스 야구협회 부회장. 별명은 '''헐크''' 혹은 '''최초의 사나이'''로, 한국프로야구 1호 안타, 1호 타점[4] , 1호 홈런, 최초 100홈런, 최초 200홈런, 최초 트리플 크라운 기록 등 많은 1호 기록들을 가지고 있기에 붙은 별명이다. 거기에 모자라 대한민국 최초의 메이져리그 코치와 코치로써의 우승까지 달성했다.
'''명실상부한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포수이자 80년대 한국 야구 최고의 타자'''다. 수비력이 박경완에게 밀린다는 얘기가 종종 나오지만, 포수 리드는 알려진 것에 비해 그 영향력이 과장될 뿐만 아니라 객관화되기도 어렵고, 세이버메트릭스로 대표되는 질적 평가에서도 거의 반영이 안된다. 또한 일반적인 수비지표에서 이만수는 박경완에게 전혀 뒤지지 않으며, 이만수의 통산 타격 스텟은 박경완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우타자 반열에 들 수 있는 수준이다. 현재까지도 이만수의 선수 시절 수준의 타격 성적을 냈거나 앞으로 비슷한 반열에 오를 만하다고 보이는 포수는 아직도 나오지 않고 있다.[5][6][7] 이만수의 타자로서 거둔 성적이 어느 정도인지 감이 안잡힌다면, 포수를 보는 이대호 정도로 보면 대강 맞아떨어진다.[8] [9]
2. 아마추어 시절
이만수의 양친은 모두 이북 출신으로, 아버지는 함경북도, 어머니는 평양 출신이다. 이만수의 아버지 이창석씨는 6·25 때 단신으로 남한으로 내려온 후 직업 군인(의무 하사관)이 되었다. 이만수는 당시 아버지의 복무지였던 강원도 철원군에서 3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만수 본인의 본적은 서울 서대문구 신촌동 66번지로 되어 있다. 때문에 일부 기사에는 출생지가 철원이 아닌 서울로 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의 복무지를 따라 이곳 저곳을 따라다니며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초등학교 4학년때 아버지가 군에서 전역하고 대구광역시에서 정육점을 시작하면서 그의 가족들은 서울 강동구로 다시 이주할 때까지 약 10년간 대구에서 살게 되었다. 부모님은 표준어를 썼고, 이만수도 표준어를 썼기 때문에 대구에서 자라면서 서울말을 쓴다고 선배들에게 많이 맞았다고 한다. 대구 사투리를 쓰지 않으면 얻어 맞았기 때문에 억지로 사투리를 배우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어쨌든 네이티브 랭귀지가 표준어인 관계로 선수 시절이나 지도자 시절이나 공식 석상에서는 항상 표준어로 인터뷰하고 있다. 다만 다큐멘터리에서 길게 이야기를 풀어나갈 때는 경상도 억양이 묻어난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동네에서 짬뽕을 하면서 야구를 익히기 시작했다고 한다. 군인 출신이었던 이만수의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군인 정신과 승부욕을 강조하며 엄격하게 키웠다. 매일 새벽 4시가 되면 아들들을 깨웠다고 한다. 아버지는 체격이 좋은 이만수가 권투를 배워 권투 선수가 되길 바랬고, 새벽에 아들을 깨워 권투장에 데려갔다. 하지만 권투장에서 사정없이 맞은 이만수는 도저히 권투는 못 하겠다고 아버지께 사정했고 결국 대신 유도를 배우게 되었다.
대구중학교에 진학했는데, 본격적으로 야구를 시작한 것은 중학교 1학년 2학기 때부터였다고 한다. 중2 시절 한번 유급을 당했다. 이는 당시 학원 야구계, 특히 대구 야구계의 고질적인 문제점 중 하나였는데, 좀 잘하는 학생이 있으면 부상 등의 구실을 붙여 일년 유급시키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만수의 선배였던 장효조도 고교 그렇게 1년을 유급당한 바 있었다. 그러면 1년간 학교에서 더 써먹을 수 있고, 그러는 동안 신체도 더 성장하기 때문에 매우 위력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만수 본인에 따르면 자신이 야구를 늦게 시작해서 실력이 부족해서 유급을 당했다고 말했다. 어쨌든 이만수는 중학교 시절부터 하루에 네시간씩 자고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지독하게 야구 연습을 했다고 한다. 정동진 감독에 따르면 이만수는 새벽 일찍 동생이랑 같이 일어나 테니스를 배웠던 동생이 테니스 라켓으로 서브를 넣으면 그걸 야구방망이로 치는 연습을 했다고 한다.[10]
또 3학년 선배였던 장효조에게 무작정 찾아가 야구를 가르쳐달라고 해서 한대 얻어맞고 배우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 이만수는 장효조와 중 - 고 - 대학까지 같은 학교에서 선후배로 지냈고 프로야구 창단 후 삼성에 입단하게 된다. 참고로, 이만수와 장효조의 아내가 독실한 크리스천이라서 삼성 시절 사적으로 매우 친했다고 한다. 반면에 집안 대대로 불교 신자였던 장효조는 아내와 이만수의 전도에도 굴하지 않고 완강하게 교회를 다니지 않았으나[11] 나중에 야인 시절 개신교로 개종하게 되었다고 한다. 아내를 사귀면서 크리스천이 되었던 이만수는 현역 시절 장효조에게 전도했다가 "전도할 사람이 따로 있지!"라고 따귀를 두 번이나 맞았다고 한다. 한데, 나중에 이만수가 미국에서 코치를 하다가 귀국했을 때 장효조가 "놀라지 마라. 나 교회 다닌다! 그리고 내 아들은 목사 됐다!"라고 말해서 이만수가 깜짝 놀랐다고 한다.
이후 대구상고에 진학했다. 대구상고에 입학한 후 중학교 시절 원래 동갑이자 동기였던 김시진과 조우하게 되었다. 하지만 김시진은 유급 없이 진학했기 때문에 이만수보다 한 학년이 높았다. 그런데 눈치없는 이만수가 김시진을 보고 반가워서 반말로 인사했다가 선배한테 반말했다고 엄청나게 얻어맞았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더욱 유명한 일화는 감독 폭행 사건이다. 당시 정동진 감독이 대구상고에 새로 부임했는데, 후배들이라고 선수들에게 잘해줬더니 선수들이 훈련을 째고 농땡이를 피우는 바람에 학교로 민원이 들어왔다고 한다. 이에 정동진 감독은 선수들을 불러 놓고 스승인 내가 잘못 가르쳤으니 나를 때리라고 했던 것. 이에 이만수가 감독님을 편하게 해드리기 위해서는 내가 때려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몽둥이를 들었다고 한다. 이 일로 학교와 동문회가 뒤집어지고 난리가 났으나 정동진 감독과 선수들의 해명으로 간신히 무마되었다. 이 사건 이후 이만수는 정동진 감독에게 대한민국 최고의 선수가 되어서 감독님께 보답하겠다고 맹세했다고 한다. 이후 이영민 타격상을 수상했다. '이영민 타격상의 저주'를 받지 않은 몇 안되는 선수이기도 하다.
고교 졸업 후 한양대에 진학했다. 이때쯤 그의 가족 역시 대구를 떠나 현 서울 강동구로 이주했다. 역시 한양대에 다녔던 김시진을 통해 알게 된 이신화씨와 사귀고 나중에 결혼하게 된다. 이만수는 한양대 시절에도 뛰어난 타격 실력을 뽐내며 학교와 국가대표팀에서 활약했다. 당시 국가대표 감독이었던 김응용이 밤에 술 한잔 마시고 숙소에 들어와보면 새벽 1시에 이만수 박종훈 두 명이 훈련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만수는 네 시간 자고 새벽 일찍 일어나 훈련하는 것을 11년 동안 유지했다고 한다.
3. 선수 경력
이만수/선수 경력 문서로.
4. 지도자 경력
이만수/지도자 경력 문서로.
5. 해설자 경력
2014년 12월 18일 MBC SPORTS+ 객원해설자로 데뷔한다는 기사가 올라왔다. 라오스 야구단 후원은 어떻게 되는 거냐는 말이 나왔는데 이미 감독 시절부터 해왔던 일인 만큼 감독보다 훨씬 여유로운 해설자라면 병행하는 게 어렵지 않다. 라오스 야구 후원에 관한 박동희와의 인터뷰에서도 완전 이주가 아니라 정기적으로 오가면서 야구를 보급하겠다고 밝혔었다.
2015년 4월 17일 kt wiz vs 삼성 라이온즈 경기를 통해 첫 해설 데뷔전을 치렀다. 이 날 중계 파트너는 한명재 캐스터와 박동희 기자였는데 전체적으로 호평이었다.
2015년 7월에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2005 월드 시리즈 우승 10주년 기념 행사에 참석한다.(영상 35초부터)
2015년 10월 2일에는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 치러지는 마지막 프로야구 경기의 시포를 맡았다.
6. 재능기부 및 선행
SK 감독에서 물러난 후 이만수는 주로 야구를 활용한 재능기부와 자원봉사에 나서고 있다. 본업이 자원봉사라고 여겨질 정도로 활발한 활동 덕분에 진정한 재능기부를 하는 야인으로써 이미지가 좋아졌다.[12]
- 2014년 3월경 기사에 따르면 라오스에 야구단을 만들고 구단주가 되어 전폭적인 지원을 하게 되었단 기사가 보도되었다. 라오스와 같은 야구 불모지에 야구를 알리기 위해서 본인 스스로도 많은 비용을 투자했고, 버선발로 뛰며 대구 내 사회인 야구단에서 안쓰이는 야구 용품들을 모아서 보내기도 했다.당시 그의 오랜팬이었던 고등학생 기자가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인터뷰한 기사가 있다.
- 그러다 결국 라오스 지원이 결실을 맺어 대한민국 외교부와 라오스 외교부의 양해각서가 체결되었다. 대한야구협회에서 라오스 교육체육부로 야구용품 1600만원치를 지원했고 내년부터는 정식적으로 라오스 야구단에 코치를 파견한다고 한다. 낮에는 코칭을 밤에는 라오스 체육교육부 직원들과의 회의에 힘썼다고 한다. 그리고 이만수의 부탁으로 라오스로 향한 권영진[13] 전 대구고 감독은 라오스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이 되어 2018 자카르타 아시안 게임에 출전한다. 이영미 칼럼
- 2017년에는 헐크파운데이션 이사장으로 매월 피칭머신 기부를 진행하고 있다. ‘헐크’ 이만수, 성지고 야구부에 피칭머신 후원…올해 10번째 선물 2018년에는 피칭머신 제작업체의 홍보모델로 나서서 받은 돈을 전액 유소년 야구에 기부했다고 한다. #
7. 별명
별명은 헐크, 떠벌이[14] , 대한민국의 베이브 루스[15] , 지지하는 팬층(주로 야갤)에서는 '''"Mansoo 'The Baseball' Lee"'''라며 '야구가 있는 곳에 그가 계신것이 아닌....... 그가 계신 곳이 바로 야구다'라고 신격화하기도 한다.
대중들에게 가장 익숙한 별명은 아무래도 헐크. 이만수의 소식을 전하는 기사에도 헐크라는 그의 별명이 자주 언급된다. 본인도 이 별명에 애착이 있어 헐크 파운데이션이라는 야구 재능 기부 재단을 운영 중이다.
2013년에는 정근우라늄, 진해수소폭탄, 전유수소폭탄, 문승원자폭탄을 실험하는 '''이만슈타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와 비슷하게 팔도의 폭탄을 수집한다고 '''팔도폭탄 수집가'''라는 별명도 나와서 큰 웃음을 주었다. 만수노트라는 제목으로 웹툰에서도 폭탄수집한다고 까였다.
선동열의 각동님과 더불어서 '''갓동님'''으로 별명이 굳어졌다. 아예 야갤에서는 이만수를 이만수라 부르면 '''갓동님이 니 친구냐 이 시벌놈아'''가 자동으로 튀어나오는 상황.
일부 SK 팬들이 유다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는데, '''절대로 쓰면 안 된다'''. 유래 자체가 인천예수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던 전임 감독을 배신했다는 의미로 쓰임으로써 은연중에 김성근을 신격화하는 표현이며[16] , 특히 독실한 개신교인인 이만수 전 감독에게 있어 유다라고 부르는 것은 '''개신교인으로서 들을 수 있는 최악의 표현이다.''' 이스라엘 사람에게 히틀러라고 부르는 꼴이나 다름없다. 실제로 이만수 전 감독도 본인이 들은 모욕적인 표현 중 가장 아찔했던 표현으로 이 유다 비유를 들었다. 유다라는 별명은 엠엘비파크 한국야구게시판 등지에서 김성근 전 감독 개인팬을 위시한 SK팬에 의해 한동안 무비판적으로 사용되었다가, 2015년 9월부터 김성근이 한화 감독으로서 보여주는 졸전과 혹사 논란과 더불어[17][18] 한게 내부에서도 자성의 분위기가 생기면서 사용이 자제되는 실정이다.[19]
물론 이만수 전 감독이 감독 재임 기간 동안 교회에서 간증을 하며 팀 상황도 안 좋은데 괜히 야구 얘기를 꺼냈다가 구설수에 오르는 등의 일이 있긴 했었지만[20][21] , 어쨌거나 좋은 표현은 아니니 이러한 면에 대해서는 유다라는 원색적인 비난보다는 좀 더 바른 표현으로 비판을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이는 이만수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 대한 비판에도 마찬가지이다. 안 좋은 드립을 써서 좋을 건 없으니까.이후 그가 키워낸 이명기, 한동민, 진해수, 박정배, 윤희상 등이 각각 SK, LG, KIA 등에서 활약하며 선수 하나는 잘 키워내는 감독이 됐다. 사실 그가 이렇게 선수들을 리빌딩했기에 SK가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았다고 할 수 있겠다.
8. 신앙
맨 위의 프로필에서 봤듯이 매우 독실한 개신교 신자이다. 그래서 두 아들 이름도 각각 "하나님의 종", "예수님의 종"[22] 에서 따서 지었을 정도다. # 이만수 SK 와이번스 수석코치“신앙도 훈련 필요”
안치용이 이에 대해 본격 디스하는 말을 했는데, 2011년 준플레이오프 1, 2차전 모두 벤치에서 대기했는데 이 때 안치용의 타격감은 절정에 이르렀기 때문에 팬들 사이에서 '''"되지도 않는 이호준 내리고 안치용 올려라!"'''라는 말도 나왔다. 그리고 3차전에서 선발 라인업에 올라간 안치용에게 기자가 이유를 묻자 '''교회도 안 나가는데 감독님이 왜 올리셨을까???'''라는 말로 디스했다. 기사 링크. 참고로 이호준은 천주교[23] , 안치용은 불교이다.
사실 '''원래는 크리스천이 아니었다'''. 개신교 신자인 부인의 영향으로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는 듯. 물론 결혼 뒤에 신앙 생활이 이어지긴 했지만, 결혼한 지가 30년이 넘었기 때문에 신앙 생활 역시 30여년으로 상당히 길다. 차라리 오랜 종교 생활로 타인에게 자신의 종교를 전도하고 요구하는 걸 쉽게 생각한다는 비판은 가능하나, 역으로 그가 모태신앙이 아니라 해도 잠깐 종교에 빠져서 오버한다는 식으로 무시한다거나 할 기간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이만수 감독은 신앙을 통해 자신을 성찰하고 주위에 베품을 실천하는 훌륭한 종교인의 한 사람으로, 종교의 가르침을 이상적으로 실현시킨 몇 안 되는 표본에 가까운 사람이다. 선수 시절 어떤한 일이 있어도 교회에 십일조는 지킨다고 말한 바 있는데, 비단 십일조 뿐만 아니라 라오스에 야구를 전파하며 자신이 가진 역량과 재능을 기부하였으며#, 헐크파운데이션도 설립해 국내외 어려운 사정이 있는 야구팀과 단체를 지원하는 등의 활동의 배경에는 독실한 개신교인으로서 성찰이 일정한 역할을 했음은 부인할 수가 없다.
삼성 선수 시절에는 일요일날 원정경기라도 있으면 선수들을 깨워서 목사를 모시고 호텔에서 예배를 드리기도 하였다. 것도 절에서 합숙 훈련까지 할 정도로 불교세가 상당히 강했던 삼성 라이온즈에서 말이다. 그것 때문에 구단 직원들이 선수들 잠 좀 더자게 내버려두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때까지만 해도 독실한 불자였던 선배 장효조도 전도하려다가 따귀를 2번이나 맞기도 했다고 한다.[24]
현재 싸인에 십자가를 그려준다.
9. 팬 서비스
프로야구 원년부터 간판 스타로 불리운 이만수는 야구 실력과 팬 서비스 둘 다 갖춘 몇 안되는 스타로 유명하다.'''"35년의 프로야구 인생을 살면서 전 항상 저 자신을 '서비스맨'이라 생각해왔습니다. 프로야구를 통해 많은 분께 즐거움과 행복을 전달해드리는, 그래서 팬들의 사랑을 먹고 사는 '서비스맨'이 바로 프로야구인의 인생이라 생각해온 것입니다."'''
2005년 11월 시카고 화이트삭스 시절 이만수 코치의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는 영문으로 된 장문의 게시물이 올라왔다. 이 글은 '이 감동적인 이야기는 이만수 코치에 관한 것이다. 누군가 한국어로 번역해 여러분들과 공유하고 싶다'고 서두를 시작했다. 월드 시리즈 기간 중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골수팬인 스탠 테리씨는 자신의 8살 딸을 데리고 야구장을 찾았다. 이 때 어린 딸이 파울 타구에 맞고 다치자 의료진을 기다리는 모녀에게 가장 먼저 달려 온 사람은 다름아닌 이만수였다. 소녀에게 별다른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후 소녀의 손에 야구공을 꼭 쥐어주며 울먹이는 아이를 달랬다. 소녀를 번쩍 들어 함께 다정한 포즈로 사진을 찍으면서 소중한 추억도 쌓았다. 잠시 후 의료진이 도착했고 간단한 응급조치를 받은 소녀는 이후 게임이 끝날 때까지 공과 글러브를 단 한번도 손에서 놓지 않았다. 테리는 글 말미에 '우리는 휴스턴의 골수팬이지만 이만수 코치 덕분에 화이트삭스도 응원하게 됐다. 야구는 팬을 위한 스포츠고 그런면에서 이만수 코치는 우리의 영웅'이라며 감사의 말을 전했다. 이만수 코치 월드시리즈 미담 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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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SK 수석 코치 시절, 3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문학구장이 매진되면 팬티 바람으로 야구장을 돌겠다고 하였고 실제 매진이 되자 팬티 세리머니를 하였다. 이만수가 팬티를 입고 뛴 이날 SK는 7:3으로 승리하며 3연패를 끊었다. 이만수 '팬티쇼'에 인천 야구팬 흥분하다
2011년 SK 감독 취임 일성으로 "프로야구는 서비스다"라며 팬 서비스의 중요성을 강조했다.'감독취임' 이만수, "프로야구는 서비스다"
2014년 SK 감독 시절 경기를 앞두고 선수단 훈련을 돕던 볼보이를 불렀다. 이 때 야구 선수를 꿈꾸는 볼보이에게 덕담을 해주었다.이만수 감독이 볼보이에게 전한 희망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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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야구 갤러리에서조차 팬 서비스 관련해서는 험담 하나 찾아볼 수 없이 모조리 미담이었다.
2015년 7월 경주에서 전국 유소년 야구대회가 열렸는데, KBO 육성위원회 부위원장으로서 경기 감독관 업무를 맡았다. 이 때 한 디시인이 이만수에게 싸인을 받은 미담을 야갤에 올렸고 개념글에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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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시카고 화이트삭스 코치 시절의 미담이 조선닷컴 기사 댓글에 올라왔다. 야구장 처음 본 야구선수들… "한국 살래요"
10. 이만수와 김성근
- 이만수를 지지했던 팬들은 이만수가 본의 아니게 유다라는 별명으로 억울하게 비난받는다고 강변했었다. 김성근 감독의 해임과 문학구장 소요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은 재계약 불발된 김성근의 정치질과 언플이고[25] 이만수는 프런트와 잘못 엮이는 바람에 까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김성근 팬들도 SK 프런트가 이만수를 데려올 때 김성근에게 제대로 말해주지 않았던 것을 비판하는 것을 보면 만악의 근원이 SK 프런트라는 점에는 친 이만수와 반 이만수 양쪽 모두 동의하는 것이 현실이었으나 2016년 한화 이글스에서 한화 감독으로 활동하는 분의 민낯이 드러나며 차라리 SK 프런트가 그 사람을 잘 내쫓았지 저때 욕 먹으면서라도 안쫓았으면 SK도 한화처럼 2군팜이고 뭐고 박살이 날뻔 했다는 여론까지 등장하고 있다. 2017년 이후 만악의 근원 타이틀 지분은 그 분이 독식하는 중. 이 꼴을 보고 있자니 인생사 정말 새옹지마다.[26]
- 김성근이 SK에서 특별히 프런트와 분쟁이 있거나, 후임 이만수와 분쟁이 있었던게 아니라 그의 야구인생 내내 그런 식이었다. 과거 OB 베어스 사장의 회고에서도 OB 감독시절 김성근이 프런트와 갈등이 있었고, 사장과도 분쟁이 있었고, 후임감으로 이광환 감독이 2군으로 부임하자 불만이 많았다고 회상했다. 김성근의 한화 시절 LG 시절 태평양 시절 등등 프런트와의 불화는 흔했고...후임 감독이 팀 내에 있는것도 흔한 일이었다. 김성근이 한화 감독으로 취임할 당시도 후임으로 이정훈 2군 감독이 취임해서 미래를 대비했다. 이처럼 1군 감독이 부임한 상태로 차기를 위해서 팀에서 감독감을 키우는 경우는 SK 시절 김성근과 이만수의 이외에도 흔했다. 감독은 떠나도 팀은 남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왜 진짜 팬과 감독님 팬을 나누려 드냐'며 적반하장 격인 태도를 보였고, 한화에서마저도 같은 짓을 반복하고 있지만, 감독은 떠나도 야구를 계속 해야할 선수와 팀까지 인종차별과 지역비하, 선수에 대한 역사왜곡까지 섞어가며 비난하는 이들을 참된 팬으로 봐야하는 걸까?[27]
이만수가 SK 감독을 맡던 시절 2군에는 팀에서 후대 감독 경력을 쌓기 위해 박경완 감독이 있었고, 김성근이 한화에 있던 시절 2군은 차기 감독감으로 이정훈이 있었다.
- 기존의 안티들은 SK 감독 시절 이만수가 프런트와 협력해서 그 분을 괴롭히고 박해했다는 누명을 씌웠다. 그러나 최소한 한 가지는 거의 확인된 셈으로, 그 분이 감독시절 이만수는 팀에서 이름만 수석코치, 2군 감독이었지, 그 분 밑에서는 X밥이었다. 한화만큼은 아니어도, 그 팀의 1군, 2군 코칭스탭이 모두 그 분의 지휘와 간섭으로 움직이는 곳이었다.[29]
이렇듯 역대 유래없는 권한을 가진 상태로 2군까지 코칭스탭을 모두 장악한 김성근이 혼자몸인 이만수에게 시달렸다는 소설은 말도 안 되는 것이다. 실제로 현실은 이만수는 그분의 의도에 따라 1군 수석코치에서 2군 감독으로 쫒겨났다가, 또 1군을 올렸다가 또 2군으로 가거나 하는 등의 사례도 그분이 하신 일이다. 이만수의 2군 감독시절도 김성근의 감시에서 벗어났던 것이 아니다. 그 당시 이만수의 일거수 일투족을 김성근의 수족인 2군 코치들이 감시하고 보고했다는 사실은 여러 사례에서 드러나 있다.
이런 과도한 감독의 권한을 주었던 프런트와 사장도 차차 이런 권한을 제한하려고 하다가 분쟁이 일어난게 사실이다.
- 이만수가 2군 감독으로 있을 때도 일거수 일투족을 2군 코칭스탭[31] 이 일일히 그 분에게 보고했다는 건 알려진 사실이다. 이만수가 2군 감독 시절에 별거 아니라고 생각해서 한 행동 하나하나가 구단을 지배하던 그분에게 알려져서 곤욕을 치른 걸 생각하면 이만수가 그분을 괴롭혔다는 누명은 꽤 억울했을 것이다.[32]
- 2011년 초부터 그 분의 재계약이 확정됨에 따라 이만수는 그분의 견제를 못이기고 사퇴하고 미국으로 다시 떠날 준비를 하고 사직서를 언제 제출할까 고심 중이었다고 한다. 가슴속에 항상 사직서를 품고 있었는데. 뜬금없이 구단에서 전화가 와서 1군 와서 감독대행을 하라고 해서 놀랐다고 하는 후일담이 있다.
- 김성근 경질 이후 이만수가 욕먹은 여러 결정적 이유중에서 이만수 감독 취임 "한-미 야구 접목, 차별화된 야구 하겠다 언론에 이런 말을 한 것이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365일 야구하나라는 발언도 엄청난 욕을 먹었다. 그런 이유로 유다란 별명이 붙었다.
'''이상군 체제, 한화, 김성근 그림자 지우기 작업'''
''' 이상군 감독대행, 특타 줄이고 송창식·권혁은 이기는 경기만'''
''' 오욕과 치욕의 김성근, 아쉬운 한화의 이별 방식''' - 박종훈 사장과 김성근감독의 감정싸움으로 주먹다짐 직전까지 갔던 상황
SK 프런트와 사장이 특별히 나쁜 놈이고... 이만수가 유다라서 김성근이 그런 치욕을 처음으로 겪었을까. 김성근은 다른 팀에서 계속 그런 경우를 겪어왔고, 그 이유의 상당수는 본인 책임이다.
사실 두 사람은 삼성 라이온즈에서 한솥밥을 먹은 적이 있다. 김성근은 감독, 이만수는 당시 선수였다. 김성근은 이만수 특유의 세리모니를 굉장히 마음에 안 들어했고, 결국엔 한번 더 하면 방출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놨다고. 이 후 이만수는 그 세리모니를 하지 못했고 시즌 중반에 들어서 야구를 도저히 못 하겠다고 코치를 통해 전했다고. 이대로 이만수를 보내기 아까웠던 코치가 이만수 칭찬 좀 해달라고 김성근에게 부탁했고 김성근이 만수 잘한다고 칭찬해주자, 이만수는 흥에 겨워서 다시 특유의 세리머니를 시작했다고.
10.1. 비교
SK에서 김성근이 매우 억울하게 당한 것인양 포장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그 전에도 그 이후에도 매번 김성근이 똑같은 일을 겪었으면 그것을 다른 사람 탓을 하지 말아야 한다. 즉
1. 프로야구에서 흔히 있는 관행적인 일이거나
2. 김성근 자체가 문제가 있어서 생긴 일
이라고 봐야 한다.
사실 SK에서뿐 아니라 LG 시절[33] 이후 한화에서 셀 수 없을만큼 더 많은 실책들을 저지르고 프런트와 갈등 끝에 KBO 역사상 유래없는 그룹 감사 끝에 자진사퇴 형식의 경질로 쫒겨난 것이 김성근이다.[34] 애당초 대부분의 구단 프런트들이 피했음에도 한화에서 팬들의 요구와 회장님의 결단으로 정중하게 감독으로 모셔갔으나...그런 한화에서조차도 차기 감독감이 있었다. 김응룡 시절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던 이정훈이 2군 감독을 맡으며 시즌이 시작됐다. 후임자를 안고 시작한 것이다. 그 이정훈도 선술한 트레이드 건 등의 이유로 마음에 안 든다고 육성군으로 내쫓았고 이정훈은 아예 짐싸서 프런트로 가버렸다.
이만수와 김경기 등이 차기 감독으로 있던 SK만 그런 것이 아니다. 김성근 감독이 OB를 맡았던 시절도 MLB에서 체계적인 연수를 받고 온 이광환 감독이 2군 감독으로 차기 감독으로 오르내렸다. 그리고 감독들이 그렇게도 증오하던 이만수와 후임으로 온 김용희 역시 감독 시절에 김경기, 박경완이라는 프랜차이즈 선수 출신 코치들이 차기 감독감으로 있었다. 즉, 그렇게 특별나지 않은 정도의 관행에 가까운 일인 것이다.
김성근은 한화에서도 역시 혹사로 욕 먹었고...프런트와 분쟁 끝에 전격 경질되었다. 게다가 김성근이 쫒겨나자마자 감독대행 이상군은 칰무원이니 상군맘 쉴드로 꿀빤다느니[35]
온갖 욕을 먹어가면서 이기는 게임에만 필승조를 쓰고 김재영, 박상원 등 신인들을 육성하려 노력하는등 김성근의 색을 지워냈다.
김성근이 처음 프로 감독이 된 80년대 OB에서도 SK, 한화와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이상군 감독대행 "특타 줄이고 송창식·권혁은 이기는 경기만"
김성근 감독의 특징인 불펜 사용을 거부하고, 선수들의 많은 훈련량도 없앤다는 식으로 감독대행 첫날부터 대놓고 이야기하고 있다. 김성근 경질 이후 감독대행이 김성근의 색을 지우는 게 SK에만 있었던 게 아니다.
'''오욕과 치욕의 김성근, 아쉬운 한화의 이별 방식'''
박종훈 사장과 김성근 감독의 감정 싸움으로 주먹다짐 직전까지 갔던 상황, 프런트와 김성근의 갈등은 한화 시절이 더 강했고, 김성근은 매우 모욕적인 일을 당했다.
OB 베어스 전 사장 박용근이 말하는 김성근 감독
40대부터 프런트와 싸우고 사장이랑 싸우고, 또 팀은 후임 이광환 감독을 2군 감독으로 선임해놓는 등 이미 그 시절부터 SK와 똑같은 구조였다. 즉, SK와 이만수에 의해서 특별히 김성근이 당한 게 아니다.사장 박용민과 감독 김성근의 관계는 늘 원만하진 않았다. '''40대 감독 시절부터 김 감독은 프런트와 자주 부딪혔다.'''
“내가 아는 김성근이라는 사람은 고집이 세고, 자기 철학이 확고해. 그 사람 생각을 바꾸려 들면 안 돼. 특히 야구에 대한 부분을 건드리면 안 돼. '''대신 경영은 모르는 사람이야. 경영자 김성근에 대해선 점수를 높게 주고 싶지 않아. 어차피 구단은 주어진 예산 아래 움직이는 거야.'''"
OB는 1988년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이광환 전 타격코치를 2군 감독으로 임명했다. 언론은 그를 차기 감독 후보로 꼽았다. 김 감독 입장에선 불편한 인사였다. "'''김성근 감독이 언짢아한 건 맞아. 자기 후임이 될 사람을 데려왔는데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나.''' 그때 김 감독에게도 말했지. ‘사장이 죽어도 기업은 계속된다. 기업이라면 반드시 차기 사장감을 키워야 한다. 야구단도 마찬가지다. 항상 포스트를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김 감독이 대놓고 이광환이라는 이름을 언급한 적은 없었다. 그럴 사람은 아니다.”
그 외에도 2017년 한화의 이상군 대행과 SK 이만수 대행의 공통점이 여러가지다.
'선수단 정리' 한화, 조인성-송신영-이종환 방출
이상군 대행은 김성근 감독 사퇴 이후 김성근 감독이 애지중지하던 이종환를 정리하고 송신영 조인성같은 노장선수도 방출했다. 특히 조인성의 방출은 이만수 대행 시절 박경완의 은퇴를 생각나게 하는데, 사실 조인성은 몸이라도 건강하다고 주장했지, 박경완은 부상이 심각했다는 걸 고려하면 박경완 은퇴 문제로 이만수가 욕먹는 게 이상할 정도이다. 조인성 은퇴는 팬들이 환호하고, 박경완 은퇴는 그렇게 욕먹었던 것은 프랜차이즈 스타라는 점이 컸겠지만, 조인성과 박경완을 기용하던 김성근의 위상 차이도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36]
김성근 이탈표? 한화, 흥행전선 이상 없다 SK 시절이나 한화 시절 김성근 이탈 이후 흥행전선에 별다른 문제가 없다는 분석이다.
그리고...가짜 팬들의 저주와 바람과도 달리 SK는 전임 감독 없이도 2년 연속으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했고, 한화는 전임 감독 시기 이기든 지든 나오던 송박권 없이도 팀 평균자책점 2위를 찍으면서 정규시즌 3위를 기록, 길었던 비밀번호를 끊어냈다. 다만 SK는 2020년이 되기도 전인 2018년 외국인 감독의 빅볼 야구로 세대교체와 5인의 선발진 구축에 성공했고 14.5게임 차를 뒤집으며 한국시리즈 우승에 성공한 반면 한화는 투심을 장착한 송은범(!), 이성열, 호잉 등 베테랑이나 외인에 의존하여 간신히 비밀번호만 끊었을뿐 불펜진 운영에 비해 감독의 야수 육성과 휴식 부여가 매우 미숙한 편이고 토종 선발진 구축 및 세대교체까지는 5년 이상이 필요해보인다.
2019년 들어 지나치게 서두르던 베테랑 정리로 인한 배영수, 심수창, 권혁 등의 방출, 송은범과의 연봉 협상 중 분쟁, 주전 외야수의 유례없는 FA 체결 및 시범경기 후 트레이드 요구로 인한 무기한 활동 정지처분, 플루크를 받던 투수진의 부진, 공인구 변경으로 인한 거포형 타자들의 타율 저하 등 여러 요인들이 한꺼번에 겹치더니[37] 전년도부터 이어진 감독의 인터뷰 문제, 투수교체 문제 등으로 최하위 급으로 떨어지면서 안타깝게도 역사는 반복되고 있다.
11. 여담
- 선수 경력 항목에도 적혀 있지만, 역사적인 한국프로야구 1호 안타, 1호 타점, 1호 홈런의 주인공.
- 가족이 모두 운동선수인 체육인 집안 출신으로, 누나인 이미옥 씨는 전직 프로골퍼이며, 한 살 터울인 동생 이용수 씨는 현역시절 국가대표까지 지낸 테니스 선수 출신이다. 학창시절에 동생 이용수 씨와 새벽 훈련을 같이 했는데, 동생이 서브를 치면 이만수가 그걸 배트로 치는 식으로 훈련을 했다고 한다. 프로야구 투수의 구속을 뛰어넘는 속도의 테니스 서브,[38] 를 받아치는 훈련을 한 것이 이만수가 강타자가 된 비결이었는지도...
-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엄청난 노력파였고 성실한 선수였다고 한다. 김종건 전 한양대 코치는 “이만수 만큼 성실한 선수는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대학 시절 재능이 뛰어나지 못해 김동엽 감독으로부터 신임을 받지 못해 정종현에게 주전에서 밀렸고, 한양대의 운동부 선수들이 모여 게임을 할 때 선수들끼리 자기편을 뽑는데 이만수는 항상 마지막에 뽑혔을 정도라고 한다. 부족한 재능을 엄청난 노력과 훈련으로 만회한 케이스라는 것.
- 2011년 6월 27일, 프로야구 30년 역사상 최고의 별로 뽑혔다.#
- 현역 시절엔 한국프로야구 사상 몸에 맞는 공을 가장 많이 당한 선수였다. 총 112개의 몸에 맞는 공을 맞았는데, 이만수가 홈런을 칠때마다 과도한 리액션을 취하는 바람에 빡친 타팀 투수들이 합심해서 고의로 빈볼을 던지는 경우가 잦았기 때문. 이후 박경완에 의해 깨졌지만 이만수는 대부분 빈볼이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 2013년 10월 4일 노컷뉴스의 팟캐스트 스토커가 이만수의 경질에 대한 단독보도를 한다고 밝혀 경질설이 떠올랐으나.. 관련기사 구단 측에서는 마지막 계약년도인 내년까지 감독임기를 보장했다는 기사가 올라왔다. 관련기사
- 2014년 4월 16일 박동희가 쓴 칼럼에 따르면 최동원 전 감독을 임종 사흘 전부터 당일까지 매일 찾아와 문병을 했다고 한다.(박동희의 야구탐사) 부산과 롯데를 그리워한 철완
- 윤희상 급소 부상 사고에 관한 본인의 코멘트에 의하면 현역 시절 공에 급소를 너무 많이 맞아서 혹까지 생겼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이만수도 현역시절 투수의 공을 받다가 실수로 그 곳을 가격당하는데, 어찌나 세게 맞았는지 확인 결과 보호대가 깨져있었다고 한다. 그것도 결혼을 몇달 앞두고서. -
- 2015년 10월 2일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의 KBO 리그 페넌트레이스 마지막 경기에서 박충식, 양준혁과 함께 삼성 라이온즈 레전드 자격으로 경기전 시포와 경기 후 대구구장을 추억하는 비행선 띄우기 행사에 참여했다. 경기 전 시포, 비행선 띄우기 행사
- 공식 홈페이지가 있다. # 생긴지는 오래됐으나 어째 아는 사람은 적다.
- 잊고 싶은 기억으로 대구우유 CF가 있다.#
- 흔히 영혼의 배터리의 대명사로 김원형-박경완 콤비를 꼽는데 그 원조는 바로 김시진-이만수다. 실제로 둘은 절친이고[40] , 대구상고 동문, 한양대 동문, 삼성 라이온즈 동문이자 고교 배터리, 대학 배터리, 프로팀 배터리의 관계이다. 이따금씩 방송에서 김시진이 이만수에 대한 일화를 말하는데 이게 꽤 웃기다. 선생님 빠따 사건이라던지[41] , 손바닥 성냥사건[42] 이라든지, 1980년 일본에서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 김시진이 차출됐다가 어깨부상으로 출국 전날 엔트리에서 빼고 이만수가 대타로 갔다가 병역특례를 받았고 김시진은 그 해 현역으로 입대했다는 에피소드 등이 많다.[43]
- 2016년 3월 19일 대구 삼성라이온즈 파크 개장 기념 자선경기에서 만 57세에 4번타자 포수로 선발 출전, 첫 타석부터 비거리 120m(!!)로 추정되는 대형 파울 홈런을 날리는 등 여전한 방망이 솜씨를 보여줬다. 연예인들과는 격을 달리하는 타구 질을 보여줬다. 사실 2번째 타석에서도 공이 어느 정도 빨랐으면 맞는 순간 홈런임을 직감할 정도로 경쾌한 소리가 들렸으나 공 자체가 너무 느려서... 참고로 이만수 항목의 프로필에 있는 사진이 바로 이 경기에서 2번째 타석 워닝트랙까지 날아가는 좌익수 플라이를 날리는 모습이다. 아쉽게도 개장1호 홈런은 강기웅이 가져갔다.
- SBS 순풍 산부인과에서 언급이 된 적이 있었다. 박영규와 이창훈이 99년 이승엽의 54홈런 이야기를 언급하며, 통산 한국 최다 홈런이 누구냐로 내기를 붙었는데 박영규는 이만수라고 하고, 이창훈은 장종훈이라고 해서 내기를 한 것. 99년 당시 장종훈은 현역으로 272 홈런을 쳤고, 이만수는 252 홈런을 치고 은퇴했다.
- 2016년 3월 25일에 손자를 얻어 할아버지가 되었다.
- 2016년 3월 28일 tvN의 리틀빅 히어로에 나와서 그 동안의 근황을 전했다.
- 2016년 현재 대구 참조은병원 홍보대사이다. 동대구역을 나가면 이만수 간판이 반갑게(?) 맞아주고 있다.
- 현역 시절 한국프로야구 최고의 포수로 활약했었지만 아쉽게도 한국시리즈 우승은 하지 못했다. 대신 85년 전기-후기리그 통합우승을 했기 때문에 우승 경험이 한번 있고, 포스트시즌 우승 경험은 메이저리그 불펜코치 시절 월드시리즈 반지 1개 및 SK 와이번스 수석코치 시절 한국시리즈 반지 3개로 대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