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국(야구)
1. 소개
삼성 라이온즈와 태평양 돌핀스에서 활동했던 전 야구 선수이자 前 kt wiz의 1군 수석코치.
2. 선수 시절
한양대학교 재학 시절 뛰어난 활약으로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어 1984 LA 올림픽 야구 국가대표팀으로 참가하였으며, 한양대학교 졸업 후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했다.
1985 시즌부터 1986년까지 꾸준히 주전 3루수로 활약했다. 하지만, 류중일에게 유격수 자리를 넘겨준 오대석과 1987년 3루 자리를 번갈아 맡았으나 류중일이 1988년 팔꿈치 수술로 출전 기회가 줄어들어 오대석이 유격수 자리로 가면서 1988년부터 3루 자리를 지켰다.
1990년 플레이오프에서는 해태를 이기는 데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1차전에서 해태의 에이스 선동열을 상대로 홈런 1개 포함해서 9회에 2타점 적시타까지 기록하며 맹활약한 것이 대표적.[3][4][5] (1990년 정규 시즌 홈런은 4개) . 참고로 선동열은 다음날 2차전에서도 삼성 김용철에게 9회 동점 홈런을 맞고, 끝내 연장전에서 역전을 허용하면서 팀의 5년 연속 한국시리즈 진출 실패의 원흉이라는 오명을 썼다.
1991~1992년, 2년간 팀의 주장을 맡던 시절에 선수로서 절정의 기량을 보였다. 삼성 1루수 신경식, 2루수 강기웅, 유격수 류중일, 3루수 김용국으로 이어지는 철벽 내야 수비진은 리그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았다. 한편 그 당시에는 맨손으로 공을 바로 잡아던지는(영어로 bare-handed catch) 능력을 갖춘 거의 유일한 3루수였지만, 이러한 뛰어난 수비 실력에 비해 타격 능력이 떨어진다는 점 때문에[6] 아쉽게도 매번 해태 타이거즈의 한대화에게 밀려 3루수 골든 글러브는 단 한 차례도 수상하지 못했다.[7]
1993 시즌이 끝나고 태평양 돌핀스로 트레이드되면서 삼성의 3루수 자리는 후배 김한수에게 물려 주었다. 1994~1995 시즌 태평양 돌핀스 선수로 뛴 다음 야구단을 새로 인수한 현대 유니콘스가 기존의 선수단을 리빌딩하는 과정에서 1996년 시즌을 앞두고 그는 세대교체의 명분 아래 김성갑과 함께 현역에서 은퇴했다.
3. 은퇴 후
1996년 실업 야구 팀 현대 피닉스의 코치로 활동하며 현대 유니콘스에서 불러 주기를 기다렸으나 소식이 없자, 가족들을 데리고 자비를 들여 미국으로 코치 연수를 떠났다. 1997년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산하 싱글A, 1998년 밀워키 브루어스 산하 싱글A팀에서 수비, 주루코치를 맡았다. 그러나 양 팀 모두 무보수 방문코치 자격으로 있었다. 마침내 1998년 말 3만 달러의 연봉을 받게 되며 한국인 최초로 유급 코치가 됨과 동시에 트리플A 코치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미국에서 오랫동안 코치를 하려면 영어에 더 능숙해야 했기에 결국 귀국을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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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라이온즈 코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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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월 이승엽과 함께.
2000년 LG 트윈스를 시작으로 2006년 삼성 라이온즈를 거쳐 2010 시즌 넥센 히어로즈의 코치로 활동하고 있다가 이듬해에 다시 친정 팀인 삼성 라이온즈로 복귀했다. 선동열 감독의 용퇴와 류중일 작전코치의 감독 승격으로 인해 삼성의 수비코치 자리가 비었고, 아직 넥센과 재계약하지 않았던 김용국 코치를 류중일 감독이 다시 불러들여서 영입한 것. 그리고 이 선택은 본인에게 있어서 팀의 한국시리즈 우승(V5)이라는 최선의 선택을 하기도 했다.
수비코치로서의 평은 무난한 편. 삼성이 원체 수비 조직력은 좋은 팀이기도 하니까 그런 것도 있겠지만 무능하다고 마구 씹히는 어느 모 투수코치에 비하면야 확실히 별 언급이 없는 자체가 이미 수비코치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는 증거일 지도 모른다.
다만, 2009 시즌에 1군 수비코치를 맡아 팀 실책 1위를 기록한 적이 있었고, 이는 해임으로 이어졌다. 갈수록 능력이 발전한다고 이해하면 편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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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 wiz에서의 코치 시절
찬바람이 몰아친 2016 시즌 후 삼성이 코치진까지 세대교체를 하겠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삼성은 그와 재계약하지 않고, kt 2군에서 수비코치를 맡고 있었던 박재현을 새로운 수비코치로 영입했다. 그 후 새로 부임한 김진욱 kt wiz 감독의 부름을 받아 강성우 배터리코치와 함께 kt wiz에 합류했다. 2017시즌을 수비코치로 재임한 뒤 2018년에는 수석코치로 승격했다.
2018 시즌 후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으면서 팀을 떠나게 되었다. 2018년 12월 12일 정경훈의 후임으로 경주고 감독을 맡게 됐다.
4. 기타
- 2010 시즌 7월, 올스타전이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 치뤄지면서 "삼성 라이온즈 레전드 올스타" 행사도 열렸는데, 김용국이 레전드 3루수로 선정되어 오랜만에 삼성의 고전 유니폼을 입고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 삼성의 프랜차이즈 스타임에도 불구하고 존재감이 상당히 없었다. 일단 이만수, 장효조, 김시진, 양준혁 등의 대단한 인기와 위의 내야진 3명(강기웅, 김성래, 류중일)에 비해 네임 밸류가 떨어진다는 점. 같은 3루수였던 김한수의 인지도가 상당했던 탓에 존재감이 미비했던 선수. 어쩌면 이영우나 김태균의 원조격이었을지도 모른다.
- 슬하에 두 아들을 두고 있는데, 둘 다 프로 야구선수였지만 별다른 활약을 못하고 몇년 안되어 방출당했다. 장남 김동영은 김용국 코치와 같은 팀인 삼성 라이온즈 소속이었는데 2013년 시즌 중 방출되었고, 차남 김동빈은 한화 이글스 소속이었으나 2012년 방출되었다.
- LG 주루코치로 활동하던 2002년 LG 트윈스의 KS 준우승에 어느정도 지분이 있다고 한다(...).
이 때 번트 사인을 놓친 서드 코치(3루코치)가 바로 김용국.2002년도는 이건 여러분들이 심각하게 들어야 되는 문제라고 보는데,
LG가 8회 초에 2점 놓고, 4점 리드했어요, 그때. 4점 리드면 이기는 거예요, 거의 다,
8회니까. 그런데 4점 들어온 다음에 내가 번트 지시를 했다고. 그럼 번트를 하면,
보내기 '''번트를 시켰는데 써드 코치가 사인을 놓쳐버렸어요.'''
근데 거기서 번트를 성공했다, 한 점 들어왔으면 세상의 비난 무지 받았을 거예요.
근데 내가 냈다고, 냈는데, 코치가 사인을 놓쳐버렸어요. 놓치는 순간에 졌다 싶었다고,
나는. 이건 거짓말이 아니고, 내가 직감이 왔다고, 졌다 싶었어요.
아니나 다를까 9회에 뒤집어졌잖아요. 그 문제는, 그게 나한테 좋은 경험이 됐는데,
그때 그 한국시리즈가. 한국시리즈는 우승하는 게 목표지, 준우승이 목표 아니에요.
6차전에서 지든, 5차전이 되든 그런 건 별 문제가 아니에요.
7차를 어떻게 이기냐 하는 문제였지. 그때 이상훈이라고 하는 피처가 클로저였는데,
이상훈이를 내가 6차전에 써버리면 7차전에 쓸 토막이 안돼요.
그럼 7차전 못 이기는 거예요.
물론 흐름이 있으니까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거지만, 승부라고 하는 것은.
그러니까 거기서 번트를 대면 이상훈이 안 쓰고 7차에 갔으면 가능성이 있은 거예요.
번트 하나 실패하니까 졌다 싶은 거예요
마, 그때는 아쉬움이라고 하는 것은 큰 역전패, 마지막에.
그리고 혼신의 힘이라고 하는 걸 아이들에게서 봤고,
그때는 준플레이오프, 플레이오프, 코리안시리즈, 3단계를 올라왔으니까,
지칠 대로 지친 한없이 지친 상태였어도 애들은 잘했지 않나 싶은데,
내가 야구장에서 눈물을 흘린 게 그때가 처음이에요.
뒤에 기대가지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는데,
사장은 지니까 기분 좋아서 김 감독 수고했어, 그러더라고,
그리고 결국은 자르더라고요.
- 2015년 골든 글러브 시상식에 야마이코 나바로 대신 나와서 "나는 현역 때 후보에만 올랐었는데, 이렇게 대리 수상이라니... 나바로가 꿈에 나와서 수상 소감을 전해 줬습니다."라고 말하는 등 역대급 수상 소감을 보여줬다.
-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올림픽 야구 사상 최초의 퇴장 선수다. 야구가 시범 종목이던 1984 LA 올림픽에서 미국과의 4강전에서 퇴장당했다. 본인의 언급에 따르면, 팀에서 영어가 되는 사람이 자신뿐이어서 항의할 사람이 자기뿐이었다고 한다.[8] 2루 태그가 되기도 전에 아웃콜을 부르는 2루심을 보고 2루까지 가서 항의했는데 이것이 묵살당하며 2루심이 무시하며 뒤돌아서자, 돌아보라면서 어깨에 손을 올렸는데, 이게 빌미가 되어 퇴장당한 것. 결국 경기는 2:2로 팽팽하던 승부에서 5:2로 역전패당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