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억추
1548년(명종 3) 10월 23일 ~ 1618년(광해군 10)[1]
1. 개요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방로(邦老), 시호 현무(顯武)이다.
2. 생애
김억추는 1548년 10월 23일 전라도 강진현(현 전라남도 강진군 작천면 현산리 박산마을)에서 김충정(金忠貞)의 아들로 태어났다.[2] 1577년(선조 10) 알성시 무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는데 무이 만호가 되어 북변에서 전공을 세웠고 제주 판관·사복시 판관, 진산·순창·초산 등의 현감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방어사로서 허숙(許淑) 등과 함께 수군을 이끌고 대동강을 지켰다. 이 때의 공으로 잠시 동안 안주목사에 발탁되었으나, 허위보고를 하고 군율을 어겼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아 삭직당하였다. 이후 계속 주사장(舟師將)으로 대동강을 지키다가 여주목사에 제수되었으나, 맡은 직무를 잘못 처리하여 교체되었다.
1594년 만포진첨절제사(滿浦鎭僉節制使)가 되었으나, 탐욕스럽고 비루하다는 사간원의 탄핵으로 또 교체되었다. 1595년에 다시 만포진첨절제사에 임명되었다가 곧 진주목사로 승진되었지만 무능한 무관이 큰 고을의 목민관이 될 수 없다는 대간의 반대로 고령진첨절제사(高嶺鎭僉節制使)로 교체되었다.
1597년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한 이억기의 후임으로 정3품 전라 우도 수군절도사에 제수되어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서 어란포 해전과 명량해전에 참전했으나 시원찮은 모습을 보였고, 결국 육지로 보직 변경을 신청하였다. 이후 밀양 부사를 거쳐 1608년(광해군 즉위) 종2품에 올라 경상 좌도 병마 절도사가 되고 뒤에 제주 목사를 지냈다. 말년에는 벼슬을 그만두고 강진군 박산마을로 낙향하여 여생을 보내다가 71세에 사망하였다.
3. 현무공실기
김억추 장군의 후손들이 1914년에 김억추 장군을 기려 행장기[3] 인 《현무공실기》를 쓰게된다.
이 책은 크게 두 가지로 논란이 되었는데 첫째는 김억추 장군을 미화하였는데 후손들이 썼다는 것을 감안 하더라도 소설 수준으로, 꿈에서 관우의 계시를 받고 쇠사슬[4] 몇만근을 완력으로 짊어지고 올돌목 양 쪽에 설치했다든가, 왜선에 단독으로 뛰어들어서 검풍으로 수백명을 죽였다는 등등. 농담으로 김억추 이누야샤 설이 인터넷에 있을 정도이다.
또한 철쇄를 사용했다는 내용이 있어 이 부분도 논란거리가 되었다. 현대에 알려진 철쇄설은 사실상 현무공실기에 기반을 두고 있다. 물론 임진왜란 이후 수백년 후에 지어진 이 기록의 신뢰성은 전혀 없다.
그렇지만, 이《현무공실기》는 후손분들이 시기를 절묘하게 타고 출간한 덕분에, 비록 기록의 신뢰성이 의심받았을지언정 내용이 구전되는 데 '''성공한 홍보물'''이기도 하다. 현무공이 칼을 1번 휘두를 때마다 미운 왜적들이 (칼바람에) 쓸려나가는 내용이 일단 통쾌하고, 쇠사슬 내용에 사람들의 조력 과정을 각색해 넣으면, 전장의 한 장면으로 흥미로운 소재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4. 난중일기상의 기록
9월 8일 (양력 10월 18일)
적선이 오지 않았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대책을 논의했다. 우수사 김억추(金億秋)는 겨우 만호[5]
감이나 맞을까 대장으로 쓰일 재목은 못되는데도 좌의정 김응남(金應南)이 서로 친밀한 사이라고 해서 억지로 임명하여 보냈다. 이러고서야 조정에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는가! 다만 때를 못 만난 것 뿐이다.
9월 16일 (양력 10월 26일. 명량 해전 당일) <갑진> 맑다.
(전략)
여러 장수들이 적은 군사로써 많은 적을 맞아 싸우는 형세임을 알고 돌아서 피할 궁리만 했다. 우수사 김억추(金億秋)가 탄 배는 물러나 아득히 먼 곳에 있었다. 나는 노를 바삐 저어 앞으로 돌진하여 지자총통·현자총통 등 각 종 총통을 어지러이 쏘아대니, 마치 나가는 게 바람 같기도 하고 우레 같기도 하였다.
5. 실록상의 기록
사헌부가 아뢰길,
(중략)
여주 목사(驪州牧使) 김억추(金億秋)는 어사(御史)의 장계대로 파출(罷黜)했어야 마땅한데 대신할 만한 사람이 없다고 하여 잉임(仍任)시켰습니다. 대저 죄를 범해 파출하여야 할 수령들을 매번 적임자(適任者)가 없다고 하여 그대로 둔다면, 봉명(奉命)한 사람의 권한이 가벼워져서 탄압할 수 없게 되는 반면 죄를 범한 이는 습성이 되어 기탄할 것이 없게 되니, 그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김억추가 범한 것은 소문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어사가 혹은 추문하여 사실을 알아내고 혹은 현장을 잡아 알아낸지라, 의심할 것이 없으니 조금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김억추를 전에 아뢴 대로 파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성임의 일은 비변사에 물으라. 이일은 원수(元帥)이니 가벼이 논함은 부당하다. 김억추는 비변사에서 의계(議啓)하였으니, 이것 역시 따를 수 없다.”
-선조 27년 3월 7일
사헌부가 이성임(李聖任)을 체차(遞差)할 것과 김억추(金億秋)를 파직할 일을 누차 아뢰니, 상이 비변사에 하문하기를, “이성임과 김억추를 이처럼 논박하니 굳이 잉임(仍任)시킬 필요는 없는데 어떻게 하여야 하겠는가?”
(중략)
김억추는 이미 불법을 저지르다 잡혔고, 대간이 법을 지키려는 뜻이 매우 정당하니 신들은 감히 다른 논의를 할 수 없습니다.”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고 사헌부에 이르라.” 하였다.
-선조 27년 3월 12일
사간원이 아뢰기를, “만포 첨사 김억추(金億秋)는 사람됨이 탐오해서 전에 수령이 되었을 때 오로지 사욕을 채우기만을 일삼았습니다. 만포는 관방(關防)의 중한 곳일 뿐만 아니라 야인(野人)들이 왕래하며 통상하는 곳이어서 가려서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체차를 명하소서.”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선조 27년 8월 4일
고령 첨사(高嶺僉使) 김억추(金億秋)는 절박한 사정(私情)이 있더라도 이미 변장(邊將)이 되었으면 그밖의 것을 고려하지 않아야 할 것인데, 외람되게 상소하여 마침내 체면(遞免)되었습니다. 이러한 버릇은 징계하지 않아서는 안 되니, 파직하도록 명하소서.”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선조 29년 5월 25일
6. 창작물에서
김경진의 임진왜란과 격류에서는 동생 김응추와 함께 악역 개그 캐릭터로 나온다. 하는 짓은 미운데 둘이 하는 걸 보면 좀 웃기다.(…) 임영대의 이순신의 나라에서도 김경진 임진왜란의 인물 묘사와 비슷하게 동생 김응추와 함께 나온다.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자신을 신임 우수사라 소개하며 거제 현령 안위, 미조항첨사 김응함 등과 함께 처음 등장한다. 복직한 통상 대감이 12척의 전선을 회수하러 육로를 통해 회령포로 가는 길에 합류하는 것으로 나오며, 판옥선 1척을 전력에 보탠다. 그렇지만 그 이후로 비중은 공기. 명량 해전에서는 존재감조차 없기에 잘 된 고증(...) 같지만, 대신 철쇄의 비중은 엄청 크게 나와서 이순신의 전공이 퇴색되는 감이 있다.
영화 명량에서는 살인의 추억의 백광호 역으로 유명한 배우 박노식[6] 이 연기했으며, 여기서도 역사적으로도 가장 전투에 소극적이었던 것을 반영했는지, 다른 장수들이 뒤늦게나마 대장선에 합류하는 시점에서도 망설이는 표정으로 공기화되었다. 특히나 해전이 시작되기 전 배멀미로 드러누워 골골대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영화 상 묘사에 불만을 가진 후손들이 항의를 하고 소송도 검토 중이라고 한다.(#) 이에 역덕후들의 반응은 "배설 후손이 항의하는 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데 김억추는 실제로 이랬으니 항의고 소송이고 소용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