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의 나라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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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대체역사 소설. 작가는 슈타인호프.
2015년에 발간됐으며 전 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2. 줄거리
충무공 이순신이 노량 해전에서 심한 부상을 입었지만 끝내 살아남아 조선의 수군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이야기로 실제 역사와는 다른 가상 상황을 토대로 하고 있다.
종전 1년 후인 1599년, 선조는 임진왜란도 끝냈는데 기왕에 이순신을 역적으로 만들어 처형할 심산으로 누명을 씌우고 한양으로 압송하려 한다. 그러나 고금도의 백성들이 압송을 막아 호송관들에게 이순신을 역적으로 만들지 말라면서 호소하고, 때마침 고금도에 들어온 안위 일행이 이순신을 구출하고는 그에게 의심꾼에다 썩어빠진 마음씨를 지닌 선조를 왕위에서 끌어내자며 거병할 것을 요청했고, 그런 상황에 탐탁치 않으면서도 상황이 상황인 지라 계속 고민하던 이순신이 그 요청을 어렵게 받아들여 반란(!)을 일으킨다는 이야기. 이순신은 일단 선조를 퇴위시키고 광해군에게 양위한 후에는 군사를 해산하고 처벌을 기다리겠다는 심산이었으나[1] 이순신을 따르는 부하들은 역성혁명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순신이 이끄는 전라좌수군은 전라우수군, 충청수군과의 전투를 치르며 한양에 들어오게 되었고[2] 이에 호응해서 배설이 이끄는 육상 병력도 함께 한양을 공격했지만 이미 선조는 도성의 백성들을 내버려두고 경강 주변의 마을 일대를 불태운 채 왕족들과 몇몇 문관들을 데리고 도망친 후였다. 이에 분노한 경군 일부가 이순신에게 합세하여 취약했던 육상전력도 보강된다.[3] 게다가 선조 일행은 함흥에 도착하면서도 수적으로 열세인 선조측 관군을 내버려두고 왕자 정원군과 짜고 누르하치 세력하의 여진족들을 끌어들이는 바람에 백성들의 민심과 관군들의 충성심을 동시에 하락시켜 버리는 악수를 두고 말았고, 결국 정원군의 야심을 이용한 누르하치의 암수에 의해 정원군과 그의 자식들을 제외한 선조 일가는 '''멸족'''하고 만다.
선조 일가의 시신을 거두고 한양으로 돌아온 이순신 일행은 그를 아직까지 의심하던 윤두수 이하 문관 및 사대부들이 꾸민 암살 음모에 휘말리나, 이내 제압하고는 임금이 없는 나라의 미래를 걱정해 휘하 부하들과 이항복, 이원익, 곽재우 등 진정한 충신들, 그리고 백성들의 지지를 업고 새로운 국가를 열게 된다. 새로운 국가의 이름은 '''韓.'''
3. 등장인물
3.1. 이순신과 주변 인물
본작의 주인공. (원 역사와는 달리) 치열한 노량 해전에서 부상을 당하고 의식을 잃긴 했지만 살아남아 부산포로 진격하여 철수하는 왜군을 상대로 최후의 전투도 치렀지만, 아직까지 그를 의심하고 시기하던 선조에 의해 견제받는 중이었다. 결국 한양으로 압송당할 위기에 몰리던 차에 고금도의 백성들이 막아섰고, 때마침 고금도에 도착한 안위 일행에 의해 풀려난 다음 잠시 쉬고 있었다가 한양에 가서 선조를 몰아내자는 안위 이하 무관들의 요청을 받아들이고 격문을 뿌려 민중과 다른 군대들을 동요시킨 다음 수군을 이끌고 서해안을 통해 한양으로 가게 된다. 도중에 몇 번의 전투가 있었지만 본인의 노련한 전술력과 그를 믿고 따르는 수군들 덕분에 돌파할 수 있게 된다.
실제 역사에선 실체가 불분명한 '수군 도독'이란 직함도 확실히 받은 상태. 정확히는 전쟁이 모두 끝난 뒤에 명국에서 수여했다는 가상 설정. 이 때문에 명나라 장수들조차 '대명 수군 도독께 인사드립니다'라고 말하는 등 쩔쩔맨다. 심지어 자신을 명으로 데려가려 줄기차게 설득하는 만세덕을 그의 부하 병력들과 함께 사실상 추방시키기까지 한다.
거병 초기에는 임금 주위의 간신들을 몰아내고 자신은 죗값을 치르겠다는 소극적인 정난을 생각했고, 이후에는 선조가 답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세자 광해군에게 양위를 요구하고 상왕으로 모신다는 수준으로 바뀐다. 그러나 가면 갈수록 심해지는 선조와 선조파 관군들의 막장 행각 때문에 부들부들 떨면서 선조의 폐서인까지 언급하게 되나, 최종 전투에서 승리한 뒤 선조와 광해군을 포함한 거의 모든 종친들이 여진군에게 피살당하자 종국에는 자신은 원하지도 않건만, 그래도 백성들이 원하기에 그것에 순응하고 베풀어야 할 길인 왕의 자리, 그것도 명나라의 정식 인가를 받은 새로운 나라 '한국'의 시조로 등극하게 된다.
실제 역사에선 실체가 불분명한 '수군 도독'이란 직함도 확실히 받은 상태. 정확히는 전쟁이 모두 끝난 뒤에 명국에서 수여했다는 가상 설정. 이 때문에 명나라 장수들조차 '대명 수군 도독께 인사드립니다'라고 말하는 등 쩔쩔맨다. 심지어 자신을 명으로 데려가려 줄기차게 설득하는 만세덕을 그의 부하 병력들과 함께 사실상 추방시키기까지 한다.
거병 초기에는 임금 주위의 간신들을 몰아내고 자신은 죗값을 치르겠다는 소극적인 정난을 생각했고, 이후에는 선조가 답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세자 광해군에게 양위를 요구하고 상왕으로 모신다는 수준으로 바뀐다. 그러나 가면 갈수록 심해지는 선조와 선조파 관군들의 막장 행각 때문에 부들부들 떨면서 선조의 폐서인까지 언급하게 되나, 최종 전투에서 승리한 뒤 선조와 광해군을 포함한 거의 모든 종친들이 여진군에게 피살당하자 종국에는 자신은 원하지도 않건만, 그래도 백성들이 원하기에 그것에 순응하고 베풀어야 할 길인 왕의 자리, 그것도 명나라의 정식 인가를 받은 새로운 나라 '한국'의 시조로 등극하게 된다.
본작의 주역이자 감초 캐릭터.[4] 반란을 일으킨 역적 정여립의 친척이라는 이유로 연좌제에 휘말려 전라우수사직에서 파직당하고 울분을 삼킨 채 채 부하들을 이끌고 고금도에 왔다가 함거 안에 갇힌 이순신을 구하기 위해 막아서는 백성들을 보았고, 금세 상황을 파악하고 이순신을 구출한다. 그 후 선조의 명을 따르던 금부도사 일행을 가두고 면식이 있던 동료들을 불러모아 선조를 내쫓기 위한 계획을 획책하고는 이순신을 설득하게 만든다.
이순신과 함께 한양으로 향하던 중 몇 번의 전투에 조우하기도 했으며, 함흥 인근에서 벌어진 여진족 & 관군과의 대전투에도 활약하는 등 은근히 도움되는 역할이 많다. 하지만 울돌목에서의 전투 때 자신이 되찾아서 탑승하려던 전라우수군의 대장선을 현직 전라우수사 김억추가 타고 도망가 버려서 나포하지 못하자 열불을 내기도 했고,[5] 소근포 해전에서는 후위에서 경계를 느슨히 하다가 충청수군의 습격에 고전하기도 하고,[6] 임진강 인근에서 커다란 실수까지 하고,[7] 영 좋지 않은 타이밍에 적군과 조우하는 등 고생도 많은 편. 성천강 전투에서는 항왜병을 포함한 우익을 맡아 근왕군 기병을 저지하고 직후 성천강을 자력도강해 함흥 본궁을 들이친다. 그리고 최후반부의 사림파의 반란에서도 시종일관 무례하게 행동하는 영창정에게 분노에 찬 일갈을 가한다.
하마터면 초반에 이탈(?)할 뻔했다. 이순신이 "거사에 참여하지 않을 장수들은 일어서시오"라고 말하자 이순신이 거사를 하기로 결정한 것에 대해 기쁜 나머지 벌떡 일어나버린 것(...). 덕분에 살짝 망신을 당한다.
이순신과 함께 한양으로 향하던 중 몇 번의 전투에 조우하기도 했으며, 함흥 인근에서 벌어진 여진족 & 관군과의 대전투에도 활약하는 등 은근히 도움되는 역할이 많다. 하지만 울돌목에서의 전투 때 자신이 되찾아서 탑승하려던 전라우수군의 대장선을 현직 전라우수사 김억추가 타고 도망가 버려서 나포하지 못하자 열불을 내기도 했고,[5] 소근포 해전에서는 후위에서 경계를 느슨히 하다가 충청수군의 습격에 고전하기도 하고,[6] 임진강 인근에서 커다란 실수까지 하고,[7] 영 좋지 않은 타이밍에 적군과 조우하는 등 고생도 많은 편. 성천강 전투에서는 항왜병을 포함한 우익을 맡아 근왕군 기병을 저지하고 직후 성천강을 자력도강해 함흥 본궁을 들이친다. 그리고 최후반부의 사림파의 반란에서도 시종일관 무례하게 행동하는 영창정에게 분노에 찬 일갈을 가한다.
하마터면 초반에 이탈(?)할 뻔했다. 이순신이 "거사에 참여하지 않을 장수들은 일어서시오"라고 말하자 이순신이 거사를 하기로 결정한 것에 대해 기쁜 나머지 벌떡 일어나버린 것(...). 덕분에 살짝 망신을 당한다.
- 정 참봉
가상 인물. 이순신의 거병에서 책사를 담당한 인물. 전직 사복시 참봉으로 이순신이 아끼던 부하 정운의 친척이어서 정운이 전사하자 그가 죽은 자리를 보고 싶다며 남해로 내려왔다가 이순신과 친분을 쌓게 되었다. 작중에서의 묘사는 거의 장량 내지는 제갈량 급으로,[8] 다른 이순신 휘하 장수들과 달리 그림자처럼 지방에서 첩보전과 정보수집, 정치질로 이순신에게 도움을 준다. 애초부터 역성혁명을 꿈꾸고 배설의 게릴라 부대와 미리 접촉하여 이순신의 가족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고, 반정의 각 국면에서 필요적절한 대책을 내놓는 등 가히 반정의 최고 공신이라고 할 법하다. 작중 말미에 밝혀지는 본명은 정호찬(호걸 호, 기릴 찬)으로 정도전의 먼 후손이었다고 하며,[9] 새로운 나라 한국에서 정도전의 이상이 다시 실현되기를 꿈꾸고 있다.
참고로 '정호찬'이란 이름은 작가의 이글루스 지인의 이름이며 이미 작가의 다른 작품인 《봉황의 비상》에 나오기도 했다(...).[10] 덕분에 작가 블로그에서 연재할 당시 신나게 놀림거리로 전락(?)했다. 사실 이 지인의 본인 책임(?)도 없지 않은 게 작가의 다른 작품에서 정도령 드립을 치는 바람에...... 실제로 작 후반에 이항복이 지나가는 말로 정 진인이 아니냐 말하긴 했다. 블로그 연재 당시 작가의 말에 따르면 정도전 포지션의 인물이 필요한데 실존인물 중에선 이 역할을 할 사람이 마땅치 않아 이미 《봉황의 비상》에서 이름을 쓰면서 독자들에게 농담거리였던 지인의 이름을 재활용한 것. 이후 작가는 아예 여기에 맛들렸는지, 차기 작품(《내가 히틀러라니!》)이나 블로그에서 연재하는 단편에서도 '정호찬'을 등장시키고 있다. 물론 연재할 때마다 댓글은 이를 놀려대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참고로 '정호찬'이란 이름은 작가의 이글루스 지인의 이름이며 이미 작가의 다른 작품인 《봉황의 비상》에 나오기도 했다(...).[10] 덕분에 작가 블로그에서 연재할 당시 신나게 놀림거리로 전락(?)했다. 사실 이 지인의 본인 책임(?)도 없지 않은 게 작가의 다른 작품에서 정도령 드립을 치는 바람에...... 실제로 작 후반에 이항복이 지나가는 말로 정 진인이 아니냐 말하긴 했다. 블로그 연재 당시 작가의 말에 따르면 정도전 포지션의 인물이 필요한데 실존인물 중에선 이 역할을 할 사람이 마땅치 않아 이미 《봉황의 비상》에서 이름을 쓰면서 독자들에게 농담거리였던 지인의 이름을 재활용한 것. 이후 작가는 아예 여기에 맛들렸는지, 차기 작품(《내가 히틀러라니!》)이나 블로그에서 연재하는 단편에서도 '정호찬'을 등장시키고 있다. 물론 연재할 때마다 댓글은 이를 놀려대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 임승조
가상 인물. 항왜장. 일본에서의 이름인 하야시 카츠스케(林勝助)의 한자를 조선식으로 읽은 이름. 본래 자신의 고향에선 꽤 이름을 날린 가신 집안[11] 출신이었다. 김충선과의 일기토 때 김충선이 '과연 하야시 가의 무사다운 솜씨요!'라고 따로 언급할 정도. 하지만 영 좋지 않은 타이밍에 가문이 몰락한 이래 용병으로 살아가다가 임진왜란에 참전했지만 최후의 전투인 부산성 탈환전에서 자신을 고용했던 왜장이 자신을 포함한 용병 부대를 버려두고 도망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용병 부대를 대표해서 이순신에게 항복을 했고,[12] 항복을 받아들인 이순신은 그들을 자신의 휘하로 편입해 준 이래로 계속 이순신 휘하의 항왜인들을 이끌게 되어 거병 이후에도 잘 활약하는 편. 다만 항왜라는 불안정한 상황 탓에[13] 자신과 부하들의 안전을 보증해 줄 전공에 욕심이 있다보니 불리한 상황에서도 관군들을 함부로 베지 말라는 이순신의 명을 종종 어기는 면이 있지만 그 행동 자체가 전장을 오랫동안 헤쳐나온 임승조 본인의 판단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걸핏하면 장수들의 전공을 챙기려고 하는 통에 안위의 골치를 썩히기도 한다(...).[14] 그것만 빼면 안위와는 제법 죽이 잘 맞는 말동무이기도 하다.
한양 입성전에서 대전공(?)을 세운다. 숭례문이 돌파하자마자 임진왜란의 7년이라는 긴 전쟁을 생각하고, 속전속결로 빠르게 정릉 동행궁으로 쳐들어가 선조를 사로잡으려 했는데, 피난민들에게 가로막히자 열 받은 하야시대 병사들이 일본어로 욕지거리를 했는데 이에 피난민들이 "왜놈들이 다시 쳐들어왔다!"며 패닉 상태에 빠졌다가 곧바로 이순신이 입성하는 것을 보자 "통상께서 왜적을 물리치고 상경하셨다!"며 반정군의 입성을 대환영한 것. 왕은 어차피 그 날 새벽에 튀었으니 어찌보면 그야말로 할 수 있는 최고의 전공을 세웠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한양에서 사로잡은 관군 항왜병들을 추가로 귀순시켜 동북면 원정에서는 500명의 부대를 이끌게 된다. 이후 성천강 전투에서는 안위가 지휘하는 우익에서 항왜병 지휘를 위임받아 총통기화차와 조총병들의 지원 아래 장창으로 관군 기병을 막아내는 혁혁한 공을 세운다. 임금 일가의 시신을 수습하고 한양에 돌아온 이순신을 탐탁치 않아 했던 윤두수 일파가 사주해서 보낸 김충선과 일기토를 벌일 정도로 개인적인 무력도 출중한 편. 조선어가 유창하긴 하지만 높으신 분들에게는 '도노'를 붙여 부르는 기묘한 습관이 있다. '통제 도노', '임금 도노' 등.
한양 입성전에서 대전공(?)을 세운다. 숭례문이 돌파하자마자 임진왜란의 7년이라는 긴 전쟁을 생각하고, 속전속결로 빠르게 정릉 동행궁으로 쳐들어가 선조를 사로잡으려 했는데, 피난민들에게 가로막히자 열 받은 하야시대 병사들이 일본어로 욕지거리를 했는데 이에 피난민들이 "왜놈들이 다시 쳐들어왔다!"며 패닉 상태에 빠졌다가 곧바로 이순신이 입성하는 것을 보자 "통상께서 왜적을 물리치고 상경하셨다!"며 반정군의 입성을 대환영한 것. 왕은 어차피 그 날 새벽에 튀었으니 어찌보면 그야말로 할 수 있는 최고의 전공을 세웠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한양에서 사로잡은 관군 항왜병들을 추가로 귀순시켜 동북면 원정에서는 500명의 부대를 이끌게 된다. 이후 성천강 전투에서는 안위가 지휘하는 우익에서 항왜병 지휘를 위임받아 총통기화차와 조총병들의 지원 아래 장창으로 관군 기병을 막아내는 혁혁한 공을 세운다. 임금 일가의 시신을 수습하고 한양에 돌아온 이순신을 탐탁치 않아 했던 윤두수 일파가 사주해서 보낸 김충선과 일기토를 벌일 정도로 개인적인 무력도 출중한 편. 조선어가 유창하긴 하지만 높으신 분들에게는 '도노'를 붙여 부르는 기묘한 습관이 있다. '통제 도노', '임금 도노' 등.
이순신과 잘 알고 지냈던 전직 수군 장수. 실제 역사와 달리 권율이 사망할 때까지 잡히지 않는 바람에 탈영죄로 처형되지도 않고 숨어 살면서 정여립과 이몽학 세력의 잔당과 조정의 숙청에서 살아남은 의병 등 조선의 현 상황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을 끌어모아 자신을 수장으로 모시는 대세력을 은밀하게나마 세웠고 이순신의 거병 타이밍에 맞춰 같이 거병, 게릴라전을 펼쳐 지방의 수령들이 군대를 이끌고 이순신을 치러 가거나 한양으로 향하지 못하게 방해한다. 이후 잠시 종적이 묘연해진 후 조정측의 감시를 피해 양천#s-1 양화리(현 영등포구 양평동)에서 갑작스럽게 3천 군세가 집결하여 조정을 패닉 상태로 만든다.
이순신 일행이 한양으로 향하던 도중에 합류하긴 했지만, 이순신의 소극적인 계획과 다르게 배설 본인은 썩을대로 썩어빠진 조선 왕실과 관료와 사대부들을 제거하려는 극단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은근히 대립각을 세웠다.[15] 또한 형편상 배설부대[16] 에게 충분한 지원을 해주지 못하는 통제영이나 이순신에게도 약간의 섭섭한 감정을 은연중에 내비친다.[17] 성천강 전투에서는 그간 육전을 도맡아 피로한 점을 고려해 적의 주공방향이 아닌 좌익을 담당하도록 배려받았지만 정작 반정군 내부에서는 "왜 힘든 일은 다 떠맡다가 마지막에 뒤쪽에 쳐박혀야 하나"하는 볼멘소리가 나왔고, 자신들의 전면에 나타난 조정군 보병부대의 굼뜬 모습에 고무되어 무모하게 진격을 감행한다. 그러나 여진족들의 기병들에게 측면공격을 제대로 당해 아들 배상중과 일부 부하들을 제외한 군세가 전멸당했고, 배설 본인은 겨우 살아남았지만 심한 중상 때문에 자신의 임종을 지키던 이순신한테 이 나라의 백성들을 결코 잊지 말아달라, 반정 이전으로 돌아가서는 안된다는 유언을 전하고 사망한다.[18] 실제 역사에서 명량 해전 직전 배설이 도망친 뒤 역모로 추정되는 일을 꾸미다가 체포되어 처형된 것을 각색한 듯.
이순신 일행이 한양으로 향하던 도중에 합류하긴 했지만, 이순신의 소극적인 계획과 다르게 배설 본인은 썩을대로 썩어빠진 조선 왕실과 관료와 사대부들을 제거하려는 극단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은근히 대립각을 세웠다.[15] 또한 형편상 배설부대[16] 에게 충분한 지원을 해주지 못하는 통제영이나 이순신에게도 약간의 섭섭한 감정을 은연중에 내비친다.[17] 성천강 전투에서는 그간 육전을 도맡아 피로한 점을 고려해 적의 주공방향이 아닌 좌익을 담당하도록 배려받았지만 정작 반정군 내부에서는 "왜 힘든 일은 다 떠맡다가 마지막에 뒤쪽에 쳐박혀야 하나"하는 볼멘소리가 나왔고, 자신들의 전면에 나타난 조정군 보병부대의 굼뜬 모습에 고무되어 무모하게 진격을 감행한다. 그러나 여진족들의 기병들에게 측면공격을 제대로 당해 아들 배상중과 일부 부하들을 제외한 군세가 전멸당했고, 배설 본인은 겨우 살아남았지만 심한 중상 때문에 자신의 임종을 지키던 이순신한테 이 나라의 백성들을 결코 잊지 말아달라, 반정 이전으로 돌아가서는 안된다는 유언을 전하고 사망한다.[18] 실제 역사에서 명량 해전 직전 배설이 도망친 뒤 역모로 추정되는 일을 꾸미다가 체포되어 처형된 것을 각색한 듯.
경상우수사. 이순신만큼이나 고지식한 인물이라 이순신이 거병을 할 때 부하들이 합류하자는 걸 거부하고 진압을 위한 출전 준비를 하였다. 본래 유형의 경상우수영 병력은 이순신의 반정 초기에서는 상당한 변수였다. 왜란이 끝난 직후, 일본군이 다시 침략한다면 경상우수영이 최전선이라는 이유로 수군의 대부분의 전선들을 경상우수영에 재배치했다.[19] 그래서 경상우수영의 함대 전력이 이순신의 통제영 및 전라좌수영 함대보다 더 강해진 것이다. 명목은 이렇지만, 실제로는 이순신을 견제하려는 선조의 꼼수였다. 이순신의 부하들은 이 명령을 받고 너무 노골적인 견제라며 불만을 품었지만, 명목 자체는 틀린 게 아니라서 이순신 본인은 순순히 이를 받아들였고 부하들의 불만도 곧 표면적으론 잠잠해졌다.
유형이 한창 출전 준비를 하던 중 선전관들이 내려오는데, 이들에게 내린 선조의 밀명이 "유형이 출전 준비를 한다면 이순신에게 합류하는 것일 테니 죽여라"였던 것. 정작 유형은 이순신을 진압하려던 건 물론이고, 독자적으로 출동했다가는 선조의 오해를 살까 봐 일부러 전라좌수영이 있는 여수와 가까운 미조항에 우수영 함대를 집결시킨 뒤 공식 어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순신은 일본의 재침을 경계하여 경상좌우수영은 끌어들이지 않고 참가 안 해도 좋으니 관할구역만은 지켜달라고 호소했었다. 그런데 이순신의 이러한 행동 때문에 오히려 경상우수영 장졸들이 더 흥분했다. 이순신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게 되었고 '딴 건 몰라도 그놈의 원균 때문에 죽어나간 경상우수영 장졸들의 한을 풀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올 정도. 결국 유형은 그 자리에서 죽을 뻔했으나 부하들이 선전관을 죽이면서 구출되고, 이제야 선조의 지독한 의심병을 몸소 겪은데다가 선전관 일행까지 죽인 상황까지 생겨버렸으니 일본의 재침에 대비해 일부 병력을 경상좌수영과 함께 대비토록 한 후 이순신에게 동참한다. 실제 역사상 세키가하라 전투로 치닫을 일본 내부 상황에 대한 정보도 입수하여 재침 가능성이 낮다는 것 역시 고려되었다. 한양 점령 이후에는 왕족의 얼굴을 아는 선전관 출신이라 임진강까지 선조 일행을 추적하고, 북정이 결정된 이후에는 한양에 남아 치안 유지를 담당한다. 이순신의 반정이 시작된 이후 여러 방면에서 활약하는 등 능력은 좋은 편이다.
유형이 한창 출전 준비를 하던 중 선전관들이 내려오는데, 이들에게 내린 선조의 밀명이 "유형이 출전 준비를 한다면 이순신에게 합류하는 것일 테니 죽여라"였던 것. 정작 유형은 이순신을 진압하려던 건 물론이고, 독자적으로 출동했다가는 선조의 오해를 살까 봐 일부러 전라좌수영이 있는 여수와 가까운 미조항에 우수영 함대를 집결시킨 뒤 공식 어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순신은 일본의 재침을 경계하여 경상좌우수영은 끌어들이지 않고 참가 안 해도 좋으니 관할구역만은 지켜달라고 호소했었다. 그런데 이순신의 이러한 행동 때문에 오히려 경상우수영 장졸들이 더 흥분했다. 이순신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게 되었고 '딴 건 몰라도 그놈의 원균 때문에 죽어나간 경상우수영 장졸들의 한을 풀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올 정도. 결국 유형은 그 자리에서 죽을 뻔했으나 부하들이 선전관을 죽이면서 구출되고, 이제야 선조의 지독한 의심병을 몸소 겪은데다가 선전관 일행까지 죽인 상황까지 생겨버렸으니 일본의 재침에 대비해 일부 병력을 경상좌수영과 함께 대비토록 한 후 이순신에게 동참한다. 실제 역사상 세키가하라 전투로 치닫을 일본 내부 상황에 대한 정보도 입수하여 재침 가능성이 낮다는 것 역시 고려되었다. 한양 점령 이후에는 왕족의 얼굴을 아는 선전관 출신이라 임진강까지 선조 일행을 추적하고, 북정이 결정된 이후에는 한양에 남아 치안 유지를 담당한다. 이순신의 반정이 시작된 이후 여러 방면에서 활약하는 등 능력은 좋은 편이다.
가리포첨사. 장비와 같은 외모에 다소 소심한 성격으로 묘사된다. 이순신의 반정군에 가담한 뒤 울돌목의 김억추를 무시하고 우회할 것을 주장했다. 우치적이 "김억추가 상선 타고 나와 싸울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 손 들어 보라"고 했을 때 너무 웃다가 뒤로 자빠지고도 계속 웃는다(...). 원 역사에선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지만 본작에선 이순신처럼 살아있다.
통제영 조방장. 임란 직후 통제영 직속 전력이 없어 허울뿐인 자리에 앉아 울분을 삼키다가 반정이 결정되자 순천부 가(假)대장으로 순천부의 병력과 물자를 쓸어온다. 이후 다시 조방장으로 반정군 함대의 좌위장을 맡아 수전과 육전 모두 매 전투마다 본대 혹은 본대에 준하는 병력을 이끈다.
통제영 조방장. 통제영 장수들 중 최연장자이다. 마포전투에서는 육전병력을 상륙시킨 후 함대를 맡아 후방을 지원하다가 육상이 정리되자 경기수군을 귀순시킨다.
- 민정붕(閔廷鵬)
방답(현 여수시 돌산읍 군내리)첨사. 김경진의 격류에서는 명량 해전을 앞두고 도망갔다가, 도중에 다시 와서 군선을 지휘하는 한심한 지휘관으로 나오는데[20] 여기서도 그 기믹을 이어받았는지 거병을 앞두고 갑론을박하던 와중 삼별초처럼 섬을 점거하고 독립을 하자, 제주도로 가자, 유구국으로 가자 등등의 헛소리를 해대다가 김극제에게 극딜당한다.
광양현감. 실제 역사에서 거북선 및 군선 전문가였던 특기를 살려 경강 돌입을 앞두고 우치적과 함께 육전용 총통거를 제작한다. 급히 만들고 천자총통 같이 화끈한 화력의 대포에 바퀴를 달지는 못했지만, 숙련도가 낮았던 도순변사군을 피떡으로 갈아내어 승리에 크게 공헌한다.
- 송여종
녹도 만호. 안위 다음으로 나온 이순신의 두번째 장수로 초반에 거병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나 이순신이 출정을 결시할 때 따라 나선다.
- 김응함
미조항 첨사. 유형이 선조가 보낸 선전관 일행에게 죽음을 맞이하기 전 군사들과 함께 유형을 구출했다.
이순신의 조카들. 이순신의 장남인 이회와 달리 이순신의 거병을 적극적으로 지지했고, 김충선이 이순신의 거처를 습격하자 맞서 싸웠으나 부상당한다. 이회에 비해서는 분량이 상당한 편.
이순신의 장남. 이순신의 친자식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등장한다. 하지만 사촌인 이완·이분에 비해서도 비중이 적은 편. 처음 거병을 결의할 때나 한양에서의 회의 정도에만 모습을 비춘다. 딱 한 차례지만 정국의 복잡한 흐름을 읽는 모습을 보여준다.[21]
- 방씨(方氏)
이순신의 아내. 마지막 장면에서만 등장한다. 작중 언급으로는 선조의 명령으로 의금부에 끌려갈 뻔했지만 배설의 반군 덕에 구출되어 보호받았고, 마지막에 남편이 왕으로 즉위하면서 당연히 중전의 자리에 오르지만 이를 두려워한다. 작품 전체를 통틀어서 유일한 여캐다(...).
- 위대기, 정공청, 소계남, 이정표 등등
이순신을 따라 반정을 일으킨 휘하 장수들. 큰 비중은 없지만 간간히 모습을 보인다.
3.2. 왕실
본작에선 선조가 은근히 열등감 투성이 & 찌질이에다 귀가 얆고 앞날을 제대로 생각하지 않는, 도량이 좁은 임금으로 나온다. 머리는 좋은데 그 머리를 자기를 위해서만 쓰는 인물.[22] 이순신이 거병하자 다른 장수들도 이에 따를 것을 생각했는지 권력을 동원해 애꿎은 사람들을 몰아넣다가 유형이 단박에 전향하는 등 일을 엉망으로 만들더니[23] 이순신 일행이 한양 가까이로 나아가자 혹시 이순신과 접촉해 새 왕이 되려 할지 모른다는 이유로 모든 직계 왕족들을 인질로 데리고 함흥으로 도망치더니 급기야는 정원군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누르하치가 이끄는 여진 병사들을 끌어들이더니만 되려 그들한테 참살당한다.
이순신의 존재를 탐탁치 않으면서도 이순신에 대해 호의를 가진 명군의 장수들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정도로 이순신에 대한 열등감이 크다. 이순신이 거병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한양 인근에 세워진 명군 진지에 대한 경계를 강화할 정도로 명군이 이 사태에 개입하지 못하게 노력해 왔지만 선조의 열등심을 잘 알고 있었던 명군 사신의 논파에 반박하지도 못했다. 여진족을 상대해야 한다는 북방의 실정은 안중에도 없이 5만 북병 중 왜 4천밖에 못 모아오냐며 함경감사를 닦달하는 등 전형적인 암 걸리는 높으신 분. 그래도 최후를 맞을 때는 나름 조선의 왕답게 여진족 군사들에게 당당히 맞서다 살해당했다. 이순신이 유해를 수습하고 실제 역사처럼 선종이라는 묘호를 올렸다.[24]
안습하게도 임진왜란 때 임금이 자신들을 내버려두고 도망친 일로 인해 민초들한테 단단히 찍힌 터라 선조의 시신 운구 행렬을 구경하면서 "도망꾼 임금이 잘 죽었다", "아예 야인 땅으로 가지 그랬냐", "조금만 더 살았으면 야인들이 쳐들어와 제주도 피난도 가보지 않았겠냐"며 백성들이 비웃을 정도로 선조에 대한 인망과 충성심이 거의 없어졌다.
이순신의 존재를 탐탁치 않으면서도 이순신에 대해 호의를 가진 명군의 장수들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정도로 이순신에 대한 열등감이 크다. 이순신이 거병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한양 인근에 세워진 명군 진지에 대한 경계를 강화할 정도로 명군이 이 사태에 개입하지 못하게 노력해 왔지만 선조의 열등심을 잘 알고 있었던 명군 사신의 논파에 반박하지도 못했다. 여진족을 상대해야 한다는 북방의 실정은 안중에도 없이 5만 북병 중 왜 4천밖에 못 모아오냐며 함경감사를 닦달하는 등 전형적인 암 걸리는 높으신 분. 그래도 최후를 맞을 때는 나름 조선의 왕답게 여진족 군사들에게 당당히 맞서다 살해당했다. 이순신이 유해를 수습하고 실제 역사처럼 선종이라는 묘호를 올렸다.[24]
안습하게도 임진왜란 때 임금이 자신들을 내버려두고 도망친 일로 인해 민초들한테 단단히 찍힌 터라 선조의 시신 운구 행렬을 구경하면서 "도망꾼 임금이 잘 죽었다", "아예 야인 땅으로 가지 그랬냐", "조금만 더 살았으면 야인들이 쳐들어와 제주도 피난도 가보지 않았겠냐"며 백성들이 비웃을 정도로 선조에 대한 인망과 충성심이 거의 없어졌다.
선조의 서장자이며 광해군의 동복형. 포악한 성격 때문에 동생 광해군에게 세자 자리를 넘겨주고, 임란 때에는 순화군과 함께 왜군에게 붙잡혔던 굴욕을 맛봐 하루하루 술로 세월을 보내는 중이다. 포로생활로 묘한 동질감이 생긴 이복동생 순화군이 자신이 왕이 되도록 밀어주면 보답하겠다는 말에 손을 잡았으나 순화군이 비명횡사하자 이후로는 명색이 왕실의 장자가 피난길에서조차 몸도 가누지 못한 채 초헌 위에서 술을 찾으며 추태를 부리는 인간 쓰레기로 전락한다.[25] 결국 정원군이 불러온 여진 군사들이 조선 왕족들을 멸족시킬 때 함께 죽었다.
본작의 진정한 대인배. 이순신의 거병에 대해 그 정당성을 이해하고, 최대한 희생없이 이순신과 협상하여 사태를 마무리지으려 하나 아버지 선조의 의심병 때문에 이순신과의 접촉 시도가 무산되고 선조에 이끌려 함흥으로 파천한다. 선조와 정원군이 끌어들인 여진족 군사들의 만행에 분개하고, 차라리 이순신이 왕이 되는 게 하늘의 천명임을 깨달아 이순신에게 선양한다는 내용의 교서를 몰래 작성하나 그 직후 여진족 군사들이 아버지 선조를 비롯한 정원군 외의 모든 조선 직계 왕족들을 살해할 때 광해군 역시 화살에 맞아 치명상을 입었다. 그러나 안위와 임승조가 구원군을 이끌고 온 덕분에 잠시 목숨을 연장하여 몇 시간 정도 조선의 마지막 왕으로 재위했고, 이순신에게 선양한다는 교서를 함흥부윤 문향식을 통해 읽게 함으로서 이순신의 새 왕조 개창에 정당성을 실어준 후 숨을 거두었다. 이순신은 애종(哀宗)이라는 묘호를 올리고 조선의 마지막 왕으로 예우를 갖춰 장례를 치뤘다.[26]
이순신이 거병했다는 소식을 알음알음 전해듣고는 몰래 임해군을 만나 (정원군이 몰래 엿듣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선조 몰래 이순신과 접촉해서 형은 글렀으니 자신이 왕이 될 수 있게 협력해야 한다는 의사를 내뱉고, 선조가 이끄는 왕족 일행이 파주에 잠시 머무른 틈을 타 안전한 도주로를 찾아야 한다는 거짓말을 치고는 장인어른과 처조부만 따로 데리고 임진강에 정박해서 선조를 붙잡기 위해 감시 중이던 안위를 만났지만 순화군의 막장스런 태도에 빡돈 안위가 직접 활로 쏴 죽인다. 화살에 목을 꿰뚫린 순화군의 시체는 임진강 물 속에 고꾸라졌고 이 광경을 본 순화군의 남은 일행은 놀라서 파주로 돌아가지 않고 줄행랑을 쳤다. 정작 이 사건 당시의 안위는 순화군의 얼굴을 몰랐던 데다가 순화군을 사칭한 막장 인간으로 판단했으나 후에 선전관 출신인 유형과의 대화 중간에 임진강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없이 내뱉자 뭔가를 느낀 유형의 재촉에 임진강을 뒤져 시체를 건졌고, 시체의 얼굴을 보고 단번에 순화군을 알아본 유형의 표정을 보고서야 엄청난 실수를 했음을 파악하고 경악했다.
다만 이 막장스러운 인간이 이순신을 만나 깽판을 부렸으면 이순신이 얼마나 골치를 썩이게 되었을 지 생각하면, 안위가 이순신을 구원한 셈이다. 대놓고 깽판은 안 치더라도 일단 왕족이 귀순한 이상 이걸 함부로 죽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조선팔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망나니를 왕으로 앉힐 수도 없고. 게다가 선조 일행은 순화군이 오지 않는 걸 이상하게 여기던 찰나에 순화군이 수행내관을 베는 것을 보고 도망친 수행원에게서 사건의 전말을 듣고 곧바로 파주를 떴으니 어차피 다 박살난 우수군 몇백명 데리고 도주로 차단과 서북병 견제 임무를 동시에 맡고 있던 안위로서는 순화군을 잡으나 마나였을 것이다.
다만 이 막장스러운 인간이 이순신을 만나 깽판을 부렸으면 이순신이 얼마나 골치를 썩이게 되었을 지 생각하면, 안위가 이순신을 구원한 셈이다. 대놓고 깽판은 안 치더라도 일단 왕족이 귀순한 이상 이걸 함부로 죽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조선팔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망나니를 왕으로 앉힐 수도 없고. 게다가 선조 일행은 순화군이 오지 않는 걸 이상하게 여기던 찰나에 순화군이 수행내관을 베는 것을 보고 도망친 수행원에게서 사건의 전말을 듣고 곧바로 파주를 떴으니 어차피 다 박살난 우수군 몇백명 데리고 도주로 차단과 서북병 견제 임무를 동시에 맡고 있던 안위로서는 순화군을 잡으나 마나였을 것이다.
본작의 진정한 발암물질. 형들인 임해군과 광해군을 몰아내고 세자가 될 야심에 차 있다가 이순신의 반정으로 인해 왕실이 함흥으로 파천하게 되자 아버지 선조가 광해군에 대해 가진 의심을 이용해[27] 누르하치의 건주여진 군사를 용병으로 쓰자는 의견을 내고 직접 누르하치를 만나러 간다. 회견장에서 술에 취한 나머지 누르하치의 야망에 대해 찬동하면서 "내가 조선 왕이 된다면 건주여진과 연합하여 명나라를 함께 공격하겠다"는 발언을 하여 누르하치에게 이용당하게 된다. 정작 그런 패기 이후에는 별 다른 전략적·군사적 식견을 보여주지도 못한 채 패륵 추잉에게 질질 끌려다니는 호구 노릇만.... 누르하치는 정원군의 어리석음을 간파하고 정원군을 조선 왕으로 삼아 조선을 지배하려는 계획 하에 선조와 광해군을 비롯하여 정원군의 아들들을 제외한 모든 조선 왕실 가족들을 살해한다. 결말에는 누르하치를 따라 건주여진으로 가서 꼭두각시인 자칭 조선 왕이 된 것으로 보인다.[28][29]
중전. 현실과 마찬가지로 와병 중이며 후반에 종실과 함께 혜산으로 피신하다가 정원군과 결탁한 여진족에게 살해당한다.
소설에서 선조 부자의 시신을 수습하던 중 '어쩌면 정원군이 빼돌리지 않았을까?'라는 언급만 나온다.
선조의 형인 하원군 이정의 아들. 인사불성이 되어 정신 못 차리는 임해군을 대신해 혜산[30] 으로 피난을 떠나는 종실과 내명부의 행렬을 이끌다가 여진족에게 죽는다. 피난행렬 중 성인 남성들 중에서는 가장 마지막까지 살아남았으나 결국 그가 한 일은 정원군 소생 왕자들의 신원을 확인해주고 그 외 조카들의 죽음을 무기력하게 지켜본 뒤 자신도 칼에 맞는 것 뿐이었다.
당은군의 동생, 숙부에게 인질로 잡혀 있다가 당은군과 함께 피난 행렬에 가담한다. 30세가 넘었으면서 형에게 계속 불평을 하지만, 역시 여진족의 화살에 맞아 죽는다.
- 영창정 이격
선조의 오촌 조카. 비교적 관계가 멀어서 서울에 두고 갔다.[31] 윤두수에 의해 선조와 광해군의 후임 국왕으로 추대되었고, 입궁한 이순신과 만나서 허생전을 연상케 하는 문답을 하는데, 결국 이순신이 질문한 개혁안에 대해서는 별 다른 답을 내놓지 못한 채 역적이다 역적 빼애애액만 부르짖다가[32] 그대로 이순신에게 압도당해 물러나고 만다. 이순신의 새 왕조가 개창한 후에는 조선 왕실의 제사를 잇게 된다.[33]
- 오강군 이건
중종의 손자로 해안군 이희의 아들이며 윤두수 일파의 회의 중에 다음 임금 후보로 이름만 언급된다. 나이가 40줄인데 제대로 군왕교육을 못 받았다는 이유로 기각.
- 홍산군(洪山君) 이득(李得)
세종의 4대손. 전란 동안 몇 번 직접 싸운 적이 있었기 때문에 작금의 문제와 그로 인한 변란을 잘 이해하고 자신이 왕위에 오르기 위해 이순신과 협력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미 왕을 세운 권신 정도의 위치로는 자신이 생각하는 개혁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이순신은[34]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다만 애매한 답변으로 왕실 내부에 분란을 조장하는 용도로 써먹는다. 이후 영창정을 옹립하려는 윤두수 일파에 의해 역적인 이순신과 결탁하려 한 것에 대한 경고 겸 이순신을 암살하기 위한 성동격서의 일환으로 암살당한다.
흥안군, 원손, 정원군과 당은군의 아들들이 포함된 다른 직계 왕족들은 이름이나 칭호만 언급되며 정원군의 아들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살해당한다.3.3. 문신
선조의 신하이지만 이순신의 인품을 잘 알고 있기에 선조의 무리한 명령에 반대하던 충신. 이순신의 거병 소식에 펄펄 뛰던 선조를 일단 진정시켰고, 이 과정에서 선조와 조정에 환멸을 느껴 이순신 지지자로 돌아선다. 몸이 안 좋다며 12번째로 사직을 청하러 입궐했다가 이순신의 거병 소식을 듣고 이래저래 대책을 논의하더니 마지막에 선조에게 대놓고 "까고 말해 너님이 쓸데없이 역적이라고 지랄하다 이렇게 된 거잖아. 지금이라도 좋게 구슬리면 이순신이 멈출 텐데?"이라는 패기 넘치는 직언으로 아주 쉽게 사직 윤허를 받아낸다(...). 이후 고향인 포천으로 가지 않고 이덕형의 사랑채에서 니트 라이프를 즐기다가[35] 선조가 왕족들을 데리고 함흥으로 파천하자 우의정으로 복귀하여[36] 도성에 남아 남은 중신들과 군사들을 통제하고 한양에 도착한 이순신을 시험할 요량으로 이런저런 논담을 던져주었다.
한양 함락 후 입부 이순신과 권준이 고초를 당한 이야기가 나오자 "통상과 연통을 주고받은 건 그 둘이 아니라 난데"라고 하자 이덕형이 농담하지 말라 하지만 그게 진담이었다. 우연히 정 참봉이 입부에게 보낸 사람을 눈치채 의금부보다 먼저 밀서를 손에 넣었고, 이를 계기로 내통하였던 것. 후에 선조 일가의 시신이 도성에 도착하자 이에 대해 경악하면서도 이런저런 전후사정을 이해하고는 이순신을 왕으로 삼아 새로운 나라 설립을 도와주는 등 용의주도함을 보여주었다. 본작에서 이순신의 역성혁명은 역적으로 몰린 반동으로 급조된 탓에 이전의 역성혁명에 비해 신진 지배층의 호응이 부족하고[37] 대신 선조와 전주 이씨 왕가에 환멸을 느껴 전향한 사대부 인사들로 때우는데 이항복은 그 선두주자를 맡는다.
실제 역사에서처럼 유능하면서도 농담을 잘 하는 유쾌한 캐릭터로 등장한다. 정 참봉과도 죽이 잘 맞는 편.
한양 함락 후 입부 이순신과 권준이 고초를 당한 이야기가 나오자 "통상과 연통을 주고받은 건 그 둘이 아니라 난데"라고 하자 이덕형이 농담하지 말라 하지만 그게 진담이었다. 우연히 정 참봉이 입부에게 보낸 사람을 눈치채 의금부보다 먼저 밀서를 손에 넣었고, 이를 계기로 내통하였던 것. 후에 선조 일가의 시신이 도성에 도착하자 이에 대해 경악하면서도 이런저런 전후사정을 이해하고는 이순신을 왕으로 삼아 새로운 나라 설립을 도와주는 등 용의주도함을 보여주었다. 본작에서 이순신의 역성혁명은 역적으로 몰린 반동으로 급조된 탓에 이전의 역성혁명에 비해 신진 지배층의 호응이 부족하고[37] 대신 선조와 전주 이씨 왕가에 환멸을 느껴 전향한 사대부 인사들로 때우는데 이항복은 그 선두주자를 맡는다.
실제 역사에서처럼 유능하면서도 농담을 잘 하는 유쾌한 캐릭터로 등장한다. 정 참봉과도 죽이 잘 맞는 편.
이항복처럼 선조의 신하이지만 왕의 뜻에 반감을 가지고, 선조의 파천 후에도 도성에 남아 이항복·이원익과 함께 이순신이 북방에 간 동안 조정을 통제한다. 이순신이 선양받는 것에는 신중한 입장을 보였지만, 즉위가 결정된 후 명나라로 가서 설득한 끝에 한왕지인이 새겨진 옥새를 받아 돌아온다. 보통 5개월 걸린다는 책봉 절차를 3개월만에 해치우고 왔으니 그의 노력을 알 만하다.
이항복, 이덕형과 함께 선조의 파천 후 전 영의정 자격으로 도성을 통제하였지만 이순신에게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역성의 뜻이 없는 지를 묻고, 선조와 광해군이 죽고 이순신이 선양받은 후에도 그게 실은 이순신이나 측근인 정 참봉의 계획이 아닌지 의심한 것. 근거 없는 의심은 아닌 게, 정 참봉은 정말로 사람을 보내 여진족으로 위장해서 왕족들을 죽일 작정이었다. 그런데 진짜 여진족이 선수를 쳐서 똑같은 짓을 한 것이다. 정 참봉이 보낸 살수들이 오히려 여진족의 만행에 대한 증인이 되었기 때문에 이순신에게는 정말 천운이 따른 것이다. 정원군이 저지른 반역행위[38] 를 전해 듣고는 이순신 지지로 마음을 굳힌다.
작중 시점에서는 이원익과 함께 탄핵당해 안동으로 낙향한 상태. 내전이 끝난 2권 후반부에 상경했다가 윤두수가 이끄는 선조파 중신들의 쿠데타에 휘말릴 때 잠깐 등장한다. 윤두수에게 이순신이 죽었다는 말을 듣자 절망하지만 김충선을 투항시킨 이순신이 무사히 입궐하자 안도한다. 그가 주장한 수미법이 이순신 진영의 주요 개혁안으로 등장한다. 정계의 이순신 인맥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사람이지만 한성에 있었다면 첫번째로 조리돌림 당했을 인물이니 낙향해서 분량이 적은 게 차라리 다행일지도.
사실 안동에서 체포되긴 했다. 다만 바로 도성으로 압송하자니 배설군이 곳곳에서 출몰하고 있어서 도중에 빼앗길 염려가 있었고, 만약 이순신이 승리할 경우 보복당할 까봐 겁을 먹은 안동부사가 잘 보호하고 있다가 승패가 확실히 기울어진 것을 알고 그제야 호위를 딸려 올려보낸 것이다.
사실 안동에서 체포되긴 했다. 다만 바로 도성으로 압송하자니 배설군이 곳곳에서 출몰하고 있어서 도중에 빼앗길 염려가 있었고, 만약 이순신이 승리할 경우 보복당할 까봐 겁을 먹은 안동부사가 잘 보호하고 있다가 승패가 확실히 기울어진 것을 알고 그제야 호위를 딸려 올려보낸 것이다.
정유년에 선조에 의해 투옥된 이순신을 옹호한 일 때문에 입지가 불안하다는 언급과 함께 조정 회의에 참석한 모습만 나온다. 윤두수 일파의 첫 회의에도 참석하는 등 이순신의 등극에는 부정적인 스탠스였지만 이후로 등장이 없는 것을 보아 다른 사대부들처럼 슬금슬금 빠진 듯.
이항복이 사직한 직후 이원익의 후임 영의정으로 조정의 영수가 되어 함흥까지 선조를 호종한다. 이순신에 강력히 반대하여 자신이 직접 들은 광해군의 유언도 무시하고 이순신을 암살한 다음 방계 왕족인 영창정을 즉위시키려 하지만 실패한다. 이순신이 이 죄로 죽이진 않았지만, 새 조정에 동참하지 않고 물러난다. 원균을 등용했다는 비아냥을 피하기가 어려웠던 것에다가 죽이려 했던 인물이 왕까지 되었으니, 한 발 물러나는 것이 이득이었기 때문이다. 안위가 이순신의 면전에서 그의 멱살을 잡았을 정도니 까놓고 이순신이 기존 사대부들의 신변을 적극적으로 보호하려 들지만 않았으면 통제영 장수들에게 중국식 능지형을 당했어도 할 말이 없을 인물. 더불어 원균을 싸고 돈 그 궤멸적 선구안이 이번에도 빛을 발해서, 영특하다며 내세운 영창정 이격은 이순신 앞에서 말 한마디 똑바로 못하고 빼액대기만 하다가 찌그러진다. 이 외에는 명군이나 여진군의 참전에는 뒷수습을 어떻게 할 것이냐며 반대하는 모습도 보여준다.[39]
경리도감 당상. 윤두수의 동생. 가히 개국 1등공신이라 할 만한 위인으로(...) 경기·충청 수군을 경강에 모아 반정군을 막자는 김명원에게 맞서 충청수군을 불러올려서는 안된다고 주장해 이를 관철시켰다. 그리고 근왕군측 수군은 소근포(현 태안군 소원면 소근리)에서 충청수군 전멸, 한강진에서 경기수군 항복으로 소멸.... 딴에는 충청도를 내주면 세곡을 걷을 방도가 없게 되니 그랬다고 하지만, 군사전문가인 김명원의 설명대로 육군이 없는 반정군 전력으로 충청도에서 지상전을 벌여 지역을 점령·통제한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할 뿐더러 고작 전선 10척의 충청수군으로 50여척의 반정군을 상대하게 했으니 그저 아무 소득 없이 소비하는 결과밖엔 거둘 수 없었다.[40] 만약 이 인간이 나대지 않고 김명원의 주장대로 20여척의 전선을 한데 모아 경강에 진을 쳤으면 반정군도 한양을 코 앞에 두고 꽤나 애를 먹었을 테니 그야말로 역사에 길이 남을 X맨이다.
영돈녕부사. 북인의 영수로 류성룡의 친구라는 이유로 왜란 때부터 이순신의 골수 안티였으며 이순신이 북정을 마치고 복귀하자 정적이었던 윤두수와 손을 잡고 이순신 축출에 앞장선다. 암살모의를 돌파한 이순신이 정릉행궁에 입궁하여 자신의 개혁안을 밝히자 어느 사대부가 그 따위 개혁안에 동참하겠냐며 악을 쓰지만 이순신은 "명문 사대부가 동참하지 않으면 재야 선비, 재야 선비가 동참하지 않으면 중인과 서얼, 중인과 서얼이 동참하지 않으면 향리와 상민이 있다"며 맞받아친다.
실제 역사처럼 광해군의 측근. 광해군이 의심받지 않게 그가 쓴 밀지를 먹어버려 증거를 말소할 정도로 보필하고 여진족까지 끌어들인 반정군 진압이 실패한 후에는 차라리 이순신과 손잡고 즉위하라고 권하며, 여진족이 본궁을 습격했을 때에는 맨몸으로 막아서다가 칼에 맞아 쓰러지기도 한다. 광해군이 죽은 후에는 이순신에게 선양하라는 광해군의 유언을 무시하고 광해군의 유서가 함흥부윤 문향식의 협박에 강제적으로 쓰인 것이라는 사실왜곡을 일삼으며 이순신을 축출하려는 대신들에게 가담한다. 다만 이는 광해군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이에 이은 선양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흑화한 데 가깝다.
3.4. 무신
전라우수사. 실제 역사에서도 이 시점에 전라우수사를 다시 맡았지만, 여기선 전쟁이 끝난 후 선조가 의도적으로 이순신을 견제하려고 안위를 파직하고 그 자리에 김억추를 재임명했다. 고금도 통제영과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워서 제일 먼저 이순신의 거병 사실을 장계로 올리는데, 여기서 당장 반란이 일어났는데 자기 건강이 안 좋으나 후임 우수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하지만(...) 씹히고 제일 먼저 반정군과 전투에 나서나[42] 전투 지휘 자체도 졸렬해 울돌목을 철통방어 하겠다며 밤 새도록 판옥선을 울돌목 출구에 전개시켜 밥도 우수영에서 지어서 날라다 먹이고 잠도 배 안에서 재우지 않나,[43] 포화 몇 번 교환해보더니 흥분해서 앞뒤 재지도 않고 울돌목 수로로 짓쳐달려들지 않나. 결국 전라우수군은 경상우수영의 합류를 몰랐던 탓에 함정에 빠지고 그 동안 김억추는 목포만호인 동생 김응추(金應秋)와 함께 육지로 도망쳤다. 덕분에 전라우수영은 포탄 한 발 안 박힌 채로 전 우수사였던 안위가 맡으면서 고스란히 반정군에 합류한다. 다만 이 인간이 우수영 관리를 개판으로 해놓은 탓에 하도 탈영으로 인한 결원이 많아 안위는 실제 운용에 애를 좀 먹어야 했다. 그리고 우리의 자애로우신 선조대왕께서는 어떤 처벌도 없이 광주목에서 몸조리하다 올라오라는 눈물겨운 배려까지 해줬지만 등장은 이걸로 끝.
충청수사. 실제 역사에선 이순신 전사 후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인물. 충청수군을 이끌고 이순신에게도 없던 거북선까지 동원해 반정군의 후미를 지키던 전라우수군에게 큰 타격[44] 을 주지만, 임승조와 백병전을 벌이다 전사하고, 다른 전선들도 무력화되며 패배했다. 남은 충청수군은 배와 화포를 남기고 저항을 포기하는 대신 반정군에는 합류하지 않고 이시언의 시신을 수습해 물러난다.
녹둔도 전투 당시 이순신과 악연이 있는 무신. 도원수 권율이 병으로 사망하는 바람에 함경도 도순변사로 이순신 진압의 책임을 지게 되지만 예상을 깨고 갑작스레 한강에 나타난 반정군에 당황해 상륙 지연을 위하여 경강 주변의 나루를 불태우라는 명령을 내린다. 나루에 살던 백성들을 대피시킬 여유조차 없이 내린 마구잡이식 명령으로 인해 대부분의 백성들이 불타 죽었고, 이를 수행한 오응태는 자신에 대한 처벌을 감수하겠다며 각오했지만 정작 상관인 이일과 조정 측에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이에 환멸을 느껴 이순신이 이끄는 반정군으로 전향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순신과의 싸움에선 군사들을 화포 앞으로 꼴아박다가 모든 병력을 잃고 정충신·고언백과 함께 간신히 함흥에 도착하자마자 여진족과 정원군 때문에 속을 끓이다가 결국 여진족 사령관에게 패전 책임을 뒤집어쓰고 정원군의 눈 앞에서 참수당한다.
병조판서. 관군 측 어전회의 때 경기수군과 충청수군이 합세해 한강을 방어할 것을 제안하지만 선조에게 씹히고(...) 조정 측 수군은 결국 소근포(현 태안군 소원면 소근리)와 한강진에서 각개격파 당하게 된다. 한양 복귀 후 윤두수 일파의 회의 때 누구를 왕으로 세울 지 갈팡질팡하는 사대부들에게 지금 이순신 몰아내는 것도 힘든 판국에 무슨 헛공론이냐고 일갈하여 분위기를 수습하고, 이후 김충선을 자객으로 보내 이순신 암살을 진두지휘하나 실패한다. 암살 작전의 입안자인 데다가 그가 엮인 신각의 죽음 문제가 작중에서 두고두고 씹히는 것을 보면 새 왕조에서는 조용히 칩거하는 것 외에 길이 없을 듯.
권율의 하인 출신으로 이항복의 동서라는 소문이 돌 정도로 친한 사이지만,[46] 동시에 선조의 은혜로 면천되고 출사한 전력이 있어 이일의 종사관으로 온 힘을 다해 반정군에 맞선다. 마포 전투에서는 명군을 감시하라는 어명을 수행하기 위해 자리를 비워 참전하지 못했고, 도순변사군과 경기감영군이 와해되지 군사 몇 명과 함께 이일에게 합세하여 함흥으로 향한다. 실제 역사에서 이괄의 난 때 한 말을 패러디하여 반정군이 한양을 함락한 후 "주상이 동북면에 도착하기 전에 따라잡으면 상책, 먼 종친 중 하나를 왕으로 세워 세력을 모으는 게 중책, 자기가 왕이 되는 게 하책인데 이순신은 지장이니 왕을 쫓을 것이다"라고 말했고 결국 성천강에서 반정군과 다시 대치한다. 선조와 정원군이 끌어들인 여진군의 막장 행패를 보며 이를 갈던 중, 성천강 전투 직후 함흥으로 철수하던 여진군이[47] 이일의 목을 베고 배를 불살라 조선군의 철수를 막자 다른 장병들이 반정군에 투항하는 와중에 100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바다 쪽으로 탈주해 배를 타고 본궁으로 합류하려 한다. 그러나 본궁이 여진족의 습격을 받은 것을 보고는 더 이상 근왕의 의미가 없다고 판단, 모든 것을 포기하고 반정군에 귀순한다.
한양으로 돌아온 직후 자신이 본 명천현감 이괄에 대한 감상을 이항복에게 말하는데, 용력이 있고 머리도 비상하나 대국적인 판단력이 부족하다고 평한다. 이항복이 정충신에게 그 경험과 판단력을 만들어주라고 조언하는 것을 보니 실제 역사의 비극은 없을 듯.
한양으로 돌아온 직후 자신이 본 명천현감 이괄에 대한 감상을 이항복에게 말하는데, 용력이 있고 머리도 비상하나 대국적인 판단력이 부족하다고 평한다. 이항복이 정충신에게 그 경험과 판단력을 만들어주라고 조언하는 것을 보니 실제 역사의 비극은 없을 듯.
전 북병사. 북벌 준비에 소홀하다 하여 해임, 한양으로 소환되었다가 북방 기병 200기를 끌고 참전했다. 임진왜란 막바지에 충청수사로 재직한 전력이 있어 함부로 나서기 어렵던 차에 이일의 명령으로 경강 나루를 불태우나 이로 인한 백성들의 피해에 죄책감을 느끼고, 이일이 맡긴 2천기의 기병 병력을 이끌고 반정군으로 전향한다.[48] 기병을 지휘하다 보니 반정군의 육상 전력에 큰 보탬이 되며 성천강 전투와 본궁 입성에서 큰 활약을 한다.
명천현감. 오응태 휘하에서 그의 전향 의사를 전하는 사자 역할을 하며, 아직 10대인 어린 나이임에도 매우 유능하지만 성격이 급한 게 흠으로 지적된다. 마포 전투에서는 후퇴하는 관군의 뒤를 기병으로 쫓아 도성 봉쇄를 저지하는 공을 세운다.
이일의 부관으로 등장. 한양을 공격한 이순신군과 싸웠지만 부상을 입고 근처 민가에 낙오되는 바람에 선조 일행의 몽진에 따라오지 못했다.
경기수사. 전선을 이끌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진압군에 합류했으며, 소근포(현 태안군 소원면 소근리) 해전 이후 종적이 묘연해진 반정군이 한강 하구에 나타난다면 교동현감에게서 바로 연락이 올 거라며 처신했지만 그 반정군이 한강으로 무사히 진입하는 것을 보고 패닉에 빠진다. 사실 이 인간도 답이 없는 게, 교동현감 홍가신이 봉수대에 올라간 사이에 교동의 모든 전력을 끌고 증발해버렸다. 대놓고 홍가신 못 믿는다고 인증을 해놓고는 교동현감이 누구라는 것조차 밝히지 않은 채 홍가신한테서 연통이 올 거라고 큰소리 치고 자빠졌으니. 이일과 도순변사군 수뇌부는 교동현감이 홍가신이라는 사실을 반정군이 경강에 들어와서야 알고 경악했다. 결국 한양이 반정군에게 넘어간 후 항복하는데 홍가신 앞에서 별 되도 않는 변명질을 하다가 비아냥만 실컷 당한다. 이후 이순신의 명으로 명나라 군사들을 강화도까지 배로 옮기는 역할을 맡는다. 그의 경기수군이 보유한 총통화차가 반정군의 육전에서 큰 활약을 한다.
교동현감. 위에서 최원이 반정군이 한강에 들어오는 순간 연통이 올 거라고 자신만만해 한 그 사람이다. 그리고 홍가신은 이순신의 친구이자 사돈이었다. 그의 4남 홍비(洪棐)가 이순신의 딸을 계실(둘째 부인)로 들인 것. 그래도 처음부터 이순신에게 붙을 생각은 없었는지 교동현 병력에게 출동준비를 해 두도록 했지만 봉수대에 올라갔다 온 사이에 최원이 모든 배를 들고 날라버리는 참상을 겪었고, 당연히 이순신이 도착하자 합류. 최원도 답답한 것이 이 사람을 죽이거나 억류하거나 고변하지 않고 그냥 교동에 남겨둔 채 모든 배를 이끌고 날라버리기만 했다. 최원이 투항하자 절대 믿을 수 없는 인물이라며 비아냥댔지만 최원을 쓸 만큼 써먹겠다는 이순신의 결정에 승복한다.
실제 역사에서 방부인은 홍비가 체구가 작다 하여 처가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 바가 있는데, 재혼에 대한 항의라는 평이 있다. 홍가신 집안이 반정에서 공을 세워 중전 자리 앉는 데 도움을 줬으니 노여움은 어느 정도 풀었을 지도?
실제 역사에서 방부인은 홍비가 체구가 작다 하여 처가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 바가 있는데, 재혼에 대한 항의라는 평이 있다. 홍가신 집안이 반정에서 공을 세워 중전 자리 앉는 데 도움을 줬으니 노여움은 어느 정도 풀었을 지도?
양주목사. 한양과 가장 가까운 곳에 주둔해 곧바로 도순변사군에 합류한다. 임해군파로 반정군이 한강가에 나타나자 교동현감은 물론이고 배설부대가 양화까지 무사통과하도록 놓아둔 수원부사, 양천현감이 다 한통속이며 배후에 세자가 있다고 입에 거품을 물었지만 곧바로 회전에서 쳐발려서 대세에 큰 영향은 못 주었다. 이후 이일 등과 함께 함흥으로 이동, 성천강 전투에서 근왕군 기병을 이끌고 반정군 우익을 공격하지만 임승조가 이끄는 항왜병대에 의해 참살당하고 임승조가 그의 신원을 확인한다.
포도대장으로 한양에 있던 중 난을 만난다. 이억기가 죽고 없는 상황에서 이순신 인맥 중 유일한 종친이자 도성 주재인원이다 보니 체포 1순위. 정 참봉이 보낸 사람이 오자 반정 참가를 거부한 답서를 써서 들려 보냈는데 이 밀사가 입부 집 하인들에게 들키는 바람에 고변을 당하여 압송된다. 다행히 이 답서는 이항복의 손에 들어간 탓에 선조도 물증 없이 아예 죽이지는 못하고[50] 적당히 친국만 하던 와중에 한양이 해방(...)되어 살아남는다. 그리고 선조는 그저 믿을 수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포도청 병사들을 아예 해산시키는 병크를 저질러 마포 전투에서 병력부족을 야기한다.
광주부윤[51] 겸 경기방어사. 임진년부터 이순신과 함께 한 탓에 요주의 인물이었는데 하필 정 참봉 측에 보내던 답서가 수원에서 도순변사에게 발각되는 바람에 추포되어 국문을 받는다. 입부와 마찬가지로 살아남아 몸을 추스르자마자 광주부 병력을 이끌고 금천에 주둔, 수원으로 내려간 경기감사의 상경을 저지한다.
2권 후반부에 도성에 남았던 중신들의 입에서 언급된다. 이순신이 거병한 후에도 아무런 기척을 보이지 않았으나 이순신을 역적으로 판단하고 치려던 경상좌병사 김응서(金應瑞)[52] 앞으로 격문을 보내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경고했다고. 곽재우의 격문을 보고 경상도 민심이 격분한 탓에 김응서는 병영 밖으로 외출도 함부로 못했다고 한다.
항왜. 이순신에게 강경한 입장인 김응서의 종사관으로 2권 후반 한양으로 파견된다. 정충신과 마찬가지로 선조에게 승은을 입은 지라 선조의 은혜를 갚기 위해 윤두수 일파의 사주를 받고 이순신 암살 작전에 투입된다. 이분과 이완을 쓰러트리는 데는 성공하나 마침 들어오려던 임승조와 일기토를 벌여 결국 패하고, 죽음을 기다리다가 선조 사망의 진상을 알게 되자 이순신의 설득을 받고 투항한다.
북병사. 효종대의 무신으로 유명한 이완#s-2.4의 아버지이다. 북방군을 이끌고 근왕에 참가하지만 동원 가능한 병력이 적어 크게 활약하지도 못하고 여진군의 위세를 등에 업은 정원군 탓에 죽어라 고생한다. 성천강 전투에서 근왕군 보병대를 이끌고 반정군 좌익을 공격하나 오응태의 기병에 포위당한다. 처음에는 오응태의 전향을 비난하다가 오응태가 그동안 도성과 함흥에서 벌어진 일들을 제시하며 반박하자 북병들이 줄줄이 전향하는 것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게 된다. 도저히 전향할 수 없다며 오응태의 양해를 얻어 홀로 함흥으로 돌아가지만 이후로는 등장이 없다.
함경감사. 죽을 힘을 다해 함경도 근왕군을 모으지만 선조에게 욕이나 얻어듣는 안습한 신세. 함흥부윤 문향식이나 북병사 이수일에 가려 큰 활약은 없다.
- 문향식
함흥부윤. 이수일이나 윤승훈과 달리 기록에는 없는 인물이다.[53] 선조와 정원군이 여진군까지 끌어들이자 전향하여 정 참봉과 연락을 주고받는다. 본궁 순라를 돌던 와중에 광해군에게 접근하여 여진군까지 끌어들이는 막장 선조 대신 이순신과 손잡고 보위에 오르라 간언하고, 이에 광해군이 승낙하자 이순신 측에 밀서를 보내지만 밀서는 여진측에 뺏기고[54] 곧바로 성천강 전투가 벌어져 유야무야된다. 이후 조정의 답이 없는 현실에 절망한 광해군에게 직접 이순신과 손을 잡는 교서를 써 달라 주청하는데 광해군은 여기서 문향식도 예상하지 못한 양위교서를 써서 밀봉해 건넨다. 직후 여진군이 본궁을 습격하자 탈출하여 반정군을 이끌고 복귀, 광해군의 요청에 따라 그의 앞에서 이순신에 대한 양위 교서를 대독한다.
- 송재석
후창군수.[55] 누르하치를 찾아가는 정원군의 호위로 월경하였다가 누르하치의 궁전(?)에서 대명정벌 운운 하는 정원군의 장광설을 그대로 듣게 된다. 이후 근왕군에 참가해 성천강 철수전에서 근왕군 측 대변인으로 나와 인간방패 앞에서 결사항전 태세를 천명했지만 속은 이미 썩어들어가던 상황. 결국 여진군이 배를 불태우며 근왕군의 철수를 막자 그대로 반정군에 항복해 정원군 모가지를 따겠다며 기병을 이끌고 함흥본궁에 진입한다. 이후 정원군의 장광설을 반정군측에 제보함으로서 이순신의 등극을 탐탁치 않아 하던 이원익 등 사대부 일부의 마음을 돌리는 데 일조하였다.
경상좌수사. 여기서는 직접 등장은 없고 유형이 임지를 떠나 합류할 때 전선 10척을 거제도에 남겨두어 경상좌수사 이운룡에게 방어를 맡겼다는 언급만 나온다.
- 김극제
보성군수. 통제영에 합류한 지 얼마 안 되는 인물로 거병에 반대해 객사에 연금되었다. 이 때 함께 연금된 반대파가 예닐곱명 정도 되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강경한 반대파로 다른 사람들이 목숨 구걸할 때에도 이순신을 욕하는 것은 물론 연금된 이후로도 매일같이 서신을 보내 반역을 그만두라고 독촉하는 패기를 보인다.[56] 하지만 이순신 일행이 한산도를 떠난 이후로는 등장이 없다.
- 전백옥(全伯玉)
낙안군수. 김극제와 함께 거병에 반대해 갇혀있다가 이틀만에 전향서를 쓰고 풀려나 반정군에 합류한다.
- 김응서
경상좌병사. 근왕병을 이끌고 이순신과 싸우려 하였으나 곽재우가 뿌린 격문에 의해 병영에만 머물게 되고 이순신이 왕이 된 이후엔 칼을 꺾고 산 속으로 들어갔다.
3.5. 명나라 측 인물
조선에 주둔한 명나라 잔여 병력의 지휘관. 반정을 일으킨 이순신과 조선 조정 사이를 중재하려 노력한다. 사실 순수한 호의만은 아니었고, 이 참에 이순신 및 반정군 병력, 기술자들을 통째로 명나라로 망명시켜 대명수군을 삽시간에 강화시는 공을 세우고 그러한 공을 세운 자신들은 부귀영화를 누리려 한 것.[57] 처음에는 이순신이 조선군과 조우하기 전에 먼저 접촉할 생각이었지만, 이 계획이 깨진 후 이순신이 한양에 입성하자 방문하여 회유하려 하지만 이순신은 망명을 거부[58] 하고 명군을 반강제적으로 본국으로 귀환시킨다.[59]
명나라군 장수들로 만세덕의 부관이다. 수원, 남양 일대에서 이순신 함대를 먼저 찾으려고 쌔가 빠지게 돌아다니지만 결국은 헛짓거리로 끝난다.
3.6. 건주여진 측 인물
건주여진의 추장. 조선인들에게는 '노을가적(老乙加赤)'이라고 불린다. 여진족을 통합하던 중 정원군을 통해 선조의 지원 요청을 받자 정원군의 야심을 이용할 음모를 꾸민다.
누르하치의 장남. 원래 그의 이름은 '추옌'인데 여기서는 중국식인 추잉으로 나온다. 하도 폭력적이라 내부에서도 반대세력이 많지만 장남인 데다가 공격적인 성향으로 아버지에게는 꽤 신뢰를 받고 있다. 조선으로 파병된 건주여진군의 총지휘관으로 현시창인 조선 조정의 현실 덕에 사실상 천장(天將; 천조국 장수) 놀이 중이며 후창에서 함흥까지 오는 길을 약탈해 함흥 인근은 거의 쑥대밭이 된 상황이다. 함흥을 공격하러 온 이순신군과 싸웠으며 전투에서 패배한 뒤 후퇴하는 길에 이일을 죽인다.[60]
누르하치의 차남. 추연과는 동복형제이지만 사이가 좋지 않다. 조선에 대한 파병을 반대했다.
건주위 동악액부. 파병 반대파였지만 누르하치는 자신이 신뢰하는 그를 추잉에게 붙여주어 전투 지휘를 돕도록 했다. 성천강 전투에서 여진기병을 끌고 반정군 중앙을 공격하는데, 초반에는 활만 쏘며 시간을 질질 끌었지만 반정군 좌익의 배설부대가 부주의하게 돌격해나오자 곧바로 배설부대를 휩쓸어 반정군에게 최대의 위기를 만든다. 하지만 오응태의 기병이 후미를 급습하자 반정군 본진에 대한 공격은 포기하고 철수한다. 이후 추잉에게 이만하면 어느 정도 성과도 있었고 앞으로 정원군을 활용해 후일을 도모할 수 있다며 설득, 건주위로 복귀한다.
- 페이잉둥(구왈갸 피옹돈)
건주위 대신. 만주어로는 피옹돈이지만 중국식인 페이잉둥으로 나온다. 성천강 전투 직후 건주기병 500기를 이끌고 합류한다. 조선왕실 몰살은 추잉의 지시를 받은 그의 부하들이 실행한 일. 함흥에서도 본궁 습격을 실행하였다.
3.7. 기타 인물
어의. 여진족에게 피습당한 채로 이순신군에게 발견된 광해군을 잠시나마 소생케 했다.
- 김양보(金良輔)
선조를 모시는 내시.
- 김수백
금부도사. 이순신을 잡으러 갔다가 안위와 고금도 백성들에게 저지당하고 감금된다.
4. 기타
- 2017년 중에 드라마 제작을 목표로 했으나 아쉽게도 무산되었다.
[1] 사실 보통은 역모를 꾀해도 "○○대군/군을 세웁시다!" 이게 많았지 "걍 내가 왕 하겠음" 이건 드물었다.(기껏해야 이홍윤의 옥사 때 이홍윤(李洪胤)이나 최대관(崔大觀)이 거론되었던 것 정도) 하다못해 신임옥사 당시에 이이명을 추대하자는 의논이 있었는데 이이명은 세종대왕의 아주 먼 후손이었다.[2] 경상좌수군은 왜군의 재침략을 우려해 주둔지를 떠나지 못했고, 어차피 수사가 다른 사람도 아닌 이운룡이라 선조와 이순신 중 택하라면 이순신 쪽에 붙었을 것이다. 경상우수군은 어명에 따라 이순신 토벌 준비를 했으나 선조의 의심병이 도져 경상우수사 유형을 이순신 인맥이라는 이유로 암살하려다가 실패하자 분노한 유형이 함대를 이끌고 이순신에게 합세, 전라우수군은 수사 김억추가 명량 해전 때처럼 조금 싸우다 도망치자 거의 모든 병력이 이순신에게 투항하고 전투다운 전투는 충청수군하고만 치뤘다. 충청수군과의 전투로 전라우수군 함대가 거의 전멸했으나 충청수군도 돌파당했고, 경기수군도 이순신에게 투항했다.[3] 함경도 육군 파견대도 가담하는데, 이들의 선봉장이 소년 시절의 이괄.[4] 격류부터 시작해서 김경진 계열의 역밀덕들에게 안위는 보통 통상빠 감초캐의 이미지가 정립되어 있다.[5] 다행히 김억추가 우수영에 배를 버리고 튀어서 되찾기는 했다.[6] 사실 충청수군이 발견된 이후의 대처는 상식적인 수준이었다. 다만 귀선이 나타나면서 항왜병들이 대패닉에 빠진 게 문제.[7] 이순신과 접촉하려던 왕자 순화군을 모르고 살해한 데다 그 사이에 잠시 파주에 묵고 있던 왕족 중 정원군이 선조한테 순화군과 임해군이 서로 짜서 이순신과 접촉하려 했다는 정보를 알려 주었고, 왕자의 배신을 염두에 둔 선조가 황해도 방면 도주로가 이순신이 이끄는 군세에 막힌 줄 알고 함경도 방면으로 도주해 여진족과 연결되면서 내전이 장기화되어 버렸다. 하지만 아래에서도 언급하지만 이 인간 잡았다고 반정군에게 딱히 호재는 아니었을 지도.[8] 소하로 보기는 애매하다. 전라도에 남아있으면서 계속해서 보급을 대주는 역할이었다면 소하라 해도 좋았겠지만 본작에서 정 참봉의 역할은 각지의 첩보망을 운영하여 뒷공작을 벌이고 정국의 흐름에 맞춘 조언을 내놓는 책사 그 자체다.[9] 그래서 이항복이 두 왕조 모두 정씨가 한 몫 한다며 묘하다는 반응을 보인다.[10] 독자들을 상대로 등장인물 신청을 받았었다.[11]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이었던 하야시 미치카츠의 일가붙이 중 하나인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12] 근처에 조명 연합군이 다가오는 데도 일부러 이순신에게 항복했다. 그가 내로라 하는 주요 전국 다이묘들을 가둬놓고 뚜까 패는 모습에 감명받았기 때문.[13] 반정 이전엔 정말 이도저도 아닌 객식구 그 자체였다. 그나마 반정 이후에는 중요한 전력으로 취급되긴 하지만 역시 조선인 승조원들과 종종 마찰이 있었다.[14] 왜냐하면 항왜부대를 빼면 이순신의 수군이나, 진압군이나 다 조선인들이기 때문, 이 점이 크게 작용해서 많은 조선군 부대들이 항복하고 합류했다.[15] 어찌나 입장이 강경한지 이순신조차 자신들이 생각하던 이상적인 왕은 아니라고 평한다. 하지만 현 상황에서는 이순신 외에 대안이 없다는 데에는 동의.[16] 통제영측 인사들은 배 수사 군이라고 부르지만 이순신은 이 단어를 절대 쓰지 않고 의병이라고 부른다. 배설의 사병으로 인식될 수 있기 때문.[17] 배설은 이순신이 수군에 넘쳐나는 포병과 궁병을 넉넉히 지원해줄 것을 기대하고 대부분 창검병을 데려왔지만, 수군도 한양에 도착하기까지 이래저래 인력과 물자 소모가 있었고 설마 배설이 궁병을 안 데리고 올 줄은 상상을 못 해 원하는 만큼 지원병력을 배속해주기 어려웠다. 이후 성천강 전투에서도 배설은 포 40문의 추가 배치를 요구했지만 역시 반려되었다.[18] 이 유언이 이순신이 등극을 결심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19] 실제 역사에서도 이 이유 때문에 조선 수군 전체에서 경상우수영의 규모가 가장 컸고, 역대 삼도수군통제사도 대부분 경상우수사가 겸직했다.[20] 사실 이때 안 왔으면 큰일날 뻔한 게, 신기전은 쏴야 되고 통제사가 탄 상선에서는 빨리 쏘라고 닦달하고, 배 안에 아무도 쏴본 사람이 없어서 쩔쩔매고 있었는데 마침 민정붕이 돌아온 것. 그나마 책으로라도 쏘는 방법을 읽은 민정붕 덕분에 큰 활약을 하게 된다. 난중일기에서는 민정붕이 판옥선을 '위덕의'라는 피난민에게 내줘서 그걸로 곤장을 쳤다고 나온다. 그런데 이 위덕의라는 사람은 나중에 형조좌랑에 까지 이른 벼슬아치였고, 명나라 제독부참군 여응종으로부터 극찬까지 받은 바가 있을 정도로 대규모 군량미 거래를 했었던 것.[21] 종국에는 이순신이 즉위했으니, 아마도 세자로 책봉되었을 것이다.[22] 이는 실제 역사에서도 비슷하다. 어차피 악역이므로 성격을 바꿀 필요도 없다.[23] 육지에 있으면서 이순신의 거병에 찬성하지도 않은 권준과 입부 이순신은 초장부터 조지더니 정작 교동현감 홍가신은 이순신의 사돈인데도 건들지도 않았다가 반정군의 한양 습격을 허용한다. 여기에 권준과 입부 이순신의 추포로 경기방어사와 포도대장 자리도 공석인 채로 한양방어전 돌입. 이뭐병....[24] 선조의 원래 묘호는 선종이었다. 후에 임진왜란 때의 공이 있다 해서 선조로 바뀌었을 뿐.[25] 이것도 사실 실제와 비슷하다. 포로로 잡혔던 것도 백성들을 위무해야 하는 처지에 이것저것 갑질만 벌이다가 일어난 일이기 때문.[26] 사실상 즉위를 못했기에 묘호를 올려야 하는지 논의가 있었으나 그가 왕으로써 이순신에게 선양을 해야 신왕조에 정당성과 명분이 생기므로 결국 공식적인 마지막 왕으로 인정되었다. 헌종으로 하자는 이들도 있었으나, 조선의 마지막 왕이라는 점을 가련히 여겨 애종으로 하였다.[27] 그 전에 정릉동행궁에서는 코를 고는 척하면서 순화군과 임해군의 대화를 엿듣고, 두 사람에 대한 의심을 선조에게 주입하는 용의주도함을 보였다.[28] 하지만 누르하치 입장에서 함흥 전투 이후 이순신의 즉위까지 약 반년여 기간 동안 그를 괴뢰 왕으로 세우고 소식을 퍼뜨리면 곧바로 조선 내부를 뒤흔들 수 있음에도 그런 모습이 안 보이는 걸 봐서는 다른 결말에 이른 것일 지도. [29] 조선 왕실의 정통성을 앞세우기엔 왕과 왕족을 몰살시킨 여진족에게 옹립된 처지라 부족한 게 많은 반면, 이순신은 광해군에게 선양받고 명나라의 책봉까지 받았다. 따라서 정원군은 조선 왕으로 사대부들이 충성을 바치기엔 명분이 앞선다고 할 수도 없다. 다만 윤두수 일파는 아직까지도 "나으 정원군 마마께서는 그러셨을 리 없다능 모두 이순신 역도들의 더러운 거짓말이라능 전하와 왕실은 이순신 역도들이 죽인 거라능!"이라며 정신승리 중이기는 하다. [30] 그런데 작중에서 피난가는 곳이 혜산이랬다가 회령이랬다가 오락가락 한다.[31] 5촌 정도면 명예직 외에는 관직도 못 나가며 봉록이나 받아먹는 정도.[32] 사대부와 지주들에게 세금을 걷고 공납을 철폐해 수미법을 도입할 수 있겠냐는 질문이었는데, 하다 못해 온건하게 가겠다는 대답조차 못 했다. [33] 조선에서도 고려를 멸망시킨 후 왕씨 학살을 벌이긴 했지만 공양군의 동생과 그 일가족은 살려두어 고려 왕조의 제사를 잇게 한 바가 있다.[34] 설령 초반에는 권신이 되어 정책을 추진한다 해도 언젠가 왕의 주변에 당여가 모여 충돌할 것이 뻔하기 때문. 이순신의 개혁안은 사대부와 지주에 대한 군역 및 조세 부과를 골자로 하고 있어서 어지간한 권력으로는 추진이 불가능했다. 실제로 왕이 개혁파를 밀어줄 때는 어느 정도 일이 되는 것 같다가 왕의 죽음이나 정계개편 등으로 지원이 끊기자 마자 중단을 넘어서서 아예 롤백되는 사례는 동서고금에 쌔고 쌨다. 작중 시점에서 가까운 예만 들어도 조광조나 정도전 등이 그러하며, 조광조는 그나마 왕이 등을 돌려 죽은 케이스라지만 정도전은 아예 자신이 사실상 건국을 주도하고 왕이 여전히 자신을 지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루아침에 반대파에게 칼 맞아 비명횡사했다.[35] 매일 닭 한 마리씩 잡수셨다고 한다. 그리고 예쁜 하녀들도 여럿 건드려서 이덕형이 '거 어머니께서 탐탁치 않게 여기시니 작작 좀 하시오.'라고 불평할 정도.[36] 이원익은 후임으로 윤두수가 취임해 '전 영의정' 자격으로 나섰지만 이항복은 후임 우의정이 없어서 현직 우의정 자격으로 복귀한다.[37] 해봐야 완전 아웃사이더였던 정 참봉이나, 곽재우·류성룡 등 재야 남인 정도.[38] 아버지 선조를 살해하고 왕이 된 것도 반역, 천자국인 명나라를 치자고 누르하치와 합심한 것도 반역이다.[39] 실제로 임란 초기 명군 청병에도 반대했다. 결국 평양성까지 피탈당하자 어쩔 수 없이 청병에 동의하긴 했지만.[40] 소근포 해전에서 전라우수군 전력을 거의 소진시키긴 했지만 그 뿐, 반정군 전체 전력으로 보면 진공을 멈출 정도의 타격은 아니었다.[41] 김억추의 후손들이 작가를 사자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수백년 전의 인물이 대상인 경우 죄가 성립하기 어렵다.[42] 참고로 반정군은 김억추에 대해선 대놓고 얕잡아 봤다. 반정군이 출전 직전 회의 때 우치적이 전라우수군의 규모를 분석하면서 '분명 전라우수군 전 함대인 12척이 울돌목에 출전할 것'이라고 판단하였는데 여기에 대해 발포 만호 소계남이 '왜 12척입니까? 전라우수군의 전력은 판옥선 13척이 맞지 않습니까?'라고 질문했다. 그러자 '여기서 김억추가 우수영 좌선을 타고 직접 출전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손 좀 들어 보시오'라는 대답이 나왔고, 그 순간 반정군 장수들은 폭소로 뒤집어졌다(...). 안위는 "혹시 김억추가 조정에 올린 장계에도 '신에게는 아직 전선 12척이 있나이다'라고 올리지 않았을까요?"라는 농담을 쳤고, 배흥립은 12척밖에 없으니 수군을 폐해달라고 쓰지 않았겠냐며 맞받아친다. [43] 좌수영 장수들은 귀순한 우수군에게서 이 이야기를 듣고 "아니, 그럼 밤새도록 노 저어서 버틴다는겨?"라며 경악. 그리고 "밤새도록 닻을 내려 버틴다"는 설명을 듣고 야습 당하면 어쩌려고 그런 짓을 하냐며 또 경악.[44] 거북선의 방어력을 더욱 강화하는 개량을 한 데다, 전라우수군의 전력이었던 항왜 병력이 거북선 때문에 '모랄빵'을 일으켜 버렸다.[45] 실제로는 문신이었다.[46] 권율에게는 자식이 이항복과 결혼한 딸 하나가 전부였다.[47] 이 때 반정군의 공격을 막기 위해 목책을 세우는데 여기에 조선 여인들을 묶어두어 인간방패로 쓰는 만행을 저지른다.[48] 이 중 500기는 전향을 거부해 해산 및 귀가하게 하면서 총 1,500기가 전향한다.[49] 실제 역사에서 이괄의 난 때 이괄군에 가담한 장수. 난이 실패하자 이괄과 함께 살해되었고 아들인 한윤은 후금으로 망명했다. 또한 임진왜란 때 이순신과도 함께 작전을 벌인 적도 있는 베테랑 장수였다.[50] 거부 답서라 해도 일단 반역도당과 연락을 했다는 물증인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엮어넣을 수 있다. 그런데 아예 거부 답서가 발각된 권준도 죽지는 않고 살아남는다.[51] 작중에서 광주목, 광주부가 혼동되는데 경기도 광주는 1577년에 부가 되어 부윤이 임명되었다. 유수부가 되는 것은 정조 시기인 1795년.[52] 계월향 전설에 등장하는 그 김응서, 웹툰 칼부림에 등장하는 그 김경서와 동일인물. 유능한 장군으로, 칼부림에 묘사된 것처럼 항왜들의 처지를 잘 이해하고 항왜들의 후원자가 된 공로가 있으나 본의 아니게 이순신을 모함하는 데 동참한 과오가 있다. 곽재우는 김응서가 이순신을 모함한 과오에 대해 꾸짖는 격문을 보냈다. 참고로 본작에서 김응서는 좌병사, 정기룡이 우병사로 나온다.[53] 함흥부윤은 조선초부터 오랫동안 함경감사가 겸직했기 때문에 그냥 문향식 없이 윤승훈이 모든 역할을 맡는 게 나았을 것이다. 함흥부의 최선임 상근직은 판관이었다.[54] 다행히 피에 절인 상태였기에 곧바로 펼쳐보지는 않았다. 이 밀서를 열어보는 것은 성천강 전투 이후. 정원군은 이걸 빌미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세자가 될 기쁨에 몸둘 바를 몰랐지만.... [55] 고증오류 중 하나. 이 당시 후창 지역은 무창군 폐군 이후 줄곧 갑산부 소속이었고, 그나마도 후주와 무창이 합쳐져서 후창이라는 지명이 탄생한 것은 1869년이다. 본작 시점에서 후주와 무창에는 진조차 없었으니 동행을 시키려면 당시 갑산부사 정항(鄭沆)을 보내야 한다. 아니면 어거지로 설치시기 불명인 혜산진첨사를 등장시키든가.[56] 사실 이순신이 이들의 신변 보호를 적극적으로 약속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는 했다. 하지만 같이 감금된 사람들이 죄다 신변도 안전하겠다 놀고 먹는 니트 라이프를 택한 와중에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반대의사를 표시한 사례는 김극제 뿐.[57] 군졸들은 물론이고 화포와 판옥선까지 포함해서다. 대신 조선에는 배값을 주면 된다는 계산이었다.[58] 만세덕이 '혹시라도 조선에서 일어난 반란을 징벌한다며 황제 폐하께서 대군을 보내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라고 말하자, 이순신은 살벌한 대답을 한다. "우리 조선의 전선 50척이 요동 해안을 지나 발해만으로 향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소?" [59] 끝내 도성을 떠나지 않으려고 하다가, 결국 이순신의 협박대로 수십 문의 화포와 1만여 명의 군사들이 포위한 상황에서 명나라로 보내버린다고는 했지만, 사실은 강화도에 보내버리는 것으로 끝. 배로 보낼려고 해도 여력이 없고, 육로로 보내려고 해도 무슨 짓을 벌이면서 갈 지 모르기 때문이라고.[60] 이로부터 약 13년 후, 추연은 실제 역사에서 이복동생 홍타이지가 누르하치의 후계자가 되자 반발하였다가 누르하치에 의해 숙청된다. 본작 세계관에서는 조선 원정 실패를 구실로 삼을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