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찬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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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2. 김찬삼의 세계 여행
3. 생애
4. 여담
5. 같이보기


1. 소개


金燦三
1926년 6월 5일 ~ 2003년 7월 2일
1926년 6월 5일, 황해도 신천군 출생으로 우리나라의 세계여행가로 유명하다. 요즘과 달리 교통이 열악했던 옛날에 세계를 누비던 모험가였다.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를 실제로 만난적도 있다. (아프리카 편에 나온다.)

2. 김찬삼의 세계 여행


일생의 명저인 여행기가 있다. 전 10권을 각 대륙/지역별로 나누었으며, 국배판 이상 대형 판형에 아트지 사진 인쇄, 두터운 하드커버 양장본이어서 가격도 비쌌다. 무려 1950년대 말부터 시작된 여행기이며, 원래는 "세계의 나그네"라는 제목으로 일간 신문에 연재하던 것을 모은 책이다. 양장본 10권짜리가 완간된 것이 80년대초반이다. 풍부한 사진, 거기에 종종 달리는, 현지의 문화, 역사, 사회에 관한 생생하고 심도있는 내용은 일반인 여행가들의 그저 슥 돌아보고 오는 기행문과는 차원이 다르다. 클럽 활동 인연을 이용해 처음 가본 곳의 현지인과 교류하기도 했다. 사실, 글씨가 작고 한자와 요즘 쓰지 않는 단어도 많으며 므흣한 내용이 조금 끼어 있어서 그렇지 ( 다들 엄청 크다 걸렸으면 여지없이 현지 감옥행. ), 몇 년 뒤에 출판된 이원복씨의 먼나라 이웃나라보다 훨씬 나은 책. [1] 다만 2020년대 현재 시점에서 다시 읽어 보면 옛날 사람다운 서술도 보이고, 사실 관계가 틀린 데도 가끔 있다. 당시 정보로는 그 정도일 수밖에 없었고, 대부분 내용이 현지에서 듣고 경험한 사실에 근거해 써 있다.
산업화로 많은 지역 문화와 자연 경관이 사라진 2010년대 현재에는 당시의 현지 문화와 경제 상황을 담담히 써 내려간 글과 수많은 천연색 사진이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으므로, 최초 연재부터 치면 60여 년, 출간부터 따져도 30년 이상 지난 현재에도 김찬삼 여행기의 가치는 퇴색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사람 수급(자른 머리)을 말려 만드는 중남미의 장식품(찬차: shrinked head, tzantza), 연기로 시신을 말리는 오세아니아 지역의 훈제 미라 등은 이미 사라진 문화이다. 특히 백인들은 잘 가지도 않는 여러 오지, 험지까지 가서 찍어온, 이미 사라진 경관을 보여주는 천연색 사진은 해당 각 나라에서도 요청할 만큼 귀중한 자료이다. 일단 그의 여행기에 나온 얘기, 사진들은 거의 다 한국 최초 소개이다.
내용이 워낙 좋고 재미있다 보니 70년대 신문 연재 당시에도 인기였고, 83년에 삼중당에서 대형 판본으로 나왔던 하드커버 컬러 양장본은 10권 한 질에 20만 원(2020년 환산 71만 원- 당시 대기업 대졸 신입 초봉이 30만원 정도였다)이라는 비싼 가격에도 당시 무려 100만부가 팔렸다고 한다. 90년대에 증보 개정판이 나왔으며 이후 절판. 2020년 현재는 초판이든 개정판이든 중고도 보기 어렵고 15만원 이상 하며, 굳이 보려면 인내심을 갖고 서초 국립중앙도서관으로 가야 한다. 수집 목적일 시엔 초판은 인쇄, 제본 기술이 안 좋을 때 나온 거라 구한다면 그나마 나은 개정판을 권한다.

3. 생애


처음엔 인천고등학교 교사였지만, 나중에는 경희대학교 교수가 되었고, 은퇴 즈음에는 어린이용 TV 세계여행프로그램 해설도 했다. 그 외에 학교법인 동산학원 이사 및 이사장도 지냈다.
화객선을 타고 태평양을 건너고, 오토바이를 타고 북미와 아프리카를 종횡하고..안 가본 데가 거의 없고 사진을 많이 남겼다.[2] 당시에는 냉전 시대고 국력도 형편없던 세계 최빈국 시절이라 비자가 안 나오는 곳도 많고 1,2차 여행 때엔 일부 공산국가에는 가지 못했는데, 나중에 80, 90년대에 갔다. 1992~93년까지 현대자동차써비스의 후원을 받아 갤로퍼로 유라시아 대륙 횡단을 포함해 288일간 세계 여행을 했다. 당시 인도 등지에서 부상을 당하기도. 결국 그 후유증 을 겪다가 2003년 7월 2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지금도 불안하다 하는 아프리카 아시아 오세아니아의 후진국의 당시 치안상태를 생각하면 목숨걸고 다닌 지역도 많고, 실제로 속아서 따라갔다가 실랑이끝에, 또는 격투하고 빠져나온 무용담도 나온다. 잘 데가 없어서 현지 경찰서를 찾아가 유치장에서 잔 적도 여러 번 있었고, 아프리카에서 맹수와 만나기도 했다. 노상강도를 만나 싹 털리고 구두 속에 숨겨 둔 필름만 건진 일도 있다. 내국인의 해외 여행이 금지이던 시절에 나갈수 있던 이유는 처음엔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며 알바해서 돈을 벌어 갔기 때문이다. 첫 여행을 시작한 50년대 말 당시, 한국의 국력은 전쟁 탓에 모든 게 사라지고 세계에서 가난하기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최 빈국이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일부 미 수교국과 공산권[3]을 제외한 거의 전 세계를 몸으로 때워가며, 재외 공관도 거의 없는 상태에서 거의 무전여행을 하였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 여행 중 굶기를 밥먹듯 하다 보니 먹을 게 있으면 사자나 호랑이처럼 한 번에 많이 먹고 또 한참을 버티기도 했다고 하며, 아프리카를 종횡단 두 번 했으면서도 큰 풍토병 걸리지 않고 무사하였으니, 생각하면 강철같은 체력을 가진 분이었다.

4. 여담


30대 초반 젊을 때부터 여행을 시작했는데, 주름이 많고 상당히 우락부락하고 터프한 인상인 데다가 노상 밖으로 돌다 보니 새카맣게 얼굴이 타서 나이와 인종을 가늠하기 어려워 현지인들과 비교적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고 한다. 이 항목 프로필 사진이 대략 60대 말 때인데, 30대 모습에서 변화가 거의 없어 결과적으로 노안에서 동안이 된 얼굴.
2001년부터 영종도 중산동에 세계여행문화원을 차려서 가지고 온 수많은 자료를 전시하였고, 별세 후 그의 외아들 김장섭이 관장을 맡아 운영하였으나, 2007년 공항 주변이 개발되며 헐린다는 얘기가 나왔고, 2013년 결국 철거되어 2018년부터 그 일대에 영종역사관이 들어서 있다.[4] 다행히 홈페이지는 살아 있어서 과거 모습을 볼수 있다. # 그래도 유족들은 운영 의지를 지니며 2010년에 인천시 당국과 새 문화원 건립에 합의했으나, 8년이 지나도 진척이 없다.
어린 시절 이 분의 여행기를 읽고 여행가가 된 사람도 많다. [5] 해외여행 자유화 이후에야 나타난 지금 배낭여행자, 바이크 여행자들의 선구자 세대가 되는 분이다.
그런데 2020년 현재, 세계여행의 원조인 그보다는 30년이 넘게 지난 후인 90년대에 여행을 시작한 한비야가 여행가로 더 잘 알려져 있다는 사실은 씁쓸하다. 한비야의 글은 오류 투성이에 불법 탈법행위도 있으며, 대필 의혹도 있는데 비해 김찬삼의 여행기는 직접 겪은 사실인 정확한 정보와 쉽고 유려한 문장으로 그 격을 달리한다. 직접 찍은 귀중한 사진들, 90년대와 58~70년대의 대한민국 국격과 경제력, 정보력이라는 여행 환경 차이를 생각하면 그 차이는 더욱 커진다.
자녀로는 총 1남 6녀를 두었다. 김세완 전 심계원장이 그의 아버지이다.

5. 같이보기



[1] 먼나라 이웃나라는 어린이 대상 만화였고 독일을 중심으로 한 유럽 지역 얘기라는 한계가 있다.[2] 일부 직접 찍지 않은 사진도 실려 있었는데. 저작권 개념이 없던 시절임에도 그런 사진에는 꼭 "이 사진은 외국 잡지에서"라는 캡션을 달기도 했다.[3] 왜 일부냐 하면, 내세우지는 않지만 실제로 공산주의국가로 분류되었거나 국교가 없는데도 우격다짐으로 국경에서 임시 여행 비자나 통과 비자를 받아서 들어간 나라가 많았기 때문이다. 당시엔 공산국가를 허가 없이 방문했다가 국내 돌아오면 여지없이 간첩 취급, 안기부-감방행이었다. 한국 정보기관도 해외 정보가 어두워서 그냥 넘어가던 거였지, 정말 무모한 여행.[4] 공교롭게도 문화원 부지 근처가 조선시대 군사시설 영종진 터였는데, 1875년 운요호 사건 당시 일본군과 교전했던 장소이다.[5] 그런데 여행기가 연재되던 1970년대 시절 사람들 중에는 드물다. 왜냐하면 내국인 해외 여행 자유화는 그가 여행을 끝낸 후인 1980년대에야 이루어졌기 때문. 게다가 당시 한국은 국력이 밑바닥이라 여러 나라의 비자를 쉽게 얻을 수 있는 나라도 아니었다. 유학을 가거나 이민을 가서 외국 영주권을 얻거나 하지 않으면 실천하고자 해도 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