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가치론

 

1. 개요
2. 역사
2.1. 서설
2.2. 고전경제학의 노동가치론
2.3.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노동가치론
2.4. 주류경제학의 노동가치론
3. 산업혁명 이후에도 성립할 수 있는가?
3.1. 보론(초과잉여가치 설명)
4. 전형문제
4.1. 보론(전형문제의 선형방정식 해법)
4.1.1. 투입계수행렬
4.1.1.1. 투입계수행렬의 차원
4.1.2. 투하노동가치 체계
4.1.3. 생산가격 체계
5. 비판
5.1. 반박(효용가치론과의 비교)
6. 같이 보기


1. 개요



Labor theory of value(LTV) , 勞動價値理論
상품의 가치는 그 상품을 생산한 노동이 만들어내고, 가치의 크기는 상품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시간이 결정한다는 학설이다. 인간의 주관적 만족도가 상품가치의 기준이 된다는 효용가치설과 대립되며, 객관적인 가치가 존재한다는 객관가치설의 입장 가운데 하나이다.

2. 역사



2.1. 서설


상품의 가격은 '생산비'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생산비에는 원자재와 임금(노동자의 노동력 사용에 대해 자본가가 주는 대가) 기타 제반 요소를 포함한다.
이러한 노동력 사용으로 상품을 생산하면서 "이윤"이란 게 어디서 발생하는지 문제된다.

2.2. 고전경제학의 노동가치론


사실 의외로 그 내력을 찾자면 굉장히 오래된 개념이다. 그 원류는 심지어 일설에 따르면 토머스 아퀴나스로 이어진다.
역사적으로 토머스 홉스, 윌리엄 페티, 존 로크 등을 비롯한 많은 학자들이 노동에 의한 가치의 규정을 논의했다. 하지만 이론적 체계를 갖춘 노동가치론은 애덤 스미스가 처음으로 제시했다.
스미스는 〈국부론(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에서 교환의 매개물인 화폐는 가치라는 관념이 부여된다고 주장하며, 가치를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로 구분했다. 그리고 교환가치의 척도는 노동이 된다고 주장하며, 가격은 이 교환가치를 화폐로 나타낸 것이라고 정의했다. 그러나 스미스는 자본가도 노동자도 없는 자본주의 이전의 경제에서만 노동이 교환가치의 결정요인이라고 주장했다. 스미스는 자본가가 생산수단의 지배를 획득하고 영주가 토지 와 자연자원을 독점화했을 때 교환가치, 즉 가격은 세 부분—임금⋅이윤 ⋅지대—의 합으로 되었다고 믿었다.
데이비드 리카도는 보다 적극적인 노동가치론을 주장했다. 리카도는 시장에서 희소재(稀少財)를 제외한 상품의 가치는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 투하한 노동의 양에 따라 결정되며, 노동의 양은 가격 기구로서 자동적으로 조정되고, 기계도구 등의 고정자본에 투하된 간접노동도 직접노동과 함께 상품가치에 포함된다고 분석해서 스미스의 이론을 보완했다. 그러나 그 역시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의 구성비, 불변자본의 내구력, 자본의 회전속도 등의 영향을 설명해내지 못해서 이윤의 근거를 도출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냈다.

2.3.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노동가치론


이와 같은 고전학파의 노동가치론은 카를 마르크스에 의해 비판적으로 계승되어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노동가치론과 그에서 이어지는 잉여가치론(剩餘價値論)으로 발전되었다.
마르크스는 오로지 인간의 노동만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며 따라서 유일한 이윤의 원천이라고 전제[1]하고,[2] 가치를 노동의 추상화, 객체화, 물질화로 정의했다. 교환과정에서 모든 상품이 갖는 유일한 공통적 속성은 노동의 산물이라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마르크스는 가치의 현상형태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사용가치와 가치로 나뉜다고 보았다. 또한 마르크스는 가치의 크기가 상품생산에 평균적으로 필요한 시간으로 계산되는 '노동의 양'으로 측정된다고 설명하면서 이를 '사회적 필요노동'이라고 규정했다.
마르크스는 이 노동가치론을 토대로 잉여가치론(剩餘價値論)을 구성하고, 이 잉여가치론을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분석장치(分析裝置)로 삼아 자본주의의 경제적 운동법칙을 밝히는 한편, 자본주의의 착취적 본질 및 그 멸망의 필연성을 주장했다. 《자본론》에서 제시된 마르크스의 경제학은 공산주의 경제학의 기반이 되었으며, 그 전반부인 이른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론(生産樣式論)을 이룬다.
스미스나 리카도 같은 경우는 후대의 마르크스 등과는 달리 노동가치론을 그냥 일종의 가정으로 활용하거나 말년에 들어 노동가치론 특유의 비실증성이나 당위지향적 경향을 인지하고 이를 포기하거나 무시했지만 마르크스는 이를 자신의 경제학의 핵심 토대로 활용했다.

2.4. 주류경제학의 노동가치론


현대 주류경제학에서는 그 존재가 등한시된다. 물론 개론에서 배우긴 한다. 주류경제학에서 널리 인정받는 한계효용학적 관점에서 보면, 상품가치는 그 상품소비자에게 줄 수 있는 한계효용에 따라 결정된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상품가치는 상대적인 것이고 내재적인 노동시간 따위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상품 생산에 들어가는 노동시간은 생산의 요소로 상품의 희귀성에 영향을 미쳐 결국 한계효용에 영향을 미치는 수많은 요소일 뿐 가치의 절대적 척도는 아니다. 굳이 따진다면, 위에서 말한 리카도가 제시한 비교우위 모형의 경우 고전파경제학자로부터 주류경제학이 계승하다시피 한 몇 안 되는 것 중 하나인데, 저 리카도 모형에서 가정 중 하나로서 쓸 때 잠시 언급하는 정도다. 다만 어차피 자본, 노동의 2요소 모형을 상정해도 특화는 나타난다. 굳이 노동가치설처럼 1요소를 상정하는건 그게 더 단순하고 편해서 그러는 것에 불과하다.
최근 학계에서는 한계효용학적 관점을 보다 발전시켜 심리학과 경제학을 결부하는 미시적 접근이 유행이다.

3. 산업혁명 이후에도 성립할 수 있는가?


노동가치론은 농업수공업이 지배적 생산방법이었던 17세기 전반기 산업혁명 이전의 농업경제단계의 생산과정에 바탕을 둔 가치학설이라는 비판이 있다.
농업 및 수공업이 중심이 된 상황에서는 당연히 노동자의 육체적 노동이 생산의 중심요소가 되어 있었다. 노동가치론은 실제로 이 단계의 경제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번역체 중 가운데 남아 있는 하루 품, 이틀 품, 하루갈이, 이틀갈이 등의 표현이 이 사실을 잘 보여 준다고 하는 견해가 있다.

3.1. 보론(초과잉여가치 설명)


차설 상술한 노동가치론이 농경사회에서 도출된 개념이라 한계가 존재한다는 주장은 19세기 산업 구조를 몰각한 경우이다. 맑스 생존 당시에도 목가적 사회는 분명 존재하였지만 도시-농촌간의 현격한 차이가 존재하였고 맑스 본인도 맑시즘을 목가사회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고 밝혔다(공산당선언, 정치경제학 비판 外). 또한 상기 가치와 생산 간에 모순이 존재한다는 주장은 하단의 속칭 '전형문제'의 주관적 해석에서 나온 오류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사회의 산업구조는 필경 맑스 생존 당시랑 다름은 분명하다. 예컨대 금융시장에서 일확천금을 벌어가는 브로커라던가, 이른바 귀족노조라고 폄훼받는 임노동제하의 부유한 노동자의 경우처럼 투입노동 대비 산출 가치가 비대하다는 것이 그러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역시도 맑스는 설명한 바가 있다.
자본주의의 초과잉여가치에 대한 맑스주의 경제학에서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초과잉여가치란 그 상품의 사회적 가치와 비교했을 때 어떤 기업에서 생산한 상품의 개별가치가 낮지만 수량은 더 많음에 인하여 그 자본가가 전유하게 되는 잉여가치의 의 초과분을 말한다. 양자[3] 모든 높은 노동생산성에 기인하기 때문에 초과잉여가치는 상대적 잉여가치의 한 형태이다. 그러나 높은 사회적 노동생산성으로부터 얻어지는 상대적 잉여가치와는 달리, 초과잉여가치의 원천은 새로운 기법, 진보적 기술 그리고 개선된 생산조직방식으로 인해 어떤 기업이 성취한 높은 개별 노동생산성이다. 어떤 상품의 개별가치가 사회적 평균생산조건에 의해 결정되는 사회적 가치 이하로 떨어지면, 자본가는 그 상품을 상대적으로 높은 사회적 가치로 팔 수 있게 된다.
그 결과 사회적 가치와 개별가치 사이에 격차가 생기고, 이 때문에 자본가는 일반적 잉여가치율에 따라 획득하는 정상적 잉여가치를 초과하여 부가적인 소득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초과잉여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해짐에 따라 자본가들은 과학기술이 이루어낸 발명들을 생산에 도입하고 기술공정을 향상시키며 생산과 노동을 더욱 합리적으로 조직하고자 한다. 이러한 기술혁신은 비밀리에 이루어지므로 오히려 전반적인 기술진보를 뱅해한다. 초과잉여가치의 생산과 전유는 일시적으로만 존재한다. 일정 산업에서 대부분의 생산자들이 과학기술성과들을 흡수하자마자 그곳 상품의 사회적 가치는 하락하고 이에 따라 초과잉여가치는 사라진다.
그러나 좀 더 개선된 노동수단과 기술공정 들을 이용하는 다른 자본주의적 기업이, 그렇게 생산한 상품의 개별가치를 재차 낮춤으로써 초과잉여가치를 얻을 수 있다. 거대기업이 되면 모든 과학기술성과들을 생산에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초과잉여가치를 전유하고자 하는 욕구는 생산의 집적으로 귀결된다. 경쟁과정에서 거대자본가는, 초과잉여가치의 일부를 포기하고 그럼으로써 경쟁자들을 파산시키기 위해, 자신의 재화 가격을 사회적 가치보다 낮게 설정 할 수 있다. 제국주의단계에서는 초과 잉여가치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거대 독점체들은 높은 독점가격을 유지함으로써 초과이윤을 획득할 뿐 아니라, 또한 중소자본가에 대한 우위를 점하기 위해 과학기술성과를 생산에 도입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초과잉여가치는 '''독점적 초과이윤'''의 안정적 원천이다. 현재 과학기술혁명이 진행되면서 과학기술진보가 급속도로 이루어짐에 따라, 거대독점자본은 커다란 초과이윤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4. 전형문제


마르크스의 노동가치론에 따르면 모든 종류의 형태의 노동을 어떻게든 단일한 기준으로 측정할 수 있도록 하는 절대적인 노동가치라는 개념이 존재한다고 하는데 이에 관한 실증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고 많은 비판을 받은 바 있다. 이에 대해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은 중력이라는 개념이나 각종 자연과학계의 애드혹 논리처럼 노동가치론을 활용해 자기들의 이론을 활용할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현실을 예측하기 위해서는 이론이 논리적으로 엄밀성, 일관성을 갖춰야 한다. 그러나 새뮤얼슨 등의 비판에 따르면 노동가치설부터 시작해서 마르크스의 이윤율 저하 경향, 잉여가치론, 착취론 따위의 이론이 수학적으로 전혀 일관되지 않는다. 이 경우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은 비과학적이라는 비판은 물론 경우에 따라 과학이라기보다 그냥 이데올로기, 유사과학에 불과하다는 비난으로까지 비약한다.
이로 인해 60~70년대에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은 소련이 해체되기 이전에 이미 이론적으로 경제학자들에게 폐기 판정을 받다시피 했다. 물론 일군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이 노동가치론 등을 어떻게 수학적으로 일관되게 전개해야 하는지 여태까지 고생을 해오고 있고, 그 시도 중 하나가 제라르 뒤메닐, 덩컨 폴리 등의 신해석이다. 그러나 신해석도 단편적으로 접근해보았을 때, 노동가치에 대해 답을 미리 정해놓고 수학 문제를 푸는 식이라는 비판도 있긴 하다. 사전에 가치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정답을 정해두고 가설을 정하는 것과 경제학의 일반적인 논리 전개 방식인 가설을 정하고 현실에서 답을 찾아가는 귀납적으로 검증하는 건 다른 문제이다.[4]
그리고 위의 비판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이나 혹은 마찬가지로 비주류에 속하는 경제학파인 신리카도 학파로부터 제기된 것이고 주류 경제학은 폴 새뮤얼슨 등을 끝으로 관심을 접다시피 했다.
앤와 샤이크(1984)를 비롯한 뉴욕의 뉴스쿨 대학의 일군의 학자들과 글래스고 대학의 폴 콕숏, 웨이크 포레스트 대학의 앨린 코트렐, 웁살라 대학의 데이브 자카라야와 같은 학자들은 귀납적, 통계적 방법으로 노동가치론에 기여한 바 있다. 이는 전형문제의 실증적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논자들의 주장과 반대로 투입산출표를 이용해 노동시간과 가격의 밀접한 관계를 도출한다[5] . 이들의 방법은 가격과 가치 체계가 이윤율을 거치지 않은 하나의 체계임을 보이는 것으로 애초에 노동가치에서 생산가격으로 전형을 "할 필요가 없다"라고 주장하며 전형문제를 해결한다[6]. 이들은 신해석 학자들과는 다른 조류를 형성하고 있으며 이들에 대한 주류경제학계의 실증적 반박은 나오지 않고 있다.
전형 논쟁에 대해 노동가치론을 방어하는 학자들은 전형문제가 노동가치론에서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문제이지만 이것이 이론으로서의 '''노동가치론을 완전히 폐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주류 경제학 역시 생산함수 논쟁으로 인해 논리적 정합성은 회의되지만[7] 이론의 지위는 유지되는 것에 비교하며 공황, 금융위기, 실업, 이윤율 하락 등 현실에서 노동가치론으로부터 예측할 수 있는 현상들을 계속해서 보여주는 한 명맥을 유지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4.1. 보론(전형문제의 선형방정식 해법)


마르크스의 전형해법이 불만족스럽다고 주장하는 측은 마르크스의 노동가치론은 가치체계와 가격체계라는 이원체계로 나뉘어져 있으며 양자가 논리적으로 정합적이지 않다고 주장한다. 특히 이들은 마르크스의 노동가치론을 개별상품에 투하된 노동시간이 각 상품의 상대가격을 결정한다는 식으로 ‘해석’한다. 물론 이는 마르크스에 대한 ‘한 가지’ 해석일 뿐이다.
노동가치론과 같이, 이윤의 발생원인을 두고 그 산식의 수리적 정합성을 요구하는가에 대한 의문은 차치하고, 이하의 접근은 종국적으로 총가격 내지 총가치의 결과값이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줌을 증명한다.

4.1.1. 투입계수행렬


마르크스경제학의 선형생산모형은 투입계수행렬 A를 이용한다. 그런데 이는 실물. 즉 물량단위로 정의되는 것에 유념하여야 한다.
예컨대 곡물과 비료를 생산하는 경제를 가정하자. 곡물 한 단위를 생산하려면 a11 단위의 곡물과 a12 단위의 비료가 필요하며 마지막으로 직접노동량 l1 시간의 노동이 필요하다. 다음으로 비료 한 단위를 생산하려면 a21 단위의 곡물과 a22 단위의 비료가 필요하며 마지막으로 직접노동량 l2 시간의 노동이 필요하다. 곡물의 가치 λ1, 그리고 비료의 가치 λ2라고 한다면
[image]
이 2 개의 연립방정식은 행렬로 간단하게 나타낼 수 있다.
(1) λ = λA + L
여기서 A는 투입계수 행렬로 다음과 같이 생겼다.
[image]
1,2,…,n개로 풀어내는 것도 어렵지 않다.
[image]
그러면 이 투입계수행렬은 어떻게 만드나? 이하에서 확인할 수 있다.

4.1.1.1. 투입계수행렬의 차원

일단 이 투입계수행렬이 물량적 비율이라는 걸 감안하면 된다. 예컨대 트랙터 1 대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철강 400 kg이 필요하다고 가정하자. 이를 투입계수행렬의 원소 aij에 고려하자면, 차원이 (i의 측정단위/j의 측정단위)로 정의되며, 그 원소의 개념이 j 재 한 단위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i 재의 비율을 의미하므로, [(kg)/(대)]의 차원을 갖는 것이 된다.[8]
그러면 이해를 돕고자 가상의 산출량을 가지고 산업연관표를 구성해보도록 하자. 한 해 곡물부문에서 1,000 kg을 생산했다고 하자. 비료부문의 총생산은 500 kg이 생산되었다. 각 기업의 생산데이터를 조사해보니 곡물부문은 곡물 300 kg, 비료 100 kg을 투입했다. 이에 비해 비료부문은 곡물을 100 kg, 비료를 50 kg을 투입하였다면 다음과 같은 표를 만들게 된다.

곡물재
비료재
생산량
곡물산업
300kg
100kg
1000kg
비료산업
100kg
50kg
500kg
이제 차원을 갖는 비율을 원소로 갖고 있는 투입계수행렬을 만들어보면 아래와 같다.

곡물재
비료재
생산량
곡물산업
$${300kg \over 1000kg}$$
$${100kg \over 500kg}$$
1000kg
비료산업
$${100kg \over 1000kg}$$
$${50kg \over 500kg}$$
500kg
이 물량적 비율들을 모두 고려하면 물량들에 투하된 노동시간들로 정의되는 것이 바로 위 (1)[9] 식인 것이다.
단 유념할 점은 투입계수행렬은 “생산적”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즉 모든 i와 j의 원소들이 0 ≤ aij <1의 관계를 만족해야 하도록 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가치량이 음(-)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결합생산물 가정에서는 투입계수행렬이 “생산적”이란 가정은 가치가 양(+)인 충분조건이 아니다)[10]

4.1.2. 투하노동가치 체계


그렇다면 이하는 사안으로 접근해보겠다. A는 투입계수행렬이다. 즉 상품 한 단위를 생산하는 데 필요 필요한 중간재의 양을 보여주는 2×2 행렬이다.
l은 상품 생산에 필요한 노동투입행렬이다. 이것은 상품생산에 필요한 직접노동의 양을 보여준다. λ는 투하노동계수의 행렬이다.이들의 관계를 수식화하면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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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식은 각 상품 한 단위의 투하노동으로 계산된 가치는 그 상품의 생산에 투입된 간접노동과 직접노동의 합임을 의미한다. 위 식을 통해 투하노동계수의 행렬식을 구할 수 있다.

[image]
그 다음으로 총계 차원의 경제를 보자. x를 경제의 상품총량이라고 한다면 λx는 투하노동으로 계산된 총생산물의 가치이다. 또한 Ax는 생산에 투입된 중간재(intermediate goods)의 총량이다. 마지막으로 y=(I-A)x는 경제의 순생산이다. 순생산이란 총생산에서 중간재 투입량을 제한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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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투하노동의 가치체계 아래 자본론의 구상대로 불변자본(C), 가변자본(V), 잉여가치(S)를 계산할 수 있다. 이는 차례대로 아래의 식과 같다. 참고로 아래 b는 노동자가 소비하는 n×1 임금재(임금으로 구매할 수 있는 재화) 행렬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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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변자본 가치는 중간재들의 투하노동가치이며 가변자본은 임금재들의 투하노동가치이고 잉여가치는 상품의 총가치 중에서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을 차감한 것이다.

4.1.3. 생산가격 체계


위의 투하노동체계를 통한 방식 외에도 ‘생산가격체계’ 아래 불변자본, 가변자본, 잉여가치를 계산할 수 있다. 이 때 p는 경제 내에 존재하는 모든 재화의 가격행렬이다. w는 임금이며 임금재들의 가격의 합(w=pb)이다. 임금률은 모든 노동자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 또한 모든 가격은 고정되어 있다고 가정한다. 이때 px는 총생산의 화폐가격이다. 나아가 py는 순생산의 화폐가격이다. 그리고 wlx는 임금총액이며 pAx는 중간투입물의 화폐가격이다. 마지막으로 pAx는 중간재 가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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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생산가격 체계에서의 평균이윤율 r은 다음과 같이 구한다. r은 이하의 마지막 식을 만족시키는 값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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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이윤율을 구하게 되면 하의 생산가격은 따라서 다음과 같다. 상품의 생산가격은 중간재 투입비용과 노동비용에 평균이윤을 덧붙인 것이다.
[image]
다만 위에서의 문제는 위의 식을 만족시키는 무사히 많은 가격행렬 p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가령 p가 아닌 임의의 t를 가격행렬 p에 대입해도 위 식은 성립한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피하기 위한 여러 가지 ‘정규화(normalize)’ 방법이 강구된다. 이 중 노동가치론에 가장 잘 들어맞는 정규화 방법은 py=lx로, 즉 순생산물의 총가격을 상품생산에 투여된 직접노동시간과 일치하도록 고정시켜놓고 보는 것이다.
이제, 생산가격행렬이 주어졌으니 생산가격으로 계산된 불변자본, 가변자본, 잉여가치를 차례대로 살펴보자.
[image]
불변자본은 중간재투입물의 가격이며 가변자본은 임금재들의 가격이고 잉여가치는 상품의 총가격에서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을 차감한 것이다.

5. 비판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임금을 지불하고 노동력을 사들여 제품을 생산한 뒤 이 제품을 자기가 지불한 임금보다 훨씬 비싸게 판다. 이때 임금과 판매가 사이에 발생하는 차이가 잉여가치다. 즉 자본의 이윤이다.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지불하지 않은 이 가치를 자기 것으로 가로챔으로써 부자가 된다. 이것이 착취 이론이다. 이 개념의 근저에는 자본보다 노동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그러나 집에서 내가 뜨개질한 한 켤레의 장갑, 내가 구운 한 덩이의 빵은 내 가족에 대한 사랑일지언정 거기서 잉여가치는 발생하지 않는다. 따라서 자본도 형성되지 않는다. 그러나 빵 기계를 도입하고 종업원도 채용하여 노동을 조직했을 때 비로소 시골 빵집 주인도 빵을 굽게 되는 것이다. 노동은 그 스스로 가치를 발생시키는 존재가 아니다. 그것을 조직하고 사회화하는 자본이 있을 때에만 가치가 발생한다. 다시 말해 노동보다 자본이 우위에 있는 것이다. 자본가의 지위가 고정돼 있는 것도 아니다. 노동의 열등한 지위가 싫다면 스스로 자본이 되려 노력하면 된다. 자본이 활발하게 움직일 때 사회는 활력을 되찾고 개인들은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다.
노동가치론, 특히 마르크스주의가 견지하거나 표방하는 노동가치론은 오컴의 면도날에 위배되거나 저촉된다고 비판될 수 있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의 방법은 시장에서 책정되는 재화와 서비스들의 가격의 '배후', 혹은 '이면'에 '객관적 노동가치'라는 형이상학적 실체가 존재하며, 상품의 가격은 궁극적으로 이에 의해 좌우된다며 상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스트리아학파나 주류 경제학이 '주관적 가치이론', 혹은 한계효용이론을 정립한 이후에 노동가치론을 역설하거나 노동가치론에 의거하여 가격을 해명하려는 시도는 오컴의 면도날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목적을 견지하며 그 목적을 이룩하기 위해 수단을 기용하거나 투입함으로써 행동한다'라는 지극히 자명한 사실로부터 필연적이며 선험적으로 도출되는 형식논리적 함의들의 집적[11]만으로 시장에서 책정되는 모든 상품들의 가격이 완전무결하며 전적으로 해명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그 배후에 '객관적 노동가치'라는 형이상학적 실체가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할 필요가 전무하기 때문이다.
물론, 만약 한계효용의 법칙이나, 혹은 주관적 가치이론만으로 시장에서 책정되는 상품들의 가격을 전적으로 해명할 수 없으며, 그에 부합되지 않는 증례나 그로 해명할 수 없는 현상들이 존재하며, 그 배후에 '객관적 노동가치'가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함으로써 현상이 더 논리정연하게 해명될 수 있다면, 이러한 가정의 도입은 용인될 수 있으며, 명백히 오컴의 면도날에도 배치되지 않는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가령 자동차의 가격이 수요와 공급이 아무리 시시각각 변화무쌍하더라도 특정한 가격대, 즉 예컨대 20원 이하로는 격감하지 않는다는 경험적인 증례나 실례를 근거로 노동가치설이 방증된다며 강변한다. 즉, 20원 이하로 결코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소위 자동차에 내재된 '객관적 노동가치'가 그 배후에 존립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이는 주관적 가치이론이 해명할 수 없는 난제이거나 반례이기는커녕, 오히려 한계효용이론이나 주관적 가치이론에 의해 지극히 명료하게 해명될 수 있다. 자동차의 가격이 아무리 떨어져도 20원을 하회하는 것으로 책정되지는 않는 이유는, 여전히 20원을 능가하는 금전을 지불하고서라도 자동차를 매입할 것을 희구하는 소비자들이 시장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그 최고구매가격이 20원을 능가하는 자동차의 소비자들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것. 만약, 그 누구도 자동차를 20원을 능가하는 금전을 지불하고서라도 매입할 용의가 전무하다면, 즉 그 어떤 자동차의 소비자들도 그들이 견지하는 최고구매가격이 20원에 미달된다면, 자동차의 가격이 20원대로 격감할 것이라는 것은 명약관화하며 심지어 돈을 얹어주고 줘야 하는 마이너스 가격조차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5.1. 반박(효용가치론과의 비교)


결론부터 말하자면 비교할 수 없다.
상기 '비판'이라는 주장은 오컴의 면도날 명제의 오용에 해당된다. 그 내용은 여기에서 확인될 수 있다.
효용가치론과 노동가치론을 대조할 때 흔히들 빠지는 오류가 '''개념''' 정의에 있다. 효용가치론의 ''''효용''''을 후자에서의 ''''사용가치''''로 오해하는 것이다.
경제학을 원론 수준으로만 공부해봐도 알겠듯이, '''"가치는 가격이 아니다."'''
경제학에서 효용은 재화를 소비할 때 느끼는 '주관적 만족도'인 반면, 사용가치는 '물질적 유용성'을 의미한다. 효용은 사람들이 재화에 대해 매기는 선호의 순서를 상정한 것이다. 반면 사용가치는 현실적으로 측정가능한 물질적 속성이다. 주류경제학의 개념으로 사용가치는 효용이 아닌 '수량'에 가깝다.
효용이나 추상노동이나 모두 상품의 교환비율, 즉 '가격'의 변화를 추동하는 실체를 개념화한 것이다. 효용은 각자가 상품을 얼마나 원하는지를 수치화한 것으로 상품에 대한 '수요'를 결정하는 힘이다. 즉, 효용은 상품수요의 실체이다. 주류경제학에서 재화의 공급은 생산요소의 부존량과 생산기술에 의해 결정된다. 효용가치론은 이런 공급조건이 주어질 경우, 시장가격은 궁극적으로 효용, 즉 수요의 크기에 따라 결정된다는 이론이다.
반면에 노동가치론은 시장가격 결정의 배후에 '가치'가 존재하고, 가치의 실체가 곧 추상노동이라는 이론이다. 효용은 곧바로 시장가격을 설명하지만 추상노동은 시장가격 형성 '''이전에''' 생산에서 결정되는 '가치'를 결정하는 실체이다. 추상노동에 의한 가치의 결정은, 상품이 생산자에 의해 '공급량'으로 시장에 등장하기 이전에, 또한 소비자 효용에 따른 '수요량'이 나타나기 이전에 이뤄진다.
정리하자면 두 가지 오해를 해소하여야 한다.

효용은 사용가치(수량)가 아니라 '''가격'''과 관련된 개념이다.

효용은 시장가격을 결정하는 상품의 '''수요'''와 관련된 개념이고, 추상노동은 시장가격 형성 이전에 생산에서 결정되는 '''가치'''와 관련된 개념이다. 즉, 효용가치론은 '시장수요가격의 실체는 효용'이라는 이론이고, 노동가치론은 '가치의 실체는 추상노동'이라는 이론이다.

결국 둘은 동일선상에서 비교될 수 없는 이론이다. 양극단의 대척점에 서로 놓여 있지 않다.
뿐만 아니라 노동가치설은 자본이냐, 노동이냐의 뭐가 더 중하냐의 논의가 아니라 이윤 창출의 원천이 무엇인가를 두고 전개되는 것이다. 이를 마치 자본 없이 어떻게 이윤이 창출되냐는 식의 선전은 학술적으로 무가치할 뿐이다.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는 이미 자본의 실체를 두고 '이전된 노동'으로 정의함으로써 자본의 발로에 대해 설명한 바가 있다.
마르크스를 골자로 하는 모든 노동가치론자들은 시장에서 책정되는 상품의 가격의 배후에 추상적 인간노동의 투입량으로부터 기인하는 객관적인 가치를 상정하였으며, 궁극적으로 가격은 이에 의해 좌우된다며 역설하였다. 오로지 그것이 '''시장가격'''의 결정에 영향을 끼치는 경우에 국한하여 노동으로부터 가치가 기인한다며 강변하는 노동가치설이 경제학적으로 유의미한 것이다. [12]
한계효용학파라고도 불리는 신고전학파는 상품이 제공하는 ‘효용’이라는 측면에서 가치론을 정립했다. 이에 따르면 소비자의 특정한 선호 체계에 바탕을 둔 특정한 수요가 현재의 기술 조건과 현재의 토지, 노동, 자본에 바탕을 둔 공급과 만났을 때 가격이 형성된다. 현실에선 분명 끊임없이 자본이 축적되고 생산기술이 발전하기에 생산에 투입되는 기존 생산물의 수요·공급 패턴이 바뀐다. 다만 여기서 오해가 있다. 주류 경제학도 얼마든지 동태적 분석을 한다. 경제성장에 대한 제 이론은 물론이고 RBC나 DGSE같은 이론들도 따지고 보면 경기변동과 성장을 통합해서 설명하다시피 하고 있다. 이 외에 국제무역에서 비교우위 역시 경제발전에 따라 변화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균형은 단지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것 외에 동일 시점에서 복수로 존재할 수도 있다는 점 역시 퍼져있다.
신고전학파 경제학자들 중에도 노동만을 요소로 고려해 모델을 만든 이들도 있었다. 이건 순전히 연구자 편의나 상황에 따라 그냥 모델을 고려할 때 노동만 고려하느냐 자본만 고려하느냐 아니면 특정 다른 생산요소만을 고려하느냐의 문제다. 필요하다면 하나만 할 수 있고 아니면 여러 요소를 필요한대로 고려할 수 있는지의 문제다.[13]
따지고 보면 이는 주류경제학과 마르크스 경제학의 중요한 차이점 중 하나다. 주류경제학은 생산요소로 여러 가지를 고려할 수 있어도 그 자체로 논리적으로 말이 된다.[14] 반면, 마르크스 경제학에서는 생산요소로 노동을 배제하면 말이 안 된다. 그리고 마르크스 경제학에서는 이런 경우에 대한 고려를 하지 않는다.

인간은 항상 합리적 선택을 하는 것도 아닐 뿐더러 인간의 '선호'가 절대적이고 일률적으로 측정되지도 않는다.[15]

이에 대해 주류경제학의 태두인 폴 새뮤얼슨은 현시선호이론을 창안했다. 인간의 생각은 측정을 못해도 행동은 측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현시선호이론조차도 철저히 비판받는다. 만약에 시장에서 상품이 A 또는 B만 있어 선택이 가능하다면 모를까 실제 소비자들의 선호는 서수적 효용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16]

6. 같이 보기




[1] 마르크스에 따르면 가치는 물론 무에서 창조되지는 않는다. 노동은 자연이 준 자원에 새로운 가치를 더하는 것이다.[2] 여기서 M= C+V+S라는 공식이 나온다. C (Constant capital) = 기계,원료 등 불변자본, V (Variable capital) = 가변자본 (노동력), S (Surplus value) = 잉여가치를 말한다.[3] 사회적 가치와 갸별가치에 내포된 각각의 잉여가치[4] 물론 해석의 접근방식은 호오나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긴 하다.[5] Zachariah D. (2006) Labour value and equalisation of profit rates: a multi-country study . In : Indian Development Review[6] Cockshott P., Cottrell A. (1998) Does Marx Need to Transform?. In: Bellofiore R. (eds) Marxian Economics: A Reappraisal. Palgrave Macmillan, London[7] 다만 케임브리지 자본논쟁에 대한 평가는 정말 학자마다 다양하기 때문에 이런 회의론 역시 일부 견해라고 볼 수 있다.[8] 류동민, 최한주, 《투입-산출데이터를 이용한 가격과 노동생산성의 관계분석》, 경제학연구 53.3 (2005): 95-120.[9] λ = λA + L[10] 한국은행 ECOS의 산업연관표도 이 투입계수행렬 개념으로 설계된다. 위 같은 원리는 실제 기업들의 조사 자료를 토대로 한다.[11]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에서는 이것을 '''인간행동학'''(Praxeology)이라고 지칭한다.[12] 설사 노동가치론이 단순히 어떤 난로가 토출할 수 있는 열량이 그 난로를 생산하는 데에 있어서 투입된 노동량에 상응한다며 강변하는 학설이었더라도, 그리고 그것이 공학적 성질이 있더라도 그게 경제학적 관점에서 다루는 가설이 되는데는 그 자체로는 문제가 없을 것이다.[13] 예를 들어 상황에 따라 저숙련노동, 고숙련노동의 2가지 요소만 고려한 생산함수 모델을 짤 수도 있고, 일반적인 노동과 자본 외에도 원자재같은 예시적인 생산요소를 고려한 모델을 짤 수도 있다. 이건 논리적 정합성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상황 설명을 위한 가정의 문제다.[14] 물론 경험적인 이유로 노동과 자본을 가장 많이 고려하긴 한다.[15] 이는 비단 노동가치론자들의 비판이 아닌 오늘날 미시경제학 연구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비판이다.[16] 고전파 경제학자 스탠리 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