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학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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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strian School
1. 개요
경제학계의 비주류 경제학파로, 19세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카를 멩거(Carl Menger), 오이겐 폰 뵘바베르크(Eugen von Böhm-Bawerk), 프리드리히 폰 비저(Friedrich von Wieser) 등이 창안하여 오스트리아학파로 불리게 되었다. 비저, 뵘바베르크 때에는 마르크스 경제학에 대한 반격과 함께 성장하였다. 이들 중 비교적 젊은 경제학자 그룹이 제1차 세계 대전 후 새롭게 만든 근대 경제학의 한 학파를 빈학파, 신오스트리아학파라고 한다.[1] 오늘날에는 앨러배마 오번의 미제스 연구소를 중심으로 학파가 유지되고 있다.
오스트리아학파는 주관적 가치설(한계 효용설)로 가치 형성 과정을 설명한다. 인간을 합목적적인 존재로 보는데, 합목적성은 어떤 사물이 일정한 목적에 적합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성질을 뜻한다.
오스트리아학파는 추상적 추론과 언어적 논리를 추구한다. 수리경제학, 계량경제학, 실험 경제학적 방법은 좋아하지 않는다. 개개인의 주관적 가치 판단을 효용 함수로 단순화시킨다거나, 통제 변인을 정해두고 실험을 진행한다거나, 통계를 도입하는 것은 복잡한 인간의 본성에 대해 설명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엄밀한 논리 전개를 추구하지만 그걸 수식으로 나타내는 건 좋아하지 않는다. 이것이 심리학적 방법론을 의미한다는 오해가 있는데 그쪽과는 관계가 없다.
미제스에 따르면 인간은 다양한 목적들 사이에서 선택하며 그 선택은 그 인간이 사물들에 부여하는 주관적인 가치 판단에 의해 영향받는다. 인간은 다양한 행동 중 그의 지식과 가치 판단에 비추어 볼 때 그에게 가장 높은 효용을 줄 수 있는 행동을 선택한다. 예컨대 누군가가 사과를 먹는 대신 가난한 사람에게 준다면 그것은 그가 자선을 함으로써 얻는 만족이 사과를 먹음으로써 얻는 만족보다 크기 때문이다. 그는 비합리적인 행동을 한 게 아닌데 그의 주관적 가치 판단을 기준으로 보면 이런 행동은 엄연히 더 큰 행복을 그에게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이며 그게 모든 인간 행동의 동기이다. 교환이 출현한 것은 사람들끼리 재화에 부여하는 주관적 가치가 다르다 보니 교환으로 모두의 행복이 증대되는 경우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심리학적인 이유로 분석되는 한계 효용 체감의 법칙에 대해서도 정통 오스트리아학파는 다른 해석을 내놓는다. 개인이 말 세 마리를 순차적으로 발견한다고 가정하자. 첫 번째 말은 말 한 마리가 봉사할 수 있는 가장 긴급한 욕구들을 채워 줄 것이다. 두 번째, 세 번째 말이 발견되면, 그는 충족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는 욕구들 중에서 가장 긴급한 것을 채우고자 그 말을 이용할 것이다. 그러나 이 욕구는 첫 번째 말이 충족했던 욕구들에 비한다면 낮은 순위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굳이 심리학을 끌어다 붙이지 않더라도 한계 효용 체감의 법칙은 인간 행동의 공리로부터 자연스럽게 발생한다. 예외처럼 보이는 경우는 재화의 묶음이 아예 새로운 효용 가치를 갖게 되어 다른 재화처럼 취급되거나 개인이 소비를 하는 도중에 효용 함수가 변화하거나 하는 일이 있기 때문인데 애초에 오스트리아학파는 이런 경우에는 아예 한계 효용 체감의 법칙을 적용시키지 않는다. 심리학을 배제하고 엄격하고 까다롭게 한계 효용 체감의 법칙이 성립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정하고 이 안에서만 이 법칙을 논하는 게 오스트리아학파의 방법이다.
공리로부터 연역만으로 경제학의 모든 걸 다 설명한다. 이자율이나 화폐의 가치, 경기 변동 이론까지... 이 과정에서 통계나 심리학적 가설 같은 건 전혀 사용되지 않는다. 미제스는 그가 인간 행동학이라고 부른 그의 경제학을 수학이나 논리학과 같은 범주로 분류했다. 오스트리아학파의 경제학에 대한 이 같은 태도는 경제학을 응용 과학으로 보고 실증적, 실험적 방법을 도입하려 하는 현대 주류 경제학과는 분명 상반되는 태도.
오스트리아학파는 구 학파와 신오스트리아학파로 나뉘는데, 구 학파는 한계효용을 경제학에 처음 도입한 학파이다. 즉 한계효용으로 가치가 정해지며, 이로 인해서 기회비용이 생겨난다는 학파이다. 경제학에서의 기회비용 개념은 이 학파에서 나온 거다. 그래서 오스트리아학파는 좁은 의미의 한계효용학파로 정의되기도 한다.
신오스트리아학파는 루트비히 폰 미제스와 그 제자인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등이 포함된다. 이들은 구 학파에 더해 인간이 가진 인지적 한계로 인해 경제적 문제가 생긴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더해 시장이 자유 시장이 될 수 있도록 하는 데에는 정부가 존재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자유 시장이 이뤄질 것이라고 보는가에 따라 좀 더 나뉠 수 있다.
2. 주장
오스트리아 학파에선 시장경제의 순기능을 옹호하고 정부나 집단의 간섭을 배제하는 걸 주장한다.
관련된 문서로는 경기변동론을 참조.
2.1. 연구 방법론
주관주의가 핵심적인 방법론이다. 다만, 주관주의는 일반적으로 주관주의라고 하는 사회과학적 연구방법론과는 차이가 있다. 주관주의는 크게 2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목표(동기)'의 주관성, 그리고 '지식(인지)'의 주관성이다. 재화나 용역의 가치뿐만 아니라 시공간, 상황 더 나아가 수단, 예산, 이윤, 비용, 재고 등의 여건이 주류경제학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어졌다기보다 생각하기에 따라 가변성이 있다는 이야기다. 오스트리아 학파 경제학자 일각에서는 이중 인간의 목적에 관한 주관주의는 기존의 주류 경제학에서도 받아들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차이가 있다면 주류 경제학자들은 인간의 효용함수 같은 것이 사전에 주어졌다고 전제하는 반면 오스트리아 학파는 엄격한 주관주의에 기초해서 인간은 행복을 위해 행동한다는 선험적인 공리만으로 경제학의 모든 정리를 끌어내려 한다는 것. 물론 이 과정에서 단순화된 효용함수나 통계 등의 사용은 완강하게 거부된다. 이 점에서 오스트리아 학파의 방법론은 응용과학보다는 수학이나 논리학에 가까우며, 이것은 과학적 객관주의를 바탕으로 객관적 측정이 가능한 행태를 중시하는 주류경제학과는 구별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행태경제학 같이 심리학에서 뻗어 나와서 주류경제학과 노는 분야가 없기는 하지만 이들 역시 따지고 보면 인간의 행태 실험 같은 것이 주 과제다.
오스트리아 학파는 본질적으로 미시경제학이다. 개인의 행동에서 출발해서 말 그대로 경제학의 모든 분야를 다룬다. 주관적 효용이론을 포함해 오스트리아 학파 이론의 기초 중 기초라 할 수 있는 것들은 이미 주류경제학에서도 받아들여서 잘 써먹고 있다. 따라서 오스트리아 학파만의 이론이라고 하면 뵘바베르크의 자본이론이나 이에 기초한 미제스, 하이에크의 경기변동론(ABC이론) 등을 들 수 있다. 현대에 주류경제학에는 포섭되지 않은, 오스트리아 학파만의 고유 영역은 사실상 이런 미시적 기초 위에서 거시경제학의 영역을 설명하는 부분들밖에 없다. 이러한 이론들은 흔히 주류경제학에서 하듯이 자본을 총량으로 다루는 걸 아예 허용하지 않는다. 뵘바베르크는 자본주의가 생산성 향상을 이룬 방법을 우회생산이라고 지적하는데, 즉 고기를 그냥 잡는 대신 먼저 그물을 만듦으로써 장래에 훨씬 더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게 된다는 식. 물론 어느 정도의 우회생산이 더 적합한지는 그 사회의 이자율, 정확하게는 시간선호에 따라 다를 것이다. 당장 굶어죽기 직전인 사회는 일단 고기라도 잡아줘서 살리는 게 우선이지 한가하게 그물이나 만들고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문제는 정부가 자의적으로 이자율을 낮출 때 발생한다. 이러면 기존의 이자율 조건에서 맞추어진 우회생산구조도 바뀌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산업 전체가 대중의 진짜 시간선호와는 양립할 수 없는 형태로 재배치되어 결국 파산할 수밖에 없는 투자, 즉 오투자가 발생하게 된다. 빵도 충분치 않은데 호텔을 지으려 하게 된다는 것. 이런 투자는 결국 완수될 수 없고 파산하기 마련이기에 우회도가 높아도 경제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정말로 굶어죽기 직전인 사람 앞에서 그물이나 만들고 있는 격인데 실제 경제에서는 결국 그물이 다 만들어지기도 전에 투자를 중단 또는 회수하고 뒤늦게라도 생필품부터 공급할 수밖에 없는 단계가 오기 마련이다. 이 과정을 분석한 것이 바로 오스트리아학파의 ABC 이론이다. 유명한 하이에크의 삼각형도 각 산업분야의 다양한 우회 정도를 다룬다. 우회도에 따른 다양한 자본 간의 차이를 강조하는 게 오스트리아 학파의 자본이론의 특성이다.
오스트리아 학파 일각에서도 아예 통계적, 실증적 방법론을 거부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런 이론에 도저히 수학을 쉽게 적용할 길이 안 보인다는 것이다. 자본을 총량으로 다루는 건 당연히 말도 안 되고, 굳이 모델 같은 걸 세운다면 우회도에 따른 자본의 분포를 다루거나 최소한 서로 다른 우회도를 갖는 다양한 자본들을 가정하거나 해야 하는데, 이것은 필연적으로 오스트리아 학파의 수학을 주류경제학의 수학보다 훨씬 더 복잡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 하물며 화폐와 신용의 이론 전반을 다룬다는 것은 더 복잡한 결과를 낳는다. 오스트리아 학파는 편하게 골치아픈 실증적, 수학적 도구들을 폐기하는 쪽을 선택했다. 그러니 연구주제가 제한되고 주류경제학에 밀리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
2.2. 사회주의에 대한 견해
사회주의, 공산주의가 불가능하다고 한다. 주류 경제학의 적지 않은 학자들은 사회주의를 '비효율'적으로 인식해서 부정적으로 본다. 오스트리아학파는 '비효율'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으로 다룬다. 1920년 이래로 미제스, 하이에크 모두 사회주의는 실패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이에크는 지식의 문제 때문에 사회주의가 궁극적으로 실패할 거라고 보았다. 사유 재산제를 폐지하게 될 경우 자본재 투자가 불가능한데, 자본재 가격은 미래에 생산될 소비재 가격을 비롯해, 수요량, 들어갈 비용, 생산량, 활용 가능한 노동력의 정도, 투자처, 노동자의 재주, 영업 능력, 기업가적 판단, 외부 상황 등등에 대한 지식이 고루 담겨 있는 정보다. 이 정보는 각 개인에 따라 고유한데(주관주의), 그 고유한 지식을 자발적으로 내뱉는 과정이 바로 가격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자기만의 지식을 자발적으로 내뱉는 결과물이 가격이다. 사유 재산이 있어야 자기 입장에서 그 자본재의 가치 평가가 가능하기 때문에 자신만의 지식을 내뱉을 수 있다. 가격 구조가 없기 때문에 사회주의는 새롭게 투자를 할 수 없고 결국 기본적인 것조차 만들지 못해 스스로 체제 자체의 문제가 있음을 느끼고 변혁을 시도한 것이다.
2.3. 간섭주의에 대한 견해
오스트리아 학파는 인간의 주관적 인지를 무시한 간섭주의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또 간섭하고 이런 현상이 지속돼서 결국 사회주의와 별반 다를 바 없다고 주장한다.
간섭주의가 패망하지 않는 이유는 모든 분야에서 통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공산주의처럼 통제했다면 산업 자체가 절멸했을 것이지만, 어떤 경우에는 매우 미미한 영역만 다루거나, 많은 자유를 남기기 때문이다. 더구나 역사적으로 간섭주의가 없었던 시절이 없었기 때문에 간섭의 정도가 심하지만 않는다면 기존의 역사의 과정과 마찬가지로 발전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오스트리아 학파가 간섭주의를 비판하는 이유는 공산주의와 마찬가지로 재산권 행사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규제가 늘어난다는 것은 나의 행동에 제약이 생긴다는 것이고 그것은 내가 택할 행동을 바꿔야 하고 이 과정에서 생기는 비용을 내가 부담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 과정이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기업가는 상품이나 기업 그 자체의 발전에 힘쓰기보다 그 규제를 최대한 피해서 손해를 덜 보는 방법에나 치중해야 한다. 이것은 다시 기업가 정신이 꺾이는 것이고 다시 말해 혁신과 새로운 도전이 감소한다. 이것이 바로 문명의 진보를 한 걸음 늦춘다고 할 수 있다.
간섭주의를 비판하는 결정적 이유는 바로 인간 지성의 한계 때문이다. 인간 이성은 모든 사안을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결여하고 있다. 오직 국소적이고 자기 감각적 범위를 벗어나지도 못한다. 또 자기가 얼마나 많이 아는지 말로 설명할 수조차 없다. 더구나 인간의 지성은 제도 틀에서만 움직인다는 사실에 비춰볼 때 특정 현장과 결부되지 않는 지식은 죽은 지식과 다름없다. 결국 사회 전체를 각 부분에 대해서 하나하나 따지면서 이해하는 것도, 그것들을 좋은 방향으로 조정하고 통제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자본주의의 가장 큰 특징은 얼굴도 모르는 수천, 수만명의 인간들하고도 협력할 수 있다는 점, 즉 인지조차 불가능한 대상으로 가득찬 거대한 사회에서 나의 목적을 이룰 수 있다는 점에 있다. 간섭주의는 이런 협력체제를 방해한다. 왜냐하면 규제라는 것은 어떤 특정한 행동을 강요함으로써 개인의 목적은 아랑곳하지 않고 권력자가 본인이 원하는 사회의 모습을 그리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에서 말했듯이 공산주의도 특정 행동을 강요(통제)함으로써 자기가 원하는 사회의 모습을 그리려 한다는 점에서 둘은 똑같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차이점은 얼마나 심하냐뿐이다. 인간이 이성을 발휘해 사회를 계획하거나 설계하려 드는 것은 인간 이성의 본질적 한계를 무시한 '치명적 자만'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간섭주의는 공산주의와 똑같이 실패할 수밖에 없다.
노조는 끝내 임금을 고정시켜 고용시장을 왜곡함으로써 개개인이 자유롭게 임금을 협상할 자유를 방해한다고 본다. 이는 자유시장을 망가뜨리는 결과를 낳을 것이므로 위협이라 본다. 이는 슘페터의 글에서도 비슷하게 본다. 노조가 주도하여 자본주의를 민주적 사회주의로 전환시킬 것이라고 본 것. <자본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는 시각에 따라 이론적으론 그렇지만 여러 단서 조건을 달아 두어 우린 안 될 거야 아마로 결론을 내리고 있다고 독해하는 경우도 있다.
3. 차이
신자유주의의 대표 학파로 꼽히는 밀턴 프리드먼 등의 시카고학파와는 비슷해 보이지만 조금 다르다. 일단 시카고학파는 주류 경제학의 범주에 들고, 통화주의를 받아들여 통화량이 적정하게 증가하는 인플레이션을 보여야 경제가 성장한다고 본다. 주류 경제학은 앨프리드 마셜이 창시한 신고전주의에 폴 새뮤얼슨, 존 힉스 등이 케인스(그런데 따지고 보면 케인스의 학설도 그 근본은 마셜과 궤를 같이 한다)의 이론을 혼합한 신고전파 종합, 시카고나 미네소타를 위시한 시카고학파, 그 외에 계량 경제학, 합리적 선택 신제도주의(공공 선택론, 게임 이론, 행태 경제학 등)을 포함한다. 반면 오스트리아학파는 일체의 인위적인 인플레이션을 반대하고 균형 재정을 강조한다.
이 학파는 금융 산업이나 정부 정책 등 안 까는 구석이 없다. 오스트리아학파는 가치를 뻥튀기하는 인플레이션을 만들어내고 통제도 못 하는 공인 위조지폐범 중앙은행과 더불어 정부의 인플레이션 제작 도구인 정부 독점 화폐 발행권, 신용 팽창을 가져오는 금융업계의 사기 행위인 부분지급준비제도와 더불어 지급정지제도를 철폐하는 걸 주장하며, 독점은 정부의 규제로 인해 생긴 것이며, 또한 연쇄 때 제대로 바닥 못 치게 만드는 최저 임금제도 까댄다. 유럽이나 한국에서는 지지 기반이 매우 없지만 미국에서는 공화당이나 자유당 등 자유 지상주의자들이 지지기반이 된다. 미국의 건국 이념인 청교도적 자본주의 정신과 매우 흡사하다. 최근 벌어지는 경제 위기를 다른 이론들이 어물쩍하고 있는 사이 확실하게 그 이유를 설명하고 해결책을 내놓는 경기 변동 이론으로 인해 주목을 받고는 있다. 그러나 그 대책이란 게 결국 "헌법 이외로 중앙정부가 시장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한마디로 그냥 냅두자)… 미국의 오스트리아학파는 헌법을 헌법 그대로 지키자는 헌법 근본주의자들인 경우가 많다. 미국 헌법은 경제 문제에 관해선 언급이 없으며, 재산권을 포함한 개인의 자유를 최우선으로 보장한다.
1960년대까지는 주류였던 케인스와 맞짱 뜬 하이에크, 미제스 등이었으나 1970년대의 스태그플레이션 이후 살아나 1980년대 신보수주의와 함께 귀환에 성공했다. 08년 금융 위기를 기점으로 케인지언과 더불어 오스트리아학파도 주목받게 되었다. 오스트리아학파의 입장에서 2008 금융 위기의 원인은 이라크 전쟁으로 인한 미 정부의 금리 장난질과 그로 야기된 부동산 거품이 금융 상품화한 것이 터져 금융계가 작살 나버린 것이다.
4. 비판과 반론
4.1. 비판
현대경제학은 적어도 정부가 시장을 조작하는 행태가 경우에 따라, 오스트리아 학파에서 주장하는 것보다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쓸모 있다는 사실 정도는 많이 밝혀낸 바 있다.
오스트리아 학파의 간섭주의에의 견해에 문제점은 있다.
첫째로, 개입이 꼭 개입을 낳는 악순환을 유발하는지는 정해진 것이 없다.
둘째로, 이런 주장이 널리 인정받는지는 별론으로 하고 당위나 현실 설명 관점에서 사회주의라고 하더라도 그 자체만 놓고 그것이 틀렸다든가 옳지 않은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물론, 주류 경제학이 보기에는 사회주의라는 체계 하의 여러 통제경제적 구조가 비능률적이라는 것에 대해 많이 합의를 하고 있지만, 이는 현실 설명에서나 그렇고 도덕적 영역에서 사회주의가 배격해야 할 것인지는 아직 지식인들 사이에 의문의 여지가 있다. 또, 주류 경제학에서 말하는 정부의 시장 개입을 사회주의나 다를 바 없다고 몰아붙이는 것 역시 문제가 있다고 지적할 수 있다. 정부의 시장 개입 중 적지 않은 것이 시장지향적 구조를 활용하거나 아니면 인공적으로나마 시장 형성에 기여하는 바가 적지 않은 점을 감안하면 특히 그러하다. 거기에 더해 개중에는 경제 능률성을 개선시킨다는 평가를 받는 것들도 적지 않다.
셋째로, 간섭이라는 것이 꼭 주관적 인지를 무시하는지 역시 논란이 있다.
인간관 측면에 대해서도 비판을 할 수 있다. 규제를 하는 것도 사람이고 시장에서 활동하는 것도 사람이다. 결국에는 둘 다 불완전한 인간에 불과하다. 인간의 지성이 불완전하므로 정부의 규제가 실패한다면, 시장 역시 실패할 수 있다. 이 문제는 인간의 지성이 불완전하므로 따라서 정부 규제를 배격해야 한다고 말하기보다, 누구에게 더 정보가 많은지를 중점적으로 봐야 한다. 물론, 현대 경제의 적지 않은 영역에서 시장 참여자들이 정부 관료들보다 더 정보가 우월한 경우는 적지 않다. 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정부 관료들이 시장 참여자들보다 더 우월한 정보력을 갖춘 경우 역시 많다. 아울러, 오늘날의 민주국가들은 정책 수립 과정에서 끊임없이 전문가, 시장참여자, 기타 이해관계자들과 소통할 것이 요구되고 있다. 이러한 소통 과정에서 시장 참여자들에게 정책 방향에 대해 정보를 점진적으로나마 제시하고 그 과정에서 생기는 피해도 최소화하는 효과가 있다. 특히, 시장 참여자들의 암묵적, 명시적 합의를 얻은 사안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거기에 더해, 시장 참여자들의 유인구조가 사회의 유인구조와 반드시 일치한다는 보장도 없다.
자유시장에의 신념을 이론으로 만든 것이나 다름 없으며 자연주의적 혹은 도덕주의적 오류를 저지른다는 비판도 받는다.
자연스러운 시장, 자연스러운 가정을 강조하는 주장이 많은 것 때문인데, 심하게 말하면 18세기 유럽의 사회적 이상, 막스 베버가 말한 "프로테스탄트 윤리"(물론 오스트리아는 가톨릭 국가지만)에 가까운 복고노선을 현재까지 지향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실제로 적용하기 위한 경제이론으로써는 정치적인 설득력이 매우 약하다는 것 역시 문제점이다. 정부의 기능에 대한 모순적인 인식이나 인간의 본성 중 사회적인 면을 부정하는 성향이 커서, 특히 하이에크파는 이를 집산주의적인 본성이라고 비난하면서 강력한 법으로 억눌러야 한다고 주장했을 정도인데, 민주적인 정치체제 내에서 타협하거나 폭넓은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정책을 제시할 수도 만들 수도 없는 탓에 꽤나 극단적으로 엘리트주의를 지향할 수밖에 없다. 혹은 인간집단의 유연성을 과대평가하는 오류가 있다. 어느 쪽이든 끝내 현실 속에서 정치적인 생명력을 유지한 예가 없다. 하이에크를 찬양했던 대처의 정치적 말로를 보면, 혹은 피노체트의 예처럼 가히 폭압적인 정책이나 반민주적인 정권 하에서만 그나마 뭔가를 해볼 수 있었을 뿐, 민주적으로 대중을 설득한 예도 제대로 없을뿐더러 희소하게 정권을 잡아도 끝에 가서는 항상 정치적 지지를 잃고 실추되었다. 실제로 추진되었던 정책들도 결국 타협노선을 걸어야 했다. 심지어 경제학계 안에서조차 제대로 납득되지 못하고 그 안에 있는 일부 이론만 다른 학파에 활용되었을 뿐 오스트리아 학파 자체는 항상 비주류에 머물러 있으며, 오히려 비주류 경제학으로서 마르크스주의 등과 도매금으로 비난받는 경우가 더 많은 실정이다.
4.2. 반론
첫째, 오스트리아학파가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이유는 단순히 도덕주의적 측면은 아니다. 오스트리아학파가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이유는 크게 2가지가 있는데, 재산권과 경제적 측면이다. 그러나, 재산권에 대한 논증 또한 단순한 도덕주의적 측면이 아닌 논증윤리에 기초한 언어학적이고 객관적이며 중립적인 방식으로 재산권을 증명한다. 논증윤리란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자인 한스-헤르만 호페가 주장한 재산권에 대한 논증으로, 구체적으로 호페는 논쟁 과정에서 그 누구도 자신이 스스로 상정하고 있는 그 어떤 전제도 일관되게, 논리성을 갖추면서 부정할 수 없음을 지적한다. 그렇게 한다면, 그는 논리적 오류 중 하나인 수행모순을 범하는 것이고, 논리가 없으므로 설득력을 갖출 수 없다는 논증을 통해 재산권을 증명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경제학인데 이는 도덕성과는 거리가 멀다. 따라서 오스트리아학파는 단순히 도덕주의적인 측면에서 사회주의를 비판하지 않았다.
정부 규제 옹호에 대한 비판은 정부의 간섭은 대체로 시장의 특정 부분에서 이루어지는 경쟁을 제한하거나, 금지하는 방식이다. 이는 대안적 판매자의 가능성을 줄여버리거나, 특정 판매자에게 독점적 지위를 부과하는 경향을 보인다. 자유롭고 경쟁적인 시장에서는, 실망한 소비자가 공급자에게 “부정적 피드백”을 제공할 수 있다. 그러나 정부에게는 그런 피드백이 불가능하다. 정부가 잘못 공급했거나 규제했다고 명백하게 판단되는 상품을 어쩔 수 없이 계속 사용해야 할 수도 있다. 시장에서 소비자가 어떤 상품에 분노한다면, 누가 잘못 마케팅했으며, 누가 잘못 생산했는지의 책임 여부가 꽤 명백하다. 구입한 상품의 소비자 기만과 부적절한 허위 광고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소비자는 다소 쉽게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다층구조로 구성된 관료제와, 미궁처럼 복잡한 정치적 의사결정 구조로 인해 정부는 책임소재가 불분명하다. 이러한 환경은 정치 권력자에게 큰 이점으로 다가온다. 그들이 완전히 몰락했어야할 수준의 심각한 거짓말과 사기를 범하는 경우에도, 대중의 따가운 눈총으로부터 더 쉽게 숨을 수 있기 때문이다.논증은 ‘아무 맥락과 근거가 없는 명제(free-floating propositions)’로 구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희소한 수단(scarce means)’의 사용을 필요로 하는 행동의 한 형태이다. 그리고 한 개인이 논증이라는 ‘명제적 교환(propositional exchanges)에 참여함으로써 ‘입증(demonstrates)’하는 ‘선호(prefer)’가 곧 사유재산임이 나타난다. 첫째로, 만약 우리가 ‘자신의 물리적 신체(his physical body)’를 ‘독점적으로 이용할 권리(right to make exclusive use)’가 이미 전제되지 않았다면, 그 누구도 어떤 것도 제안할 수 없었을 것이며, ‘논쟁의 수단에 의해 제시된 어떤 명제(any proposition by argumentative means)’에도 확신할 수 없었을 것이다. 논쟁은 서로가 ‘자신의 신체(one’s own body)’에 대한 ‘상호 배타적 통제(mutually exclusive control)’를 ‘인정(recognition)’하는 행위로, 이는 말해진 명제에 대해서는 서로 의견이 다를 수 있지만, 적어도 ‘의견 차이가 존재하고 있다(at least on the fact that there is disagreement)’ 라는 사실 자체에 대해서는 언제나 동의가 가능하다는 ‘명제적 교환으로서의 논쟁의 특색(the distinctive character of propositional exchanges)’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다. 이로써, 어떤 ‘규범(norm)’을 정당화하려고 시도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소유권(property right to one’s own body, self-ownership)’이 ‘선험적(a priori)’으로 정당함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이 명백해졌다. 정말로, “나는 이러이러한 것을 제안한다.(I propose such and such.)”를 말하기 위해서는, ‘자기 신체에 대한 배타적 통제권(the exclusive right of control over his body)’이 ‘정당하다는 규범(a valid norm)’을 전제 했어야만 했다. 자기소유권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누구나 ‘실행모순(practical contradiction)’에 직면하게 된다. 그렇게 주장하는 그 순간, 그는 이미 반대하고자 했던 바로 그 규범, 자기소유권은 암시적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The Economics and Ethics of Private Property》, 한스헤르만 호페
또한, 오스트리아학파에서 단순히 정부의 실패가 시장에 대한 정보 부족만이라고 보지 않는다. 물론, 하이에크 계열의 오스트리아학파는 그런식으로 보긴 하지만, 하이에키언을 제외한 미제스 계열의 오스트리아학파는 정부의 개입 실패를 정보의 부족으로 보지 않는다. 바로 그 원인을 사유재산과 가격의 부재로 본다. 또한, 오스트리아학파 내에서도 하이에크의 이러한 견해는 여러가지 비판이 있고, 이 부분에 대해서는 견해가 갈린다.[2]
그리고 자유시장에 대한 신념을 이론으로 만든 것이나 다름 없으며 자연주의적 혹은 도덕주의적 오류를 저질렀다느니 객관이나 과학적 이유가 아니라 이념을 근거로 자유 시장을 운운했다느니 하는 비판은 오스트리아 학파의 입장에서 볼 때 완전한 오해이다. 미제스는 경제학의 가치중립성에 집착했다. 정치철학에 대한 책을 쓸 때나 자연권 같은 걸 운운하지 그걸 경제학에다가 끌어 붙이지는 않는다.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 이론은 선험적이며 연역적이고 논리에 근거한다. 오스트리아학파에는 이념을 위한 자리는 없다. 사실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은, 이론화를 위해 경험적 분석에 의존하는 다른 경제학파들보다 훨씬 덜 이념적이다. 왜냐하면 경험적 분석은 반드시 상당히 많은 해석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학파에 대한 이러한 비판이 실제로 의미하는 바는, 비판자가 일반적으로 "시장은 작동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자유시장에 대해 이념적이거나 감정적인 원한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자들은 그러한 규범적인 진술을 하지 않고, 오직 자유시장, 간섭주의, 그리고 완전한 중앙계획 하에서 경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규명함으로써) 설명한다. 이 중에서 더 나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가치판단은 물론 이론의 일부가 아니다. 다만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자들은 상정된 목적을 위한 수단이 적절한지 전문적으로 지적할 수 있다. 또한,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자들은 일단 자유시장(즉, 정부에 의해 방해받지 않는 행동과 상호작용)에 관한 적절한 이론들을 정립하고 나서야, 정부에 의한 규제나, 사람들의 선호의 변화와 같은 요소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주는지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우선 경제에 대한 어떤 외부적 영향이 없는 상황에서 경제가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먼저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그러한 요소들이 어떤 변화를 주는지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에서는 인간의 사회적 측면에 대해서 부정하지 않는다. 이 또한 흔한 오해인데 사람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과 서로 배우고 협조하고 교류하며 살아왔다. 중요한 부분은 주변으로부터의 어떤 영향은 받고 받지 않을지, 혹은 다른 사람을 도울지 않을지에 대한 최종 선택은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다. 즉, 사회적 측면을 거부하는 것과 사회적 측면을 강제하는 행동에 대해서 거부한다는 점은 명백히 다른 행동이라는 것을 인지해야한다.
5. 학문의 현황
유명한 것은 하이에크의 오스트리아 학파다. 이걸로 군나르 뮈르달과 공동으로 노벨상까지 수상하였다. 젊었던 시절에 영국에서 케인즈와 대척점에 있었기도 했고.
6. 여담
'''"창조적 파괴"''', '''"기업가 정신"'''등을 내세운 조지프 슘페터는 "자본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에서 보듯 사회주의 체제 자체에 관심을 가졌으며, 결국 이 창조적 파괴로 자본주의는 자발적으로 사회주의로 이행될 것이라는 예측을 다루고 있다. 오스트리아 학파의 뵘바베르크의 제자였으나 슘페터는 실상 레옹 발라스의 일반균형이론에 기울어진 로잔 학파로 여겨진다.
한국에서는 대구대학교 전용덕 교수와 강원대학교 민경국 교수가 알려져 있다. 전용덕 교수는 고려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 미제스 연구소 학장을 지내고 있다. 민경국 교수는 전경련 산하의 자유경제원이나 재벌이 공동소유하고 있는 한국경제신문에서 많이 밀어주고 있다. 2000년대 이후 숫자상으로는 한국에서도 오스트리아 학파의 입지는 상당히 넓어지긴 했다.
"케인"이라는 링네임으로 유명한 프로레슬러이자 정치인 글렌 제이콥스가 오스트리아학파의 지지자이다.
7. 계보
학파의 비조들
관련 학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