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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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206년에 고르 왕조로부터 독립하여 델리를 수도를 삼아 북인도에서 세력을 키우게 되는 이슬람 왕조. 델리 술탄 왕조의 시초가 되는 왕조이다. 1290년, 할지족들에 의해 멸망한다. 향후 600년간 이어지게 될 북인도 이슬람 제국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역사상 중요하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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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리 술탄 왕조의 시초인 노예 왕조를 세운 쿠트브 우딘 아이바크는 원래 노예 출신으로 어린 시절에는 한 상인에 의해 길러지다 한 카디(법관; 우르두어로는 카지Qazi)에게 팔렸다. 그에 의해 아이바크는 행정 실무와 군사적인 훈련을 받게 되었다. 카디가 죽은 후 아이바크는 그의 아들에 의해 상인에게 팔렸고 그 상인은 그를 고르 왕조의 왕 무함마드에게 넘겼다. 무함마드에게 충성을 다한 덕분인지 아이바크는 왕의 신임을 얻게 되었고 1192년 타라인 전투 이후 델리에 남아 그 지역을 통치하게 되었다. 델리의 통치자가 된 후에도 무함마드의 명령에 따라 영토 확장을 계속했다. 이후 무함마드가 죽으면서 실질적으로 델리의 왕이나 다를바 없어진 아이바크는 고르 왕조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델리 술탄 왕조를 성립시켰다.
당시 가즈니의 얄두즈는 욕심이 많아 아이바크의 델리까지 넘보았다. 결국 얄두즈는 델리의 지배권을 주장하며 펀자브 지역으로 침공을 했지만 실패하고 오히려 역으로 수도 가즈니를 빼앗기게 되었다. 이대로 아이바크가 가즈니를 통치하나 싶었지만 당시 주민들은 이에 반발했고 얄두즈에게 협력하여 아이바크를 공격했다. 결국 아이바크는 가즈니에서 물러나 인도에 있는 자신의 본거지로 돌아가게 되었다.
델리에 독자적인 이슬람 정권을 세웠던 아이바크는 종교에도 매우 열성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델리와 아지메르에 모스크를 세워 자신의 종교적 열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재위 4년만에 아이바크는 라호르에서 차웅가[1] 를 하다, 낙마했는데 이때 입은 부상으로 사망했다. 참고로 다음 술탄은 알람 샤가 즉위했는데 원래 아이바크는 딸 3명밖에 없어 그가 터키계 귀족들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2] 근데 이 알람 샤 술탄은 왕국을 다스릴 만한 자질이 부족했다. 그래서 터키계 귀족들은 다른 왕을 뽑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샴스 우딘 일투트미쉬를 천거하고 자신들의 술탄이 되어달라고 요청했다. 이는 당시 투르크인들에게 있어 왕위 계승에 관한 일정한 법률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 대부분은 족장이나 귀족들의 의견 혹은 상황의 위급함의 정도에 따라 왕이나 그 지도자를 결정하는 편이었다.
귀족들의 요청에 응한 샴스 우딘 일투트미쉬는 1212년 군대를 이끌고 델리로 향했다. 주드 평원에서 그는 알람 샤를 무찌르고 공식적으로 술탄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신드 지역에서는 나시룻딘 콰바차가 스스로 통치자임을 선언하는 등 여러 지역에서 내분이 발생했다. 하지만 일투트미쉬는 이런 반란들을 제압하며 무사히 극복했다. 1229년 일투트미쉬는 바그다드의 아바스 왕조 칼리파로부터 정식으로 술탄의 칭호를 받았다.
일투트미쉬가 델리 술탄 왕조의 기반을 튼튼하게 만들고 있을 당시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위세를 펼치고 있던 호라즘이 가즈니를 점령하고 인더스 지역으로의 진출을 꾀했다. 하지만 일투트미쉬가 병사를 이끌고 라호르로 달려가 이를 바로 물리쳤다. 그 후 호라즘은 몽골 제국에게 패망하는데 이 몽골인들의 세력 확장은 일투트미쉬에게도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그 외 데바 왕조나 세나 왕조 등 동쪽 지역의 힌두교계열 왕국들과도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일투트미쉬의 뒤를 이어 술탄이 된 사람은 놀랍게도 여성인 라지야 술타나[3] 이었다. 참고로 일투트미쉬에게는 그녀 말고도 다른 자식들이 있었다. 물론 그중에 아들들도 있었는데 일투트미쉬의 맘에 드는 아들은 나시룻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시룻딘은 나이가 너무 어렸기에 그는 딸이지만 매우 총명하고 자비로운 마음을 가졌던 라지야에게 왕위를 물려줬다. 하지만 역시나 귀족들의 반발은 강했다. 거기다 그녀의 오빠들도 이를 인정하지 못하였고 노골적으로 술탄 자리를 노렸다. 귀족들이나 다른 왕족들 뿐만 아니라 무슬림 사제들의 반발심도 매우 컸다. 결국 라지야 술타나는 안타깝게도 겨우 재위 4년만에 암살당했다.
라지야가 죽은 뒤에 터키계 귀족들은 서로 왕위를 노리고 다투기 시작했다. 이 왕위 다툼은 1246년 원래 일투트미쉬가 점찍어 놓았던 아들 나시룻딘 마흐무드가 재상인 발반의 도움으로 끝을 맺게 되었다. 하지만 재상 발반의 야욕도 상당히 만만치 않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세력을 점차 강화시켜 나갔다. 그러나 당시 귀족들의 반발심이 매우 강해 발반은 어쩔 수없이 당장은 물러나게 된다. 하지만 펀자브 지방으로부터의 몽골세력의 위협은 나시룻딘에게 큰 근심거리로 작용했다. 이에 나시룻딘은 물러났던 발반을 다시 왕궁으로 물러들이게 되었다. 발반은 술탄의 무한한 신뢰를 받아나갔고 기존에 자신을 반대했던 정적들을 제거해나갔다.
1266년, 나시룻딘 술탄이 사망하면서 발반은 자신이 직접 술탄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이전의 치욕을 생각했고 귀족들 특히 인도계 귀족들을 경계했으며 이들을 절대 중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터키계를 제외한 다른 민족들을 차별하기 시작했다. 이는 결국 나중에 큰 문제점을 가져오게 되었고 노예 왕조를 멸망시키는 직접적인 요인이 되었다.
발반이 죽고 나서 델리의 귀족들 사이에 큰 분쟁이 일어났다. 본디 발반은 자신의 큰아들 무함마드를 후계자로 삼았었는데 그는 몽골 제국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래서 터키계 귀족들은 둘째 부그라 칸을 후계자로 지목했다. 하지만 당시 벵골과 비하르 지역을 통치하던 부그라 칸은 술탄 자리에 관심이 없어 이를 거절했다. 귀족들은 이에 당황하게 되었고 발반의 손자 카이카바드를 술탄에 즉위시켰다. 하지만 그는 어렸기에 왕위에는 적합하지 않았고 결국은 할지족들의 반발이 일어났다. 할지족의 수장 잘랄 웃딘 할지가 반란을 일으켜 노예 왕조를 멸망시키고, 할지 왕조를 건국했다.
3. 역대 국왕
- 1대 쿠트브 우딘 아이바크 ( 1206년 ~ 1210년)
- 2대 알람 샤 (1210년 ~ 1211년)
- 3대 샴스 우딘 일투트미쉬 (1211년 ~ 1236년)
- 4대 라지야 알딘 (1236년 ~ 1240년)
- 5대 무이즈 우딘 바흐람 (1240년 ~ 1242년)
- 6대 알라우딘 마수드 ( 1242년 ~ 1246년)
- 7대 나시룻딘 마흐무드 (1246년 ~ 1266년)
- 8대 기야스 우딘 발반 (1266년 ~ 1287년)
- 9대 무이즈 우딘 무함마드 카이카바드 (1287년 ~ 129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