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종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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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신
尹鍾信 | Yoon Jong Shin
예명/가명
신경필[1], 탁영[2], 풍운아[3]
출생
1969년 10월 15일 (54세)
[image] 경상남도 진해시[4]
국적
[image] 대한민국
본관
칠원 윤씨[5]
신체
168cm[6], 60kg, A형
가족
父 윤광석[7], 母 송순덕[8], 2남 중 장남
배우자
전미라(2006 결혼 ~ 현재)[9][10]
자녀
아들 윤라익(2007년 11월 12일생)
딸 윤라임(2009년 9월 14일생)
딸 윤라오(2010년 12월 13일생)
종교
개신교(예장통합)[11]
학력
서울광장초등학교 (졸업)
대원국제중학교 (졸업)
대원외국어고등학교 (스페인어과 / 졸업)
연세대학교 미래캠퍼스 (국어국문학 / 학사)
소속사
미스틱스토리 (대표 프로듀서)
그룹
신치림, Team89[12]
데뷔
1990년 7월 15일[13]
015B 정규 1집 〈텅빈 거리에서〉 객원보컬
장르
발라드, 팝, 어덜트 컨템포러리
악기
보컬, 기타
별명
종신옹, 예능계 늦둥이, 윤자기[14], 음악왕, 깐족종신, 보급형 정우성, 만년대리[15], 정두홍, 윰, 다산(多産) 윤종신, 윤종심
링크
月刊 尹鍾信
1. 개요
2. 생애
3. 음악가 윤종신
3.1. 보컬
3.2. 작사
3.3. 작곡
3.4. 프로듀싱
4. 음악 활동
4.1. 1990년대
4.2. 2000년대
4.3. 2010년대
4.3.1. 2010~2016년
4.3.2. 2017년
4.3.2.1. 좋니의 역주행
4.3.3. 2018년
4.3.4. 2019년
4.3.5. 2020년
5. 방송 활동
5.1. 예능
5.1.1. 2000년대
5.1.2. 2010년대 이후
5.2. 오디션 심사위원
5.3. 연기
5.4. 라디오 DJ 활동
6. 수상 내역
7. 저서
9.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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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뮤지션이자 방송인, 미스틱스토리프로듀서.

2. 생애


1969년 10월 15일 경상남도 진해에서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주 어릴 때 잠깐 살다가 5살 무렵 서울 광진구로 상경, 그 뒤 대원 외국어학교[16] 스페인어과를 졸업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터보라는 이름의 스쿨밴드를 했다. 이후 연세대학교 미래캠퍼스 국어국문학과 88학번으로 입학 후[17] '소리를 창조하는 사람들'이라는 음악 동아리에 가입하며 음악에 대한 꿈을 키우게 되었다.
본래 음악을 좋아하여 노래나 작곡을 취미로 하긴 했지만 사실 진짜 꿈이 가수, 작곡가는 아니어서 진지하게 노력했던 건 아닌데 우연히 교내 가요제에 참가했다가 수상 후 운이 좋아서 데뷔한 케이스라고 한다.[18] 만약 자신이 신학과에 합격했다면 목사가 되고, 가수가 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컸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리고 자신의 음악 스타일에도 찬송가의 영향이 크다고도 하는데, 어릴 적부터 기독교 음악을 많이 접한 탓이라고 한다.[19] 미래캠퍼스 홍보비디오에도 나왔고, 과거 라디오에서도 '미래캠퍼스에 다닐 때 크고 아름다운 호수가 있었다'는 등 대학 시절의 이야기를 이따금씩 했다.
연세대 미래캠퍼스 가요제에서 금상으로 입상한 이후, 과 동기로부터 정석원을 소개받았다. 정석원은 친구의 아파트에서 윤종신의 노래를 듣고 015B의 객원보컬로 픽업했다. 이 때 장호일이 반대했다고 한다. 이유는 비주얼. 그래도 보컬이 밴드의 얼굴인데... 가창력만으로 승부한 데뷔였던 셈이다. 그런데 윤종신이 특유의 친화력으로 정석원의 마음을 얻었고, 둘이 급격히 친해지면서 장호일로서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1990년 7월 15일, 015B의 데뷔 앨범이 발매되면서 윤종신도 가수로서 데뷔하였다. 같은 해에 데뷔한 신승훈(11월 1일), 윤상(11월 30일)보다도 날짜가 빨랐다. 종종 "나 노태우 대통령 때 데뷔했어! 심지어 걸프전보다도 전이야!"라는 드립을 친다.[20] 이후 5집을 제외하고 015B 6집까지 계속 객원보컬로 참여하였다.
이듬해 1991년 솔로 1집을 냈다. 1990년대 중반까지 너의 결혼식, 오래전 그날, 환생 등 독자적으로 적잖은 히트를 기록했다. 정규 4집부터는 작사, 작곡뿐만 아니라 프로듀싱도 겸하였고, 5집부터는 작품주의 싱어송라이터로 완연히 거듭났다. 객원보컬로 시작하여 프로 작곡가, 작사가로 인정받은 것은 대한민국 음악 역사상 윤종신이 유일하다. 커리어적으로 발라드계에서 입지전적인 케이스다.
1998년 제대 이후 IMF와 음반시장의 침체로 7, 8집이 망하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이때부터 영화와 예능에 손을 뻗치기 시작하였다. 2000년대 초, 여러 편의 영화 OST를 프로듀싱하며 카메오로 출연, 이후 2004년 논스톱 등에 출연하며 연기자로서도 활동의 스펙트럼을 넓혔다. 이 시기에도 (2001년) 9집 타이틀 팥빙수라는 불멸의 여름 시즌송이 히트하기도 했다. 2000년대 중반부터는 라디오 스타, 패밀리가 떴다, 나는 가수다 등 굴지의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예능 늦둥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사실 윤종신은 90년대부터 라디오 DJ로 활약하며 입담과 예능감을 뽐내 왔기에 예능인으로서의 활약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2008년, 정규 11집 <동네 한 바퀴>를 발매하였지만 철저히 외면당했다.
2006년, 9세 연하의 前 테니스 선수인 전미라와 결혼했다.[21] 힐을 안 신어도 전미라가 더 크다[22]... 슬하에 1남 2녀를 두고 있다. 이름은 윤라익(아들), 윤라임(딸), 윤라오(딸). 전미라의 이름 끝 글자를 돌림자로 썼다고 한다. 막내딸은 전미라를 거의 빼다 박은 수준으로 닮았다.
2010년대, 윤종신은 발군의 시간관리능력을 보여주며 음악가, 예능인, 연예기획자의 세 직업 분야에서 두루 성과를 냈다.
  • 첫째, 윤종신의 음악 커리어는 2010년대에 이르러 그 꽃을 피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10년 5월, 매달 1곡 이상을 발매하는 음악적 실험인 월간 윤종신 프로젝트를 시작하였다. 월간 윤종신은 본능적으로, 막걸리나, 오르막길, 탈진 등 수많은 히트곡을 만들어내며 음악가로서 윤종신을 널리 알렸다. 특히, 2017년 6월 발매한 싱글곡 좋니가 대히트하며 데뷔 27년만에 지상파 1위를 하는 쾌거도 이루었다. 2000년대에 비해 창법도 훨씬 안정적으로 변했다. 2020년 현재 무려 20집 가수이다.
  • 둘째, 예능인으로서 윤종신은 라디오 스타의 장수에 힘입어 지상파뿐만 아니라 케이블 및 종편에서도 메인MC로 종횡무진 활약했다. 2000년대 중반의 깐족 이미지를 탈피하고 진중하고 매끄러운 진행 능력을 보여주었다.
  • 마지막으로, 윤종신은 2010년 자신이 속했던 1인기획사 신스타운을 확장하여 미스틱89라는 기획사를 세워 자신의 옛 동료인 조정치, 김연우, 하림 등은 물론 투개월, 박재정, 박지윤, 퓨어킴 등 특색 있는 뮤지션들을 모아 앨범을 프로듀싱했다. 이후 미스틱89는 김영철, 아나운서 박지윤 등의 방송인도 매니징함은 물론 가족액터스와 인수합병하며 명실상부한 종합 연예기획사로 거듭났고, 회사명도 미스틱엔터테인먼트로 바뀌었다. 결국 무려 SM의 자회사로 인수되었고, 사명도 미스틱스토리로 바뀌었다. 인수 이후 윤종신은 회사 경영에서는 물러났으나, 대표 프로듀서 직을 맡으며 소속사의 음악활동에 대해서는 전권을 가지고 활동했다.
2019년 6월 4일 방송 활동을 잠정 중단한다고 선언했고, 차츰 여러 방송에서 하차했다. 2019년 10월 해외로 출국하였으며, 11월부터 '이방인 프로젝트'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후 2021년 3월까지 해외에서 휴식하면서 월간 윤종신 등 다양한 콘텐츠 제작에만 매진할 예정이다.[23]
2020년부로 데뷔 만 30년을 맞았다. 그러나 코로나 여파와 '이방인 프로젝트'로 인해 기념활동 가능성은 미지수...
놀면 뭐하니?를 통해 결국 귀국했음이 확인되었다. 본래는 정말로 이방인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해외에서 지내려고 했지만, 코로나 사태와 모친의 위독으로 인해 그 프로젝트를 연기하고서 귀국했다고.

3. 음악가 윤종신


상술하였듯, 윤종신은 015B의 객원보컬에서 시작한 뒤에 작곡, 작사, 프로듀싱 능력을 갖추었다.
2013년 음악취향Y라는 웹진에서 발라드 베스트 100곡을 뽑았는데 총 7곡에 참여하여 이문세, 유재하, 이승환, 신승훈, 김동률, 김형석 등 내로라하는 80~90년대 뮤지션을 능가하여 최다 노미네이트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여러 분야에서 각각 골고루 차트에 올린 것도 주시해볼 만하다. [24]
  • 보컬(015B 객원보컬): 텅 빈 거리에서 (2위), 우리 이렇게 스쳐보내면 (64위)
  • 자작곡: 너에게 간다 (24위), 처음 만날 때처럼 (65위)
  • 작곡/작사: 거리에서(성시경) (15위), 넌 감동이었어(성시경) (91위)
  • 작사: 이별택시(김연우) (96위)

3.1. 보컬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유행하는 창법은 풍부한 성량과 감정을 담아내는 호소력 있는 보컬인데, 윤종신의 목소리는 그와 정반대로 깔끔한 발음과 발성이 특징이다. 그래서 담백하면서도 절절하게 감정이 묻어나는 편이다. 가사 전달력은 국내 최고다.
이는 윤종신의 가사와 맞물려 더 큰 감정 동요를 일으킨다. 이별하고 미쳐 죽을 것 같은데 그걸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담백하게 부르니 앞에서는 담담하게 얘기해도 속은 썩어들어가는 이별한 남자의 정서를 극대화시키는 효과가 있다. '너의 결혼식'에서 절규하듯 부르던 시절의 보컬 스타일과 비교하면 감정을 조금 누르고 절제시킴으로써 더 애절하게 만드는 스타일.
하지만 모든 노래를 담담하게만 부르는 것은 아니다. 윤종신이 지르는 노래들은 대개 히트하는 경향이 있다. 가깝게는 '좋니'부터, '너의 결혼식', '부디', '몬스터', '오르막길', '1월부터 6월까지' 등.
국문과 출신이라 그런지 발음을 굉장히 중요시 여긴다. 한국어에 서툴렀던 박정현의 1집 프로듀서가 윤종신이었는데, 그때 박정현의 한국어 발음이 많이 나아져서 지금도 감사하다고 한다. 성시경, 유희열, 정준일 등의 동료 가수나 라디오 스타 MC들이 윤종신의 또박또박한 발음을 자주 디스했다. 2014년 4월 9일라디오 스타에서 정준일이 말한 "종신이형 창법은 중국 노래 같다."라는 내용을 보면 된다. 나~ 언~ 을~ 나는~
모 예능에 의하면 라틴 계열 발성에 잘 어울린다고. 하여간 여러모로 특이한 보컬. 뽕끼도 있어서 트로트도 잘 한다. '사랑의 뒷북'이라는 트로트 싱글을 낸 적이 있다.
데뷔 당시 윤종신은 옥구슬같은 미성을 자랑했다. 그러나 솔로 1집(1991년)~2집(1992년) 사이에 맑은 음색이 사라지고 목소리가 굵어졌다. 3집에서는 명확히 달라진 게 느껴진다. 그러다 4집(1995년) 전후로 [25] 목소리가 급격히 탁해지더니 목소리 자체가 바뀌어버렸다!! 당장 1999년에 나온 <후반> 때 목소리와 2001년 9집 <그늘>을 연달아 들어보면, 그 2년 사이에도 많이 달라져 있다. [26]
당시 같이 미성으로 이름을 날렸던 신승훈도 그의 목소리가 너무 변했다며 안타까워했다. 이승환의 증언에 의하면 자신이 아는 가수 중 가장 단기간에 가장 많이 목소리가 변한 가수라고. 이 목소리 변화는 위에서도 말했듯, 어느 날 갑자기 확 바뀐게 아니라, 몇 년에 걸쳐 미성이 사라지고 탁성이 나타나는 등 단계적으로 진행되었다. [27]
2001년 9집 <그늘> 이후에는 잦은 흡연 + 음주의 영향으로 발성이 더욱 나빠졌고, 2002년~2003년 사이에는 조금만 음을 올려도 목소리가 갈라지고 가래가 낄 정도로 목소리가 나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2001년과 2005년 사이에는 정규앨범은 내지 않고 OST 제작, 타 가수 음반 제작에만 참여하였다. OST 중에도 윤종신이 부른 <밤차>나 <어느 예비군의 편지>를 들어보면 탁하디 탁한 윤종신의 발성을 확인할 수 있다.
2005년 10집~2008년 11집 당시에는 성대가 온전히 닫히지 않고 바람이 많이 들어가는 소리를 낸다.[28] 11집 발매 직후 출연한 수요일 밤 MBC의 음악프로 음악여행 라라라에서 본인의 옛 노래들을 매우 힘들게 부르더니, SBS의 음악프로그램인 김정은의 초콜릿에서는 7집 타이틀곡 '배웅'을 부르다가 가래가 낀 듯한 목소리를 잠시 냈다. 그래도 3옥타브 도까지는 올렸다.[29] [30]
윤종신 본인에 따르면 잦은 음주흡연으로 인해 목소리가 변했다고 한다. 가수들 사이에서 말술로 유명하다. 라디오 DJ로 활동하던 시절 밤 늦게 술 마신 얘기를 자주 했다. 헤비 스모커로도 유명했다. 그러다 한 번 쓰러지고 크론병을 앓은 이후로는 술과 담배를 많이 줄였고, 담배는 거의 끊었다. 테니스를 통해서 몸은 오히려 좋아졌다고. [31] 금연쏭이라는 제목의 싱글도 냈었다.
그 결과 2010년대 들어 윤종신은 보란듯이 성대를 갈아끼우는데... 2010년 이후 절주, 금연하면서 가창력이 확연히 좋아졌다. 2009년~2010년 한 해만에 가창력이 확연히 달라졌다. 2010년대 후반 들어서는 고음역대의 발성이 엄청 단단해졌다. 나이가 무색하게 짱짱한 고음을 뽑아내는 중. 2016년 6월 월간 윤종신 의미 없다에서의 최고음은 3옥타브 레. 물론 반가성 느낌의 샤우팅 발성이고, 저 노래를 라이브 무대에서 부를 가능성은 낮지만 이걸로 리즈 갱신은 확정. <좋니>로 활동하면서도 한 번도 무대 실수 없이 2옥타브 시를 어렵지 않게 냈다.
2010년대의 라이브가 2000년대보다 훨씬 듣기 좋다. 예를 들어, 2002년 윤도현의 러브레터에서 키를 낮추고도 겨우겨우 불렀던 담배 한 모금을 2015년 작사가 콘서트에서는 원키로 가뿐히 부른다. [32]
다만 깨끗하고 얇은 가성은 이제 더이상 나지 않는 듯. 데뷔 초에는 무려 3옥타브 라까지 올라가던[33] 청명한 가성을 더는 들을 수 없다. 좋니 라이브영상들에서 3옥타브 레#(D#5) 가성을 거칠게 낸다. 원래 가성이란 게 성대에 상처가 많이 나 있을수록 바람빠진 소리가 나기 때문에... 가성을 내면 소리가 상당히 거칠다. 그 대신 그때보다는 중저음이 훨씬 탄탄해졌다.

미성이었던 흔적이 있다 보니 윤종신의 음역은 절대 낮지 않다. 2017년 히트한 "좋니"만 해도 진성으로 최고음이 2옥타브 라#(A#4)이다.

판타스틱 듀오에서의 '지친 하루' 라이브 영상. 5분 5초에 벨팅에 가까운 진성으로 3옥 레#을 낸다.
미성이 아예 사라진 건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 스페이스 공감에서 라이브로 부른 2017 월간 윤종신 6월호 <끝 무렵>을 들어보면 정확히 알 수 있는데 진성을 내다가 가성으로 넘어가는 곳에서 꽤 맑은 음색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라이브 보러가기. 음색 변화의 원인엔 음주, 흡연같은 관리 문제와 노화도 있겠지만[34] 본인이 의도한 것도 있는 듯하다.[35] 2013 월간 윤종신 Repair 프로젝트 9월호에서 부른 굿바이[36]에서 부드러운 창법을 보여주기도 한다.
고음 부분에서 특히 몸을 구부리며 반동을 이용하는 모습이 보인다. 실제로 반동이 있으면 고음을 낼 때 훨씬 더 강력하게 낼 수 있지만 실용음악적으로 권장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의 탄탄한 발성보다 예전의 불안하지만 애절한 목소리가 더 감정적으로 듣기 좋다는 의견도 있다.

3.2. 작사


작곡에서 윤종신을 그저 그렇게 평가하는 사람들도 작사만큼은 이견없이 그 수준을 인정하는 편. 역시 국문과 전공자답다. 윤종신의 작사에서는 인간 본성의 여러 모습을 대하는 그의 따뜻한 시선을 느낄 수 있다는 평.
디렉터스 컷에서 작사에 대해 윤종신 본인이 직접 얘기한 바로는 자기는 작사에는 잘하고 못하는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고. 물론 겸손의 의미로 한 말이며, 옆에서 하림이 '근데 형은 잘하잖아요'라고 바로 되받아쳤다. 가사도 굉장히 금방 쓴다고 하며, 믿거나 말거나지만 거리에서도 2절 가사가 없었는데 즉석에서 만들어줬다고 한다.
발라드 가사에 잘 등장하지 않는 의외의 상황이나 주제를 묘사하는 생활밀착형 가사를 자주 쓴다. 노래의 화자는 대개 찌질하고 볼품없는 남자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37][38] 그래서 사랑이나 이별을 주제로 한 작사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윤종신 특유의 '한끗'이 있는 표현, 혹은 하이퍼리얼리즘적 표현으로 가슴을 절절하게 하는 경우가 많은 편. 가사를 다 쓰고 나면 가수들에게 가사를 보여주며 '여기 이 표현은 앨범 몇 장짜리, 이 표현은 몇 장짜리' 하는 식으로 포인트를 짚어준다고... [39]
EBS 공감에서 김연우는 이별택시를 소개하면서 발라드에 감히 넣을 수 없는 '아저씨' 라는 단어를 넣어서 녹음실에서 유희열과 함께 미쳤냐고 했다는 에피소드를 언급했다.[40] '~기에'라는 표현을 작사에 자주 이용하는 듯. '-ㄴ다'를 가사에 쓰는 몇 안 되는 사람이라고 성시경이 언급한 적이 있다.[41]
박정현은 한국에 와서 윤종신이 작사한 '오랜만에'를 사전을 찾아가며 의미를 해석했고, 의미를 알게 된 후엔 가사가 너무 좋아서 '한국에도 작사를 시의 수준으로 해내는 사람이 있구나'하고 감탄했다고. 심지어 신사동호랭이같은 댄스 작곡가들에게도 작사가로는 존경받고 있는 롤 모델이라고 한다.
윤종신 작사, 이규호 작곡의 '팥빙수'는 가요사상 거의 전무후무한 요리 레시피를 가사로 쓴 것이라 개그소재 등으로 자주 애용된다. 어느 방송에서 가사를 어떻게 썼느냐는 질문에 "인터넷에서 팥빙수 레시피를 검색했다"고 밝혔다.[42] 본인 스스로 '대한민국 푸드송의 원조' 라고 주장했으나 별 근거는 없다.[43] 요즘은 예능용으로 자주 써먹는다. 박명수의 "바다의 왕자", 쿨의 "해변의 여인" 등과 함께 오래도록 깨지지 않을 여름의 레전드 곡이다.
2009년 무한도전의 '강변대로 듀엣 가요제'에 '영계백숙'을 작사/작곡하기 했다. 그 기세로 또 하나의 푸드송 "막걸리나"를 내놓았다(국순당이 부탁해서 만든 막걸리 로고송) 2013년에는 망고 쉐이크라는 노래도 냈다. [44] 2014년에는 '눈송이 빙수', 2015년에는 '쿠바 샌드위치'로 영계백숙에 이은 두번째 핫 푸드 송도 냈다. 그리고 아무도 기억을 못하지만, 박경림이 전대미문의 히트를 쳤던 곡 '착각의 늪'이 수록된 앨범 '박고테 프로젝트'에 '안녕 핫바'라는 푸드송을 수록하기도 했다. 당시엔 본격적인 예능인이 되기 전 시절이라 방송에서도 진지하게 작사작곡을 하는 모습만 비춰졌다.
2016년 이후에는 월간 윤종신 수록곡들을 통해 단순한 남녀간의 사랑과 이별을 제외한 다른 주제들도 자주 노래하는 편이다. 2017년 1월호 '세로'에서는 차트 줄세우기 위주의 음반계를, 2016년 12월호에서는 촛불정국을 노래했다. 중장년층, 혹은 나이든 뮤지션으로서의 심경도 자주 노래하는 것 같다. [45]
참고로, 윤종신의 디스코그라피에는 약 10년 주기로 본인의 나이를 노래한 곡이 몇 곡 있다. 관심 있는 위키러는 들어 보자.
  • 28살 : 나의 이십대 (6집, 1996년[46]) 링크
  • 37살 : 서른 너머... 집으로 가는 길 (10집, 2005년) 링크
  • 43살 : 나이 (13집, 2011년) 링크
  • 48살 : Old School (2016년) 링크
윤종신이 작사에 자주 이용하는 소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벽지무늬/천장: 아이유 - 벽지무늬 / 박재정 - 시력 / 신치림 - 굿나잇
  • 동네 및 거리: 윤종신 - 돌아오던 날, 동네 한 바퀴, 모처럼, 야경 / 성시경 - 거리에서 / 박정현 - 미아
  • 우연한 조우: 나윤권 - 미행, 뒷모습 / 이수영 - 스치듯 안녕
  • 요리 및 음식: 윤종신 - 팥빙수, 영계백숙, 쿠바 샌드위치, 막걸리나, Home Made, 눈송이 빙수, 망고쉐이크... / 박고테 - 안녕 핫바
  • 여행, 입/출국: 박재정 - 여권 / 하림 - 출국 / 윤종신 - 도착 (Vocal 박정현)
  • 독특한 장소 및 물건: 윤종신 - 수목원에서, 일년, 치과에서, 자유로 Sunset / 성시경 - 굿모닝
  • 계절: 윤종신 - 이별의 온도, 가을옷, 늦가을 (Vocal 규현), 12월, 바캉스 매니아, 결국 봄, Welcome summer
  • 헤어진 전날/당일/다음날: 윤종신 - 이별을 앞두고, 내일 할 일, 아침, 고요 / 김연우 - 이별택시 / 박정현 - 전야제 / 아이유 - 첫 이별 그날 밤
  • 치명적인 것 (독, 병 등): 김연우 - 해독제 / 윤종신 - 몬스터 / 하림 - 난치병 / 박정현 - 몽중인

3.3. 작곡


윤종신은 015B 객원 보컬 출신으로 솔로앨범을 낼때 작사/작곡까지 참여하면서 스스로의 노래를 만드는 싱어송라이터로 발전했다. 유영석은 싱어송라이터를 두 부류로 분류하는데 보컬에서 작편곡을 시작하면서 싱어송라이터가 되는 부류, 전문 작곡가가 보컬에 참여하면서 싱어송라이터가 되는 부류이다. 윤종신은 바로 전자에 해당된다.[47]
그런데 윤종신이 작사/작곡을 하는 싱어송라이터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전문적으로 편곡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곡이 전문 작곡가와의 공동 작곡이고 편곡을 맡긴 경우가 많다. 디렉터스컷 방송을 보면 음표도 잘 못 그린다. 이 때문에 편곡 및 채보를 위한 서포터가 필요한데, 이들이 윤종신의 음악노예들이다.
윤종신은 015B 시절 정석원을 만나면서 작사 작곡에 눈이 떴다고 술회했다. 화성학을 배운 적이 없다 보니 최초로 스스로 작사/작곡/프로듀싱한 4집 타이틀곡 '부디'를 처음 들은 정원영 밴드의 정원영이 "윤종신 이 자식 뭐하는 놈이지..."라고 농담으로 디스하기도 했다고... 출처
더불어 화성학을 공부하지 않은 덕분에 작곡을 할 때 틀에 박힌 코드에 얽매이지 않아 독특한 곡들을 많이 뽑을 수 있다며 이야기하기도한다.
한 엠팍커가 2011년에 분석한 윤종신의 작곡법
최근 방송에 노출되는 이야기에 따르면 곡을 쌓아 놓고, 집에 '고객상담용 모니터'가 있으며 폴더별로 나뉘어서 들려줄 정도로 공장장. 거기다 상당히 쿨한 성격이라 곡이 까여도 '마음에 안 드니? 그럼 이건?'라는 식이다. 메일 등을 이용해서도 노래를 무진장 가수들에게 뿌린다고 하는데, 성시경에게는 한 번에 9곡이 온적도 있다고.
대개 편곡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기 때문에 작곡 당시에는 본인이 직접 친 통기타 반주에 본인 목소리로 가이드를 넣는 것 같다. 다분히 옛날 방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요즘은 가이드 곡이라도 편곡이 상당부분 완성된 상태로 나가고, 가이드도 실력파 보컬들이 맡아서 모르는 사람들이 들으면 팝송으로 들릴 정도로 세련되게 다듬어진 상태로 가수들에게 전달된다. 디렉터스컷에서 전한 일화에 따르면, 한번은 윤종신이 이효리에게 곡을 주려고 기타로 반주를 치고 멜로디를 흥얼거려서 녹음한 뒤 메일로 보냈는데 거절당했다고 한다. 헌데 나중에 이효리가 자기한테 굉장히 세련된 팝송을 들려주길래 "야 이거 좋다. 누구 노래야?" 라고 물어봤더니 이효리에게 온 가이드 곡이었다나. 자기는 통기타를 쳐서 흥얼흥얼 녹음한 뒤 "나중에 편곡이 되면 여기에 이런 비트가 들어갈거야, 상상되니?" 하는 식인데 이효리가 받는 가이드 곡들은 이미 완성품 수준의 퀄리티를 가지고 있어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감성적인 멜로디와 감정을 억누르다 후반부의 폭발하는 전개로 좋아하는 사람들이 상당하다. 대표적인 곡이 "너에게 간다". 이런 노래들을 '매달' 국수 뽑듯 뽑아내고 있는 괴물.
최근 윤종신의 탈곡기에서 자신의 작사/작곡법을 공개하고 있다. 관심 있는 위키러들은 찾아보자.

3.4. 프로듀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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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신과 음악노예: 유희열, 조정치, 성시경, 박정현, 하림, 투개월(김예림, 도대윤) 순.[48][49]
윤종신의 프로듀싱 능력은 015B 시절 음악적 스승이었던, 그리고 솔로 1~3집을 프로듀싱해 준 정석원으로부터 배운 것이다. 스스로 프로듀싱한 것은 4집 '공존'부터.
유희열에 따르면 윤종신은 '뮤지션들이 휴지기를 가져야 음악이 나온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다고 한다. 즉, "녹음실 갈 때나 집 갈 때 생각나면 쓸 수도 있는 것. 그건 급하지 않아서 그렇다"라고 했다. 유희열은 "만년 대리"같다고 평했고, 성시경은 요즘 임원이 되어서 음악 노예들을 부려먹는다고 디스했다. 그도 그럴 것이 유희열은 윤종신의 음악노예 1호 수준이었다. 윤종신 특유의 부지런함을 느낄 수 있는 부분.[50]
"이별여행"으로 유명한 가수 원미연의 말에 따르면, 의외로 윤종신이 깐깐하다고 한다.
2000년대, 특히 2000년대 초반에는 윤종신 혼자 프로듀싱한 적도 많지만, 2010년대 이후에는 윤종신이 혼자 작사, 작곡, 편곡을 한 노래는 그리 많지 않다. 스스로도 자신이 화성학 지식이 있는 전문적인 작/편곡자가 아니기 때문에 아이디어나 멜로디는 자신이 만들고 그것을 곡으로 만드는 것은 조정치, 정지찬, 유희열, 정석원 등 전문가와 공동작업을 해 왔다.[51]
이들 중에 유명한 사람들이 소위 윤종신의 '음악노예'들인 유희열, 하림, 조정치. 셋 다 전문적으로 음악을 공부한 정통파들로 전부 윤종신이 발굴하다시피한 인물들이다. 윤종신이 방송에서 대놓고 "신치림은 진짜 천재다."라는 말을 했었다. 윤종신 본인도 방송에서 자기 자신은 천재가 아니지만 천재를 보는 안목은 있다고 자부했듯이 셋 모두 탁월한 능력을 가진 음악인들이다. 유희열은 군에서 제대한 후 정신을 못 차릴 때 낚아챘다고 하며 조정치는 세션으로 활동하던 시절에 김C를 통해 세션 기타로 추천받았다가 재능을 알아보고 데려왔으며 심지어 하림의 경우 해당 문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윤종신이 군 복무 시절에 알아보고 계약서를 쓰게 했다고 한다. 윤종신 본인은 이를 예능 소재로 써먹고는 있지만 본인의 한계점을 명확하게 인식한 뒤에 그 점을 보완하려고 재능 넘치는 원석들을 계속 발굴해서 성장시키며 가까이 두고, 서로 윈윈하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게다가 그들 모두 윤종신을 무시하기는 커녕 아직도 윤종신 앞에서는 꼼짝못한다는 것을 주목할만하다. '나는 천재를 다루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말한 윤종신의 말은 사실인 것. 특히 유희열은 이미지와 달리 의외로 청소년기에 폭력 사고도 쳐본 불량청소년 출신이었고 독립 후에 젊은 나이에도 윤종신을 압도하는 대중음악적 성과를 거둔 대작곡가임에도, 아직도 윤종신 앞에서는 약간 농담을 하는 게 전부일뿐 장난으로조차 함부로[52] 하지 않는다.[53] 그리고 가장 좋아하는 형님이라는 말도 (윤종신 앞에서) 한 적이 있다. 윤종신의 말로는 20년전에 세뇌된게 남아서라고 하나, 실제로는 그들도 자신의 리즈시절조차 윤종신의 프로듀싱 능력이 뛰어났다는걸 알고 있기 때문.
좋은 프로듀서가 아니라는 비판도 받았다. 윤종신 본인은 이 기사를 자신의 트위터리트윗 시켜놓았다.
2000년대 초반 이후로는 군대에서 알게 된 작/편곡가 이근호와 매우 자주 함께 작업한다. 인터뷰 참조. 거리에서, 넌 감동이었어, 시간, 지친 하루, 오르막길 등 2000년대와 2010년대를 걸쳐 이근호의 손을 거친 명곡이 상당히 많다. 알고보면 하림, 조정치 등에 버금가는 전속 어시스턴트. 이근호는 클래식 작곡에 능하여, 윤종신이 흥얼거리는 멜로디에 코드와 반주를 입히고 편곡을 하는 역할을 맡는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이근호씨는 2014년 창작동요대회 대상을 수상하였다. 동요뿐만 아니라 성가 등도 작곡하는 듯.[54]
그 외에도 임재범의 '통증', 배우 서현진이 활동했던 걸그룹인 밀크의 'Come To Me' & 'Wish'를 작/편곡하고, 나얼의 '같은 시간 속의 너' 및 '기억의 빈자리'를 편곡하였으며 조규만 & 조규찬 형제와도 작업한 바 있는 작곡가 강화성, 싱어송라이터 정지찬과도 자주 작업한다.
아가씨 OST인 '임이 오는 소리' 프로듀서를 맡았다. 편곡은 조정치.
2018년 들어서는 키보디스트 및 작곡가 송성경(미쓰송)과 함께하는 작업이 잦아졌다.

4. 음악 활동




4.1. 1990년대



1990년 7월 1일, 015B 1집의 객원 보컬로 데뷔했다. 노태우 재임할 때 데뷔했다는 걸 개그소재로 종종 써먹는다. 윤종신이 참여한 타이틀곡인 '텅 빈 거리에서'의 '야윈 두 손에 외로운 동전 두 개 뿐'이라는 가사가 공감을 샀고 앨범도 30만 장으로 크게 히트했다.
당시 윤종신의 목소리는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얇고 고운 미성이다. 당시 대중과 평단은 무공해 목소리라는 찬사를 내렸다.
1991년, 015B 객원보컬로서 높아진 지명도를 바탕으로 1집 앨범(TITLE : 처음 만날 때처럼)을 발표했다. 판매량 33만 장.
이후 015B에 지속적으로 참여하는 한편[55], 솔로 앨범에서도 많은 인기를 얻었다. 2집 'Sorrow'(TITLE : 너의 결혼식)[56] 때가 윤종신의 전성기로, 개그맨 박휘순이 윤종신의 팬이었다고 한다. 판매량 38만 장.
3집 'The Natural'(TITLE: 오래전 그날, 판매량 70만 장), 4집 '공존'(TITLE: 부디, 내사랑 못난이, 판매량 91만 장), 5집 ''(TITLE : 환생, 판매량 97만 장) 등등 윤종신 전기 음악의 대단원이라 할만큼 노래 각각의 완성도로 보나 앨범의 완성도와 짜임새로 보나 걸작이었다.
특히 5집의 경우 1996년 별들의 전쟁이라 불리는 스타급 가수들의 컴백 경쟁 속에서도 꾸준히 인기를 얻은 앨범으로 가요톱텐에서는 최고 4위, 인기가요 베스트 50에서는 3주 간 1위 후보에 올랐다. 입대하기 직전에 부랴부랴 냈던 6집(1996. 11)까지도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확실히 이 시기는 인기로 보나 히트곡의 중량감으로 보나 명실공히 대한민국 발라드판에서 거의 신승훈의 바로 아랫급 정도의 지위는 누렸다고 볼 수 있다. 이른바 무관의 제왕...
다만 음반 판매량은 역대 최고인 4집, 5집 모두 밀리언에 약간 못미친다. 밀리언셀러 대열에는 아깝게 합류하지 못했으나, 비공식 합산으로는 100만장을 넘긴 것으로 봐도 무방하다.
1996년 발매된 015B 6집의 "21세기 모노리스"를 '신경필'이라는 가명으로 불렀다.[57] 공식적으로 밝힌 적은 없지만, 팬들은 다 아는 사실이다. 당시 대영AV에 소속되어 있던 015B가 LG미디어로 옮기면서, 대영에 남아 있었던 윤종신이 대놓고 참여하기 어려워서 그랬다는 설이 있다.[58] 그 외에도 하림의 1집 앨범에서 '탁영'이라는 가명의 작사가로 활동한 적도 있다.
해군 연예병사 1기 출신으로 2함대가 평택으로 이전하던 때 부른 '바다로 세계로'라는 군가는 일반 가요라고 해도 믿을 만한 가사와 멜로디를 자랑한다.
-바다로 세계로- 작사 : 금나영 / 작곡 : 조만호 / 노래:윤종신
해군 홈페이지 mp3 다운로드 주소 링크. (다른 군가와의 괴리감이 엄청나다.)
군 복무 중 하림이라는 인물을 찾아 내기도 했으나, 정작 전역한 후에는 음악 시장이 완전히 재편되어 있었다. 1999년 1월 17일에 발표한 복귀 앨범인 7집 '후반'(TITLE : 배웅)은 평가가 괜찮았으나 이전에 거두었던 상업적 성공과는 거리가 멀었다. 자신만만해하며 거액을 투자하여 만들었는데, 흥행에 실패했다. 베스트앨범 격인 6집이 29만 장 팔렸는데 7집이 12만 장 팔렸으니 판매량이 거의 3분의 1로 준 것.
윤종신 본인도 거듭되는 성공에 취해 있다가 한 번 말아먹자 충격이 컸다고 한다. 게다가 판권 문제까지 걸렸다. 하지만 8집, 9집을 1년 주기로 계속 낸 것으로 보아 충격은 곧 가신 듯하다.
라스에서 본인이 밝힌 바로는, 그 당시 앨범도 망하고, 7집을 발표한 후 MBC에서 밤 10시에 맡았던 라디오 프로그램(윤종신의 자유지대)도 청취율이 개박살나는 등의 일이 일어나자 "내 연예인 운은 끝이구나" 하고 다른 일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친구와 노래방에 갔다가 "내 행복은 여기 있는데 왜 다른 걸 하려고 할까" 하면서 생각을 고쳐먹었다고 한다.

4.2. 2000년대


2000년 3월 8집 헤어진 사람들을 위한 지침서 발매. 당시 자신의 이별 경험을 토대로 작업했다. 그래서 가사 내용이 다소 흠좀무하다. 특히 후반부 곡들중 타이틀곡인 'Annie'의 주인공이 이영애가 아니냐는 루머가 퍼지기도 했다. 당시 둘은 SBS '아주 특별한 만남' 공동MC였다. 2008년 명랑히어로에서 장항준 감독이 애니가 '한양대 출신으로 눈이 크고 얌전하고 우아한 한류스타'라며 이영애를 연상케 하는 떡밥을 던졌다. 이에 대해 윤종신은 애니는 가상인물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둘 다 결혼함으로 인해 진실은 영원히 미궁 속으로...
2001년 여름 콘셉트 앨범인 9집 '그늘'을 내놓았다. 이규호가 작곡한 팥빙수가 들어간 앨범. 이한철 등의 동료 가수들이 호평했다. 2010년 백비트 김봉현과의 인터뷰에서 본인의 베스트 앨범으로 9집을 꼽은 바 있다.[59]
2001년 말 하림 1집을 프로듀싱하였다. 2002년~2003년 사이에 윤종신은 음악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방황하던 시기였다고 한다. 이때의 음악이 가장 날이 서 있고 날것의 감정을 싣고 있다고 한다. 이 기간 동안 세 편의 영화 OST를 제작했다. 작품명은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 불어라 봄바람, 라이터를 켜라. 영화의 흥행 여부를 떠나서 영화음악 프로듀서로서 호평을 받았다. 이때의 작업물 중 일부는 2015년 1월 'Melodies On Film'이라는 컴필레이션 앨범으로 재발매된다. 윤종신의 가장 와일드한 감정을 드러내는 시기의 노래들이다. 창법도 가장 거칠다.
2004년에는 하림 2집, 논스톱4 OST를 제작하고, 신라대학교 교가 '꿈 그리고 한 가지'를 작곡하였다. 보컬은 무려 김연우... 교가 치고는 굉장한 고퀄리티다.
2005년, 10집 Behind The Smile을 발매했다. 군 입대를 전후하여 윤종신 음악을 전기와 후기로 나눌 때, 후기를 대표하는 앨범. 90년대 초창기 솔로앨범들에 큰 도움을 준 음악적 스승 015B의 정석원, 그리고 7집 이후의 음악적 파트너인 하림과 함께 한 점이 특기할 만한 부분이다. 타이틀곡인 '너에게 간다'도 제법 히트하며, 매니아들과 대중을 두루 만족시킨 명반.
앞서 언급한 8~10집은 5집과 함께 윤종신을 대표하는 명반으로 평가된다. 평론가들은 대개 10집과 5집을 윤종신의 디스코그라피 중 으뜸으로 꼽는다. 참고로 한겨레에서 만든 음악웹진 백비트에서 선정한 2000년대 베스트 앨범 100에서 'Behind The Smile'(10집)이 51위, 1990년대 베스트 앨범 100에서 '우 (愚)'(5집)가 27위에 선정되었다
2008년, 오랜 공백을 깨고 11집 동네 한 바퀴를 내놓았다. 결혼 및 예능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이후 처음이고, 현재까지 마지막 정규앨범이다[60]. '동네 한 바퀴', '내일 할 일', '야경' 등 명곡이 다수 수록돼 있지만... 윤종신의 음방 활동의 존재감은 미미했고 라스명랑 히어로에서 김구라의 놀림거리로 전락했었다. 이후 음악과 예능의 병행을 고민하던 윤종신은 특유의 꾸준함을 활용, 몇 년에 한 번 정규앨범을 내놓던 기존 가수활동의 틀을 벗어나, 새로운 시도를 감행하게 되는데...

4.3. 2010년대




4.3.1. 2010~2016년


2010년 윤종신의 음악활동은 월간 윤종신 프로젝트로 요약될 수 있다. 이 프로젝트의 시작은 M.net에서 방영한 디렉터스 컷(Director's cut)이라는 프로그램인데, 당시 윤종신이 아끼는 인물들(하림, 조정치, 정지찬 등)이 많이 나왔었다. 디렉터스 컷에서는 출연진들이 특정 지역을 여행하면서, 윤종신이 미리 만들어둔 멜로디에 함께 가사를 붙였다. 여기서 만들어진 수많은 노래 중에 단 두 곡, '새로고침'과 '빈 고백'이 Director's Cut이라는 앨범으로 2010년 1월에 발매되었는데...
이를 시작으로 2010년 3월 25일, Monthly Project라는 이름의 싱글을 발표했다. 이후 2017년 현재까지 매달 곡 2~3개를 묶어 싱글 형태로 발매하는 중이다. 잡지처럼 표현하자면 2017년부로 벌써 통권 100호를 넘었다.
전혀 이윤이 남지 않을 듯한 프로젝트를 하는 이유에 대해 본인은 그때그때의 감정에 충실하여 곡을 만들고, 그것을 바로 표현하고 싶어서라고 답했다.[61] [62]
2010년 말에는 디렉터스 컷의 노래를 포함, 2010년 동안의 월간 윤종신의 싱글들을 엮은 '행보 2010 윤종신'을 내놓았다. 타이틀은 '이별의 온도'. 한 해 동안의 월간을 묶어서 행보로 내놓는 전통은 2017년까지 현재 진행형.
2010년 문제가 많던 기존의 소속사와 결별했고, 2011년 하림, 정석원 등과 함께 기획사 미스틱89를 설립했다.
2011년 10월에는 블루스퀘어 삼성카드홀 개관기념으로 'Just Melody'라는 제목의 콘서트를 열었다.
2012년에는 음악 후배인 하림과 조정치와 함께 신치림이라는 그룹을 결성했다.
2012년 10월에 발매된 손가인의 솔로 미니 앨범 2집 'Talk About S.'에 '시선'이란 곡으로 참여했다. 작사/작곡은 윤종신 본인이 하고 편곡만 POSTINO가 담당했다. 무려 가인과의 듀엣곡으로 가사가 비범하다. 사실 이 앨범 전체가 그런 컨셉이긴 하지만 사실 윤종신이 쓴 곡들치고 이런 느낌의 곡을 찾긴 힘든 편이다. 손가인유희열의 스케치북에서 밝히기로 윤종신 선배님에게 곡을 받는다고 했을 때 발라드를 기대하고 갔는데 점점 부르다보니 가사가 이상했다고 한다. 결국 듀엣곡이 음흉해졌다고 녹음 후일담을 밝히기도 했다.
결국 유희열의 스케치북 2012년 성탄특집에서 유희열까지 합세해 '시선'을 방송에서 불렀다. 포인트는 시종일관 진지한 표정으로 장미를 씹어먹을 듯한 윤종신과 무심히 피아노치며 코피 터지는 유희열. 그리고 손가인의 의상.
2013년에는 정말 오래간만에 가수 윤종신으로'' 연말 가요제에 참여해서 노래를 불렀다. 비록 소속가수인 김예림, 박지윤과 함께 나온 것이었지만, '본능적으로'를 끈적한 버전으로'''[63] 연말 가요제에서 부른 건 처음이다.
2014년, 네이버 뮤직 음악감상회에서 했던 라이브. '오래전 그날', '1월부터 6월까지'외 여러 곡을 불렀다. 젊은 시절 미성은 사라졌어도, 부드러워진 저음과 한층 더 깊이 있어진 감성으로 아직도 충분히 경쟁력 있는 좋은 가수임을 보여주는 라이브이다.
2014년, 게임 '회색도시2' OST에 참여하고 게임 내에도 특별출연하였다.
2015년, 작사가 윤종신 콘서트를, 2016년 작사가 윤종신 Part 2를 열었다. 작사가 윤종신 콘서트의 실황은 행보 2015에 함께 담겼다.

4.3.2. 20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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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Monthly Drips라는 이름의 530장 한정판 싸인 LP를 출반했다. 가격은 88,000원. 월간 윤종신에서 선정된 곡들이 수록. 독일에서 리마스터링했다고 한다. 30장은 윤종신의 지인에게 나눠주고, 100장은 오프라인 판매, 400장은 온라인에서 판매했다. 온라인 판매된 400장은 1시간 남짓만에 매진되었다.
2016년 이후 발매곡을 보면 대체로 대중성 있는 발라드 곡은 객원보컬(특히 미스틱 소속)에게 주고, 본인은 실험적인 곡이나 자신의 심경을 표현하는 노래에만 보컬로 참여하는 경향이 강하다. 발라드 가수 윤종신을 사랑하는 팬의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아쉬운 부분.
월간 앨범과 별개로 정규 12집 앨범을 준비 중인 듯. 시기는 미정이다..
박재정 싱글 '시력' 작사에 참여했다. 이별의 아픔을 흐릿해진 눈으로 비유한 것이 일품.
2017년 5월~6월 동안 명품 발라드를 네 곡이나 [64] 찍어냈다. 역시 다작의 대명사...
솔로 2집 시절부터 함께 작업해 온 사진작가 '안성진'과 2017년 6월~8월 27일까지 한남동 소재 '월간 윤종신' 스튜디오에서 사진전을 개최했다. 2집~10집 사이의 앨범아트워크 사진을 전시하고, 사진집 및 원본 필름도 판매했다. 인터뷰 영상 사진전이 9월 말까지로 연장되었다. 관심 있는 위키러는 방문해 보자.
9월 15일, 오랜만에 신치림의 이름으로 에디킴과 함께 신곡을 냈다. 미스틱의 음악 플랫폼 Listen의 열네 번째 곡으로, 곡명은 '지금'. 윤종신으로서는 '좋니'에 이어 두 번째 Listen 참여곡. 미스틱과 SM의 컬래버레이션 음악 예능 눈덩이 프로젝트의 마지막 미션인 '황혼'을 주제로 한 노래로,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하자는 메시지를 담은 서정적인 발라드이다. 작곡 하림, 작사 윤종신, 편곡 강화성의 완벽한 조합..
2017 전국투어 콘서트가 결정되었다. 콘서트명은 무려 윤종신 좋니? 링크 울산 (10월 28일)부터 순차적으로 일정 공개. 공연일정
라디오에서 본인이 밝힌 바로는 시리즈물이라고. 2017년은 '윤종신 좋니?' 2018년은 '윤종신 이래도 좋니?'.......
눈덩이 프로젝트에서 천만뷰 달성 공약으로 NCT의 Mad City 랩을 약속했다. 본인 왈 우리 회사에서는 그런 숫자를 본 적이 없다고. 천만뷰를 넘으면서 9월 24일 멜로디 포레스트 캠프에 출연하여 랩을 선보였다. 검정 마스크에 선글라스까지 착용했다.
https://youtu.be/_A2qhxVSobs
'좋니'에 이어 10월에 발표된 월간 윤종신 Special 곡인 '너를 찾아서'도 차트에서 선전하고 있다. 지니, 벅스, 소리바다 등에서 1위를 차지했다.
10월 12일 EBS 스페이스 공감에 출연했다. 박재정, 퍼센트, 장재인, 민서 등과 함께 출연. 여기서 부른 좋니 라이브가 역대급이라는 평가다.
박재정 싱글 '악역'을 작사했다.
월간 윤종신 11월호 '나는너' 는 오랜만에 이규호 작곡가와 함께 진행했다. 이규호와 윤종신의 만남은 언제나 옳습니다. 역시나 역대급 퀄리티로 팬들은 환호했으나.... 음원 공개 하루 전날 올린 기사 한개가 홍보의 전부였다.
11월 13일, 이규호 콘서트 'kyo_몰린'에 게스트로 참여했다.

2017년 11월 14일 발매된, 015B의 새로운 싱글 <015B Anthology Part 2>에 참여했다. 015B의 원년 멤버였던 그였기에 정말 오랜만의 귀환이라 할 수 있을 정도. 제목은 <엄마가 많이 아파요>.
실제로 015B 멤버들의 어머니가 2013년 암으로 세상을 뜨면서, 2014년에 만들었던 곡인데 발표를 하고 있지 않다가, 2017년에 새롭게 작업을 한 곡이다. 곡이 곡인지라 심금을 울리는 노래 내용과 가사가 일품이다. 실제로 10월 27일, 015B 'Homecoming' 콘서트에서 게스트로 참가한 윤종신이 이 노래를 부르다가 울기도 했다. 윤종신의 요청으로 앵콜에서 다시 불렀으나.... 또 울었다. 멤버들의 어머니와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이이기도 하고 본인의 어머니도 요양원에 계시는만큼 감정이입이 된듯하다. 유투브에 직캠영상이 떠있으니 관심있는 위키러들을 찾아보기를 권한다.

4.3.2.1. 좋니의 역주행

음악성과 노래방이 만들어 낸 역주행, 그리고 데뷔 27년 만의 첫 음악 방송 1위.
음악가인 그에게 2017년을 최고의 한 해로 만들어 준 노래.


4.3.3. 2018년


2017년에 이어 전국투어 콘서트 '윤종신 좋니?'를 진행한다.
국내에 1월에 개봉한 디즈니 애니메이션 코코의 주제가 Remember Me[65] 한국어 더빙판을 담당해 불렀으며 좋은 반응을 얻었다.
5월에는 송성경 작곡가와 함께 MBC 브랜드송을 작곡했다.
7월에는 월간 윤종신 100호 기념 300장 한정 티셔츠를 판매했다.
'계절은 너에게 배웠어'라는 가사 수필집을 발간했고, 동명의 전국투어를 개최한다.
10월 13~14일, '부르지 않은 노래' 라는 제목으로 여태껏 라이브한적 없는 노래만 모은 콘서트를 열었다. 7집 루시, 6집 나의 이십대 등 숨겨진 명곡뿐만 아니라 심지어 2집 귀퉁이에 박혀있는 '이세상에 가장 외로운 너' 같은 올드팬조차도 생소할 수 있는 노래로 셋리스트가 메워져있어 골수팬들에게는 여러모로 뜻깊은 사건. 뿐만 아니라 공연 실황은 2018년 행보 앨범에 실렸다! 또, 비슷한 컨셉의 공연을 앞으로도 계속할 예정이라고.

4.3.4. 2019년


1월 11일, 행보 2018 앨범을 발매했다. 이와 함께, 부르지 않은 노래 라이브 실황 영상이 유튜브 채널에 하루에 한 곡씩 공개되었다.
3월부터 빈폴과 제휴하여 30이라는 숫자를 컨셉으로 여러 가수와 함께 월간 윤종신의 부록을 발매한다. 우선 3월달에는 윤종신이 대표주자로 이라는 제목의 곡을 내놓았다.
월간 윤종신 관련 LP를 또 내놓을 예정이라고 한다.
이방인 프로젝트로 명명한 작업을 위해 방송 활동을 정리하고 10월 중 해외로 떠날 것임을 밝혔다.

4.3.5. 2020년


해외에서 월간 윤종신을 내놓고 있다.
종종 월간윤종신 유튜브 채널에 뜬금 LIVE 영상을 올리고 있다. 링크
7월 초순 코로나 사태로 인한 락다운, 그리고 모친의 건강 악화로 인한 간병을 위해 다시 귀국하였다.
그리고 9월 3일 결국 모친이 향년 85세의 일기로 끝내 별세하였다.
12월 12일 놀면 뭐하니?에 출연하며 오랜만에 TV에 모습을 비췄다.
2021년에는 월간윤종신을 그동안 불러왔던 음악, 작사 작곡한 음악들을 새롭게 편곡하는 REPAIR 형식으로 발매한다고 한다.
그리고 가을무렵 정규앨범 형식으로 12집을 발매할 계획이라고 SNS에 밝혔다.

5. 방송 활동


윤종신 역대급 드립 TOP 7
윤종신의 드립 대표적인 예
깐족 컨셉으로 장수하는 예능인으로, 오히려 2010년대 어린 세대들에게는 예능인으로 더 친숙한 경우도 있을 정도였다. 이전에도 예능에 가끔 나왔지만 2006년 이후부터 패밀리가 떴다, 라디오스타 등이 흥행에 성공하면서 본격적으로 예능인의 입지를 다졌다.
90년대에 가수로 활발히 활동할 때도 윤종신은 이미 그를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깐족의 대명사로 불렸다. 당시 윤종신의 그 간드러지는 평소 목소리를 들으면 사람들이 놀랐다고 할 정도. 본인도 "라디오 들어본 사람들은 자기가 원래 이런 이미지라는 것을 알 것."이라는 말을 하곤 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본업이 가수였기 때문에 예능에 나올 이유가 없긴했다.
29살에 늦게 군대에 들어간 윤종신은 30이 넘어 제대를 했는데, 자기 생각에 30살이 너무 많은것 같아서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무리를 하기 시작한다. 직접 제작에도 참여하면서 그동안 번돈을 모두 날려먹고 2004년엔 집도 없어지고 빚만 6억이 남았다. 본인왈 1999년부터 2005년 까지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라고...[66]
그래서 자구책 느낌으로 예능, 드라마에 나오기 시작하게 된다.
애초에 윤종신의 캐릭터는 촐싹맞고 얄밉게 깐족대기. 아무래도 나이도 나이고 몸도 몸이니만큼,[67] 몸을 쓰는 일(몸개그를 포함하여)은 어려웠던 듯하다. 대신 쉴 새 없이 말로 태클을 걸거나, 특히 다른 사람이 던진 말장난을 한번 더 받아치는 '주워먹기' 개그에 뛰어나다. 그래서 기프갤에서 얻은 별명이 윤자기. 본인도 주워들었는지는 몰라도, 2010년 공감토크쇼 놀러와 283회에서 갑자기 윤자기 드립을 쳤다. 그 날 윤종신의 활약으로 놀러와는 음악성과 웃음을 함께 거머쥐며 흥했다. 윤종신은 자기가 나오는 프로그램에서는 거의 모든 드립을 주워먹는다. 특히 독한 것은 그 깐족대는 캐릭터와 겹쳐서 독한 드립은 더 독하게 치는 바람에 말리는 시누이 포지션으로 정착한 것. 김구라조차도 명랑 히어로에서 난 최소한 앞에서 때리지 저 형은 뒤에서 친다고라면서 질색했다.
그래서 방통위에서도 대상으로 찍힌 적 있다고 라디오스타에서 언급되기도 했다.
하지만 본인은 예능인 윤종신과 음악인 윤종신의 괴리감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오히려 스스로 영화감독 기타노 다케시와 개그맨 비트 다케시와 같이 생각하면서 예능인과 음악인으로서 두 마리 토끼를 잡고 싶다고 얘기하고 다닌다고 한다.[68][69]
실제로 김구라도 괴리감이나 이미지에 대해서 언급할때 옆에서 "말하는 재능도 있는데 굳이 그걸 감춰야하나??"라고 묻기도했고, 박완규가 라디오스타에 나왔을때도 본인은 예능이 좋아서 하는거라고 얘기했다.
2019년 6월 4일 방송 활동을 잠정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10월 해외로 출국해 2020년을 해외에서 음악 등 다양한 콘텐츠 제작에만 매진할 예정이다.# 이에 따라 라디오스타, 방구석1열 등 출연 방송에서 모두 하차한다.#
이미 모든 프로그램은 녹화를 마쳤고 12년 동안 MC를 했던 라디오 스타에서는 2019년 9월 4일 마지막 녹화를 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이후 녹화후에 "12년간 나의 수요일 일터...그리고 함께 한 모든 분들 감사합니다"라고 감회를 남겼다. 이로써 이제 대단원의 방송을 마무리 짓는다. 인스타그램 녹화후 소감 방송은 2019년 9월 11일로 결정되었다.

5.1. 예능




5.1.1. 2000년대


1990년대 후반까지는 방송에 거의 출연하지 않고 음악활동만 했다. 제대 후 활동 폭을 넓힌 그는 2000년대 초반에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에 영화감독 장항준과 함께 비실형제로 카메오로 출연,[70] 이후 본격적으로 예능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 2002년 똑바로 살아라[71]에 또 카메오로 2번정도 출연했고, 2003년 논스톱4에서 교수 역할을 맡는 등 점차 활동의 폭을 넓혀 3사를 종횡무진하는 예능인으로 성장했다.
2007년 5월부터 MBC 황금어장 라디오 스타에, 2008년부터는 SBS 패밀리가 떴다와 MBC 명랑히어로에 출연하기 시작했다. 2009년이 그 전성기로, MBC 황금어장의 라디오 스타, SBS 패밀리가 떴다, 예능선수촌[72] 에 고정출연하여 시청률 60%를 책임졌으면 좋았겠지만 모두 프로그램의 중심 캐릭터가 되지 못했다. 대신 깐족거리는 서브MC 이미지를 굳혔다.[73]
패밀리가 떴다 시즌 1이 마감하면서 같이 하차. PD와 접촉하여 시즌 2를 노렸으나 대대적으로 물갈이하려던 방침에 맞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본인의 말로는 '애는 늘었는데 프로그램은 줄었다'라고 한탄하기도 했다. 예능선수촌의 경우 초기에는 최양락의 레전드급 토크로 흥하였으나 결국 놀러와를 이기지 못하고 그 해 가을 조용히 사그라들었다. 그 뒤 SBS는 월요예능을 화요일로 옮겨 강심장으로 재기한다.
무한도전 듀엣가요제에서의 영계백숙을 작곡했다. 그런데 작곡 후 정준하의 보컬이 아쉬웠는지, 본인이 직접 불러 리믹스를 해 유료 음원 시장에 내놓았다. 이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5.1.2. 2010년대 이후


  • 2010년 KBS 2TV '밤샘버라이어티-야행성'에 출연했다.
  • 2014년 7월 31일부터 M.net 블랙드라마 엔터테이너스에 출연했다. UV신드롬, 음악의 신, 방송의 적을 연출한 박준수 PD의 작품인데, 페이크 다큐멘터리였던 전작과는 달리 드라마 혹은 시트콤의 성격이 강하다. 윤종신이 틴탑의 프로듀싱을 맡으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음악의 신에서 한 몸 불살라 제 2의 전성기를 열었던 이상민처럼 자기 비하도 서슴지 않으며 분투하고 있지만 영 반응이 시원찮은 편.
  • 2014년 11월부터 2015년 3월까지는 종편JTBC속사정쌀롱의 진행도 맡으면서 생애 처음으로 종편 프로그램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호평에도 불구하고 신해철사망 여파로 프로그램은 조기종영 크리...
  • 2017년 5월 부로 채널A 하트시그널MC로 참여했다.
  • 2017년부로 라디오 스타가 10주년을 맞이했다. 첫회부터 모두 출연한 라스의 유일한 MC였다.
  • 2017년 6월부터 9월까지 SM과 미스틱의 전략적 제휴의 결과물인 눈덩이 프로젝트에 출연했다.
  • 2017년 10월 7~8일 양일간 방송되는 KBS2 건반 위의 하이에나에 출연하고, 여기서 월간 윤종신의 제작 과정 및 음원을 공개한다. 10월호가 될 뻔했으나 월간 윤종신 스페셜호로 바뀌게 되었다. 제목은 <너를 찾아서>. 이 곡도 차트 1위를 기록했다.
  • 2017년 10월 11~17일 네이버TV 빅픽처 EP.42~47에 출연하여 OST를 제작하고 땡볕에서 천막 하나 치고 식사를 하였다.
  • 2020년 12월 23일 라스 700회 특집에 게스트로 나왔는데 이때 예능에 대한 입장을 밝혔는데 당분간은 이방인 생활을 하면서 게스트로만 나올 듯 하다. 이방인 프로젝트도 있고 프로그램에 묶여서 개인활동 하는것이 창작 활동에 도움이 되지 않다보니 현재로서는 고정 프로에 뜻이 없는 듯 하다. 당분간은 이거 아니면 안될 프로그램이 나오지 않는 이상 게스트 출연만 할듯 했지만,
2021년 1월 22일부터 JTBC에서 방송예정인 배달가요-신비한 레코드샵에 장윤정, 웬디,규현과 함께 공동진행으로 방송복귀 확정

5.2. 오디션 심사위원


슈퍼스타K 1, 2, 3기에 걸쳐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 가끔 개드립을 치기도 했지만, 대체로 설득력 있는 평을 내린데다가 도전자들을 챙겨주고 가수로서의 방향성에 대해 많은 조언을 해준 덕분에 슈퍼스타K의 심사위원 중 비교적 시청자들의 반응이 좋은 편이었다.
슈퍼스타K4부터는 심사위원으로 참여하지 않는다고 한다.[74] 하차하고 나서 대체로 '윤종신 특유의 섬세한 심사평을 듣지 못하게 되는 것이 아쉽다'는 의견이 많았다.
그런데 그 와중에 슈퍼스타K 2, 3의 PD인 안준영 프로듀서는 트위터 상에 '앓던 이가 빠진 느낌이다! 감사합니다! 잘 빠졌네요^^' 라며 슈퍼스타K를 하차하는 윤종신을 저격하는 뉘앙스의 트윗을 남겨 잠시 논란이 됐었다.
프로그램 하차 이유에 대해서 인터뷰를 통해 '난 사실 음악을 말하는 걸 참 싫어했다. 그냥 듣고 느끼면 그게 다인데.. 트위터 시작하고 부쩍 음악을 말한다. 고치려고. 심사를 관둔 이유도 그 이유가 큰데. 열심히 만들고 부르고. 이 새벽도 그러면서 지샙니다'라는 트윗을 남겨 간접적으로 슈퍼스타K 하차 이유를 밝혔다.
하지만 슈퍼스타K5로 복귀했다.그리고 하차 건으로 김구라에게 슈파스타K의 장성택이라며 디스를 당하기도 했다.
슈퍼스타K7를 끝으로 하차가 결정되었다. 하지만 차후 언제든 다시 참여할 수 있다는 뜻을 밝혔다 한다.
그리고 슈퍼스타K 2016에서 탑10 결정전 윤종신의 곡을 부르는 미션에서 조언자로 출연하였다.
JTBC 팬텀싱어에서도 프로듀서들을 거의 리드하고 중재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아무래도 같이 나오는 윤상을 제외하면 방송경험이 별로 없는 각 분야 전문가들이고, 윤상은 평범한 멘탈이 아니기 때문에... 게다가 MC진인 전현무와 김희철도 거의 먹튀의 위엄을 보여줘서 진행도 일부 윤종신이 영향력을 발휘하는 느낌이라 MC들 출연료도 떼어서 윤종신 줘야 할 수준이다. 시즌 2에서 김희철이 하차했는데 여전히 전현무는 최소한의 진행멘트만 맡고 있다.
JTBC 슈퍼밴드에서 심사위원을 맡게 되었다.

5.3. 연기


  • 영화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 출연
  • 시트콤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에서 언더그라운드 가수 역으로 특별 출연해서 '팥빙수'를 잠깐 부른 바 있으며[75], 어느 네티즌이 '팥빙수'에 가사만 바꾼 패러디곡 '보신탕'이 소리바다에 떠 돌아 다닌 적도 있었다.
  • 논스톱4에서 윤종신 실용음악과 교수겸 그룹의 지도교수로 나왔었다.
  • 태희혜교지현이 얼굴없는 가수 풍운아 예명에 박미선과 엮인다. 암호명:윤빈대

5.4. 라디오 DJ 활동


한편, 윤종신은 라디오DJ로 다수 활동했다. 리즈 시절인 1991년에 MBC 표준FM <우리는 하이틴>을 시작으로 SBS 표준FM <기쁜우리 젊은 날>, MBC FM4U <두시의 데이트> 등에서 오랜기간 DJ를 했다. 여담이지만 두시의 데이트를 진행하던 2004년에는 MKMF 참석 차 방한했던 일본의 비주얼계 아티스트 각트가 출연하기도 하였다.
요즘은 완전히 깐족거리는 기믹으로 활약하고 있지만, <우리는 하이틴>[76]의 DJ로 활동하던 시절에는 내성적이었다고 한다. 한 번은 당대 최고의 스타였던 김완선[77]이 게스트로 출연했는데 작가가 써준 대본 내용으로만 프로그램을 진행했을 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해 방송사고를 낸 에피소드가 있다. 그러다 라디오DJ로서의 경험도 쌓이고 깐족거리는 이미지가 더해져 나른한 낮시간 때에 최적화된 DJ로 변모했다.
유희열에 의하면 본디 젊은이들의 감성을 건드리는 섬세한 오빠같은 섬세한 밤 DJ였다고 한다. 적어도 '우리는 하이틴', '기쁜우리 젊은 날'때까지는... 그런데 실제 당시 기사로 그렇게 나와있었다고 한다.

5.5. 유튜버 활동


월간 윤종신 채널이 2018년 11월 현재 10만 명 이상의 구독자를 보유 중이다.
2018년 11월 23일 오후 9시, <윤종신의 탈곡(曲)기>라는 이름의 프로그램으로 유튜브 1인방송에 데뷔한다.

6. 수상 내역


  • 1995년
    • SBS 스타상 라디오 MC상
  • 2005년
    • MBC 연기대상 라디오부문 우수상
  • 2008년
    • MBC 방송연예대상 쇼 버라이어티부문 인기상
  • 2009년
    • MBC 방송연예대상 코미디,시트콤부문 남자 우수상
  • 2010년
    • MBC 방송연예대상 MC부문 인기상
  • 2011년
    • MBC 방송연예대상 MC부문 특별상
    • MBC 방송연예대상 PD상
  • 2012년
    • MBC 방송연예대상 남자 최우수상
    • MBC 방송연예대상 우정상
  • 2014년
    • MBC 방송연예대상 뮤직토크쇼부문 남자 최우수상
  • 2016년
    • MBC 방송연예대상 뮤직토크쇼부문 특별상
  • 2017년
    • 제25회 대한민국 문화연예대상 K-POP 가수상
    • 엠넷 아시안 뮤직 어워즈 베스트 보컬 퍼포먼스 남자 솔로부문
    • 제9회 멜론 뮤직 어워드 뮤직스타일상 발라드 부문
    • MBC 방송연예대상 공로상 (라디오스타 공동수상)
    • 2017 한국 갤럽 올해의 가요 1위 "좋니"
  • 2018년
    • 제 32회 <골든디스크> 디지털 음원부문 "좋니" 본상[78]
    • 제27회 하이원 서울가요대상 최고 음원상 '좋니'
    • 제7회 가온차트 뮤직 어워즈 올해의 파퓰러 싱어상
    • 제7회 가온차트 뮤직 어워즈 K-POP 공헌상
    • MBC 방송연예대상 뮤직토크쇼부문 남자 최우수상[79]

7. 저서


  • 계절은 너에게 배웠어 (2018.08.23) : 자신이 작사한 가사에 담긴 비하인드 스토리를 실은 수필집. 다만 내용 자체는 본인곡 뮤직비디오에 실려있던 걸 모아놓은 것임으로 새로운 내용을 기대한다면 주의.

8. 사건 및 사고




9. 여담


  • 윤종신을 잘 모르는 요즘 사람들은 주로 예능에 나오는 연예인, 특히 개그맨인 줄 알지만 데뷔했을 때나 지금이나 본업은 가수. 사실 예전에는 거의 가수 활동만 했지만, 군대에 갔다 온 후에 예능이나 시트콤 등에도 출연하고, 영화음악도 꽤 하게 되면서[80] 개인앨범 발매 주기가 상당히 늦어져서 그런 이미지가 생긴 듯하다. 그래서 두 자리수 앨범을 낸 가수임에도 개그맨이 장난으로 앨범을 내지 말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그리고 아직도 그러는 인간들이 있다.[81][82]
  • 올드 팬에게는 내가 좋아했던 가수가 맞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예능에서 이미지 변신을 했다. '텅 빈 거리에서, 애니, 모처럼, 바다이야기' 등의 헤어진 다음에 찢어지는 남자의 감정(혹은 청승)을 가장 잘 표현했던 그이기에 예능 활동을 보고 있자면 눈물만 흐른다.[83] 다만, 라디오에서는 전성기 때부터 이렇게 깐족거렸다.
  • 사실 강호동과 윤종신은 굉장히 친한 사이로 윤종신이 아내를 만날 때 강호동이 바람잡이 역할로 계속 둘을 엮었다고 한다. 전미라가 처음에는 키 작은 남자에는 관심이 없었고 윤종신도 마찬가지였으나 계속 엮다 보니 관심이 생기게 되었고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고 한다. 전미라는 결혼 전까지 윤종신의 노래를 듣지 않았다고 한다.
  • 2012년 2월 윤종신은 SBS 힐링캠프에 출연해 난치병크론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최초로 밝혔다. 크론병은 입에서부터 항문까지 이어지는 모든 소화기관에 염증이 생길 수 있는 병으로, 수술로도 완치는 불가능하며 평생 약물치료를 해야 하는 병. 윤종신은 2006년에 처음으로 병에 걸린 것을 알았다고 한다. 너무 늦게 발견해 소장을 60cm나 잘라야 했고 지금은 약물 치료 중이라고 한다. 게다가 더 놀라운 사실은 윤종신이 지금까지 예능에서 치질에 걸렸다는 얘기를 하며 웃으며 했던 얘기가 사실은 이 크론병으로 인한 치루질환을 말한 것이었다고… 난치병을 웃음소재로 바꿔 시청자들에게 웃음을 줘야 했던 윤종신의 안타까운 고백이었다. 이 소장수술을 하고서 마취가 풀리면 링거에 연결된 모르핀이 조금씩 나오도록 장치를 해 놨다고 한다. 간호사가 너무 아플 때마다 버튼을 한번씩 누르라고 했다고. 그런데 마취에 깨면서 "아, 아! 아!!!" 비명 지르며 뾱뾱뾱뾱뾱뾱뾱뾱뾱뾱뾱뾱… 그리고 3일간 기절해 있었다고 조미료 섞인 썰을 예능에서 풀었다... [84] 아직도 소화기 쪽이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은 모양. 김구라에 따르면 윤종신이 배가 아파 라스 녹화가 지연된 바 있다고. 링크
  • 과거 윤종신의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치아교정으로 젊을 때보다 나이 들어서 외모가 준수해진 케이스의 연예인이다. 과거엔 입이 유재석 같이 돌출형이었으나 교정을 하면서 인상까지 좋아졌다. 이 때부터 정우성 닮았다는 드립을 치고 다닌다. 교정은 2010년 전후로 받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 정치성향은 중도 혹은 중도진보에 가까운 듯하다. 2008년 명랑 히어로 출연 당시에는 이경규와 함께 광우병 촛불시위를 지지하지 않는 것으로 묘사되었는데, 김구라가 이를 물고 늘어지는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2016년 박-최 국정농단 사태 때 '용기를 내어' 가족들과 함께 촛불집회에 참여했다. 이 때의 감상을 바탕으로 2016년 12월 월간 윤종신 '그래도 크리스마스'를 작사 작곡했다. 마침 그 곡의 가사가 JTBC 뉴스룸의 앵커브리핑에 소개되고, 이 인연으로 뉴스룸에 인터뷰로 출연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보수 중에서도 몇몇 극우를 제외하고 최순실 게이트를 비판하고 촛불집회에 참석한 부류가 있으므로 촛불집회에 참석했다는 이유만으로 윤종신을 진보라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 온누리교회에 다니는 듯. 그런데 2017년 월정사에서 공연도 했고, 이에 대해서 좋은 평을 남기기도 해서, 배타적인 신앙을 가진 것 같지는 않다.
  • 진중권 교수와 트위터 상에서 외모(둘 중에 누가 더 잘생겼냐는)에 대한 논쟁을 벌였으며, 이에 유희열은 전파낭비라고 라디오에서 얘기한 적이 있다. 이 얘기를 접한 윤종신은 "이게 웬 하수의 기웃거림인가?.....ㅋㅋㅋ"라는 트윗을 남겼다. 이후에도 SNS에서 종종 서로 까는 모습이 등장한다. 물론 분위기 자체는 가볍게 놀리는 정도. 아래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두 사람이 실제로 만난 적도 있다.[85] 2014년에는 같이 예능에도 출연하고, 심지어 히든 싱어 윤종신 편에는 진중권도 패널로 출연했다.
  • 김구라도 칭송하는 가요계의 황태자에서 김구라의 밥으로 전락한 비운의 음악가. 윤종신은 이 말이 얼마나 마음에 들었는지, 이걸 4년이 넘게 기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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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예인 중에서도 특히 잘 알려진 시계 매니아이다. 방송을 통해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롤렉스 모델만 신/구형 서브마리너, 그린 서브마리너(초록베젤), 데이토나 등이며 그 외에도 태그호이어의 까레라 복각 모델을 자신의 뮤직비디오(1월부터 6월까지, 나쁜, 못나고 못난)에 착용하고 출연한다거나, 세이코의 SKX007 모델도 방송에 차고 나오는 모습을 보여준다.
  • 시계 뿐 아니라 2000년대 중후반부터 슈퍼스타 K나 라디오 스타 등에서 보여준 깔끔한 코디가 호평받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윤종신의 패션 센스일 것이라는 가능성을 배제하고 윤종신의 코디를 칭찬하고 있지만 '윤종신 코디', '윤종신 스타일리스트'는 한때 검색어 자동 완성이 되었을 정도. 본인도 라디오 스타 MC들의 패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본인의 스타일리스트에 대한 칭찬을 인용하곤 하는 것을 보아 실제로 스타일리스트의 공이 꽤 큰 것으로 보인다. 튀지 않고 무난한 패션으로 키가 큰 편이 아니고, 특히 안경을 낀 일반인들은 롤모델로 따라 입을만하다.
  • 유희열의 말론 한때 본인을 한국의 기타노 다케시(비토 다케시)라고 자칭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김장훈은 윤종신과 달리 비트 다케시는 재밌는 사람이라고 말했다.[86] 사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틀린 말도 아니긴 하다... 다른 점이라면 다케시의 경우 코메디를 하다가 영화인도 겸하게 된 경우고 윤종신은 거꾸로 음악을 하다가 예능계로 손을 뻗은 경우. 둘 다 하고 싶은 일을 하기에 순서를 떠나 비슷한 것은 변함없다.[87]
  • 팥빙수 노래 가사 중에 '팥빙수 팥빙수 난 좋아 열라 좋아'라는 소절이 있는데 뒤의 '열라'가 비속어라는 이유로 방송 금지 판정을 받아서 방송용으로 '열라 좋아'를 '진짜 좋아'로 수정한 버전도 만들었다.
  • 명랑 히어로 두 번 살다에서 유희열이 윤종신의 상체 체형을 일컬어 시샤모에 비유한 적이 있다.
  • 한때 포유류만이 고통을 느낀다는 주장을 믿고 있었던 듯 하다[88]. 이를 강호동에게 전파했고 1박 2일에서 이 떡밥으로 논쟁이 벌어진 끝에 강호동(과 이승기)이 짜장면을 못 먹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심지어 방송용인가 실제 양인가는 몰라도 보통인데도 상당한 양이었다). 그리고 강호동은 본래 윤종신이 엄청나게 똑똑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사건으로 이미지가 와장창 깨졌다고 한다[89]. 하지만 이후에도 방송에서 어려운 문제에서 윤종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모습을 보였다.
  • 애견가다. 포이라는 이름의 개를 오랫동안 길렀다. 한동안 윤종신의 인터넷 아이디는 poydaddy. 하지만 포이는 죽고 현재는 라울이란 이름의 리트리버와 라리라는 이름의 개를 기르는 중.
  • 2011년, 디씨인사이드 윤종신 갤러리(약칭 깐갤)가 개설된 직후, 갤러리에 출몰 및 인증한 적이 있다. 닉네임은 왕왕왕... [90] 최근 컴퓨터 화면이 캡처되었을 때 즐겨찾기에 디씨 갤러리의 아이콘이 등장한 적이 있다. 아마도 종종 눈팅하는 듯. 2017년 현재에도 계속 갤을 눈팅하고 있다. 갤에서 만든 움짤을 퍼가서 인스타에 출처 ; DC 윤종신 갤러리라고 당당하게(?) 올렸다.
  • JTBC 예능프로 '나의 외사친'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영어 이름이 파블로(Pablo - Paul의 스페인어 버전)이다. 아마 대원외고 스페인어학과 시절 지은 이름인 듯.
  • 국어국문학 전공자답게 예능에서 국어 문법과 관련한 개그를 종종 하는 편이다.
  • 팬클럽 '공존' 홈페이지에는 윤종신이 2001년부터 2012년까지 때때로 남긴 일기가 모여있다.
  • 2018년 7월까지 평창동에서 카페 LOB를 운영했다. 현재는 폐업. 2018년 7월 23일부터 한남동 '월간 윤종신' 스튜디오가 '월간식당'으로 개장했다.
  • 아버지는 70년 넘게 활동한 1세대 사회복지사 윤광석 한사랑마을 초대원장. 인터뷰 참조

  • 한국 가수들 중에서 보기 드물게 세대를 뛰어넘어 롱런하는 가수다. 가수 초창기의 청아한 미성으로 끓어 올리던 고음 가성에서 탄탄한 중저음을 위주로 보컬 스타일이 변했지만[91][92] 본인의 감성을 끊임없이 재창조해내며 호평받고 있다. 과거 오래전 그날, 환생으로 대표되던 90년대 전반기의 대표 명곡이나 배움, 너에게 간다로 대표되는 90년대 후반기~00년대, 좋니, 막걸리나, 본능적으로 등으로 대표되는 10년대까지 전혀 음악성의 퇴보가 없이 꾸준히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잠시 침체기였던 00년대 후반~10년대 초반까지 예능인 윤종신의 인지도에 음악인으로써 모습이 잠시 흐려졌던 모습도 보였지만 현재 대한민국에서 윤종신을 대한민국 최고의 가수 중에 하나로 뽑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1] 소속사 문제로 1996년 015B 6집 앨범에서 쓴 가명. 비슷한 경우로 3집과 5집엔 이철민이라는 가명의 가수가 있었다.[2] 하림 1집 작사 당시 사용한 가명. 박진영의 파티피플 출연 당시 '탁한 영혼'이라는 뜻이라고 말했으나, 탁한 그림자(影)일 수도 있다. 한자 출처[3] 디지털 싱글로 트로트곡 <사랑의 뒷북> 발매 당시[4]창원시 진해구. 성장기 연고지는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이다.[5] 칠원 윤씨 39세손 '鍾'자 항렬이다.[6] 구글프로필은 170cm로 기재. 같은 라디오스타 방송진행을 하는 167cm인 김국진과 비슷하다. 과거 방송에서는 167cm로 나온 적이 있었다.[7] #[8] 2020.09.03 소천[9] 2015년 현재는 리얼입대 프로젝트 진짜 사나이 여군 특집에 출연해서 좀 유명해졌지만, 예전에 윔블던 주니어 부분 결승에 진출한 적이 있었던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여자 테니스 선수였다. 1994년 윔블던 주니어 여자단식에서 준우승을 기록했는데, 당시의 결승전 상대 선수는 여자 테니스계의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 선수였던 마르티나 힝기스였다. 이후 1995년 US오픈에서는 힝기스와 복식조로 나서기도 했다. 2005년에 현역 생활을 마감한 후 윤종신과 결혼했다. 2015년 현재 테니스 해설위원으로도 활약하고 있으며, 후배 테니스 선수들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10] 윤종신보다 키가 크다.[11] 서울 구의교회 출신이다. 이 교회는 예장통합에 속해 있다. 윤종신이 어렸을 때부터 이 교회에 잘 출석했다는 것으로 한 유튜브 동영상을 통해 알려졌다. 현재는 온누리교회에 출석한다.[12] 포스티노, 정석원과 함께 활동하는 작곡팀.[13] 015B 데뷔 당시. 솔로로서는 1991년도이다.[14] 방송에서 애드립을 잘 받아먹어서 인자기에서 유래했다.[15] 유희열이 그의 음악 작업 방식을 음도에서 평하기를[16] 2회 졸업생으로, '대원 외국어학교' 시절이다. 일반 고등학교를 못 가는 사람들이 가던 그 시절 맞다. 대원외고 동창으로 현재 벤츠의 딜러인 한성자동차의 세일즈맨으로 알려진 가수 김민우, 작곡가 MGR(음악가)이 있다.[17] 본래 가족들이 독실한 신앙인이 워낙 많아서 어릴 적부터 연세대 신학과에 진학하여 목사가 되는 것이 원래 꿈이었지만 성적으로 인해 미래캠퍼스 국어국문학과로 입학하게 되었고, 때문에 적응을 못해서 1, 2학년 동안 방황을 많이 했다고 한다. 너무 방황을 많이 해서 대외적으로 그 학과를 나왔다고 얘기하기 교수님들께 죄송스럽다고 말한 적이 있다.[18] 이때가 1989년, 우연히 이 가요제를 보러 온 정석원을 만나고, 목소리가 마음에 들었다는 정석원의 요구로 015B에 들어가 데뷔를 하는 등 음악인 커리어로서 술술 풀렸다. 그래서 나중에 소속사명을 '미스틱89'라고 지었다.[19] 이런 성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낸 곡이 '배웅'과 '환생'이다. 배웅은 전통적인 찬송가 스타일, 환생은 꽤나 가스펠 스타일인 곡이다.[20] 종전에도 윤종신이 윤상의 전성기에 대해서도 드립을 쳤을 정도로 미는 개그 중 하나였다. 노태우 대통령 취임은 1988년 2월 25일, 윤종신 데뷔는 1990년 7월 15일, 걸프전 발발 1990년 8월 2일이다.[21] 1994년 윔블던 주니어 여자 단식 결승에 진출하여 준우승을 기록한 경력이 있다. 당시 상대는 훗날 1990년대 중후반 세계 여자 테니스계를 주름잡았던 스위스마르티나 힝기스. 전미라는 2005년에 현역 은퇴를 선언한 후 이듬해 윤종신과 결혼했다. 현재는 엠스플의 테니스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후배 테니스 선수들을 위하여 여러 가지 활동을 한다고 한다. 마리텔에 부부 자녀 동반으로 출연했으나, 최하위에 그쳤다.[22] 윤종신은 (프로필상) 170cm, 전미라가 175cm이다. 각자 프로필 상 키기 때문에 실제로는 더 차이날 수도.[23] 하지만 코로나19 사태가 터지면서 여러 일정에 차질이 생겼다.[24] 단, 심사위원 중 한 명이 윤종신의 골수팬 김봉현 칼럼니스트임을 감안할 것. 물론 심사위원 한명의 팬심으로 고른 것이 아닌 여러명의 인풋을 종합해서 선정한 것이며, 밑의 곡들을 보면 실제로 높이 평가받고 많은 사랑을 받는 곡들 뿐이다.[25] 정확히 말하면 The Natural Live 앨범 (1994)에서부터[26] 제대 이후 방황하던 7집의 발성에 비해 오히려 2000년 8집을 기점으로 현재와 같은 창법으로 안정화됐다고 봐야 할 듯.[27] 실제로 윤종신이 성대결절을 앓았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다.[28] 물론 의도한 것일지도 모른다.[29] 하림과 함께 부른 '출국' 라이브[30] 라디오 스타 '이승철'편에서도 옥타브 대결에서 2옥타브 시를 생목이긴 하지만 올리긴 올렸다.[31] 하지만 주량은 아직도 5병 정도다...[32] 최고음 3옥 도[33] 1992년 015B 라이브 앨범, 친구와 연인 후반부 애드립[34] 사실 술, 담배, 노화로만 가수의 목소리 변화를 전부 판단할 수는 없다. 이런 식으로 치면 성시경 또한 이미 목소리가 망가져야 정상인데 성시경은 데뷔 초부터 40이 넘은 지금까지 목소리가 거의 안 바뀌었다(...). 참고로 성시경은 술과 담배를 즐기는 사람이며 폭식도 자주하는 사람이다.[35] 1992년 015B 라이브 앨범에 실린 <텅빈 거리에서>를 들어보면 이미 이때도 미성보다는 끈적한, 굵은 목소리로 부른다.[36] 원래는 윤종신 4집 공존 테이프 B면의 첫 곡으로, 장혜진과 듀엣했으며 가요계 숨은 듀엣 명곡으로 꼽힌다. 박주연과 정석원, 그야말로 윤종신의 사람들(각자 오래전 그날의 작사가와 윤종신이 가수로 데뷔하는데 도움을 준 작곡가.)이 모여서 명곡을 만들어 낸 셈이다.[37] 우리 모두 내면 어딘가에는 그 '찌질한' 자신의 모습이 있기 때문에 윤종신의 작사가 카타르시스를 주는 것이다.[38] 이별택시의 가사를 보면 화자가 비오는 날에 애인이랑 헤어지고 택시를 탔는데, 술에 잔뜩 취한 상탸에서 멍하니 창문 밖을 보고 전화를 보다가 행선지를 말하긴 커녕 어디로 가야되냐고(..), 우니까 귀찮냐고 물어보다가 뒷자리에 눕는(...) 등 진상을 피우다가, 끝내 내려서 비 속을 달려가는(...) 추태를 부린다. 노래라서 그렇지 이 정도면 진상 취객이다.[39] 2008년 명랑히어로 두 번 살다에 나온, 당시 예능감 없던 박정현이 한 말이니, 아주 빈말은 아닌 모양...[40] SG 워너비이석훈이 당시 김연우의 제자였는데 당시 김연우와 함께 가사를 보고 황당해했다고 얘기하기도 했다.[41] 너에게 간다, 내일 할 일, 거리에서, 나이, 이별택시, 눈물이 주룩주룩, 그대 없이는 못 살아, 너를 찾아서 등.[42] 물론 조크다. 실제로는 이 레시피대로 하면 망한다. 음과 박자를 고려해서 세심하게 단어를 배치한 것. 그렇게 쉽지 않다.[43] 1994년에 정광태가 발표한 김치 주제가가 있다. 김치 없인 못살아, 정말 못살아.의 그 곡. 또 1980년대 후반에 아기공룡 둘리의 삽입곡으로 나온 라면과 구공탄도 있다.[44] 다만 팥빙수와는 다르게 영계백숙이나 막걸리나, 망고 쉐이크는 레시피를 다루진 않았다.[45] 마지막 순간, Old school, 나이, Birdman, 모난돌 등...[46] 군 입대 직전의 심경을 담은 노래[47] 데뷔가 015B의 1집 객원보컬이었다.[48] 이 순서는 그림 순서이고, 실질적으로 '음악노예'라는 별명이 가장 어울리는 사람들은 유희열, 하림, 조정치 정도까지로 봐야 한다. 가수 활동 위주로 하는 사람들이나 윤종신과 함께 일한 지 몇 년 정도 밖에 안 된 다른 사람들은 사실 노예 수준 노가를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에 비해 유-하-조 세사람은 그와 함께 적지 않은 기간 일하면서 가수활동만 한 것이 아니라 엄청난 양의 작곡과 편곡을 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하림의 경우는 윤종신 관련 음반 편곡의 대다수에 기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희열은 독립이라도 했지 하림은 윤종신에게 여전히 속해 있다.[49] 이 중 김예림은 미스틱을 떠났다. 이제는 저 자리에 박재정이 들어와야 맞다 카더라...[50] 참고로 한때 유희열은 윤종신이 참 게으르다며 한탄을 한 적이 있다. 아무래도 음악에 한해서인듯.[51] 이승환과 비슷한 작업 방식이다. 이승환 역시 음악과를 전공한 게 아니기 때문에(그는 외대 출신이다) 황성제 등과 공동작업을 하고 있다.[52] 두사람이 모두 방송에서 직접 말한 바로 이미 유희열이 신인작곡가일때 윤종신이 군기를 잡아버렸다고 한다. 첫 계약금을 현금으로 주어 돈의 무서움을 알게 한 뒤, 고급일식집에 데려가 단둘이 식사를 하며 연예계의 무서움을 말해준 뒤, "오늘 식사값은 큰 돈 번 니가 내라. 큰 돈을 쓸 줄 알아야 계속 큰 돈을 번다."라고 했다고. 그때부터 윤종신에게 목줄잡혔다고 한다.[53] 유희열의 스케치북에 나갔을때도 윤종신이 유희열의 약한 농담을 강한 드립으로 받아치자, 당황하며 말을 못 이었을 정도. 윤종신의 말발이 유희열보다 더 세서일 수도 있긴 하다. 대학공연이나 기타 기관 공연 같은 행사에서도 두 사람이 함께한 적이 있는데, 유희열의 말로는 그것도 윤종신의 요구로 본인이 나온 거라고 한다. 지금도 윤종신이 좋은 취지의 행사공연이라고 말하면서 같이 공연하게 나오라고 요구하면 쉽게 거부하지 못하고 나온다고. 윤종신이 노래를 부르고 유희열이 피아노 연주를 했다. [54] 그럴 수밖에 없다. 작곡가 이근호는 총신대 교회음악과 작곡 전공이다. 원뿌리는 개신교 교회음악에 닿아있기 때문이다.[55] 015B 2집 '두 번째 에피소드'의 수록곡 '친구와 연인', 'H에게", 3집 '제3의 물결'의 수록곡 '우리 이렇게 스쳐 보내면'(박선주와의 듀엣곡), '1월부터 6월까지' 등 간간히 피처링으로 015B를 돕고 있다.[56] 원래는 작곡가 박강영에게 편곡을 맡기려고 아는 사람한테 번호를 물어봤는데, 그 사람이 실수로 작사가 박주연의 번호를 알려 줬다고 한다. 차마 잘못 걸었다고 할 순 없어서 작사를 부탁드렸는데, 그 잘못 걸린 전화로 인해 윤종신의 초기 양대 명곡으로 꼽히는 너의 결혼식과 오래전 그날이 탄생하게 되었다.[57] 비슷한 케이스로 토이 3집, 5집에서 이승환이 이철민이라는 가명으로 불렀다.[58] 참고로 LG미디어는 1997년 외환 위기 때 사업을 정리했다. 덕분에 015B 6집은 음악 성향이 상당히 실험적으로 변한 것과 맞물려 재발매도 안 되어서 다른 앨범에 비해 현재 구하기 엄청나게 어렵다.(다만 근래에는 2006년 발매된 7집이 더 구하기 힘들어지긴 했지만. 이 앨범은 1만장 한정 판매) 아닌 게 아니라 1980~1990년대에 괜찮은 음악을 내던 음반사와 기획사들이 1997년 외환 위기로 대부분 몰락한 것이 MP3의 범람과 함께 대한민국 음악 시장이 1990년대 말에 급변한 하나의 원인으로 꼽힌다. 예당음향, 동아기획, 대영AV, 서울음반 등도 이 시기에 치명타를 맞으면서 사그라들었고, 그 빈 자리를 채운 것이 기획형 아이돌을 내세운 SM엔터테인먼트, YG엔터테인먼트, JYP엔터테인먼트 등이다. 이외에 서태지 5집, 토이 4집을 낸 삼성뮤직도 음반업계에서 결국 철수했다. (다만 토이 4집은 다른 회사에서 재발매 중이다.)[59] 윤종신 曰, "9집이(나의 베스트 앨범이)다. 제일 창의적인 작품이었다. 수목원에서 같은 곡은 우리나라에서 나만 할 수 있다. 버릴 곡이 하나도 없었다. ... 음악을 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팥빙수가 그렇게 만만한 노래가 아니다. 이규호가 곡을 호락호락하게 쓰지 않았다. 어렵게 만들었는데 쉽게 들리는 노래가 멋있는 노래다. 9집은 전곡이 어쿠스틱 모양새가 나온다."[60] 편의상 월간 윤종신의 연말 행보 앨범도 정규 n집으로 표기하기는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정규 앨범은 아니다.[61] 그러나 2번째 Monthly 앨범(Project 2010 May)의 수록곡인 '본능적으로'가 슈퍼스타K 2에서 강승윤 덕분에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면서 이문도 남는 프로젝트가 되었다. 이 노래는 윤종신이 표현하길 자신의 음악 인생을 통틀어 유일한 1등곡이자 초대형 히트곡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기록은 2017년 '좋니'로 보기 좋게 깨졌다![62] 버스커버스커가 슈퍼스타K 3에서 리메이크한 첫번째 Monthly앨범 수록곡 '막걸리나'도 히트했다.[63] 선글라스에 의자까지, 작정하고 꾸몄다.[64] 여권, 시력, 좋니, 끝무렵[65] 번역된 제목은 '기억해 줘'[66] 해피투게더에서 본인이 밝힌 내용.[67] 항문이라든지 무좀이라든지[68] 하지만 김장훈과 유희열은 이 얘기를 듣고 비웃었다.[69] 물론 2시간 내내 방송에서 예능인 윤종신을 비웃다가 마지막에는 정색하고 어렵고 힘든 길을, 그것도 두 길을 모두 성실하게 묵묵히 걷는 윤종신을 존경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셋은 거의 형제같은 사이로 장난끼 넘치는 디스는 그들의 일상이다. 참고로 유희열이 잠시 미국 여행을 간 사이 윤종신은 자신의 공연에서 "희열씨가 드디어 빚쟁이의 등쌀에 못 이겨 라디오를 버리고 미국으로 도피하셨습니다"라는 드립을 쳤다.[70] MBC 시트콤 지붕뚫고 하이킥 64회에서도 비실형제 컨셉으로 둘이 카메오 출연을 했다. 몸이 허약한 정수기 설치 직원 역할.[71] 심지어 주제곡까지 불렀다. 2번째로 나온 에피소드에선 언더그라운드 가수의 설정이었는데 나중에 TV에 출연해서 이 노래까지 불렀다.[72] 야심만만 시즌2[73] 당시 방심위에서 주목을 받았다고 언급하기도 했다.[74] 대신 싸이가 참여한다.[75] 극중 내용: 꼴통 4총사(노영삼 외 3인)가 방학 중 휴가비 마련을 위해 팥빙수 장사 시작 → 윤종신이 매일 사먹으면서 '이 빙수를 먹으면 악상이 떠오른다'고 말하며 이 노래를 부름 → 1주일 뒤 빙수를 먹으면서 배가 아파오는 것을 단순히 장이 나빴던 것으로 의심하다가 그 빙수를 사먹은 종신의 어머니도 똑같이 복통을 호소 → 결국 빙수 제조 공정의 불량(위생얼음도 안 쓰고 청결상태가 영 좋지 못한 손으로 제조)을 눈치채서 빙수 장사를 접게 만들고 끝.[76] 윤종신은 이 프로그램의 DJ가 되기 전에 015B의 멤버들과 출연한 적이 있었는데, 텅빈 거리에서를 2번이나 틀려, 녹음방송이라 그냥 넘어갔지 생방송이었으면 완전 끝장날 뻔한 짓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것 때문에 윤종신은 우리는 하이틴이란 이름만 들어도 치를 떨었다고 했는데, 몇 달 후 DJ로 섭외가 들어왔으니 윤종신의 심정이 어땠을까...(출처는 정석원이 쓴 '공일오비 스토리')[77] 김완선과 윤종신은 동갑이다. 생일은 김완선이 더 빠르고, 데뷔 연도로만 따지면 4년 차이.[78] 대상 수상곡인 밤편지와는 20점차이로 고배를 마셨다. 아쉬운 수상.[79] 전국 투어 중이었던지라 같은 후보였던 김국진이 대리수상.[80] 그리고 자기가 영화음악을 만든 그 영화에 출연을 하기도 한다.[81] 실제로 나이가 어려서 윤종신을 TV로만 접한 나이가 어린 학생들은 아직도 윤종신의 본업이 개그맨으로 아는 경우가 많다. 물론, 슈퍼스타K나 월간 윤종신 같이 음악적 활동으로도 대중적인 어필을 한 후엔 많이 줄었들긴 했다.[82] 윤종신의 반응[83] 본래 코미디에 욕심이 있어서 시트콤에 종종 출연해 기존 팬을 깜짝 놀라게 했었다. 사실은 거침없이 하이킥에까지 고정출연자로 섭외되었으나 테니스 선수 출신 부인과 만날 시간이 없을 것 같아서 거절을 했다고 한다. 대신 하이킥 시리즈에 까메오로는 나왔다. 친구인 영화감독 장항준과 "몸이 약한데 여자를 밝히는 친형제"로 나와서 여자들을 꼬시려다 바람만 불거나 다른 사람과 살짝 부딪혀도 크게 넘어지는 코믹 연기를 했다. 윤종신이 형 역할이었다.[84] 물론 실컷 눌렀다고 해서 모르핀이 쭉 나왔을 리는 없다. 모르핀이 한 번에 많이 들어가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에, 짧은 시간 동안 여러 번 눌러도 실제로는 한두 번 밖에 안들어가도록 설계되어있다. 대체로 10분 간격으로 자동으로 투입되나, 그 사이에 몇 분 안에 한해서 누를 수 있다던가. 방식으로 사용한다. 실제로 수술 후 깨어난 뒤에 모르핀 때문에 다시 기절해서 3일 동안 못 깨어난다면 의료사고가 될 수 있어서 병원 뒤집어져 난리난다. 최소한 하루 이상 지난 뒤 '윤종신 수술 후 혼수상태로 위독'으로 연예뉴스에 나왔어야 할 정도..[85] 그 전부터 서로 외모가 많이 닮았다는 이야기는 네티즌들 사이에서도 있었던 이야기였다.[86] 이 때의 윤종신은 예능 늦둥이로 불리던 시절로 2015년 기준 현재처럼 그다지 예능계에 영향력이 있던 사람은 아니었다. 지금이야 두 분야 각각 충분히 인정받고 있지만 그땐 아직 음악인 윤종신으로서의 모습이 강했기 때문에 낯설어 하는 사람들과 젊은 세대들에겐 알듯말듯한데 예능계에 자주 눈에 띄어 가수인지 예능인인지 헷갈려하던 시절이었다.[87] 흔히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윤종신은 예능을 꽤 오래 전부터 하고 싶어했다. 주변에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의 언급을 보면 줄곧 벼르고 있었던 듯. 음악을 떠나 라디오라든지 시트콤, 활동 기간에서의 방송을 보면 그 부분이 두드러져 있는 걸 알 수 있다.[88] 신경계가 있는 모든 생물은 고통을 느낄 수 있다.[89] 전화를 한 뒤에 알게 된 듯 문자 메시지로 '자신을 너무 믿지 말라'는 말을 보내 강호동은 완전히 허탈해했다.[90] 아마도 음악왕이란 표현을 변형한 듯. 혹은 강아지가 짖는 소리일 수도...?[91] 물론 윤종신의 노래를 불러보면 알겠지만 비교적이다.... 1995~2010년까지 윤종신은 미성이 사라지고 거친 흉성이 소리에 섞일 정도로 보컬에 있어서 음주,흡연으로 망가졌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2010년대 이후 성대를 바꿨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과거의 가창력을 회복했다. 과거 고음의 청아한 가성이 나오지 않는 것이지 여전한 미성을 기반으로 중고음에서 발성이 굉장히 단단해서 노래가 듣는 것보다 부르기가 너무 어렵다.[92] 실제로 라디오 스타에서도 김태원 출연 당시 "회상3"의 이승철 파트를 깨끗하게 처리했다. 음색 자체가 탁해져서 그렇지 음역대 자체는 지금도 그리 낮지만은 않다. 그리고 현재도 사실 노래 부를 때 목소리는 미성에 가까울 정도로 깨끗한 편이다. 과거 목소리가 워낙 맑아서 비교되는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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