닝샤 후이족 자치구

 


[image] '''중화인민공화국자치구'''
'''宁夏回族自治区(Níngxià Huízú Zìzhìqū''' (寧夏回族自治區)
'''نٍ ﺷﯿَا ﺧُﻮِ ذُﻮْ ذِ جِ ﺛُﻮْ ْ '''ْ

닝샤 후이족 자치구
Ningxia Hui Autonomous Region

[image]

'''자치구정부
소재지
'''
인촨시 싱칭구 제팡시가 361
(银川市 兴庆区 解放西街 361)
'''지역'''
시베이
'''면적'''
66,400km²
'''하위 행정구역'''
5지급시 9구 2현급시 11현
'''인구'''
632만명
'''인구밀도'''
95명/km²
'''시간대'''
UTC+8
'''한국과 시차'''
1시간
'''서기'''
스타이펑(石泰峰)
'''정부주석'''
샨휘(咸辉)
'''HDI'''
0.739 (2017)
'''GRDP'''
$559억 1,100만 (2018)
'''1인당 GRDP'''
$8,175 (2018)
'''행정구역 약칭'''
'''宁'''
'''ISO 3166-2'''
'''CN-NX'''
홈페이지
1. 개요
2. 상세
3.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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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BS세계테마기행 - 미지의 중국 닝샤
중화인민공화국 서북부에 있는 자치구다. 약칭은 영(宁), 혹은 하(夏). 국내에서는 영하 회족 자치구라고도 부른다. 황하 유역이며 내몽골 서북쪽 끝인 오르도스 고원 지역 중심에 위치해 있다.
면적은 66,000km²이며 인구는 2010년 기준 6,301,350명으로 인구의 62%는 한족이고 34%는 이슬람교를 믿는 소수민족인 후이족(回族)이다. 레닌주의 민족해방론에 따르면 민족 영토가 결여된 채 오직 문화에 토대를 둔 민족은 민족으로 인정받을 수 없었으므로, 원래부터 회족 인구보다 한족 인구가 많지만 후이족 자치구로 지정되었다.

2. 상세


러시아유대인 자치주설립 취지가 비슷하다. 회족 역시 유럽유대인 비슷하게 종교만 다르고 각지에 고르게 널리 퍼져 사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었다. 소련에서 만약 유대인 자치주를 유대인 인구가 많던 벨라루스 서부 지역에 설정하면 현지인들이 들고 일어날 게 뻔하므로 대신 만주 근처 공백지에 세웠던 것처럼, 중화인민공화국에서도 티베트인회족들이 갈등하던 칭하이성 대신에 건조한 오르도스 지역에 할당했다. 하지만 오늘날 러시아 연방 내 유대인 자치주가 유대 민족 국가 이스라엘로 유대인이 몰리면서 유대인 인구 비율이 소수점 대로 감소한 것에 비하면, 닝샤 후이족 자치구는 나름 민족 자치구 역할을 수행하는 셈이다.
성도는 인촨(银川)시인데 서하의 수도였던 곳으로 유명하다. 물론 오늘날 서하를 구성하던 탕구트인은 씨가 말랐다. 칭기즈 칸이 서하를 원정하던 도중 죽었기에 그 아들인 오고타이는 하필 칭기즈 칸의 서하인을 단 한명도 남기지 마라는 유언을 충실히 받들어서 서하인을 상대로 일종의 제노사이드를 행했다. 이후 이 지역은 카이두와 원나라의 전쟁터가 되고, 쿠빌라이가 둔전을 실시하면서 몽골족과 한족, 위구르인과 페르시아인을 비롯한 여러 민족들이 들어오게 되었다.
황하가 이 땅을 통과하며 만리장성이 닝샤의 북동부 경계를 따라 세워져 있다. 지세는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다. 남부는 황토 고원이나 육반산이 많은 땅을 차지하고, 북부는 닝샤 평원이 있으며, 서북부는 하란산이 있다. 가장 건조한 지역 중 하나로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다.
닝샤 후이족 자치구의 류판산은 몽골의 컨티산맥과 더불어 칭기즈 칸의 무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1]이라서 몽골계 중국인들에게 성지로 여겨지기도 한다.

3. 역사


[image]
  • 명나라 때 지어진 모스크인 동심청진사 (同心清真寺). 중국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모스크로 닝샤 후이족 자치구의 퉁신현(동심현)에 위치해 있다.
서하의 수도 카라호토가 이 지역에 있었으나 서하는 몽골 제국에 의해 멸망하고, 서하인들은 일종의 제노사이드를 당해 절멸했으며(물론 다 학살되진 않았지만 남은 일부 서하인들은 몽골화되거나 다른 곳으로 이주하게 되면서 그들의 후손은 매우 적다고 한다), 그 빈 자리에는 후이족과 서북 출신 한족들이 들어와 살게 되었다. 중앙아시아 출신 후이족의 영향으로 이 지역에서는 포도 재배[2]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준가르 원정을 나서던 강희제가 닝샤 지역의 포도와 국수 맛을 칭찬한 기록이 남아있다.
역사적으로 간쑤성의 일부였으나 오늘날에 우중 시에 해당하는 금적보를 중심으로 회족들의 상업 공동체가 번성하고 1862년 회민반란 당시 섬서성 내 회족들 상당수가 이 지역으로 피신하면서[3] 회족 비율이 늘어나고 중화민국 시기인 1927년 간쑤성의 행정구역들이 합쳐져서 닝샤성(영하성)으로 신설되었다.
군벌 마훙쿠이가 이곳의 지배자로 군림하면서 칭하이성마부팡, 간쑤성마훙빈과 함께 서북삼마로 꼽혔다. 장제스의 북벌로 군벌은 이후 대부분 항복해 중화민국의 통치권 내로 들어왔다.
국공내전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며 1954년 간쑤성에 합병되어 폐지되었으나 1958년 회족 자치구로 부활했다.

4. 행정구역



[image]
출처:#
총 5개의 지급 행정구역이 있다.
닝샤 후이족 자치구의 각 지급시의 인구
인촨
1,993,088 명
구위안
1,228,156 명
스쭈이산
725,482 명
우중 시
1,273,792 명
중웨이
1,080,832 명
[1] 중국에서는 류판산을, 몽골에서는 컨티산맥을 칭기즈 칸의 무덤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2] 포도는 원래 투르판의 특산물이다.[3] 섬서성 내 수백만여 명에 달했던 회족 인구는 1862년 회민반란과 뒤이은 1880년대 대기근으로 수만명 수준으로 감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