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하이성

 


[image] '''중화인민공화국
青海省(Qīnghǎi Shěng''' (靑海省)
칭하이성 | Qinghai Province

'''티베트어'''
Mtsho-sngon Zhing-chen[1]
མཚོ་སྔོན་ཞིང་ཆེན་
'''몽골어'''
Хөхнуур муж(Khökhnuur muj[2]
[image]

'''성정부 소재지'''
시닝시 청중구 시다가 12
(西宁市 城中区 西大街 12)
'''지역'''
시베이
'''면적'''
721,800km²
'''하위 행정구역'''
2지급시 6자치주 3현급시 28현 7자치현
'''인구'''
588만 7,000명
'''인구밀도'''
7.8명/km²
'''시간대'''
UTC+8
'''한국과 시차'''
1시간
'''서기'''
왕젠쥔(王建军)
'''성장'''
류닝(刘宁)
'''HDI'''
0.680 (2017)
'''GRDP'''
$432억 9,800만 (2018)
'''1인당 GRDP'''
$7,387 (2018)
'''행정구역 약칭'''
'''青'''
'''ISO 3166-2'''
'''CN-QH'''
홈페이지
사진 보기
1. 개요
2. 상세
3. 역사
4. 지리
5. 민족 갈등
6. 행정 구역
7. 출신인물


1. 개요


칭하이성은 중국 서중부에 위치한 성급 행정구역이다. 성 이름은 칭하이성에 위치한 중국 최대 호수인 칭하이 호(青海湖)에서 유래했다.
성도는 란저우와 가까운 동북방의 시닝이다.[3]
칭하이는 중국어 명칭이며 원래 이 지방은 티베트의 일부로 티베트어로는 암도 지역이고 암도 및 현 쓰촨성 서부인 캄, 그리고 현 티베트 자치구와 함께 티베트를 구성한다.

2. 상세


'''중국에서 자치구를 제외하고 가장 넓은 성'''으로, 면적이 남한 면적의 7배가 넘는 '''721,000km2'''에 달한다.
반면 인구는 562만 명에 불과해 중국의 모든 성을 통틀어 가장 적다.[4]
인구의 54.5%가 한족이나, 티베트족(20.7%)과 후이족(16%), 몽골계인 투족(4%) 등 소수민족 인구 비중이 거의 한족과 비슷한 수준이다. 실제 행정구역도 2개 시와 6개 소수민족 자치주로 이루어져 있다. 6개 소수민족 자치주들은 성 면적의 97%를 차지하나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35.9%로 한족들이 많이 거주하는 2개 시보다 적다. 반대로 성 면적의 3퍼센트 정도인 지급시 시닝시하이둥시의 인구구성은 한족이 우세하고 칭하이성 전체 한족의 80% 가까이가 두 지역에 거주 중이다.
칭하이 호를 기준으로 남쪽은 대체로 티베트인이 많고 북쪽은 한족이 많이 산다. 위수 티베트족 자치주와 궈러 티베트족 자치주, 황난 티베트족 자치주, 하이난 티베트족 자치주는 티베트족이 각각 '''97%'''와 '''92%''', 66%, 63%로 티베트인이 많이 산다.
원래는 티베트인이 대부분이었으나 티베트 지방과는 달리 청나라 시기 청해로 분할되었으며 중화민국 시대에 청해성이라는 이름으로 중국의 통치하에 남아 성으로 승격되었다. 한족의 경우 역사적으로 보면 한나라 때 정복을 통하여 한족이 들어왔다가, 강족, 토욕혼 등과 섞이게 되어 특이한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
특산물로 야생 상태의 동충하초가 유명하다.

3. 역사


전술했듯 원래는 티베트의 암도 지방이었으며 오이라트준가르 등 몽골 세력, 한족 세력, 튀르크계가 교차하는 곳이었다가 청나라 강희제 연간에 외몽골과 함께 준가르로부터 빼앗았다. 그땐 몽골어로 코코노르라고 불렸다.
1929년 1월, 군벌 펑위샹의 주도로 간쑤성에서 떨어져나와 성립되었다. 군벌 쑨롄중이 초대 성정부 주석을 맡았으며 1차 장풍전쟁 중 마씨군벌 마치(1869)가 정부주서에 임명되어 청해성의 지배자가 되었다. 이를 기점으로 오늘날의 간쑤성 일대의 회족 상당수가 이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칭하이성은 1931년 마치가 사망할 때까지 마치의 지배 하에 놓여 있었으며 마치가 사망한 후 마씨 군벌들이 돌아가면서 지배했다.
티베트는 티베트인들이 많이 사는 이 지역을 자신들의 고유 영토로 생각하여 침공하였으나 마부팡이 지휘하는 회족 군대에게 패전하고 이 지역은 마씨 군벌의 영지(?)화 되었다.
1938년, 마치의 아들 마부팡장제스로부터 성정부 주석에 임명되면서 청해성의 지배자가 되었다. 1949년, 국공내전에서 중화민국이 무너질 때까지 마부팡의 지배를 받았다.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독립투쟁이 치열한 위구르, 티베트 자치구와 달리 암도 지방인 이쪽은 별 다른 특이사항이 없다.

4. 지리


[image]
칭하이 호의 위성사진
티베트 고원의 동북쪽 부분을 이루고 있으며 매우 높은 산들이 존재한다. 가장 높은 산은 부카다반봉(布喀达坂峰)으로 해발 6,860m에 달하며, 그 외에 아니마칭 산도 여기 위치하고 있다. 성도 시닝만 해도 해발고도 2,275m의 고지대이며, 칭하이 호는 해발 3,205m에 위치해 있다. 고지대다 보니 기후가 춥고 건조한 편으로, 일부 고원 지역에서는 한대기후도 나타난다.[5]
이곳은 알프스-히말라야 조산대에 위치한 곳으로 지진이 자주 일어나는 편이며. 2016년 10월 17일에 이곳에서 규모 6.4의 지진이 일어났다.

5. 민족 갈등


상기했듯, 티베트 불교를 믿는 티베트족(장족)과 이슬람교를 믿는 후이족(회족)이 같이 사는데 이 둘 사이의 갈등이 제법 심하다.
회족과 티베트족 간 갈등은 마씨 군벌 통치기부터 이어진 갈등으로 티베트가 이 지역에 쳐들어왔다 마씨 회족 군대에게 격퇴당하기도 했다. 이른바 장회충돌(藏回冲突) 혹은 회장충돌이라 불린다.
후이족티베트인은 사이가 매우 좋지 않지만 칭하이성에서 상호 교류는 활발한 편이다. 티베트 요리도 후이족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는 티베트 불교에서는 도축을 권하지 않기 때문에 티베트인들이 도축과 육류 가공을 후이족에게 맡기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만 후이족은 똑같은 티베트 불교를 숭상하던 만주족에게 탄압[6]당했던 역사 때문에 반불교 감정이 심하고, 상대적으로 약자인 티베트인에게 화풀이하는 성향이 있다.
티베트인들도 후이족이 배타적이라고 거부감을 느끼는 편으로 티베트인이 봉기하는 경우 한족뿐 아니라 후이족들도 표적이 되는 경우도 있다.
티베트계 무슬림인 까체의 경우 일반 티베트인과 후이족 양쪽에게 모두 배척당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양쪽의 중재 역할을 하기도 한다.

6. 행정 구역


'''칭하이성'''
'''青海省'''
행정 구역
(중국어)
(티베트어)
면적(km²)
인구(`10)
민족 구성(`10)
시닝시
西宁
Xīníng
ཟི་ལིང
Siling
7,607
2,208,708
한족 74.0%
후이족 16.3%
하이둥시
海东
Hǎidōng
ཧའེ་ཏུང་
Haidung
12,982
1,396,846
한족 55.7%
후이족 19.6%
하이베이 티베트족 자치주
海北
Hǎiběi
མཚོ་བྱང་
Cojang
34,390
273,304
한족 35.9%
후이족 31.5%
티베트족 24.4%
황난 티베트족 자치주
黄南
Huángnán
རྨ་ལྷོ་
Malho
18,226
256,716
티베트족 68.5%
몽골족 14.0%
하이난 티베트족 자치주
海南
Hǎinán
མཚོ་ལྷོ་
Colho
43,453
441,689
티베트족 66.3%
한족 24.8%
골록 티베트족 자치주
(궈뤄 티베트족 자치주)
果洛
Guǒluò
མགོ་ལོག་
Golog
74,246
181,682
티베트족 91.9%
위쉬 티베트족 자치주
(위수 티베트족 차지주)
玉树
Yùshù
ཡུལ་ཤུལ་
Yüxü
204,887
378,439
티베트족 96.5%
하이시 몽골족 티베트족 자치주
海西
Hǎixī
མཚོ་ནུབ་
Conub
300,854
489,338
한족 66.0%
후이족 13.5%
티베트족 10.9%
행정구역은 2개 지급시와 6개 자치주로 이루어져 있으며, 6개 자치주는 전통적으로 티베트의 암도 지방과 캄 지방의 일부(위쉬)이기도 하다.

7. 출신인물



[1] 초응온 싱첸이라고 읽는다.[2] 후흐노르 모즈라고 읽는다.[3] 시닝은 본디 감숙성에 속함[4] 성급 행정구역을 모두 치자면 티베트 자치구(명목상 성급 행정구역인 특별행정구를 포함하면 마카오)가 가장 적다.[5] 중심 도시인 시닝도 위도는 충청북도 청주와 정확히 똑같은데(북위 36도 38분) 해발고도는 넘사벽으로 높아서 여름이 매우 시원하다. 청주가 38℃에 습도 99%로 24시간 야외 사우나를 운영하고 있을 때 시닝은 아무리 기온이 높아도 27℃가 못 되며 밤에는 매우 쌀쌀해진다.[6] 후이족에게도 변발을 강요한 건 물론 모스크 정문에 “황제만세 만만세”라는 현판을 붙일 것을 강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