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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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8년 준가르의 영토및 청과의 전쟁 경로
오이라트어: Zöünɣar
몽골어: ᠵᠡᠭᠦᠨ ᠭᠠᠷ/Jegün-ghar, Зүүнгар/Züüngar(현대 몽골어)
영어: Dzungar
중국어 정체: 準噶爾(준가얼, 준갈이)
1. 개요
2. 역사
2.1. 기원
2.2. 갈단 한[1] 즉위, 청나라와의 대립
2.3. 준가르의 반격
2.4. 멸망
3. 통치자 목록
4. 번외: 토르구트의 귀환


1. 개요


오이라트유목민족. 몽골어계 종족으로서 북원 이후 인류 역사 최후의 유목 제국[2]이다.
기병에만 의존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화약과 무기를 생산했으며, 강력한 전투력으로 최후까지 청나라를 괴롭혔다. 유목수렵채집 생활을 주로 했으나, 상업 발달은 물론 기후가 허락하는 한 농경도 병행했을 정도로 유연한 사회 경제적 구조를 갖고 있었다. 칼미크인과 사촌이나 현존하는 칼미크족과 달리 준가르 부족은 청나라와의 전쟁과 천연두 유행으로 거의 멸족되고 남아있지 않다.
서북부 신장-위구르 지역 북부의 중가리아카스피해, 그리고 외몽골티베트에까지 걸쳐 거주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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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가르 기병
준가르 전사들

2. 역사



2.1. 기원


기원은 예니세이 강 유역에 거주하던 유목민 오이라트다. 주로 수렵과 목축을 하며 살았다. 12세기경에 칭기즈 칸에게 정복당하여 4만 호로 편성되었고 이후 몽골군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원대에도 색목인으로서 우대받았다. 그런데 몽골 제국내에서 우구데이 가문의 카이두와 대칸의 경계선에 진출했었기에 몽골 제국 시대에 중요한 변수로 떠올랐으며 주로 대칸의 반대편에 서서 싸웠으며, 주원장이 명나라를 세우고 북진하면서 몽골의 세력이 약해지자 몽골에 대항해서 싸웠다.
이렇게 몽골과 맞서 싸우면서 오이라트는 몽골고원 서쪽의 유목 민족들을 흡수하는데, 케레이트, 나이만, 메르키트를 위시해 칭기즈 칸의 몽골 통일 당시 가장 거세게 대항했던 부족들로 워낙 덩치가 큰지라 말이 오이라트지 실제로는 흡수된 부족 출신들이 원 오이라트계보다 훨씬 많아진다. 즉 이즈음에는 오이라트를 중심으로 서몽골의 유목 부족들이 뭉쳤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후 오이라트의 최대 부족 순위는 준가르와 토르구트부터 나이만, 케레이트 계열이 된다. 원 오이라트계 부족은 쩌리로 전락한다.
에센 타이시의 시대에 전 몽골을 통일할 정도로 위세가 대단하였고 급기야는 토목의 변을 일으켜 명나라의 정통제를 생포하면서 악명을 떨쳤다.하지만 에센이 암살당한후 오이라트는 혼란에 빠지고 약화되어 몽골 부족들의 공격을 받아 서쪽 자신들의 본거지로 후퇴하였다. 이후 몽골 최후의 명군알탄 칸[3]의 등장으로 오이라트는 몽골고원을 결국 상실하고 몽골에 복속되었다.
1600년대 초반부터 오이라트는 재흥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시기에 1623년 몽골 할하부를 격파하여 완전한 독립에 다시 성공하였다. 그 직후 내분을 겪어 케레이트의 후예 토르구트부가 서쪽으로 이주해 카스피해 북부의 노가이 칸국를 멸망시키고 그곳을 중심으로 삼아 지금의 칼미크가 되었다. 남은 오이라트의 부족 중 칭기스 칸의 동생 주치 카사르의 후예를 자칭하던 호쇼트부는 티베트 내전에 개입한 후 이주해 떨어져 나가고 잔존 오이라트는 1640년 청의 성장으로 위협을 느낀 몽골과 화의한 후 준가르부를 중심으로 통합하여 최후의 유목 제국을 건설했다.
준가르의 군주 칭호는 갈단 때를 제외하면 한(Xān)이 아닌 '''홍 타이지'''(Xong Taiǰi)라고 전해진다. 헌데 홍 타이지는 청 제국의 숭덕제의 휘호로 잘 알려져있기도 한데, 그렇기에 숭덕제의 휘호에 관해서 논란이 있다.

2.2. 갈단 한[4] 즉위, 청나라와의 대립


의 등장은 북방 유목민족의 흥망을 바꾸게 된다. 계속되는 내분과 청의 정벌로[5] 몽골은 사실상 분열되고 정복되거나 힘을 못 쓰는 상황이였다. 그 반면 중국 서쪽의 오이라트계 종족들은 준가르를 중심으로 뭉쳐서 단합하기 시작했고 그들의 지도자로 갈단 한이 등장하면서 이후 청조에게 군사적으로 위협적인 존재로 서서히 성장하기 시작한다. 갈단은 준가르의 첫 홍 타이지인 바투르(Bātur)의 둘째아들이며, 원래 승려였으나 아버지의 후계자 및 형인 셍게가 형제들과의 다툼으로 피살당하자 환속해 준가르를 평정했다. 그 전까지 홍 타이지의 칭호를 쓰던 갈단은 이전까지 오이라트의 맹주였던 호쇼트 부족[6]을 정복하며 준가르를 통합하고 달라이 라마 5세에게 홍 타이지를 거쳐 '보쇽투 한'(Bošoqtu Xān)의 칭호를 받았다. 갈단은 한때 티베트 불교의 승려였던 경력 및 고승 웬사 투르크의 환생자로 공인받은 인연으로 티베트와도 우호관계를 유지하며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타림 분지로 영토를 넓혔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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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군과 준가르군의 전투.

갈단의 부와 인구는 서역을 장악했다. 그는 모래에서 기름을 뽑아내고 흙을 구워 유황을 추출하고 황산을 이용하여 초석을 만들었다. 구리, 납, 양질의 철이 생산되었다. 준마와 오랑캐 기수의 규모에서 그들을 능가할 자들이 없었다. ... 갈단은 질 좋은 무기를 직접 만들 수 있었기에 군용 자재를 멀리서 구하지 않았다. 그는 작은 고리 미늘을 연결하여 사슬 갑옷(Chain mail)을 만들었는데, 마치 직물처럼 가벼웠다. '''만약 화살이 이를 뚫으면 그는 갑옷 제작자를 죽였다.''' 또한 그는 회회족에 사절을 보내 화약 무기 사용법과 전술, 즉 먼저 총을 쓴 뒤 활과 검으로 싸우는 전법을 가르쳤다. 그는 병사들에게 총, 소검, 활과 화살을 휴대시키고 허리에 단도를 착용시켰다. 그들의 천둥 같은 고함을 들은 이들은 원근을 불문하고 항복했다.

- 진변기략 1687

1688년에 갈단이 외몽골 할하 부족의 내분을 틈타[8] 청나라령 외몽골을 공격하자, 서역의 교역로를 안정화하고 몽골티베트에서의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강희제는 오랜 준비 끝에 준가르 원정에 나서 적봉에서 준가르군을 격퇴한 뒤, 몽골 고원으로 갈단을 추격하며 여러 차례 승리를 거뒀다. 갈단은 울란바토르 북동쪽인 테렐지, 준모드에서 1696년에 벌어진 전투에서 패한 후 반격을 노렸지만 본국에서 조카인 체왕 랍탄이 반란을 일으키고[9] 티베트와의 연락도 끊긴 와중에[10] 본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1697년에 객사했고 시신은 청나라에서 인수해 장례를 치렀다. 갈단이 죽은 후에는 체왕 랍탄이 뒤를 이어 전성기를 구가하여 카자흐스탄에서 티베트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 때문에 준가르 제국에 로망을 느끼는 이들도 있으나, 준가르 제국의 국력은 러시아나 청조에 비하면 인구수(준가르는 60만 정도)나 농업 생산력으로나 기술력으로나 엄연히 뒤쳐져 있었다.

2.3. 준가르의 반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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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렇다고 청에게 일방적으로 당한것은 결코 아니었다. 옹정제 때 청나라 변방의 목마장들을 습격해 말을 대량으로 털어가고 청의 영토인 투루판을 공격하여 청나라를 놀라게 했다. 또한 강희제 말기에는 티베트 내정에 개입하여 달라이 라마 6세를 내쫓고 친준가르 승려를 새 달라이 라마로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준가르가 옹립한 달라이 라마는 정식으로 인정받지 못하며, 티베트와 호쇼트 부족은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해 달라이 라마 7세[11]를 새로 세우고 준가르 세력을 몰아냈다. 그리고 이때부터 티베트는 청나라의 세력권에 놓이게 된다.
청의 대신 악종기[12]는 준가르 쪽의 변방에 30만의 대군을 투입해야 한다고 16차례나 건의했으나 옹정제는 그건 너무 많다며 망설이다가 결국 악종기의 의견을 받아들여 20만의 병력을 파견했다. 그러나 푸르단이 이끄는 북로군이 호톤노르에서 준가르의 유인전술에 넘어가는 바람에 5만 명을 잃고 주요 장수들이 줄줄이 전사하거나 자결하는 큰 패배를 당하고 만다. 서로군을 이끌던 악종기도 이 패배의 책임을 물어 파면된다. 그나마 칭기즈 칸의 20세손인 체링이 준가르군을 격퇴하고 그 중 1만을 살해하여 영토를 유지할 수 있었다.[13]

2.4. 멸망


하지만 세력이 팽창한 준가르는 과거 비슷한 유목 제국을 세운 몽골 제국처럼 후계자 문제로 내분을 겪으며 약해져 갔다. 여기에 건륭제가 즉위한 후 청나라는 이전과는 다른 철저한 준비 끝에 본격적인 원정에 나서게 되었다. 압도적인 청의 국력과 내분이 겹친 준가르는 결국 후계자 싸움에서 역전을 노린 아무르사나의 투항으로 청에 복속된다.
그러나 청이 준가르 땅을 4명의 대등한 을 세워 분할통치하려하자[14] 자기가 혼자 대빵이 될 거라 생각했던 아무르사나가 반발해 다시 반란을 일으킨다. 물론 이미 대세가 기운 판에 상대가 될 리 없었고 아무르사나는 청군에게 패배하여 간신히 목숨만 건져 도망갔고 결국 이역만리인 러시아에서 죽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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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준가르가 복속을 거부하고 계속 저항하여 청에게 피해를 입히자 단단히 빡친 건륭제는 복속시킨다는 것을 포기하고 아예 '''멸족'''시키기로 결정해 항복도 받아주지 않고 주도면밀한 준가르 족 학살을 시작했다. 비록 중국 사서에서는 준가르족에 대한 멸족 시도를 발뺌하고 있긴 하나 '''학살하는 장수들에게는 상을 내리고 죽이진 않고 밖으로 내쫓는 장수들에게는 벌을 줬다'''는 것에서 이미... 그래서 어린아이건 노인이든 가릴거 없이 죽였다고 하며 설상가상격으로 천연두까지 돌면서 결국 준가르인은 건륭제의 제노사이드로 최소 80%, 최대 90% 이상이 사망했고, 그나마 살아남은 준가르인들은 러시아 제국이나 카자흐로 도망쳐서 현지 주민들에게 동화되거나 아니면 청나라에 붙잡혀서 노비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준가르는 역사에서 사라졌고 티베트에서 신장-위구르, 외몽골에 이르는 모든 영토가 완전히 복속되어 중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 후 건륭제는 십전노인이라는 명성을 위해 준가르 지방 원정의 공로를 쪼개 여러 개의 원정으로 둔갑시켰고 잔혹한 학살을 저지르고도 평화롭게 정벌했다는 '평정'으로 미화까지 했다. 물론 준가르한테 얼마나 질렸던지 건륭제는 중국 내에서 준가르라는 단어를 삭제하고 꺼내지도 못하게 했다.
이후 이 준가리아, 현 신장 북부지역에서는 위구르인들이 번영하게 된다. 참고로 청이 침략하기 전 이 지역의 인구는 준가르인이 60만, 위구르인들이 37만 정도로 추산된다.

3. 통치자 목록


출처
  • 1대: 하라쿨(?~1634)
  • 2대: 에르데니 바투르(?~1653)
  • 3대: 셍게(?~1671. 재위기간 1653~1671)
  • 4대: 갈단 한(1644~1697. 재위기간 1671~1697)
  • 5대: 체왕 랍탄(1643~1727. 재위기간 1697~1727)
  • 6대: 갈단 체렝(?~1745. 재위기간 1727~1745)
  • 7대: 체왕 도르지 남잘(1731~1750. 재위기간 1745~1750)
  • 8대: 라마 도르지(1726 또는 1728~1753. 재위기간 1751~1753)
  • 9대: 다와치(?~1759. 재위기간 1753~1755)
  • 아무르사나(1723~1757)

4. 번외: 토르구트의 귀환


그 후 1771년에 같은 오이라트 세력이었지만 17세기에 카스피해 인근 지역으로 떠나서 살던 오이라트의 일파인 칼미크(토르구트)인이 준가르가 소멸되어 사라진 땅에 다시 돌아오길 청원하자 건륭제는 이 지역에 자신의 영향력이 강화되는 기회라 여기고 허락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러시아가 중앙아시아 지배력이 약화될 것을 우려했고 군대와 휘하 다른 유목민족을 동원해 이들을 잡아죽이려 했다. 특히 칼미크를 싫어하던 카자흐인들과 키르기스인들은 칼미크인들을 적극적으로 공격했다. 그리하여 러시아도 칼미크인 학살을 시작했고 칼미크인들은 카자흐인, 키르기스인이 포함된 러시아군의 협공으로 9천 명이 넘는 인원이 사망했다. 물론 칼미크인들도 러시아군에게 저항하며 격퇴하기도 했지만 전원이 전투병이고 보급까지 받아 여유가 있는 러시아군과 달리 칼미크인들은 식량과 무기사정이 좋지못한데다 여성과 아이들이 같이 있었기에 맞서 싸울 때마다 피해가 막심했다.
특히 러시아의 칼미크 학살도 준가르를 멸망시킨 청나라만큼 주도면밀했는데 숲과 초원에 불을 지르고 산짐승을 죄다 잡아서 칼미크인들이 가져갈 만한 식량과 땔감, 가축 사료를 철저하게 없애버렸다.[15] 게다가 계절까지 겨울이라서 식량차단의 효과는 더욱 좋았다. 무엇보다 칼미크인들을 추격해서 족치기 쉽도록 전원 기병으로 편성했기에 추적해서 족치는게 더욱 쉬웠다. 그러다보니 칼미크인들은 러시아군을 피해서 사막이나 늪지로 가야만했는데 이곳을 지나간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아서 늪지에서만 3천여 명이 죽고, 바람이 끝도 없이 불고 눈이 내려 하루에 십리를 가기도 힘들었다. 게다가 러시아군은 휘하의 카자흐 기병대와 키르기스 기병대를 시켜 여기까지 추격해와서 공격했기에 이들과의 전투때마다 많은 수가 사망하는 비극이 발생한다. 러시아군은 공격하면서 사막과 늪지에서도 숲과 초원에서 했던 식량차단 전술을 잊지않고 하니 칼미크인들의 사망자를 더욱 늘렸다. 더구나 그곳에 거주하던 원주민들도 러시아군의 사주를 받았던 탓에 칼미크인들을 공격해왔다.
결국 이들 오이라트의 마지막 후예는 다시 8만 명만이 준가르 분지에 돌아오긴 했으나, 계속된 전투와 학살, 질병, 기아 등으로 남성 대부분이 사망하여 떠나올때 17만이었던 인구가 고작 6만 9천 정도만이 살아서 청의 도움을 받아 겨우 이곳에 정착할 수 있었다. 이때 청나라에 도착한 칼미크인들의 상태는 이들을 받아주던 청나라 관리 서현덕이 건륭제에게 보고할 때 이렇게 묘사할 정도로 나빴다.

투항한 자들을 살펴보니 노약자나 부상자, 아녀자들이 많았는데, 너나 없이 정신이 나간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저들이 우리 주둔지로 들어온 후 모두들 통곡하고 애원할 따름이었습니다. 그들의 참혹하고 궁핍한 모습을 보면서 실로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추위를 막을 수 있는 옷이 제대로 없었으며, 그나마 입고있던 옷도 다 찢어지고 아이들은 아예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습니다. 신발을 신지 않은 이도 부지기수입니다. 도중에 극도의 기아에 허덕였기 때문에 이곳에 와서 고기를 포식한 후 온몸에 열이 나자 물로 뛰어 들어 배가 불어 죽거나 병이 들어 죽은 자도 적지 않았습니다.[16]

이 생존자들 역시 대부분이 여성이라[17] 청에 충성하는 몽골인, 위구르인과 동화되었다. 칼미크인의 친척인 준가르인들은 위의 문단에도 나왔지만 멸족된 거나 마찬가지였고 오이라트의 후예들은 중국과 몽골, 러시아에서 소수민족으로 명맥을 잇게 된다.
칼미크족 자체가 준가르족과 먼 친척이라는점, 그리고 칼미크 중 일부가 준가르 분지로의 귀환을 따라서 거의 멸족되다시피 했지만, 준가리아로 가지 않고 남아있는 칼미크족들도 러시아령 칼미키야 공화국에서 지금도 평화롭게 러시아 땅에서 불교를 믿으면서 사는 것을 보면[18] 오이라트 자체가 완전히 멸족당한 것은 아니다.
[1] 튀르크계와 몽골계 종족들이 사용하는 칭호이다. 한국 학계에서는 주로 '칸'이라고 한다.[2] 준가르와 달리 20세기 초인 1912년까지 지속되었으니 최근까지 살아남았었던 청나라야말로 최후의 유목 제국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만 청나라의 지배민족이었던 만주족의 원거주지인 만주는 삼림지역이었기 때문에 유목보다는 농업과 수렵 그리고 타민족과의 무역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을 뿐더러 중원을 완전히 점령한 후 강희제 치세를 기점으로 점차 중국화되면서 문화적으로 한족에 거의 동화된 채 자신들의 민족 정체성만 간신히 유지하던 청나라 말기엔 변발과 호복을 제외하면 심하게 한화되어버렸다. 그리고 애초에 전신인 여진족도 농경, 수렵, 어업, 유목을 모두 하는 민족이었기에 진짜 유목만 하던 유목민족이 아니었다. 따라서 금나라청나라유목 제국이라고 하는 것은 엄밀히 말하자면 잘못된 것이다.[3] 알탄 칸은 다얀 칸의 손자이지만 몽골의 대칸은 아니다.알탄 칸은 몽골 6부중 튀메드부의 칸일뿐이다.하지만 여러차례 중국을 침입하고 1550년에는 북경을 포위 공격하는 경술의 변을 일으키는등 그 명성과 영향력이 몽골 전부족에 퍼졌다.그래서 당시 몽골의 대칸이었던 다라이손 구덴 칸은 알탄 칸에게 게게엔 칸이라는 직위를 주어 타협할수 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다라이손 구덴 칸은 차하르로 근거지를 옮길 수밖에 없었으며, 대칸의 권력은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4] 튀르크계와 몽골계 종족들이 사용하는 칭호이다. 한국 학계에서는 주로 '칸'이라고 한다.[5] 청으로선 반드시 족쳐야하는 것이 변방을 자꾸 약탈하는 몽골을 그냥 놔두었다가는 두고두고 골칫거리라서 그렇다.[6] 호쇼트 부족은 셍게의 아내인 아누다라의 출신 부족이며 당시 지도자는 구시 한이었다. 셍게가 죽자 갈단은 유목민 관습에 따라 형수를 아내로 맞았다.[7] 참고자료: 배석규, 대몽골 시간여행.[8] 당시 할하는 자삭투 한과 젭춘담바 후툭투의 동생 투시예투 한이 내분을 벌였는데, 갈단은 자삭투 한을 지원했으나 갈단의 동생이 투시예투 한에게 살해당했다. 또한 웬사 투르크는 몽골 활불인 젭춘담바 후툭투 1세의 스승이었고, 웬사 투르크의 환생자를 자처한 갈단은 1688년에 할하에서 열린 회담에 달라이 라마의 대리인(간단사원 좌주)과 젭춘담바가 동석에 앉자 아니꼽게 여겨 할하를 침공할 때 젭춘담바가 머물던 에르데니 사원을 공격했다. 피신한 젭춘담바는 강희제에게 도움을 요청했다.[9] 체왕 랍탄은 셍게의 아들이며, 그가 장성하자 왕위를 노릴 걸 경계한 갈단이 숙청을 시도하자 도망쳐 권토중래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갈단이 외몽골에서 패배하자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10] 당시 티베트는 갈단을 지지하던 달라이 라마 5세가 사망하고 6세가 즉위하기까지의 과도기였고, 섭정인 상게 갸초는 체왕 랍탄을 지지했다.[11] 6세가 미리 지명한 환생자였다.[12] 악비의 21대손. 옹정제와의 대화형식으로 된 대의각미록으로 유명한 증정에게 모반을 권유받은 바로 그 인물.[13] 체링은 그 공으로 울랴수타이 정변좌부장군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건륭제는 그를 맹기 몽골의 상징적인 인물로 삼았으며, 사후에 태묘에 그 신위를 봉안해주었다.[14] 이는 외몽골, 신강, 티베트도 이런 방식으로 경영했다.[15] 심지어 숲과 초원에 식량을 구하러가던 칼미크인들이 러시아군이 놓은 불에 많은 수가 타죽기도 했다.[16] 원래 기아에 허덕인 사람에게 영양을 공급시킬때 무턱대고 고기나 간식류같은것을 먹이면 몸이 소화를 시키지못하고 죽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묽은죽같은 몸이 소화시킬 수있는 음식부터 먹여야 한다.[17] 왜냐면 원래 전쟁을 많이 하면 군인들이 많이 죽어서 나라가 자연스럽게 여초국가가 되어 버린다. 당장 파라과이가 3국 동맹 전쟁이 끝난 지 한참이나 지났음에도 아직도 여초국가다. 거기에다가 청나라군과 러시아군은 종족의 보존을 끊으려고 남성과 아이들을 집중적으로 학살했기 때문이다. 이러니 남자는 아예 씨가 마를 수밖에 없다.[18] 마냥 평화로웠던 건 아니고 러시아의 동화 정책과 소련의 박해를 받던 시기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