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영어제목- Why Has Bodhi-Dharma Left for the East?
1. 개요
2. 줄거리
3. 평가
4. 그밖에


1. 개요


1989년에 개봉된 한국 영화다.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학교) 서양화 미술교수이던 배용균이 기획 8년, 제작 4년에 걸쳐 그야말로 홀로 다 만든 영화다. 감독, 제작, 연출, 각본, 촬영, 미술, 편집, 조명을 싸그리 그 홀로 맡았으며 배우들도 영화 연기랑 무관한 배우를 썼다. 저예산 독립영화로 소리소문없이 만들어진 이 영화는 한국 최초로 로카르노 영화제 대상인 금표범상을 수상[1] 하면서 서구 국제영화제 대상을 처음으로 수상해 당시 엄청난 화제를 모았다.
그리고 로카르노 가기 전 1989년 칸 영화제에 출품해 주목할만한 시선에 올랐는데 이두용 감독의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1984) 이후 2번째다.

2. 줄거리


젊은 스님 기봉은 홀로 살고 있는 앞 못 보는 어머니를 두고 있다. 어머니를 모셔야 하는가, 아니면 그냥 이게 하늘 뜻이니 도를 닦고 승려로서 살아가야할지 고민한다. 그런 고민을 하던 기봉은 어린 동자스님 해진과 살고 있는 노스님 혜곡이 사는 작은 암자를 찾아가 마음 수련을 한다. 그러나, 이런 번민이 이어지고....
한편, 동자스님 해진은 어느 날 새 한마리를 줍게된다. 다친 새를 돌보며 정성껏 치료하지만, 새는 죽고 만다[2]. 죽음에 대해 해진은 고민하게 되고, 혜곡은 자신이 병에 걸려서 오래 살지 못함을 알게 된다. 번민하던 기봉을 탓하던 혜곡은 나중에 자신이 오래 못 살고 죽을 것을 이야기한다. 결국, 혜곡은 입적하고, 그의 시신을 말없이 화장하는 기봉[3]. 그리고, 곁에서 말없이 보고 있는 암자에서 맡아 키우던 황소[4].
혜곡에 대한 유품을 모두 정리하고 기봉은 길을 떠나려한다. 어디로 가시냐고 질문하는 해진에게 기봉은 답변하는데...

3. 평가


지금이야 한국 영화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아카데미상 4관왕 수상작도 나와 격세지감이지만, 당시 충무로는 그야말로 경악했다. 듣도 보도 못한 감독이 홀로 거의 영화를 다 만들어버린데다[5] 첫 서구영화제 대상을 받았으니. 문화관광부에서 포상금으로 3,000만원을 수여했다.
그리고, 이러한 화제 속에 175분에 이르는 긴 시간에 대사도 그리 없고, 매우 지루할 수 있음에도 서울관객으로 14만 3,881명을 기록하여 흥행도 당시 기준으로 대박이었다.
해외에서도 상당히 성공한 영화라서 크라이테리온 콜렉션 첫 한국 영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영화기도 하다. 한동안 이 영화가 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영화로 꼽힐 정도. 단 레이저디스크로만 나왔고 DVD는 다른 곳에서 나왔다.
일단 초기 판본이 DCP 리마스터링 되었으며,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종종 튼다.
2020년 배용균 본인이 참여하여 감독판이 2년에 거쳐 4K 복원 중이다. 계획상으로는 올해 상반기에 영화제 등지에서 공개될 예정이라고. https://www.koreafilm.or.kr/kofa/news/notice/BC_0000055770
2020년 기준으로 IMDB에서는 10점 만점에 7.5점의 평가를 받고 있다. 화가 출신 감독이 만들었다는 점 때문인지 영상미에 대해 높게 평가하는 댓글이 많으며, 선불교에 대한 배경지식이 있는 해외 시청자들의 평가가 상당히 좋은 편. OST가 다케미쓰 도루를 연상하게 한다는 평가도 보인다. 이 영화를 보고 배용균의 다른 영화를 찾아봤다가 그 난해함에 실망한 사람들은 덤이다.

4. 그밖에


  • 극 중 노스님 혜곡을 연기한 이판용은 배우도 아닌 민간인이며, 그것도 독실한 개신교 장로였다. 1989년 영화월간지 로드쇼 5월호에 의하면, 당시 배용균 감독이 노스님 이미지에 맞는 배우를 찾고자 오랜 시간을 걸려 찾았지만 마음에 드는 배우를 찾지 못했다가 우연히 이 분을 알게되어 이 분이야말로 내가 찾던 노스님 역에 어울리는 이미지라고 찾아가서 설득했다. 당연히 난데없이 영화라니? 그것도 머리카락 박박 밀고 승복입은 승려를 맡아달라? 이판용 씨는 정색하며 거부했다. 그러나, 엄청난 설득에 결국 노스님을 연기하게 되었다. 극중 대사도 그리 없고, 영상미 쪽으로 많이 주목을 받게했기에 연기에는 큰 불편이 없었다고. 그리고, 영화 완성을 한 지 얼마 안 돼 병으로 별세했다고 한다. 전문배우도 아니라 그런지 이판용 씨에 대한 검색을 해봐도 생몰연도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 젊은 스님 기봉을 맡은 신원섭은 이 영화 주연에서 그나마 연극배우로 연기 경력이 있었고 1992년에 한국 영화 <세상은 살만큼 아름답다>에서 최종원과 같이 나온 바 있다. 이 영화가 상업적으로 대박을 터트린 건 아니여서 이후로 연극무대에서 활약했다. 해진을 맡은 아역 황해진도 이판용처럼 이후 영화계를 떠났다. 기사에 따르면 직지사에 갔다가 찾아낸 얼굴이라 한다. 영화를 찍으면서 어떤 장면 연기가 가장 힘들었냐는 질문에, '연기는 힘들지 않았는데, 감독님이 밥을 안 줘서 힘들었다'라고 대답했다고.
  • 배용균은 이 영화 하나로 주목을 받게 되지만, 2번째 영화인 <검으나 땅에 희나 백성>은 6년이나 걸린 1995년에 만들어졌고 베니스 영화제에 초청받았지만 개봉은 1997년에서야 이뤄졌다. 하지만, 그야말로 묻혀졌고 흥행도 서울 관객 7천명도 안된 집계를 기록한다. 2000년 초반에는 서강대학교 교수로 재직했으나, 사표를 쓰고 배용균은 해외로 가서 20년 넘도록 3번째 영화를 내놓지 않고 있다. 2008년 탐문 기사에서는 지인들조차도 '교수 생활이 힘들어서 그만 뒀을 것이다'라고 추측할뿐 잘 알지 못할 정도. 예전 대구 아파트를 찾아내긴 했지만 부인 외에는 방문하는 사람이 없었고, 그마저도 오랫동안 방문하지 않았는지 인적이 뜸했다고 한다. 영화제에도 나타나질 않았다고.[6] 출처 스타일 면에서도 이후 한국 영화 르네상스랑 전혀 관계 없기 때문에 배용균은 한국 영화사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가장 미스터리한 감독이자 과작 감독으로 꼽힌다. 2019년 부산국제영화제 회고 상영 후 오래간만에 근황이 밝혀졌는데, 어떻게 연락이 닿아서 평론가가 관객과의 대화를 요청했으나 거절했다고 한다. 전해온 메시지에 따르면 아직까지도 영화를 사랑해줘서 감사하지만, 대중들 앞에 나설 생각은 없다고. 이후 4K 복원판 작업을 위해 한국영상자료원에 방문했다고 한다. 링크.

  • 한양대 연극영화학과 교수이던 백일성 감독 데뷔작 『한줌의 시간 속에서』가 1993년 제46회 이탈리아 살레르노 국제영화제에서 작품상, 즉 대상을 받은 게 이후 서구영화제 2번째 대상 수상작이다. 전무송, 고 이미경 같이 달마와....다르게 배우들은 전문배우들이 나왔다. 하지만, 제법 인지도를 인정받았던 로카르노 영화제와 달리 살레르노 영화제는 정보를 찾기도 어려운 영화제라서 그런지 묻혀졌다. 한국에서 이 영화제 정보도 찾기 어려운데 사실 이 영화제는 영화를 통해 문화를 홍보하는 뜻에서 이뤄진 것으로 영화 비영리 단체 CINE CLUB SALERNO에서 주최하고 있다. 2019년까지 73회째 꾸준히 이어져 오고 있으며 영화를 통한 관광 홍보 분야같은 곳으로도 수상하기에 1980년에 한국 홍보 다큐멘터리 영화인 한복이 이 영화제 관광 분야에서 대상을 수상한 것을 비롯하여 여러 홍보 다큐멘터리 영화가 수상한 바 있다. 백일성은 1995년에 2번째 영화 <인간아>를 준비했지만 이후로 정보조차 찾아보기 어렵고 필모그래피에서도 『한줌의 시간 속에서』 한편만 검색된다.
  • 이 영화를 소개하던 월간지 로드쇼는 한국 영화도 이렇게 국제영화제 대상을 받을 수 있을 만큼,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도 언젠가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서술했는데 딱 30년 뒤에 기생충(영화)이 황금종려상을 수상하게 된다. 정작 로드쇼는 1998년 창간 9년만에 폐간했다.
  • 정성일과의 대담에서 배용균은 '일요일의 리얼리즘'을 찍고 싶었다고 밝힌 바 있다. 정확히는 조물주가 창조를 마친 뒤, 휴식하는 시간, 또는 일요일 교회나 절에 가는 한적한 시간을 담고 싶었다고.
  • 촬영은 주로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에 있는 봉정사 영산암에서 이뤄졌다고 한다.
  • 판본이 다수 있는 영화다. 개봉판 / LD판 (135분), 마일스톤 DVD 출시 당시 재작업한 감독판 (145분), 초기 편집본 / VHS판 (170분)으로 나눠져 있다. 이 중 감독판과 초기 편집본이 DCP로 만들어졌다. https://blog.naver.com/sega32x/221670183263. 한국영상자료원과 배용균 본인은 감독판을 정본으로 삼고 있다.

[1] 구봉서가 주연으로 나온 영화 수학여행(1969)이 지금은 사라진 이란 테헤란 국제영화제 대상을 받는다든지 그보다 앞서, 지금은 듣보잡이 되어버린 아시아 태평양 영화제에서 시집가는 날(1957)이 대상을 받은 게 해외영화제 대상 첫 수상작이지만 이 영화제들은 아시아 영화제로 아시아 영화들에게 주로 시상하던 한계가 있었다.[2] 영화 마지막에도 새가 한번 더 나온다. 이 새는 죽음을 은유하며, 살생을 저질렀다는 해진의 죄책감을 상징하기도 한다.[3] 화장하고 남은 혜곡의 재는, 생전에 혜곡이 던진 화두인 '마음의 달이 차오르면 주인공은 어디로 가는가'와 오버랩된다.[4] 인간의 눈먼 욕망에 대한 상징이다.[5] 때문에 파업전야, 오 꿈의 나라, 칸트씨의 발표회, 상계동 올림픽과 함께 한국 독립영화의 효시로 꼽히기도 한다.[6] 개봉 당시 관객과의 대화를 가진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