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대통령 초상화
1. 개요
청와대 세종실 전실에 전시되어 있는 역대 대통령들의 초상화. #1 #2
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들의 초상화로 청와대에서 국무회의를 하는 세종실로 들어가기 위한 전실에 전시되어 있다. 현대판 어진인 셈. 영부인의 경우에는 영부인 접견실인 무궁화실의 복도에 사진이 걸려있다. 대통령의 임기가 1년 정도 남았을 때 문화체육관광부와 작가협회에서 화가들을 추천하고 대통령이 최종적으로 결정한다. 직접 보고 그리는 것이 아닌 사진을 바탕으로 초안을 그린 후에 대통령의 의중을 반영하여 그린다고 한다. 완성된 그림은 마지막 국무회의 때 설치한다고 한다. 이러한 행사를 초상화 헌액게첩 행사라고 부른다. 퇴임 직전에 이뤄지므로 사실상 현직 대통령의 초상화는 걸려 있지 않다고 보면 된다.
탄핵이나 퇴임 후 예우 박탈 등과는 관계 없이 대통령이었으면 다 전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대한민국 국회의사당 옆 헌정기념관에는 "헌정을 파괴했기에 박정희, 전두환의 초상이 없다"는 주장이 있지만 사실은 '''국회의원 출신이 아니라서''' 그런 것이다. 정확한 명칭은 "의회가 배출한 대통령관"이다. 전직 국회의원이었던 박근혜는 아직 걸려있지 않다.
청와대의 주 회의장 노릇을 하는 "세종실" 앞 복도에 일렬로 걸려 있다. 현임자의 초상은 전시하지 않는다. 세종실이 국무회의나 정상회담에 주로 사용되는 관계로, 뭔가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의미심장한 설정 샷을 찍거나,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이 믹스커피 같은 걸 타먹으며 잡담하는 공간으로(...) 사용된다.
맨 위의 문재인 정부 시절 사진과 밑의 참여정부, 이명박 정부 사진을 비교해 보면 시간이 갈수록 초상화들 간의 간격이 좁아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초상화를 좌우 대칭으로 전시하기 위하여 임기 말마다 모든 초상화의 위치를 조금씩 조정하는 듯 보인다.
2. 이승만
김인승[1] 이 그렸다. 가격은 1,000만원으로 거래되었다.
3. 윤보선
김인승이 그렸다. 가격은 1,000만원으로 거래되었다.
4. 박정희
김인승이 그렸다. 가격은 1,000만원으로 거래되었다.
국장 영정과는 다른 그림인데, 국장에 쓰인 그림은 정형모가 그렸다. 지금은 현대미술관에 보관돼 있다. 정 화백은 1979년 10월 27일 오후 문공부로부터 박 전 대통령 영정을 그려달라는 주문을 받았다. 순간 정 화백은 박 전 대통령의 모습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두려운 감정이 앞섰으나 4년 전인 1975년 8월, 박 대통령을 청와대에서 직접 만났을 당시의 느낌[2] 을 그대로 표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일주일 동안 영정을 완성했다고 한다.
5. 최규하
박득순이 그렸다. 가격은 1,000만원으로 거래되었다.
6. 전두환
정형모[3] 가 그렸다. 매입가는 1,000만 원이었다. 머리숱이 적어서 그게 처음부터 머리가 벗어진 건 아니니까 일부러 머리숱이 조금 더 있었을 때를 생각하면서 그렸다.
7. 노태우
김형근이 그렸다. 7,500만원에 청와대에서 매입했다고 하며, 가격이 꽤 높은 편이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초상화는 다른 전 대통령의 것과 다른데, 배경을 자세히 보면 봉황 한 쌍이 마주보고 있다. 후광이 비치는 듯 띠가 둘러져 있기도 하다. 이는 "대통령의 인물이 중요하지만 배경도 신경을 많이 썼지. 황금색으로 칠한 건 영원히 변치 않는 황금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였어. 퇴임하는 대통령이지만 후대에 길이 기억되라는 뜻이지. 봉황은 알다시피 대통령의 상징이라서 넣었고."라고 김형근 화백이 밝혔다.
김 화백에 따르면 초상화 제작 시 노 전 대통령은 특별한 요구사항이 없었다고 한다. 그저 “잘 부탁한다”는 인사만 남겼다고 한다. “청와대에 초청 받아 갔을 때 노 전 대통령을 처음 봤지. 악수 한번 하고 그분이 나가려는 거야. 내가 ‘제 앞에 몇 번 앉아 주셔야 하는데…’ 라며 무례하게도 포즈를 취해달라고 했어. 사진만 보고 그릴 재주는 없었거든. 허허.”
김 화백은 “대통령의 초상화라고 특별할 것은 없다”고 했다. 다만 오래 보관될 작품이니 오래 보고 즐길 수 있도록 그렸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초상화 속 주인공이 늙는다 해도 고유의 인상은 변함이 없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노 전 대통령의 눈빛은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는 눈빛이 아니고, 날카로우면서도 인자한, 묘했다고 한다. 사진을 하도 뚫어져라 봐서 아직도 얼굴이 눈에 선하다고도 했다. 그는 “노 전 대통령의 초상화에서 ‘눈빛’을 표현하기가 가장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초상화는 청와대 관계자가 직접 차로 가져갔다. 나중에 “노 전 대통령이 상당히 만족했다”고 비서관을 통해 전해 들었다. 막힘 없이 대답하던 그가 “초상화 값으로 얼마를 받았느냐”는 질문에는 망설였다. 그는 “섭섭하지 않게 받았다”고만 말했다.
8. 김영삼
이원희 계명대 교수가 그렸다. 그림을 그릴려면 먼저 당사자를 봐야한다는 신념 때문에 독대를 고집했다고 한다. 당시 국정원장이 30분 독대였는데, 이원희는 1시간 가량 독대를 했다고 알려졌다. 때문에 총무수석이 대단하다며 농담을 건넸다고 한다. (...)
이 화백은 “당시 내가 대학 교수(현재 대구 계명대 미술대 학장)라니까 김 전 대통령이 대학 다닐 때 이야기를 했다”며 “친구들 술을 사주다가 전당포에 물건을 맡긴 얘기도 했는데 대통령이 저렇게 솔직해도 되는가 싶어 놀랐다”고 말했다.
이 화백은 초상화를 그리기 앞서 사적인 이야기를 나눈 덕분에 대통령의 인간적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피부 결이나 작은 안면 근육의 움직임까지도 세세하게 스케치할 수 있었다. 김 전 대통령은 피부가 아기처럼 곱고 입 꼬리에서 자신감이 묻어났다고 한다.
여느 작가들과 달리 이 화백은 대통령에게 직접 초상화를 전달했다. “초상화는 넥타이와 배경색을 달리해 두 점을 그려갔어요. 마음에 드시는 걸로 결정하라고 말씀 드렸지요. 수정해 달라는 말은 없었고, 웃으시며 ‘좋다’고만 짧게 말했어요. 아마 임기 말에 여러 가지 문제로 어수선해서 초상화를 자세히 평할 여유가 없지 않았나 싶어요.”라고 이원희는 밝혔다. 매입가는 1,500만 원이었다.
이 화백은 지금도 김 전 대통령의 초상화가 맘에 들지 않는다고 한다. 당초 계획보다 작업 기간은 늘어났지만 여러모로 자신의 ‘베스트’는 아니라는 생각이다.
9. 김대중
정형모가 그렸다. 정형모는 육영수의 영정을 그린 것을 계기로, 박정희의 눈에 들었다. 이후 각종 청와대의 그림을 전담했다. 이러한 명성으로 전두환에 이어 김대중의 초상화도 맡았다. 그리기 전에 김대중을 몇 차례 만났다.
정형모의 기억으로 김대중은 한마디 한마디를 신중하고 진지하게 이어나갔다고 기억하고 있다. 초상화는 사진을 보면서 2~3개월간 그렸다고 한다. 그림이 마음에 들었던 김대중은 하나 더 그려달라고 해서, 다른 하나는 김대중도서관에 걸었다고 한다. 가격은 2,000만원으로 거래되었다.
10. 노무현
이종구 중앙대학교 교수가 그렸다. 이종구는 "농민 화가", "민중미술가"로 유명하다. 미술의 민주화와 사회성 회복에 관심을 가진 이종구는 70·80년대 군부독재 시절 사회비판적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노무현은 4월 말 관저에서 점심식사를 하면서 "농촌 출신으로 농민의 얼굴을 그린 분이라 초상화를 부탁하고 싶었다"며 "제 초상에도 농촌에서 산 사람의 표정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10여년 전에 개인전에서 인상 깊게 보고 연락했다고 한다. 정부미 부대에 농부 얼굴을 주로 그려온 이종구는 "8개월 동안 고민한 끝에 소탈하면서도 젊은 모습으로 캔버스에 초상화를 완성했다"고 밝혔다. 1시간 20분 동안 이어진 식사시간 동안 대통령으로서의 고충도 털어놓았고, 이라크 파병·FTA 등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말해서 ‘인간적인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이 화백은 “초상화에 두 달 정도 시간을 쏟았으나 붓이 자유롭게 놀지 않아 애를 먹었다”고 했다. “초상화에서 부드러움과 카리스마, 편안함과 긴장감이 동시에 느껴지기가 쉽지 않았어요. 노 전 대통령이 쌍꺼풀과 주름이 두드러져 보이지만 전체적인 분위기에 맞게 부드럽게 표현했습니다. 넥타이도 원래 회색이었는데 젊은 대통령을 상징하기 위해 빨간색으로 바꿨죠.”
2007년 4월 중순부터 준비했다고 한다. 서명도 하지 않은 미완성 초상화를 먼저 보내 평을 들었는데 당시 노 전 대통령은 권양숙 여사와 함께 자신의 초상화를 30분 정도 꼼꼼히 살펴보고 서는 “머리칼이 너무 단정하다는 지적을 받았습니다. 피부가 지나치게 깨끗하게 표현됐다고도 하셨어요. 농촌 사랑방에서 담배 피고 농담하는 보통 서민으로 그려지길 바라셨는데…. 대통령이니까 ‘있어 보이게’ 그리려 했던 게 마음에 안 드셨나 봅니다.”라며 평가를 했고, 이후 지금의 초상화가 탄생했다. 초상화는 2008년 2월 9일 일반에 공개되었다. 가격은 1,500만원으로 거래되었다.
11. 이명박
정형모가 그렸다. 전두환과 김대중을 그린 적이 있다. 퇴임 직전에 급하게 의뢰를 받아 시간이 부족했다고 한다. 만나기는 2번을 만났다고. 이명박은 초상화를 보면서 "피부가 잘 나왔다. 실물보다 낫다"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현실적이고 주관이 뚜렷했다고 한다.
12. 박근혜
이원희가 그렸다. 이원희는 이미 김영삼 대통령의 초상화를 그린 바 있다.
보통 초상화는 대통령의 임기 말엽에 그려서 퇴임 전 마지막 국무회의 때 액자로 만들어 걸어놓는데, 재직 중 탄핵으로 인해 파면된 박근혜는 초상화를 만들게 된 과정이 달랐다. 국회에서 탄핵 소추가 된 후, 2017년 1월 초 청와대로부터 이원희에게 의뢰가 들어왔다고 한다.[4] 과거 다른 화가들은 독대를 해서 직접 당사자를 만나고 난 뒤에 그렸으나, 박근혜의 경우는 파면과 퇴임, 다시 구속되는 과정에서 시간적 여유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청와대 관계자는 단 한 장의 사진만을 건네고 그대로 그려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다른 자료도 달라는 요청을 했지만 거절했다고 한다. 작품은 박근혜가 탄핵된 뒤 완성되어 3월 20일 청와대로 넘어갔다. 때문에 정작 박근혜는 초상화를 보지 못했다고 한다.
초상화가 미묘한 느낌이 든다는 세간의 평가에 이원희는 "어떠한 의도를 갖고 그림을 그리지는 않았다”면서도 “박 전 대통령의 사진 자체는 힘이 있을 때의 밝은 모습이지만, 보는 사람에 따라 화가의 무의식 속에서 비극적인 상황이 그림에 영향을 미쳤다고 해석할 수는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으로 인해 헌정기념관의 "의회가 배출한 대통령관"에 걸리게 될 지는 미지수이나, 박근혜 역시 전직 국회의원이었기 때문에 이승만이나 노태우의 사례로 보아 걸릴 가능성이 있다.
13. 문재인
[1] 개성 출신. 일제 강점기, 도쿄미술학교에서 서양 유화를 전공하였다. 그는 적극적인 친일활동을 벌이며 일본의 군국주의 작품을 다수 창작했다. 해방 이후에는 이화여대 미술대학 교수가 되었고 정부 요인의 초상화, 정부의 공식 도안 등을 도맡아 작업했다. 그의 이러한 행보는 권력지향적 성격뿐 아니라 그가 독보적인 미술 술기를 가졌기 때문이다.[2] 인간적이고 수줍은 듯하면서 상대방의 가슴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3] 육영수의 초상화를 그린 후 청와대 전속 화가로 활동했다. 제일 유명한건 박정희의 영정.[4] 문화체육관광부와 미술계의 추천→청와대 참모진의 검토와 보고→대통령의 결정이 일반적인 과정이다. 박근혜 초상화에 대해서는 약식으로 진행되었다는 추정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