쑨뎬잉
1. 개요
중화민국의 군벌. 서태후를 비롯하여 청황실의 무덤을 도굴하는 동릉 도굴 사건을 일으켜 도굴장군이라는 악명을 얻었다.
2. 생애
2.1. 어린 도박사
1889년 1월 13일, 하남성 영성현 서양루촌에서 빈농 손옥림과 부인 소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손옥림은 처가인 소씨 가문의 땅 2무를 빌려서 겨우겨우 먹고 사는 가난한 농부에 불과했다. 그런데 쑨뎬잉이 태어나던 날, 점쟁이 한 사람이 쑨뎬잉의 외할머니 집을 찾아가 이 집안에서 흑룡이 강림하여 태어났다고 아부하면서 밥을 얻어먹었다. 밥을 얻어먹은 점쟁이는 쑨뎬잉을 보더니 문관이 되면 독무에 이를 것이고 군인이 되면 상장군에 이를 것이며 상인이 되면 큰 재산을 모을 것이라는 점괘를 내렸다. 그리고 쑨뎬잉의 원수는 이 나라에서 가장 존귀한 인물이라는 괴이쩍인 말을 남긴 후 쑨뎬잉의 이름을 전영, 아호를 금귀, 자를 괴원으로 지어주고 떠났다. 당연하지만 전제군주국인 청나라에서 황제의 원수가 태어났다는 말은 삼족이 몰살당할 수 있는 무시무시한 소리였으므로 소씨 집안은 점쟁이의 말이 절대 새어나가지 않게 함구하였다.
한편 쑨뎬잉의 아버지 손옥림은 처가에서 땅을 빌려주었음에도 이를 부치지 않고 빈둥거리다가 급전이 필요하면 도둑질을 하거나 사기를 쳐서 돈을 떼먹고 훈계하는 처가 식구들을 구타하곤 했는데 결국 홧병에 걸린 쑨뎬잉의 외할머니가 세상을 떴다. 분노한 소씨 집안 사람들은 손옥림을 흠씬 두들겨 팼는데 손옥림은 반성하지 않고 오히려 칼을 구해서 소씨 집안 젊은이를 찔러 죽여버렸고 그 죄로 관아에 잡혀가 참수당했다. 어릴 때부터 집안이 풍비박산난 상태였지만 쑨뎬잉의 어머니 소씨는 점쟁이의 말을 철썩같이 믿고 가난한 살림에도 쑨뎬잉이 7살이 되자 사숙에 보내 공부를 하게 했다. 하지만 천방지축으로 말을 듣지 않던 쑨뎬잉은 사숙에서 공부는 안하고 싸움질만 해댔고 훈장이 자신을 꾸짖자 앙심을 품고 사숙에 불을 질러버렸다.(...) 결국 쑨뎬잉은 사숙에서 완전히 쫓겨났고 설상가상으로 천연두에 걸려 죽다 살아나게 됐는데 겨우 목숨은 건졌으나 얼굴에 곰보자국이 남아 훗날 손대마자, 마가 등의 별명을 얻게 된다.
결국 쑨뎬잉 모자는 서양루촌 주민들의 멸시를 받다가 손옥림의 고향인 손가장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주변의 멸시에 상처를 받은 쑨뎬잉은 더욱 막나가게 되었고 13살 즈음에 아예 손가장의 건달 우두머리가 되었다. 건달 패거리 중에는 집안이 부유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쑨뎬잉은 이들과 노름을 하여 적당한 돈을 잃어주면서 사람을 꾄 다음에 어느 틈에 더 많은 돈을 따면서 노름으로 생계를 이어나갔고 그것으로 어머니를 봉양했다. 16세에 이르러 쑨뎬잉은 아예 유명한 도박사인 숭현사람 조낙천의 제자가 되어 하남성 일대를 떠돌아다니면서 도박을 하여 먹고사는 타짜 인생을 살게 되었는데 20세 즈음에는 도박으로 많은 돈을 모아 지역의 고관과 명사들을 초청하여 연회를 베푸는 등 지역유지의 수준에 이르렀다.
2.2. 군문에 들다
그런 쑨뎬잉이 22세가 되었는데, 선양의 비밀 도박장에서 도박을 하던 쑨뎬잉은 경찰에 체포되어 3개월 간 구금되었다. 이때 쑨뎬잉은 예서지역의 비적인 초문전을 만나게 되었는데 초문전은 쑨뎬잉에게 도박사 대신에 군인이 될 것을 권유했다. 도박계에서 나름 일가견이 있는 위치였지만 일개 포졸에게도 굽신거려야 한다는 사실에 좌절했던 쑨뎬잉은 출세하기 위해 너도 나도 입대하던 분위기에 편승하여 하남성 의군통령 강계제의 부대에 입대하였다. 하지만 평생 도박으로 먹고 살았던 쑨뎬잉은 군대에서도 도박을 끊지 못해 불법적으로 도박판을 벌였다가 강계제의 동생인 관대 강계흔에게 적발되었다. 강계흔은 쑨뎬잉에게 곤장 40대를 때렸고 분노한 쑨뎬잉은 그길로 탈영하여 다시 도박사를 하였다. 그리고 이때 마약 제조법을 배워서 마약장사까지 하게 되었다. 쑨뎬잉은 아편과 금단 등 마약을 팔아 어마어마한 돈을 벌었으나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건국되는 혼란기를 보고 돈만 가지고는 살기 힘들겠다는 생각을 하고 1912년 도적 출신의 군벌 장치공의 부하로 입대하였다. 장치공을 비롯하여 지방군들은 군기가 엄격한 강계제의 의군과 달리 군기가 썩을 대로 썩은 상태였고 쑨뎬잉은 군문에 든 상태에서 마약 장사에 열을 올렸다. 1914년, 하남육군 제1혼성연대장 겸 예서 진수사 정향령과 알게 된 쑨뎬잉은 정향령과 함께 본격적으로 아편 장사에 돌입했다. 정향령의 위세를 등에 업게 된 쑨뎬잉은 섬서, 안휘까지 장사를 넓혔고 관동주, 한커우, 연운항 등의 대도시에도 아편을 팔아치웠다. 이때 그가 개발한 홍환이라 불리는 헤로인이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홍환 팔이로 재미를 본 쑨뎬잉은 아예 가짜 헤로인을 만들어 팔아서 더 많은 수입을 얻었고 정향령은 그런 쑨뎬잉을 총애하여 소대장으로 승진시켰다가 다시 중대장으로 승진시켰다. 이에 쑨뎬잉의 옛 건달 부하들이나 도박친구, 술친구들이 몰려와 의탁했고 쑨뎬잉은 이들을 모두 자신의 부하로 삼았다. 이때가 쑨뎬잉이 33세가 되던 해였다. 사업은 계속 확장되어 난징, 상하이, 감숙성에 이르기까지 동서남북 전역에서 쑨뎬잉의 마약이 팔렸고 마약 종류도 다양화되어 헤로인의 일종인 백면, 금단, 삼량, 거기포 등을 제조해서 판매했다. 이때 쑨뎬잉의 모사로 예서의 소제갈이라는 별명이 있는 흑부자라는 사람이 있었다. 흑부자는 청나라 거인 출신으로 점쟁이질을 하다가 쑨뎬잉에게 의탁하게 되었는데 그는 홍수전, 쑨원, 장쭤린, 차오쿤, 우페이푸 등의 이름을 열거하며 난세에는 천하를 뒤엎거나 한 지역을 확고히 틀어지고 웅거하는 호걸들이 두각을 나타내며 단순히 남의 권세에 빌붙어 허장허세하는 것은 결과가 좋지 않다고 충고했다. 흑부자의 말에 귀가 솔깃해진 쑨뎬잉은 하남성의 도교 종파인 상선묘회도의 교주 장명원의 제자 이로회를 찾아가 묘회도에 입교했다. 중대장 신분을 가지고 있던 쑨뎬잉은 묘회도의 높은 서열을 보장받았고 묘회도 도장이 되어 신도들을 하남성 전 지역에 침투시켜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였다.
쑨뎬잉이 파는 마약은 효력이 독했기 때문에 중독자들이 양산되었고 중독자들이 각종 범죄를 저질러 사회적 폐해가 컸다. 결국 1922년, 하남성을 장악하고 있던 군벌 우페이푸는 마약 매매를 금지시키고 쑨뎬잉에 대한 체포령을 하달했다. 하지만 마약 장사와 교주질로 두터운 인맥을 쌓은 상태였던 쑨뎬잉은 수배령이 내려졌다는 소식을 접하고 인맥을 동원하여 하남성 섬현으로 숨어버렸다.
2.3. 비적이 되다
그러던 어느날 쑨뎬잉은 부하들과 함께 도박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쑨뎬잉의 부하 우씨가 가지고 있던 돈을 모조리 잃고 분노해서 자신의 아내를 걸고 한판을 더 하겠다고 억지를 부려댔다. 쑨뎬잉은 나중에 말 바꿀거 시작도 하지 말라고 핀잔을 주었지만 우씨가 하도 난리를 치자 재미로 도박 한판을 더 했는데 우씨는 한 게임만에 쑨뎬잉에게 무참하게 패했다. 그러자 우씨는 욕설을 퍼부으며 쑨뎬잉의 얼굴에 패를 집어던지고 나가버렸다. 그러자 격노한 쑨뎬잉은 정말로 우씨의 아내 위씨를 납치해서 자신에게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쑨뎬잉은 처음에는 그저 우씨를 협박하기 위해 위씨를 잡아온 것이었지만 미녀인 위씨를 보자 욕정을 발동해서 위씨를 강간하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우씨는 발칵 뒤집혀서 정향령에게 자신의 아내를 찾아달라고 호소했다. 경악한 정향령은 쑨뎬잉을 즉시 자신에게 데려오라고 했는데 위씨가 탐이 난 쑨뎬잉은 정향령의 명령을 무시하고 위씨와 휘하 부대를 데리고 야반도주를 해버렸다. 정향령은 하남독군 자오티에게 쑨뎬잉을 체포해달라고 요청하는 한편 부대를 보내 쑨뎬잉을 추격하게 했지만 정향령의 부하들이 모두 쑨뎬잉의 친구들이라서 그들은 몇달 추격하는 시늉만 하다가 추격을 그만두었다. 정향령도 일이 더 커지는 것을 원치 않아 쑨뎬잉 추격을 중단하였다.
숭산에 들어가 본거지를 차린 쑨뎬잉은 자신이 지도하는 묘회도 신자들을 숭산으로 불러모았으며 부하들을 모두 묘회도 신도로 입교시켜 자신을 숭배하게 함으로 부하들의 충성심을 유지시켰다. 쑨뎬잉 세력은 수천명 수준 밖에 되지 않았으나 각 지방 관리들의 비호를 얻어 거침없이 범죄를 저질렀고 이 때문에 자오티는 하남성 참의원 이소란을 쑨뎬잉에게 보내 대대장 자리를 줄테니 정부군에 투항하라고 제의했다. 대대장 자리에 혹한 쑨뎬잉은 그길로 자오티에게 귀순하여 진숭군 5여단에 배치되었으나 여단장 감옥곤과 연대장 후방걸 모두 쑨뎬잉을 사람취급하지 않으며 쑨뎬잉의 면전에서 그를 욕하고 쑨뎬잉의 혼성대대에게 힘든 일과를 계속 부여하였다. 화난 쑨뎬잉은 결국 무기를 탈취하여 남양 복우산으로 들어가 다시 비적질을 하게 되었다.
1차 직봉전쟁 이후 우페이푸가 감옥곤의 5여단을 27사단을 재편하고 감옥곤을 예악감 3성 초비사령관에 임명하자 감옥곤은 즉각 쑨뎬잉을 토벌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쑨뎬잉은 즉각 감옥곤에게 뇌물을 바치고 투항의사를 전달했는데 감옥곤은 이를 수락하고 쑨뎬잉을 연대장으로 승진시켰다. 1924년 2차 직봉전쟁이 발발했는데 직예군 3집단군 총사령관 겸 육군검열사 펑위샹이 북경정변을 일으켜 대총통 차오쿤을 포로로 잡자 쑨뎬잉은 우페이푸 정권은 끝났다고 판단하고 각 지방 민병대와 정향령의 기병대를 규합하여 낙양성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우페이푸는 장쭤린에게 패하여 도주길에 오르느라 쑨뎬잉을 토벌하지 못했고 쑨뎬잉은 하남성 일개에서 활개를 치며 스스로를 독립여단장이라 일컬었다.
2.4. 장쭝창에게 의탁하다
그러던 중 펑위샹과 장쭤린의 관계가 연일 악화되었고 장쭤린의 부하 궈쑹링이 장쭤린에 맞선 모반을 준비하였다. 궈쑹링과 펑위샹은 손을 잡았고 이에 펑위샹 휘하의 국민군은 차차 하남성의 우페이푸의 잔여세력과 충돌을 빚게 되었다. 특히 국민군 2군단장 호경익은 직예군벌과 원한이 있어 우페이푸의 부하 감옥곤과 더욱 날카롭게 날을 세웠다. 당시 쑨뎬잉은 6천명 가량의 부하를 거느리고 가는 곳마다 약탈, 강간, 학살을 자행하고 있었는데 감옥곤은 쑨뎬잉을 5혼성여단장으로 임명하여 자신의 편으로 만들려 했다. 하지만 호경익이 감옥곤을 격파하고 하남성을 장악하자 쑨뎬잉은 펑위샹의 부하인 3군 부군장 겸 2사단장 엽전장에게 투항하여 여단장에 임명되었다. 허나 펑위샹이 엽전장에게 감숙, 섬서 지역으로 퇴각하라고 지시하자 쑨뎬잉은 연고가 없는 서북으로 갔다간 찬밥 신세가 될 것이라 여겨 펑위샹을 배신하고 다시 비적이 되었다. 1925년 12월, 쑨뎬잉은 과거에 곤장 40대 맞은 원한을 설욕하기 위해 박주성을 공격하여 박주의 모든 여자들을 강간하고 닥치는대로 불을 지르고 약탈을 자행했으며 특히 강씨 일족을 모두 끌어내 남자들은 매질하고 여자들은 겁탈했다.
쑨뎬잉이 박주에서 만행을 저질렀단 소식을 들은 안휘독판 진조원은 격노하여 20개 대대를 파견하여 쑨뎬잉을 포위해버렸다. 이에 쑨뎬잉은 박주의 지역유지 200명을 인질로 삼아 진조원의 공격을 멈추게 한 후 앞으로 하남, 안휘에서 활동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산동성 조주로 달아난 후 인질들을 석방했다. 이때 쑨뎬잉은 비서실장으로 청나라 거인에 급제했으며 한림원 차길사로 근무했었던 양랑선을 임명했다. 양랑선은 산동의 군벌인 개고기 장군 장쭝창의 친구이기도 했는데 쑨뎬잉은 양랑선에게 자신을 장쭝창에게 소개해달라고 요구했다. 양랑선은 장쭝창의 부하 한건고를 통해서 쑨뎬잉과 장쭝창의 만남을 주선했는데 쑨뎬잉이 마음에 들었던 장쭝창은 그를 즉시 직로연군 25사단장에 임명하고 제녕에 주둔했다. 당시 25사단은 9개 여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쑨뎬잉은 자신의 편이 아닌 7명의 여단장을 처형하고 25사단을 3개 여단으로 재편성했다. 한편 장쭝창은 쑨뎬잉의 충성심과 전투력을 시험해보기 위해 안휘군벌이며 제남진수사를 지냈던 마량의 잔여세력인 고진과 소자열을 토벌하라고 지시했다. 쑨뎬잉은 고진과 소자열을 성공적으로 토벌했고 이어 산동의 비적 장명구를 토벌하였다. 다만 장명구가 항복하는 조건으로 그를 살려주기로 했던지라 장쭝창이 장명구를 처형하라고 지시했음에도 거짓처형식을 벌여 그를 풀어주었다.
1926년 직봉풍전쟁이 일어나자 장쭝창의 명령에 따라 장신점에서 펑위샹의 부대와 교전해서 승리했다. 7월, 장제스가 국민당의 1차 북벌을 거행하자 11월 장쭤린이 베이징에서 소집한 채원회의에 참여하여 장쭤린에 대한 충성을 선언했다.
2.5. 중국 국민당에 투항하다
하지만 우페이푸, 쑨촨팡, 장쭝창이 모두 국민혁명군에게 패했으며 1928년, 국민당의 2차 북벌이 시작되자 국민혁명군은 순식간에 베이징까지 밀고 올라왔다. 장쭤린은 황고둔 사건으로 암살되고 봉천군벌은 전의를 상실했다. 장쭝창도 패배를 거듭하여 계현으로 패주했으나 쑨뎬잉과 장쭝창의 전적 총지휘 서원천은 국민혁명군에게 포위되어 더 이상 퇴각할 곳도 없었다. 이때 장제스의 심복 하성준이 이들에게 투항을 권유하자 서원천과 쑨뎬잉 모두 수락하여 각각 국민혁명군 6군단 총사령관과 12군 군장에 임명되었다. 이로써 쑨뎬잉은 국민정부에 합류하게 되었는데 군비가 부족하자 동릉 도굴 사건을 저질렀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경진위수사령관 옌시산은 톈진경비사령관 푸쭤이를 파견하여 동릉을 보존하게 하고 관련자들을 체포하게 했다. 이후 쑨뎬잉의 부하 담온강이 체포되면서 범죄가 들통날 위기에 처한 쑨뎬잉은 옌시산, 진군 총참모장 주수광, 베이핑 시장 하기공, 하북성 정부주석 상진 등에게 막대한 뇌물을 바치면서 자신이 무죄라고 로비하였다. 이에 옌시산은 자신의 관할 지역에서 군대가 대규모 도굴을 저질렀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기도 싫고 청나라도 그다지 좋지 않은 판에 담온강을 석방시켜주었다.
하지만 청나라 조정과 유신들이 들고 일어나고 언론의 취재가 이어지면서 이 일은 정치문제로 비화되었다. 결국 쑨뎬잉의 탈영병인 장기후가 칭다오에서 체포되어 자초지종을 고변하면서 쑨뎬잉과 부하들을 재판정에 서게 되었으나 막대한 뇌물을 사방에 뿌려서 도굴을 한게 아니라 사실 비적들이 도굴을 하고 남은 것을 주운 것이라고 얼렁뚱땅 넘어가게 되었다. 이후 쑨뎬잉은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쿵샹시, 쑹아이링, 허잉친 등 국민정부 최고위 지도부에게 막대한 뇌물을 바쳤으며 이후 바이충시의 지휘를 받아 봉천군벌 방진무와 함께 공동으로 옛 상전인 장쭝창과 저옥박의 직노연군 잔여세력을 토벌했다. 하지만 상하이에서 처분하려던 보물들은 청방에게 사기를 당해서 거의 잃어버렸고 결과적으로 얻은 보물은 거의 남지 않았다. 쑨뎬잉은 남은 보물을 처분하여 덴마크식 경기관총과 박격포, 신식소총을 구입하여 군대의 무장을 강화하였다.
1930년 중원대전이 발발할 당시에 쑨뎬잉은 6만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옌시산과 펑위샹의 회유를 받고 4방면군 5로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안휘성 정부주석 자리를 약속받았다. 쑨뎬잉은 정저우에서 펑위샹과 회견하고 장제스와 일전을 벌이려 했으나 장쉐량이 참전하면서 병력을 이끌고 산서로 퇴각해야 했다. 하지만 쑨뎬잉은 패잔병들을 수습하여 병력을 8만명으로 증강시켰으며 국민혁명군 41군으로 재편성되어 산서 진성, 고평, 장치에 주둔하게 되었는데 옌시산과 펑위샹이 모두 공직에서 사퇴하고 도주함에 따라 중앙군에 흡수되었다. 1932년, 관동주로 망명했던 옌시산이 귀국하여 다시 산서의 대권을 틀어쥐자 쑨뎬잉은 9군단 총사령관에 임명되었고 펑위샹과 함께 만주사변에 맞서 열하성에서 일본군과 교전했으나 패배했다. 이후 청해성 둔간독판에 임명되어 영하로 주둔지를 옮겼으나 청해군벌 마부팡의 반발을 샀고 서북의 마씨 군벌인 마훙쿠이, 마홍빈 등의 공격을 받아 박살났다. 쑨뎬잉은 쑹저위안으로부터 찰북 보안사령관에 임명되어 잔여부대를 이끌고 차하얼 성에 주둔했다.
2.6. 중일전쟁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쑨뎬잉은 기찰유격대 사령관 겸 기북민구 사령관에 임명되어 산서성 진성에서 일본군에 항전했다. 이때 중국 공산당 휘하 홍군이 8로군으로 개편됨에 따라 8로군 129사단 류보청, 덩샤오핑 부대와 합류하였다. 이때 쑨뎬잉은 129사단의 무장이 형편없는 것을 보고 무기를 제공하여 류보청, 덩샤오핑과 친분을 맺게 되었다. 1938년, 타이위안에 주둔하고 있던 카츠키 사단이 장치, 고평을 공격하자 쑨뎬잉은 류보청, 덩샤오핑과 함께 증조산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파함으로 일본군의 산서 진군을 저지하였다. 증조산 전투를 성공적으로 지휘한 쑨뎬잉은 기찰유격대를 이끌고 하북성 무안현, 섭현으로 이동하였고 다시 하남성 임현으로 이동하여 일본군을 상대로 유격전을 수행했다. 이에 제1전구 사령장관 웨이리황으로부터 포상을 받고 신식 79식 보총을 비롯한 신식 무기를 지급받아 전투력을 증강하였다.
1938년, 군사통계국 국장 다이리와 친분을 맺어 그의 초청을 받고 충칭을 방문하여 장제스, 쑹메이링 부부를 알현하였는데 본의 아니게 달링 사건을 일으켰다. 쑹메이링은 미국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남편인 장제스를 Darling이라고 불렀는데 중국인들 대다수는 이것이 대사령관의 약자인 대령(大令)이라는 뜻으로 이해했다. 이 때문에 쑨뎬잉은 장제스를 만나 달링 각하께 안부 인사를 올린다고 했고 장제스는 무척 당황했다. 이어 쑨뎬잉이 쑹메이링에게도 달링이라고 하자 그 말을 듣고 있던 쑹메이링의 조카 공령위가 마구 욕을 퍼부으며 달려들었고 당황한 쑨뎬잉은 달링이 대사령관의 준말인 줄 알았다고 변명했다. 그 모습을 보며 쑹메이링이 깔깔 웃으면서 바나나를 대접했는데 좀전의 소동으로 당황한 상태였던 쑨뎬잉은 바나나를 껍질째 씹어먹고는 민망하여 바나나가 뭔지 모르는 척 이렇게 쓴 참외는 처음 봤다고 변명했다. 오해를 풀고 쑨뎬잉에게 호감을 느끼게 된 장제스는 쑨덴잉의 부대를 확대편성하는 것을 허락하였고 쑨뎬잉은 장제스를 앞으로 아버지로 모시겠다고 절하였다. 이에 장제스는 웃으면서 쑨뎬잉을 신편 육군 5군단장에 임명했다.
하지만 1943년 4월, 일본군의 급습에 포로가 된 쑨뎬잉은 전향을 선언하고 왕징웨이 정권의 괴뢰군 6방면군 총사령관 겸 11군단장에 임명되어 한간이 되었고 전국의 중국군에게 화평을 호소하는 전문을 보내는 등 선전에 활용되었다. 1945년, 일본군이 패망하자 쑨뎬잉은 즉시 정저우에 주둔하고 있는 11전구 사령장관 쑨롄중을 찾아가 자신이 왕징웨이에게 항복한 것은 어디까지나 포로가 되어 부득이한 일이었다고 해명하면서 자신은 국민정부의 뜻을 따르고 있었으며 앞으로도 국민정부의 명령에 따르겠다고 맹세했다. 이예 쑨롄중은 쑨뎬잉은 4로군장에 임명하여 치안유지와 한간 처벌을 맡겼다. 쑨뎬잉은 이를 이용하여 적산 몰수를 명목으로 많은 재산을 약탈했다.
2.7. 국공내전과 죽음
전후 장제스는 쑨뎬잉을 포함하여 화중, 화남의 군대를 평한선을 따라 북상하라고 지시했다. 쑨뎬잉 부대는 육군 3종대로 개칭되어 5,6총대와 3개의 독립연대를 관할하게 되었다. 쑨뎬잉은 산서, 하북, 산동, 하남의 농촌에 8로군이 깊숙이 침투한 것을 보고 각 현에 대한 국민정부의 통치력을 재고하였다. 1946년 2월, 장제스가 하남성을 방문하여 쑨뎬잉을 만나 사진을 찍었는데 쑨뎬잉은 이를 자신에 대한 호의로 여기고 눈물을 흘리며 장제스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다시 4월에 이르러, 쑨덴잉은 하남성 평선로의 탕음현성에 주둔했다. 하지만 1947년에 이르러 공산군이 승기를 잡고 대대적으로 공격해왔는데 1947년 3월, 탕음은 공산군 36종대 요일명의 부대에게 포위되었다. 요일명은 쑨뎬잉에게 항복을 권유했으나 쑨뎬잉은 편지를 찢으며 요일명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폭탄 3천개를 다 쓰기 전에는 대화는 없다고 소리쳤다. 결국 탕음에서 쑨뎬잉과 요일명 사이의 전투가 벌어졌는데 10여일간의 공방전 끝에 쑨뎬잉은 완전히 포위되었다.
쑨뎬잉은 신향에 주둔한 11전구 사령장관 왕중렴에게 구원을 청했고 왕중렴은 49여단장 이수정을 출동시켜 쑨뎬잉을 구하게 했으나 이수정은 공산군의 공격에 패해 물러났다. 쑨뎬잉은 잔여 병력 1천명을 이끌고 공산군의 공격에 저항했으나 결국 공산군이 성벽을 무너뜨리고 몰려들기 시작했다. 6총대장 왕수경이 부상을 당해 쓰러지자 병사들은 완전히 전의를 상실하고 무너졌고 쑨뎬잉은 요일명에게 항복 의사를 밝혔다. 요일명은 쑨뎬잉의 명예를 고려하여 쑨뎬잉이 패해서 항복한 것이 아니라 봉기를 일으켜 공산군에 투항한 것으로 보고해주겠다고 하였고 쑨뎬잉은 이를 수락하여 형식적으로 국민혁명군 40군 진지를 향해 포를 몇발 발사했다. 이렇게 1947년 4월 2일, 쑨뎬잉은 공산군의 포로가 되었다. 이때 쑨뎬잉과 인연이 있던 류보청이 특별히 지시를 내려 그를 무안현으로 보내주었고 대마초를 제공하는 등 융숭히 대접했다.
하지만 류보청이 남하하자 그에 대한 우대도 중단되었으며 쑨덴잉은 우울증에 걸려 갖은 질환에 시달리다가 1948년 10월, 무안현 시골에서 사망했다.
3. 참고문헌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구룡배의 전설 1,2권, 웨난, 일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