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칙서

 

'''임칙서[1]'''
林则徐 / Lin Zexu

[image]
'''성명'''
임칙서(ZH林则徐)
'''출생'''
1785년(건륭50년) 8월 30일
청나라 복건성 복주부 후관현
'''사망'''
1850년(도광30년) 11월 22일(향년65세)
청나라 광동성 보저현
'''별칭'''
자: 원무(元抚)
우자: 소목(少穆), 석린(石麟)
시호: 문충(文忠)
'''매장지'''
임척서묘(푸젠성 푸저우시 북교마안촌)
'''종족(민족)'''
중국인(한족)
'''경력'''
1811년(가경16년) 과거시험'''진사출신'''
하동하도총독 1831년~1832년
강소순무1832년~1837년
호광총독, 1837년~1839년/1839년
흠차대신, 1838년~1840년/1850年
량광총독,1840년~1840년
섬서순무, 1846년
운귀총독, 1847년
태자태보, 1848년
'''참전'''
아편전쟁
양무운동
'''직업'''
정치가
'''가족'''
임빈일(林賓日, 아버지)
임명학(林鳴鶴, 형)
임패림(林霈霖, 남동생)
정숙경(鄭淑卿, 부인)
슬하 4남 4녀
1. 개요 및 생애
2. 흠차대신 취임 및 활동
3. 아편전쟁 이후
4. 평가
5. 기타


1. 개요 및 생애


다른 나라 사람들이 영국아편을 팔고 영국인들을 부추겨서 아편을 사서 피우게 한다면, 여왕께서도 크게 분노하시리라 믿습니다.

-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에게 보낸 편지

청나라의 관료. 1785년 8월 30일 복건성 후관현에서 태어났다. '칙서(則徐)' 라는 이름은 그가 태어날 때 복건순무로서 시찰 중이던 서사증이 폭우를 피해서 임칙서의 집에 피난을 하던 중이어서 서사증(徐)을 본받으라(則)는 의미에서 지어진 것이다. 그의 아버지 임빈일(林賓日)은 과거에 도전했다가 실패해 시골에서 학도를 가르치는 교사 노릇(서당 훈장)을 하고 있었는데, 과거 합격이라는 꿈을 아들이 대신 이루도록 하기 위해 4살 때부터 사숙에 보내고 20세까지 직접 가르치는 등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 결과인지 임칙서는 13세에 부시(府試)에 1등으로 합격하고 다음해에는 수재(秀才)가 되었으며, 이후 오봉서원에서 공부하면서 경세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1805년에는 향시에 합격하여 거인이 되었으며 이 해에 결혼했다. 다음 해에는 과거의 최종시험인 회시(會試)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과거시험과 강사 노릇을 동시에 병행하다가 무역항의 서기, 복건순무의 막료 생활을 전전하였다. 이후 1811년에 세번째 회시에 응시,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고, 이후 한림원에 들어가 한림학사로 10년간 근무하였다. 이때 그는 동남지역의 생활과 한림원에서 볼 수 있는 정보들로 인해서 청조가 점차 쇠퇴해간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내정 개혁안을 기초하는 한편 과거제 시험관으로 있으면서 실학에 재능을 가진 인재들을 등용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하고, 실학자 공자진과 교류했다.
1820년부터 1838년까지 양절염운사(兩浙鹽運使), 강소안찰사, 섬서안찰사, 하남포정사, 강녕포정사, 강소순무, 호광총독 등의 관직을 역임했으며 농촌 복구에 힘쓰는 한편 백성들을 괴롭히는 탐관오리들을 징치하는 등의 활약을 펼쳤는데, 포청천에 빗대어져 "임청천" 소리까지 들을 정도였으니 그야말로 청백리 중의 청백리.
한편 강소안찰사로 재임하던 시기, 임칙서는 이미 만연하고 있던 아편의 폐해를 깨닫고 자신의 관내에서 근절하고자 노력했다. 또한, 그의 형은 중국 과거제의 최고 학위인 진사 다음가는 거인을 젊은 시기에 취득한 인재라 집안의 기대를 많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편에 중독되어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기에, 더욱 아편을 증오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청나라 조정에서는 아편을 막기 어려우니 현실적으로 아편을 국산화하면서 가격을 올리고 점진적으로 근절하자는 주장과[2] 강력히 단속, 근절해야 한다는 주장이 맞서고 있었는데, 도광제는 임칙서가 아편을 근절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받고 후자 쪽으로 방향을 정했다.

2. 흠차대신 취임 및 활동


1838년 12월, 도광제는 임칙서를 흠차대신()으로 임명해 아편 밀수를 금지하는 임무를 맡겼다. 임칙서는 광둥성에 도착하기 전부터 공문을 보내 마약상 60명을 체포하고, 영국 상인들에게 "아편 무역을 중단할 것"과 "'밀매하다가 적발될 경우 자산을 몰수당하고 사형에 처해질 것을 각오하겠다'는 서약서를 제출하라"고 명령했다.
이 때 영국 마약상들은 임칙서가 뇌물을 받기 위해 쇼하는 거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아편 밀수를 위해 뇌물을 바친 자도 있었다. 하지만 임칙서는 어지간한 청나라의 관리와는 차원이 달랐으니, 결국 호되게 당한 뒤 아편 1천 상자를 내놓아야 했다.
하지만 임칙서는 영국 마약상들이 숨긴 아편이 2만 상자가 넘는다는 걸 간파했고 "숨겨둔 것들을 내놓으라"고 명령했으며, 그것이 통하지 않자 영국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을 봉쇄하여 물자 이동을 단속하기에 이른다. 결국 굶어죽을 위기에까지 놓이게 된 마약상들은 항복하고 아편 2만 1,306상자(237만 6,254근)을 내놓았으며, 임칙서는 곧바로 폐기할 것을 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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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을 폐기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임칙서.
보통 이 아편들이 소각되었다고 알려져 있는 데, 사실은 조금 다르다. 사전에 소량을 불태워본 결과, 원래 양의 약 4분의 1 정도가 불타지 않고 녹아서 회수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 그 뒤 아편을 완전히 못쓰게 하기 위해 이것저것 섞어보니 열과 석회와 소금에 약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임칙서는 해변에 임시 연못을 만드는 작업을 20일이나 했으며, 거기에 바닷물을 끌어들인 뒤에 잘게 자른 아편 덩어리와 석회를 같이 넣어 휘저어 녹인 다음, 마지막에 바다 쪽의 수문을 열어 이 혼합물들을 바다로 흘려보냈다. 석회가 물과 반응하면 열이 발생하는 과정에서 연기가 나는데, 그것을 보고 태우는 걸로 착각했던 듯 하다. 호문에서 이루어졌다 하여 이 사건을 '''호문소연'''이라고 하며, 이를 "동아시아의 보스턴 차 사건"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3]
이에 분노한 영국 마약상들은 영국 정부에 하소연했고 이것이 아편전쟁의 원인이 되었지만, '''마약 몇 푼 팔아먹으려고 싸움 걸러 온다'''는 것은 그야말로 적반하장 그 자체였다. 그냥 몰수를 당해도 할 말이 없을 지경인데, 몰수가 아니라 아편 1상자에 차 5근으로 보상을 했다. 아편과 차의 시세에 따라서는 영국 마약상 쪽이 손해를 보았을 수도 있지만, 오늘날로 치면 마약사범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한 뒤 마약을 몰수하여 폐기했으니 비상식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너무나 관대한 처분이라고 할 수 있다.
아편 전쟁 당시의 활동에 대해서는 임칙서, 그리고 신사의 나라라는 글을 참고하는 것도 좋다.

3. 아편전쟁 이후


결국 전쟁이 터졌지만, 임칙서는 일찌감치 광저우의 지식인들과 서양 선교사들을 초빙해 서양 군사학에 대한 지식을 확보해 둔 상태였다. 따라서 유럽의 대포와 상선을 사들이고 초보적인 증기선과 민병대까지 준비할 수 있었으며,[4] 미리 준비를 했던 임칙서의 방어 병력은 영국 군함이 광저우로 들어오는 것을 막아낼 수 있었다. 본격적으로 아편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있었던 해전에서는 청나라 해군이 대패했지만, 이후 임칙서는 광저우에 서양에서 구매한 해안포와 화공선을 깔아서 요새로 만들었고, 아편전쟁을 치르러 본격적으로 파견된 영국 함대도 이걸 보고서 광저우 공략을 포기했다. 대신 영국 해군은 함대를 톈진으로 북상시켰고, 이에 조정에서는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죄를 물어 임칙서를 해임하고 결국 청나라는 전쟁에서 패하고 만다.
파직당한 임칙서는 유배지인 신장(위구르)에서 농지 개혁을 추진하는 한편 남하하는 러시아 제국의 위협을 간파하고 '''"영국은 경제 이득만 원하기에 문제가 아니지만 영토를 탐내는 러시아가 문제다. 나는 늙었지만 너희들은 그것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실제로 러시아는 청나라의 영토였던 탄누투바연해주를 지금까지 영구히 가져갔고 몽골의 독립을 적극 후원해 위성국화시킨 걸 생각하면 장래를 제대로 예측한 셈.[5] 아무튼 이런 임칙서의 주장은 좌종당 등에게 영향을 끼쳐 소위 새방파를 만드는데 계기가 되었다.
1845년에 유배가 풀린 뒤 섬서순무, 운귀총독을 역임하다가 1849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은둔했으며, 이듬해 1850년에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자 다시 흠차대신으로 임명되어 난을 진압하게 되었지만 임지로 가던 중에 병사했다.
흠차대신에서 파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정을 원망하기는커녕 조국의 장래를 걱정했던 대단히 청렴결백한 인물로, 오늘날까지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중국의 주룽지 전 총리가 존경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4. 평가


세계사 교과서만 대충 훑은 사람들한테는 망해가는 청나라 관리로 주제도 모르고 영국에 싸움을 걸어 아편전쟁의 발단을 만든 원흉 정도의 취급을 받고 있지만, 상술한 내용과 아편전쟁의 경과 과정을 읽어보면 청나라 후반 관리들 중에서도 보기 드물 정도로 '''진보적인 인물'''이었다.[6]
당장 제1차 아편전쟁 당시의 기록만 읽어봐도 살인을 저지른 영국인들이 영국법 운운하며 살인범 인도를 거절하자, 직접 들여와서 번역까지 끝마쳐놨던 영국 법전을 그 면전에다 들이대며 따졌다는 기록까지 있으며, 그가 광저우에 부임하자마자 한 일이 영자 신문, 영국법, 국제법 등을 중국어로 번역해놓으라는 거였다.
그리고 아편전쟁의 서막이 되는 천비 해전에서는 국제적인 문제를 만들지 않기 위해, 아편 뺏긴 영국 상선이 아편과 무관한 영국 상선을 포격하는 희대의 팀킬 짓을 자국 해군을 동원해 제지하였고, 그 과정에서 자국 해군력이 빈약하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즉시 미국 상인과 접촉해 서양 대포 300문을 조달했다. 이 조치는 상당히 효과적이어서 실제 아편전쟁 초기 광저우로 몰려왔던 영국군은 그가 설치해놓은 광저우 진지를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함선 4척만을 견제용으로 남겨둔 채, 그대로 우회해서 톈진으로 돌아가는 것을 선택했을 정도다. 비록 영국군이 국경 지대를 헤집고 다니는 것을 막지는 못하였지만, 그의 조치가 효과적이었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다.
만약 이 인물이 파면되지 않고 계속 청나라의 고관직을 맡고 있었다면, 청나라의 미래가 조금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정치적 숙청을 당한 탓에 끝내 조국을 완전히 구해내지는 못한 점은 원나라토크토아명나라원숭환과 비슷하고, 정치적 숙청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복직 후 재기하여 공을 세운 점은 조선이순신과 비슷하다.
그런데 근대 일본의 지식인인 후쿠자와 유키치는 임칙서를 두고 "신중하지 못한 자가 쓸데없이 아편을 태웠다가 전쟁을 자초하여 망신만 당했다."라는 식으로 조롱했는데, 사실 이건 후쿠자와 유키치 자체가 탈아입구[7]를 주장할 만큼 극렬 혐중이라 그랬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8]

5. 기타


김동인이 「아편전쟁」이라는 이름의 소설을 쓴 적이 있는데, 여기에서 사실상 주인공으로 묘사된다. 소설 전문 '서구의 동양 침략의 시발점이었던 홍콩이 황군(일본군)에게 함락된 기념'으로 쓴 소설로 대동아 공영권을 합리화하려는 의도가 있다. 그럭저럭 읽을 만하지만 아편을 태웠다는 오류가 보이며 김동인 특유의 영웅 논리가 강하다.
중국 영화 '아편전쟁'에서는 삼국연의 84부작에서 조조를 연기한 것으로도 유명한 배우 포국안이 맡았는데, 공교롭게도 조조(155~220)와 임칙서(1785~1850) 모두 66세에 세상을 떠났다는 공통점이 있다.

[1] 현대 중국어 독음으로는 린쩌쉬(Lín Zéxú)[2] 이러한 주장을 이금론이라고 하는데, 이를 '아편 무역의 합법화'로 오해하는 경우도 많지만 이 역시 아편 무역에 반대하며 궁극적으로는 말살하자는 것이었다.[3] 이 장면이 포국안이 임칙서로 분한 영화 아편전쟁에서도 그대로 나왔다. 다만 아편을 '소각'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있던 시절인데다가 소각방법을 결정하는 과정이 전혀 묘사되어있지 않아 역사에 관심있는 시청자들에게조차 '''"짱깨들 고증 클라스 ㅋㅋㅋㅋㅋㅋ 저걸 바다에 쳐붓고 앉았넼ㅋㅋㅋㅋㅋㅋ"''' 하는 식으로 억울한 까임을 당하기도 했다(...).[4] 이때 그가 쓴 "사주지"는 그의 동지인 위원이 쓴 해국도지(海國圖志)의 원판이 되었고, 흥선대원군이나 일본도 이 책을 많이 참고했다고 한다.[5] 러시아는 여기서 더 나아가 위구르에도 손을 뻗어보고 내몽골 지역과 청나라의 성지인 만주까지 합병해 청나라를 만리장성 이남으로 몰아내려고 했다. 이런 시도들은 일부 진행됐다가, 러일전쟁에서 패하면서 좌절되었다. 만주의 다롄이나 하얼빈에 러시아식 건축물이 다수 남아있는 것도 러일전쟁 이전까지 러시아가 사실상 빼앗아가서 러시아식으로 개발했기 때문이다.[6] 다만 임칙서 뿐만 아니라 보수적인 청나라 관리들도 서양문물중 화기(대포)와 철선만큼은 도입할 필요성을 느꼈고 이로 시작된 것이 양무 운동이다. 물론 그 한계가 뚜렷한게 동도서기론에 입각한 정신문명의 우월성은 버리지 못했다는 것.[7]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으로 들어간다는 뜻. 글자 그대로 후쿠자와 유키치는 청나라와 조선을 포함하여 모든 아시아 국가들을 혐오했던 인물이었다. 간혹 국내의 후쿠자와 유치키 옹호자들은 후쿠자와가 친한파인데 조선의 갑신정변이 실패한 일 때문에 탈아입구를 주창했다고 하지만, 후쿠자와는 갑신정변 이전에도 중국과 조선을 가리켜 더러운 거지와 천민이라고 공공연하게 멸시하였다.[8] 상술된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실제 임칙서는 매우 선각자적인 인물이었고 더욱이 아이러니한 것은 그의 방대한 서구에 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쓰여진 해국도지가 일본의 막말 지식인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