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언 페리맨

 

'''라이언 페리맨의 수상 및 영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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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L 챔피언결정전 우승 반지'''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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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라이언 페리맨(Ryan Perryman)
'''생년월일'''
1976년 4월 13일 (48세)
'''국적'''
미국
'''출신학교'''
데이튼 대학교 (1994~1998)
'''포지션'''
파워 포워드, 센터(KBL)
'''신체사이즈'''
198.7cm, 109kg
'''KBL 입단'''
2001년 KBL 외국인드래프트 2R 20순위(동양)
'''KBL 소속팀'''
'''대구 동양 오리온스 (2001~2002)'''
창원 LG 세이커스 (2002~2004)
'''개인 타이틀'''
'''1997-98 NCAA 리바운드 1위'''
'''KBL 챔피언결정전 우승 1회 (01~02)'''
KBL 수비 5걸 1회 (02~03)
'''KBL 리바운드상 3회 (01~04)'''
01-02시즌 야투성공률 1위(59.3%)
1. 개요
2. 선수 시절
2.1. KBL 입성 전
2.2. KBL 시절
3. 플레이 스타일
4. 여담
5. 관련 문서


1. 개요


'''KBL 역대 최강의 20순위 지명 외국인 선수'''[1]
KBL의 외국인 선수로 2000년대 초 대구 동양창원 LG에서 총 3시즌을 뛰었다. 센터치곤 단신이었지만 아르헨티나 리그에서 2년 연속, KBL에선 3년 연속 리바운드왕을 차지했던 그야말로 '''"리바운드의 달인"'''.

2. 선수 시절



2.1. KBL 입성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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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CAA 기록
NCAA 데이튼 대학교에서 1학년 때부터 4년 동안 주전 파워 포워드로 뛰었고, 4년 내내 팀에서 가장 많은 리바운드를 잡는 선수였다. 페리맨의 재학 시절 데이튼 대학교는 시즌 5할 승률도 간당간당할 정도의 팀이었고 멤버 구성 또한 별로라, 오죽했으면 국내 팬들에게 블루워커로 유명한 페리맨이 대학시절엔 2학년이던 95-96 시즌부터 3년간 팀내 득점 1위를 놓치지 않을 정도였다;;;
97-98 시즌 졸업반이 된 페리맨이 평균 15.2득점-'''12.5리바운드'''를 잡으며 맹활약한 데이튼 대학교는 6할 승률을 넘기며 Atlantic 10 컨퍼런스 서부 공동 1위에 올랐지만, 컨퍼런스 토너먼트 2회전 만에 커티노 모블리[2]의 로드 아일랜드 대학교에 무너지며 컨퍼런스 4강 문턱에서 좌절했고, 이 바람에 NCAA 토너먼트 출전티켓을 눈앞에서 날리게 된다.[3] 하지만 97-98 시즌 페리맨이 걷어낸 12.5개의 리바운드는 전미를 통틀어 가장 많은 수치였고, 덕분에 페리맨은 '''97-98 시즌 전미 최고의 리바운더'''로서 NCAA 역사의 한페이지에 이름을 남긴 것은 물론,[4] 97-98 시즌 '''Atlantic 10 컨퍼런스 퍼스트팀'''에 선정되는 영광까지 누렸다.
하지만 NBA의 벽은 전미 리바운드왕도 넘기 힘들 정도로 높았고, 1998 NBA 드래프트에서 낙방한 페리맨은 새크라멘토 킹스 트레이닝 캠프에 합류하기도 했지만 금방 방출된다. 이후 페리맨은 특이하게도 바로 프로선수가 되지 않았고, 고향 미시건 주 오크파크로 돌아가 교사 생활을 시작한다!!![5]
99-00 시즌부터 해외리그의 문을 두드린 페리맨은 아르헨티나 리그의 아르헨티노스 후닌 팀에서 2시즌 동안 뛰며 99-00, 00-01 '''2시즌 연속 리바운드왕'''을 차지, 자신이 프로레벨에서 통하는 빅맨임을 증명했고, 중간에 일정이 겹치지 않는 헝가리 리그에서 01-02 시즌을 보내기도 했다. 같은해 선수 경력이 한창인 25세의 페리맨은 2001년 KBL 외국인선수 트라이아웃에 지원하는데, 대학시절 페리맨의 명성을 몰라본 9개 팀 관계자들은 점프도 별로고 슛거리도 짧은 페리맨을 하나같이 외면했고, 덕분에 1순위로 마르커스 힉스를 뽑은 대구 동양의 김진 감독은 무려 2라운드 20순위로 전 NCAA 시즌 리바운드왕을 건지는 대박을 잡게 된다.

2.2. KBL 시절



2.2.1. 대구 동양 오리온스 (2001~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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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L 기록
전희철, 김병철이라는 황금콤비를 보유했지만, 바로 전시즌 이들 양철 콤비가 삐걱대면서 시즌 꼴찌로 추락했던 대구 동양은, 새롭게 베스트 5에 합류한 젊은피 3인방 김승현-힉스-페리맨의 맹활약을 토대로 01-02 시즌 개막과 동시에 그야말로 폭풍질주를 거듭했고, 1라운드에 7연승, 3-4라운드에는 무려 9연승을 달리는 등 한시즌 54경기로 바뀐 첫시즌에 무려 36승(18패)을 거두며 오리온스 팀 창단 이래 최초로 KBL 정규리그 1위를 달성한다. 시즌 득점 4위 힉스의 득점력과 어시스트 1위 김승현이 팀의 화려함을 담당했다면, 경기당 무려 14.8개의 리바운드(공격리바운드 평균 4.7개)를 잡아내며 수비가 좋은 팀이 아니었던 오리온스의 골밑을 잘 지켜낸 페리맨은 숨겨진 강력함이었다. 거기에 별다른 공격옵션 없이 골밑에서 몸싸움 후 집어넣는 터프샷으로만 평균 16.7점을 올린 페리맨은 팀의 터줏대감이었던 전희철(평균 14.8점), 김병철(평균 13.9점)을 제치고 힉스(24.2점)에 이어 팀내에서 두번째로 많은 득점을 올리는 선수이기도 했다. 플레이오프 4강 창원 LG전에서도 역시 게임당 5개의 공격리바운드를 잡으며 골밑을 장악했고, 상대팀 센터 마이클 매덕스(199cm)를 잘 마크해주면서 대구 동양을 사상 첫 챔피언 결정전으로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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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진 서울 SK와의 챔피언 결정전은, 당초 정규리그 1위 대구 동양이 외국인 선수 1명이 부족한[6] 서울 SK를 가볍게 꺾으리라 예상되었지만, 정작 챔프전이 시작되고부터는 국보급 센터로서의 면모를 제대로 보여준 서장훈의 맹활약에 슈터 조상현의 득점포까지 연일 터지면서 대구 동양이 5차전까지 2승 3패로 패배 위기에 몰리는 반전이 일어난다. 특히 정규리그때만해도 서장훈에 맞설 수 있는 몇안되는 센터로 불렸던 페리맨은, 챔프전에서 자신보다 8cm 더 큰 서장훈을 맞아 너무도 위축된 탓에 4차전까지 자유투를 1개도 얻지 못하는 등 시리즈 내내 소심한 플레이로 일관했고,[7] 평균득점 6.9점에 그치면서 팀 공격 부진의 원흉이 된다. 다행히 상대 외국인선수 에릭 마틴도 공격은 별로인 선수라 골밑 대결에서 크게 밀리진 않았고, 이후 마르커스 힉스가 대폭발한 덕분에 7차전 접전끝에 오리온스는 창단 첫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다.
쉽게 갈거라 예상했던 파이널이 예상외로 진흙탕에 빠진데에는 서장훈을 상대로 리바운드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페리맨의 부진이 이유로 꼽혔고, 우승에도 불구하고 김진 감독은 좀더 존재감 있는 센터를 찾겠다는 생각에 페리맨과의 재계약을 포기하게 된다.

2.2.2. 창원 LG 세이커스 (2002~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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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동양과의 재계약에 실패한 우승팀 센터 페리맨은 2002년 KBL 외국인 트라아웃에 다시한번 지원했고, 김태환 감독의 선택을 받아 1년전보다 한참 높은 순위(1라운드 6순위)로 지난시즌 플레이오프 4강 상대팀인 창원 LG 유니폼을 입는다.
02-03 시즌 창원 LG는 노장이지만 아직도 KBL 탑클래스 가드인 를 트레이드[8]로 영입했고, 페리맨과 함께 새로 뽑은 단신빅맨 테렌스 블랙(192.5cm)의 기량도 괜찮아, 00-01 시즌 이후 또한번 챔피언결정전 진출을 노리고 있었었다. 지난시즌까지 조성원을 중심으로 한 공격농구였던 팀컬러도 페리맨 영입후 박규현, 김재훈 등 수비가 좋은 선수들을 대거 기용하며 수비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바꾸었고, 이후 시즌 중반에는 점차 출장시간이 감소하던 조성원을 공수겸장의 스몰포워드 김영만으로 바꾸는 트레이드까지 실행하며 마지막 점을 찍는다. 페리맨은 시즌 전경기 출장에 평균 16.8득점-13.5리바운드를 잡아내며 변함없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주전 중 4명이 고르게 두자릿수 득점을 올린 창원 LG는 시즌 내내 디펜딩 챔피언 대구 동양과 1위 경쟁을 펼친끝에 38승 16패로 대구 동양과 동률을 이루었으나, 상대전적에서 2승 4패로 밀린 탓에 정규리그 2위로 시즌을 마친다. 하지만 정규리그 2위의 성적에도 다수의 창원 팬들은 불안해했는데, 이유는 4강 플옵 상대인 원주 TG가 정규리그에서 창원 LG에게 1승 5패의 압도적인 상대전적을 안겼던 팀이기 때문이었다. 4강 플옵이 시작되면서 우려는 현실이 되어, 창원 LG는 홈에서 열린 3경기를 모두 내준 끝에 2승 3패로 또다시 4강에서 탈락하고 만다. 블랙-페리맨이 지키는 골밑은 02-03 시즌 내내 최강의 조합으로 꼽힐 정도였지만 유독 원주 TG에게만 약했는데, 이는 바로 루키 김주성의 존재 때문이었다. 아직 신인인데다 워낙 마른 체격 탓에 파워와 테크닉을 갖춘 리온 트리밍햄이나 조니 맥도웰에겐 꽤나 힘겨워했던 것에 반해, 파워보다는 탄력과 저돌성으로 골밑을 파고 드는 스타일이었던 블랙-페리맨 듀오는 루키 김주성 블락파티의 잔칫상과 같았다. 김주성은 창원 원정경기였던 플옵 2차전에서 블락 8개를 기록하는 등, 시리즈 평균 3.8개의 블록슛을 쳐내며 골밑을 완전히 유린했고, 페리맨은 전시즌 서장훈에 이어 또다시 토종 장신빅맨을 상대로 무력한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플옵에서의 부진에도 불구하고 김태환 감독은 다음시즌에도 페리맨을 재신임했고, 힉스 스타일의 장신 포워드 빅터 토마스(199cm)를 페리맨의 새 짝으로 데려온다. 하지만 03-04 시즌 가 급격한 노쇠화로 인해 벤치로 물러난데다, 금강불괴인줄 알았던 페리맨이 무릎부상으로 2라운드를 통째로 빠지는 등 다사다난한 한 시즌을 보냈고, 부상에서 돌아온 페리맨이 평균 15.0득점-13.6리바의 여전한 활약을 펼쳤음에도 창원 LG는 지난 4년간 가장 낮은 순위인 6위까지 추락한다.오리온스와의 6강 플옵에서 심판 오심의 수혜자가 되면서[9] 4시즌 연속 4강 진출에 성공하지만, 4강 상대 전주 KCC 찰스 민렌드에게 평균 30.7점을 내주며 완전히 탈탈 털리며 결승진출에 실패한다.
03-04 시즌을 끝으로 외국인선수 제도가 자유계약으로 바뀐 데다 페리맨을 신임하던 김태환 감독이 재계약에 실패하면서, 페리맨도 재계약에 실패하며 한국을 떠났다. 이후 칠레, 도미니카 리그 등에서 뛰다 2007년을 끝으로 은퇴했다.

3. 플레이 스타일


한마디로 '''리바운드의 달인''', 신, 제왕. 의외로 점프력은 높지 않았지만 자리잡는 센스가 워낙 좋았고 박스아웃을 버티는 힘이 뛰어나, 페리맨이 골밑에 자리잡는 것만 보아도 팬들이 안심할 정도였다.
탁월한 리바운드에 비해 공격력은 많이 부족해, 1:1 공격이라곤 골밑까지 비집고 들어가 페이크 후 터프샷이 전부였는데 KBL 첫 시즌엔 이것만으로 평균 16점을 넘게 올렸다;;; 이후 두 번째 시즌인 창원 LG 시절부턴 페이드어웨이 슛까지 장착한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그닥 믿음을 주는 옵션은 아니었다. 자유투가 매우 나빠 KBL 3시즌간 평균 58.3%에 그쳤고, 특히 03-04 시즌 플레이오프에서는 36%라는 극악의 자유투 성공률을 보여준 탓에, 공격 시 파울 당할까봐 상대 수비를 피해다니는 꼴사나운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점프가 낮아 리바운드 수치에 비해 블록슛이 적은 편이라(3시즌 평균 0.81개) 상대팀 공격선수에게 위압감을 주는 수준은 아니었다.

4. 여담


  • 특이하게도 대학 졸업 후 1999년부터 약 2년간 고향 미시건 주의 오크파크에 있는 Southfield 공립학교에서 중,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더 놀라운 건, 같은 시기인 99-00, 00-01 시즌에 걸쳐 아르헨티나 리그에서 뛰며 2년 연속 리바운드 왕을 차지했다는 사실(…).
  • 전희철과 한 팀에서 뛸 때 둘이 황당 부상을 합작해낸 재미있는(?) 일화도 있었다. 바로 리바운드를 걷어내려던 전희철이 떨어지면서 자기 치아로 페리맨의 머리를 찍는 바람에 페리맨의 머리 윗부분이 끔찍하게 찢겨져 나간 것. 물론 전희철의 치아도 멀쩡할 린 만무했다(…). 페리맨이 머리를 밀고 다니는 스타일이라 더더욱 큰 부상을 당했다.
  • 흑형 농구선수 답지 않게 굉장히 순하고 착한 선수로 유명했다. KBL에서 뛸동안 상대선수와 시비붙은 일이 거의 없었고 아무리 상대선수가 거칠게 플레이해도 허허 웃곤 했다.
  • 2007년 은퇴 후 현재까지 출판업계에서 근무하고 있다고 한다.(출처: Linked in 프로필)
  • KBL 블록슛의 전설 김주성1호 블락슛을 허용한 주인공이다(…).
  • 데이튼 대학교에는 전설적인 선수로 인정받고 있는 선수로, 리바운드 관련 각종 기록을 다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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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7 시즌 중 모교를 방문한 레전드를 환영하는 팬들.

5. 관련 문서


[1] 2001-2002년 시즌 외국인 선수 드래프트에서 2라운드 10순위, 전체 20순위로 지명되었고, 그만큼 이 선수에 대한 기대는 적었다. 그러나 후술되어 있듯이 리바운드 능력과 골밑 장악력은 당대 최강이었고, 결국 지명 첫 시즌에는 우승까지 차지하였다.[2] 2000년대 휴스턴 로케츠에서 스티브 프랜시스와 환상의 백코트를 이루었던 6-4(193cm)의 슈팅 가드.[3] 결국 페리맨은 대학시절 4년간 NCAA 토너먼트에 한번도 나서지 못했다.[4] 해당 시즌 리바운드 순위 중 알려진 이름으로 3위에 라예프 라프렌츠(캔자스, 평균 11.4개, 1998 NBA 드래프트 전체 3순위), 5위 마이클 올로와캔디(퍼시픽, 평균 11.2개, 1998 NBA 드래프트 전체 1순위) 등이 있다.[5] 그러면서도 같은해 페리맨은 미국 하부리그인 CBA에서 잠깐 뛰기도 했다.[6] 서울 SK의 경우 주전 가드 로데릭 하니발이 정규리그 도중 부상으로 시즌 아웃되면서, 계속된 용병 교체 끝에 스윙맨 찰스 존스(196cm)가 합류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에이스롤을 맡아도 모자랄 단신 외국인선수인 존스의 기량이 토종 식스맨 윤제한, 김종학보다 기량이 떨어지는 바람에, 서울 SK 최인선 감독은 플레이오프 내내 속을 태워야만 했고, 챔프전들어선 아예 존스를 벤치에 앉히고 외국인선수 1명(에릭 마틴)만 기용하고 있었다.[7] 페리맨의 정규리그 자유투 성공률은 59.3%로 매우 낮았다.[8] 오성식을 울산 모비스로 보내는 1:1 트레이드였다.[9] 대구에서 열린 최종 3차전에서 결승골이 될 뻔한 오리온스 센터 바비 레이저의 팁인 슛을 실린더룰 위반이라고 무효시키는 등, 이 날 심판들이 범한 오심들은 다시 나오기 힘든 수준일 정도로 추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