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농구인)

 

'''김진의 수상 및 감독 경력 '''
[ 펼치기 · 접기 ]
'''KBL 챔피언결정전 우승 반지'''
'''2002'''









''' 대한민국의 농구감독 '''
''' 이름 '''
'''김진'''
'''金鎭'''
''' 출생 '''
1961년 1월 22일 (63세)
대한민국 강원도 춘천시
''' 국적 '''
대한민국
''' 학교 '''
춘천초등학교(졸업)
춘천중학교 (졸업)
신일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졸업)
''' 신체 '''
키 186cm |체중 75kg
''' 직업 '''
농구선수(가드/ 은퇴)
농구감독
''' 가족 '''
아들 김윤
''' 본관 '''
김녕 김씨
''' 실업입단 '''
1984년 삼성전자 농구단
''' 소속 '''
''' 선수 '''
[image] 삼성전자 농구단 (1984~1995)
''' 코치 '''
[image] 상무 농구단 (1995~1996) [1]
[image] 동양제과 농구단 (1996~1997)
[image] 대구 동양 오리온스 (1997~2000)
''' 감독 '''
[image] '''대구 오리온스 (2001~2007)'''
[image] '''대한민국 농구 국가대표팀 (2002)'''
[image] 서울 SK 나이츠 (2007~2009)
[image] '''창원 LG 세이커스 (2011~2017)'''
''' 프런트 '''
[image] 서울 SK 나이츠 (2010 / 기술고문)
''' 행정 '''
재정위원 (2017~)
[image] KBA (2017~ / 이사)
''' 국가
대표 '''

''' ABC '''
준우승 : 1989 베이징
'''WC'''
출전 : 1990 아르헨티나
'''AG'''
은메달 : 1990 베이징 (선수)
''''''금메달''' : 2002 부산 (감독)'''
1. 소개
2. 선수 시절
3. 지도자 시절
3.1. 대구 동양 오리온스/대구 오리온스
3.2. 서울 SK 나이츠
3.3. 창원 LG 세이커스
3.3.1. 11-12 시즌
3.3.2. 12-13 시즌
3.3.3. 13-14 시즌
3.3.4. 14-15 시즌
3.3.5. 15-16 시즌
3.3.6. 16-17 시즌
4. 감독 퇴임 이후
5. 통산 감독 성적
6. 코칭 스타일
6.1. 장점
6.2. 단점
6.3. 작전
6.3.1. 더블팁과 로테이션 수비
6.3.2. 아시안 게임 중국전 격파
7. 비판
7.1. 코트의 신사? 1994 한기범 폭행사건
7.2. 상위 드래프트 픽을 위한 탱킹 의혹
7.3. 외국인선수 뒷돈 의혹 및 주전고집
8. 여담
9. 관련 문서


1. 소개


'''"꿈을 버리지 않고 최선을 다해준 선수들에게 정말 고맙습니다."'''[2]

'''“선수들이 준비를 잘했고, 어려운 상황에서 잘 따라와 주면서 서로 신뢰가 쌓이면서... 그 부분이 마지막까지 힘을 낸 원동력이라고 생각합니다.”''' [3]

대한민국의 농구인.
2001년부터 2007년까지 대구 동양 오리온스의 감독이자 2002 부산 아시안게임 농구 국가대표팀 감독이었으며 중간에 2007년과 2009년까지 서울 SK 나이츠의 감독이었고 2011년부터 2017년까지 창원 LG 세이커스의 감독이었으며 농구계의 국민감독으로 불리기도 한다.
별명은 코트의 신사이자 '''코트의 스님'''이며 KBL의 제리 슬로언이다. 자신의 멘토였던 박광호 감독과 최명룡 감독 모두 별명이 코트의 신사였는데 냉정하면서도 인내를 하는 모습을 통해 별명이 변화했다.
이 유래는 농구 팬들은 근엄한 모습이 마치 도를 닦으시는 모습이 마치 신사의 모습 중 스님을 연상하게 하면서 김스님 또는 스님진으로 불리기도 한다. (사실 김스님 또는 스님진은 본인께서는 갸우뚱하시기도 했다.)
현재는 KBL 재정위원이자 대한민국농구협회 이사로 활약하고 있다.

2. 선수 시절


신일고등학교[4] 시절 주목받는 가드로 고려대학교(80학번)에 진학해서도 꾸준한 활약을 보이며 삼성전자에 스카우트되어 실업무대에 데뷔했다.
농구대잔치 시절 삼성전자 농구단에서 10년 넘게 활약했다. 1984년에 입단하여 1년 선배인 김현준과 더불어 삼성전자의 가드진을 이끌었다.
쟁쟁한 선배들인 신동찬, 안준호, 박인규, 임정명과 함께 1984/85 및 1987/88 농구대잔치에서 각각 두 번 트로피를 들었다. 특히 1987 코리안리그 우승 시절 김현준과의 우승기념 사진은 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당시 라이벌이었던 현대전자에는 모교 대선배인 고려대 출신의 명사수였던 이충희의 전성기 시절에 함께했던 후배 중 하나다. 비록 삼성전자에서 활약하게 되면서 경쟁을 하게 되었지만 실제로 이충희에 대한 존경심을 가졌다.
선수 시절엔 득점력이 좋은 슈팅 가드로서 팀의 에이스 김현준, 입단 동기 오세웅[5]과 함께 삼성전자 특유의 활화산 같은 외곽포를 지원사격하는 역할이었다. 1986-87 농구대잔치를 끝으로 장신 포인트 가드 신동찬, 슈터 박인규, 센터 임정명 등 기존 주전들이 한꺼번에 은퇴하면서 3년차때부터 주전으로 올라선 김진은 신동찬이 맡던 리딩가드 역할까지 맡아야 했고, 한창 전성기를 달리던 에이스 김현준을 지원하면서 1987-88 농구대잔치에서 삼성전자의 두번째 우승[6]을 이끈다.
하지만 전성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우승을 딱 한 번 했으니까 콩라인은 아니지만 결정적인 순간 우승 문턱에서 밀려 많이 좌절했다.
충격과 공포의 중앙대학교 출신이 있는 기아자동차 농구단의 창단과 함께 전성기에서 내려오게 된다.
당초 기아자동차는 방열 감독을 시작으로 유재학정덕화의 연세대 색이 있었지만 중앙대 출신으로 기존의 강정수를 시작으로 한기범김유택에 이어 허재와 의 입단과 중앙대 출신인 최인선 감독의 부임과 함께 예전 현대전자와 삼성전자를 뛰어넘는 역대급 팀으로 바뀌게 된다. 결국 허재로 인해 방열은 쓸쓸하게 퇴진하게 되었고 최인선 감독은 코치 시절 이를 눈치챘는지 를 항상 아끼게 된다.
중앙대 출신인 가드 강정수와 쌍돗대라 불렸던 동갑 센터인 한기범김유택이 건재한 상태에서 허재의 가세는 도 함께 따라가게 되었고 이후 김영만이 입단하며 프로농구 출범과 함께 역대급 팀의 절정을 보여주었다.
본론으로 들어가면 1988년 허재와 1990년 가 기아산업에 입단하면서 기아의 전성시대가 시작되고, 김진-김현준-오세웅 트리오의 삼성전자는 분전했지만 88~90년 농구대잔치까지 3회 연속 3위(3성전자;;), 91~92년 2연속 준우승에 머물며 기아 독주시대의 희생양이 되고 만다.
33세의 노장이 되어 참가한 1993-94 농구대잔치에서는 비록 예선에선 연세대, 고려대의 대학세에 밀려 5위로 플레이오프에 오르긴 했지만, 예선 4위 고려대[7]와 만난 8강전에서 김대의, 김진, 김현준 등 30대 노장들이 투혼을 보여주며 2승 1패로 역전, 4강에 진출하는 저력을 보여주는데, 8강전 마지막 경기 동점 상황에서 결승 3점슛을 꽂은 선수가 바로 김진이었다. 당시 인터뷰에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뛰었음을 고백했다. 그러나, 삼성은 4강전에서 서장훈의 연세대에 패하여 탈락한다.
1994-95 농구대잔치를 앞두고 삼성전자는 기존의 서동철강양택이 있지만 전대회에서 연세대를 우승으로 이끈 주역인 New 에이스 문경은과 중앙대 4강 신화의 주역 터보가드 김승기를 보강했고, 거기다 상무에서 제대한 센터 이창수까지 가세하면서 전대회 우승팀 연세대, 절치부심한 기아자동차와 함께 우승후보로 꼽혔고, 김진과 김현준은 선수생활의 마지막을 농구대잔치 우승으로 마무리할 수 있을거란 기대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농구대잔치를 한달 앞두고 열린 실업농구 코리안리그 2차대회 결승전 삼성전자:기아자동차 경기에서 한기범에게 폭력을 휘두른 김진[8]은 3개월 출장정지를 받게되고 이후 징계가 경감되어 1994-95 농구대잔치 중반부터 뒤늦게 참여하게 된다. 삼성전자가 악전고투끝에 8강전에서 연세대를, 4강에서 SBS를 꺾고 결승에 오르면서 김진 또한 커리어 마지막을 우승으로 장식하게 되나 싶었지만, 결승전에서 기아 허재마이클 조던급 활약을 막지못하면서 1승 3패로 또다시 패배했고, 이후 김진은 김현준과 함께 은퇴식을 가지며 정들었던 코트를 떠났다. 또 하나의 은퇴동기는 후배지만 닮은꼴인 센터 강을준이었다.

3. 지도자 시절



3.1. 대구 동양 오리온스/대구 오리온스


[image]
은퇴 후 국군체육부대 상무 농구단의 코치를 맡으며 박광호 감독을 보좌하게 된다.
이후 1996년 박광호 감독은 대구 동양 오리온스의 창단 초대 감독으로 선임되자 같이 자리를 옮겨서 동양의 창단 코치를 맡게 된다.
1997 시즌 KBL 프로농구 출범과 함께 박광호 초대 감독을 보좌하면서 창단 멤버들인 전희철김병철을 중심으로 포인트 가드가 약했지만 단신 외국인들의 활약까지 이루어지면서 1997-1998 시즌까지 2년 연속 4강 플레이오프를 경험하게 되었지만, 전희철과 김병철의 상무 입대와 외국인이었던 그렉 콜버드마저 가족사를 이유로 무단도주를 하는 초대형 악재속에 역대급 흑역사와 굴욕을 당하게 된다.
프로농구 역대급 최다연패인 32연패(...)로 막장을 찍던 시절 코치 신분으로 방송취재라는 굴욕을 경험했으며 박광호 초대 감독이 자진사퇴를 하는 아픔 속에서도 코치 자리를 꿋꿋하게 지켰다.
후임 감독은 나래 블루버드 시절 정인교주희정으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던 최명룡 감독이었지만, 창단 시절부터 이어졌던 포인트 가드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2000-01 시즌에는 1999-2000 시즌 활약했던 조우현을 대신해서 상무에서 제대한 김병철의 가세에도 연패가 계속되면서 결국 최명룡 감독이 자진 사퇴를 하게 되었으며 감독 대행을 맡아 잔여 시즌을 치렀다. 한 때 00-01 시즌 정규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고개를 숙인 모습에 팬들은 마음 아파했다. 심지어 대구 홈 최종전에서도 패하면서 최소한의 자존심인 10승을 거두지도 못했다. 9승 36패...
이 과정에서 고려대 출신의 정태호 단장이 시즌 중 부임하면서 00-01 시즌 감독대행 중 이미 중대한 결정을 하게 된다.
2000-2001 시즌 중 큰 합의를 본 이후 2000-2001 시즌 이후 동양의 창단멤버였던 김진 코치의 감독승진을 발표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다음 시즌인 2001-2002 시즌부터 대구 동양 오리온스의 정식 감독으로 3대 감독 선임과 함께 내부 승격했다. 이 시즌부터 KBL 프로농구의 정규리그 경기수는 45경기에서 54경기로 바뀌었다. 이유는 수원에서 서울로 연고이전한 서울 삼성 썬더스와 청주에서 서울로 연고이전한 서울 SK 나이츠로 인해 KBL 잠실실내체육관 중립경기가 사라지면서 나온 변화였다. 김진 감독은 동양과 2년 계약을 했다.
그 변화속에 2001-2002 시즌을 준비하게 된다.
이 당시 평가는 중위권이었다.
절대로 우승후보가 아니었다.
1997-1998 & 1998-1999 KBL 2년 연속 통합우승의 현대 다이넷-걸리버스의 후신의 최고 명가인 KCC 이지스와 99-00 KBL 플레이오프 챔피언이었던 SK 나이츠 그리고 00-01 KBL 통합우승의 명가 삼성 썬더스가 우승후보였다.
이외 플레이오프권은 역시 고려대 농구부의 대선배인 초대 이충희 감독과 양희승 선수와 박규현 선수 그리고 박재헌 선수가 상징이었으나 중앙대학교와 국민은행 여자 감독 출신의 김태환 감독에 양희승과 트레이드된 조성원박훈근과 트레이드된 조우현의 LG 세이커스도 지난 해 창단 첫 KBL 파이널에 진출하면서 우승후보로 평가받았지만 포지션과 높이만 보면 다소 부족했다.
이외 SBS 스타즈와 SK 나이츠의 SK가 형제더비가 된 SK 빅스 그리고 김주성을 준비하는 허재김승기 및 의 삼보 엑써스 정도가 동양 오리온스와 플레이오프권 경쟁을 예고했다.
동양 오리온스의 경우 전희철과 김병철의 동반 전역 가세로 인해 창단 초기처럼 기본이 6강이었고 최대 4강이었다.
그 이유는 바로 고질병과 같은 포인트 가드 부재. 그리고, 동양 오리온스의 전통적인 팀컬러인 가드 중심에서 나오는 공격력인데 정작 약점은 힘에서 부족한 골밑이었다.
그러나, 김진 감독이 승진하면서 내부에서 본 약점이 어딘지 잘 알고 있었으며 두 역대급 토종 선수와 외국인 선수로 인해 180도 다른 팀이 되었다. (결국 처음부터 우승후보는 없는듯.)
신인 드래프트에서 전체 3순위로 지명한 동국대 출신 포인트 가드인 김승현을 시작으로 새롭게 뽑은 외국인 선수 마르커스 힉스라이언 페리맨의 맹활약,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창단멤버인 전희철김병철박재일의 가세로 팀을 기존전력에서 베스트 멤버들을 보강하면서 완전히 다른 팀이 된다.[9]
[image] [image]
창단 첫 정규리그 우승에 이어 창단 첫 플레이오프 우승까지 현재 유일한 KBL 통합우승을 이끌면서 일명 명장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40대 중 40세의 나이로 당시 감독대행을 거쳐 사실상 차기 감독을 예약한 원주 TG 삼보 엑서스의 전창진 감독을 제외하면 감독직 세대교체 기수론의 중심으로 등극하게 된다. 32연패 시절 코치로서 선수단에게 자존심을 지켜야 함을 강조했는데 인고의 시간 끝에 3년만에 동양의 신화창조로 한국프로농구를 빛내게 된다. [10]
그리고 프로농구 우승 팀 자격으로 발탁된 국가대표 감독을 맡아 안방에서 개최된 2002 부산 아시안 게임에서 2002 부산 아시안게임 남자농구 대표팀 감독으로 대한민국을 1982 뉴델리 아시안 게임 이후 20년 만의 아시안 게임에서 극적인 금메달과 함께 한국농구의 신화창조와 함께 국민감독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2002-2003 시즌을 앞두고 2001-2002 시즌 창단멤버이자 통합우승의 주역이었던 전희철은 외국인과의 매치업으로 인해 파워 포워드와 스몰 포워드 사이의 포지션 문제와 샐러리 캡 문제로 인해 트레이드를 했고 [11] 높이 문제로 인해 리바운드 머신이었던 라이언 페리맨의 재계약 포기 및 창원 LG 세이커스로 떠나게 되었다.
[image]
비록 전력이 약해졌지만 창원 LG 세이커스와의 정규리그 최종전 끝에 당시 2002-2003 시즌 대구 홈 최종전에서 승리하며 대구 동양 오리온스를 2년 연속 정규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이후 최대 시련을 맞이하게 된다. 2002-2003 TG 엑서스와의 챔피언 결정전 5차전에서 통한의 계시계 오작동으로 패배를 당하면서[12] TG(현 DB 프로미)에게 2승 4패로 패배하며 우승을 놓쳤다. 당시 동양 정태호 단장과 김진 감독은 농구 팬들을 위해 대승적 차원에서 양보하게 되는 가슴 아픈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여기까지가 그의 리즈시절(...).'''
2003-2004 시즌에는 마르커스 힉스가 부상으로 팀을 떠나게 되는 초대형 악재를 맞이하게 되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도 외곽슛을 쏘는 백인 빅맨으로 에릭 이버츠 이후 성공평이었던 바비 레이저와 마르커스 힉스의 대처 외국인으로 포스트에서 밀렸던 아이작 스펜서를 대신해서 김동광 감독의 삼성 썬더스 시절에 00-01 KBL 통합우승을 이끌었던 아티머스 맥클래리를 시즌 중 트레이드 영입하면서 원주 TG 삼보 엑서스와 전주 KCC 이지스라는 두 우승후보를 넘기 위해 승부수를 띄우게 된다.
하지만, 정말로 가슴 아팠던 장면이 또 나왔다. 원주 TG 삼보 엑서스와 전주 KCC 이지스가 아닌 6강 플레이오프에서 창원 LG 세이커스에 2년전 4강 플레이오프와는 반대의 충격을 받게 되었다. 가장 결정적인 사건으로 03-04 시즌 창원 LG 세이커스와의 6강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도 오심과 함께 분노에 이어 통한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13]
그런 시련 속에서도 KBL 원년 구단이었던 대구 동양 오리온스를 창단 시절부터 코치로서 2년의 전성기와 함께 3대 감독으로 승진하면서 자신이 추구하는 런앤건이라는 공격농구라는 팀 컬러를 통해 기존의 전희철김병철이 있었지만 김승현과 20년만에 한국농구에 있어서 신화와 같았던 2002 부산 아시안게임 대표팀 금메달 감독을 통해 2001-2002 시즌부터 2006-2007 시즌까지 대구 동양 오리온스 겸 대구 오리온스를 KBL 인기구단으로 만들어냈다. [14]
2001-2002 KBL 통합우승과 2002-2003 KBL 정규리그 우승과 함께 김진 감독은 3년 재계약을 했다. 역대 동양-오리온 감독 중 첫 3년 재계약의 주인공이기도 했으며 40대 초보 감독의 성공으로 세대교체 기수론의 중심으로 첫 재계약과 함께 KBL에서 롱런한 감독으로 이어가게 되었다.
물론 오리온스 감독 재임 시절에는 팀을 6년 연속 플레이오프에 진출시키면서 괜찮은 감독이라는 평판을 이어갔다. 김승현을 드래프트를 통해 얻은 성과와 2004-2005 시즌 네이트 존슨으로 6강에 올랐고 2005-2006 시즌 아이라 클라크와 트레이드로 리 벤슨을 영입하면서 4강에 오르면서 플레이오프에는 간간히 진출을 하게 된다.
2006-2007 시즌에는 역대급 외국인 선수로 평균득점 30점대의 득점왕이었던 피트 마이클과 함께 6년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 및 4강 플레이오프까지 진출했다.
물론 마르커스 힉스피트 마이클의 등장에 덕을 본 결과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어쨌든 자신이 맡는 팀을 PO에 계속 올려 놓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리고 종종 오심의 피해를 보기도 했고, 김승현이 부상으로 골골대는 와중에도 전력을 잘 추스린 편이다. 물론 김승현의 부상과 주장 김병철의 무리한 출전속에 혹사라는 비판이 적지는 않지만, 오리온스 자체가 로스터가 두텁지 못한 팀으로서 그래도 괜찮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던 것은 김진 감독의 지도력이 결코 적지 않았다.
그리고 김진 감독이 물러난 뒤, 자신의 대학 모교 선후배 사이의 이충희김상식에 고등학교 선배였던 가 후임이었던 대구 오리온스는 10위-10위-9위-10위로 추락하게 되었다.[15]
창원 LG 세이커스의 창단과 함께 LG 초대 감독이었던 후임인 이충희 감독은 2007-2008 시즌 김진 감독보다 주전만 더 쓰는 등 더 심한 고집으로 26경기에서 4승 22패로 불명예의 자진 사퇴를 했고 당시 수석코치에서 감독대행을 거쳐 2008-2009 시즌 감독으로 승진했던 안양 SBS 스타즈-안양 KT&G 카이츠의 선수-수석코치 출신이었던 김상식 감독 또한 외국인 부상 악재로 인해 1년을 못 버틴 채 자진 사퇴를 했다. [16]
이후 대구 동양 오리온스와 대구 오리온스의 역사는 추일승 감독이 부임하면서 대구광역시에서 고양시로의 충격적인 연고 이전과 함께 대구 팬들에게는 비극으로 끝나게 되었다.[17]

3.2. 서울 SK 나이츠


[image]
대구 동양 오리온스/대구 오리온스의 영광을 뒤로하고 11년간 정들었던 팀을 떠난 그를 서울 SK 나이츠가 전격적으로 모셔 왔다. 3년 계약에 연봉 3억 3천으로 당시 최고 대우였다. 2007-08 시즌부터 감독을 맡게 되었으며 당시 참모로 이상윤 감독과 김태환 감독을 보좌했던 강양택 수석코치를 자신의 삼성전자 시절의 인연이 있었는지 추가로 김태술 선수를 지명한 행운인지 우선 수석코치직을 유지하면서 팀의 체질개선에 나섰다. 동양 오리온스 시절 수석코치였던 김지홍 코치는 SK 나이츠에서는 보조코치를 맡게 된다. [18]
하지만, 자유계약에서 드래프트로 바뀐 외국인 제도의 변화로 인해 역량을 드러낼지는 반신반의였다.
래리 스미스와 트래비스 개리슨을 선발했지만 KBL에 적응하지 못하면서 각각 자시 클라인허드와 브랜든 로빈슨으로 바뀌는 악재를 겪었고 부상이 매번 고질병이었던 SK는 김진 체제로도 매번 부상을 당하는 악재만 반복했다.
그러나, 시련을 삼아서 막내인 방성윤과 김태술의 맹활약 덕분에 간간히 승리를 따내면서 마침내 봄농구에 진출했다.
최인선 감독 이후 봄농구에 오르지 못했던 서울 SK 나이츠를 6년만에 플레이오프 6강에 올리면서 역시 명장의 클래스는 다름을 증명했다.
그 이전 형제인 SK스포츠SK 와이번스는 왕조를 세우게 된다. 김진 감독이 재임할 때 SK 나이츠는 07-08 시즌 6년만에 6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했고 SK 와이번스는 2년 연속 KBO 통합우승을 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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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6강 PO에 팀을 올려 놓았지만, 애당초 07-08 시즌 스폰서가 SK 텔레콤이라서 심판이 도와줬다[19]는 풍문부터 김태술 덕이라는 이야기까지 전술적 능력에 대해 의구심을 표하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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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 시즌 SK를 플레이오프에 진출시키면서 암흑기를 청산한 듯 했지만 그 다음 시즌 8위 추락, 그리고 또 다음 시즌 13연패의 수렁에 빠트리며 SK를 DTD의 팀으로 입증시킨 감독.'''[20]
위기는 소리없이 찾아오게 된다.
2008-2009 시즌 전자랜드 블랙슬래머의 스코어러였던 테런스 섀년을 영입했지만 계속되는 토종 선수(방성윤 & 김태술)의 부상에 이어 조직력에 문제점을 드러내며 KBL 감독 커리어 상 처음으로 6강 플레이오프에 탈락하면서 지도력에 위기를 받게 된다. 추가로 디엔젤로 콜린스는 대마초 사태로 팀 분위기를 악화시켰다.
2009-2010 시즌을 앞두고 트레이드로 변화를 물색했으나 실패하게 된다.
결국 김태술안양 KGC 인삼공사로 트레이드 하는 대신 야심차게 영입했던 포인트 가드로 자신이 유독 아꼈던 대학 제자였던 투맨 게임을 잘하는 주희정 트레이드 카드가 실패하게 된다. 추가로 외국인 또한 LA 레이커스 출신의 포워드였던 사마키 워커 카드도 체력부족으로 인해 매번 힘들어했다.
시즌 초반 13경기에서 1승을 거두는 최악의 부진이 이어지자 결국 2009년 12말 연말 팀 성적 부진에 책임지고 충격적인 자진사퇴의 아픔을 겪게 되었다. KBL의 레알 마드리드에서 결국 모래알 조직력을 해결하지 못하면서 모두에게 안타까움을 전했다. [21]

3.3. 창원 LG 세이커스



3.3.1. 11-12 시즌


한동안 명목상 서울 SK 나이츠의 기술고문으로 있다가 미국 NBA 최고 인기팀이자 명가인 코비 브라이언트LA 레이커스 연수를 SK 나이츠 시절에 함께했던 강양택 수석코치와 함께 다녀오면서 견문을 준비하게 된다. 사실 한국농구에 있어서 NBA 전국구 팀인 LA 레이커스 연수는 김상식이 유일할 정도로 쉽지는 않다.
2011년 5월 계약이 만료된 자신의 실업 삼성전자 시절 친하면서도 닮은꼴(?)의 후배인 강을준 감독의 후임으로 창원 LG 세이커스의 6대 감독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2009년 12월 서울 SK 나이츠 5대 감독 이후 1년 5개월만에 KBL 감독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전임 강을준 감독이 허병진 단장에게 적극적으로 추천해주었는데 반영이 된 격이다. [22]
코칭스테프도 과거 삼성전자-동양 오리온스-SK 나이츠 시절에 대학을 제외한 인연이 있는 코치진을 구성했다.
삼성전자와 SK 나이츠 시절에 인연이 깊었던 강양택 수석코치와 대구 오리온스 시절부터 김지홍 수석코치와 함께 인연이 있는 정재훈 코치를 선임했다.
전력도 전임 강을준 감독과는 다르게 베스트 5부터 색깔이 있는 라인업으로 개편을 했다.
강을준 감독 시절에 자리를 잡지 못했던 김현중에게 주장직을 주면서 부활을 배려했고 문태영 또한 스코어러로서의 아이솔레이션을 배려했으며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와는 강대협이현민을 내주는 대신 2002 부산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함께했던 서장훈을 영입하면서 6강은 기본이고 4강을 목표로 2011-2012 시즌을 준비하게 된다.
실제로 LG는 2011-2012 시즌 창원 홈경기 개막전이었던 모비스전에서 승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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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전임 강을준 시절부터 문제가 되었던 조직력은 여전히 모래알이었다.
LG의 입장에서는 에이스 문태영이 뛰는 마지막 시즌이니만큼 2011-12 시즌 올인을 목적으로 영입했다고 봐도 무방한 상황. 그러나 야심차게 영입한 서장훈 카드가 실패로 돌아갔고, 외국인 선수도 시즌 초반에 두 번이나 바꾸면서 처음 표방했던 트라이앵글 오펜스는 실패했고, 당시 외국인이 1명 보유에 1명 출전이라는 제도에도 발목이 잡혔다.
리바운드 머신이었던 올루미데 오예데지의 빈약한 공격력으로 인해 외국인 또한 올어라운드 스코어러인 애런 헤인즈를 영입하는 등 꼬이기도 했다.
여기에 구단이 김승현 트레이드 파문으로 인해 김현중은 마음의 상처를 안으면서 1 시즌을 겨우 마칠 정도로 부침이 심했다.
성적도 전해보다 되려 더 떨어진 21승 33패 7위로 LG는 6년만에 6강 PO 진출에 실패하게 되면서 첫해부터 지도력에 위기를 받게 된다.
시즌 중에도 김승현 트레이드 실패로 인해 허병진 단장이 문책성으로 경질되었고 후임으로 김완태 단장이 부임하게 되었는데 젊은 선수 위주의 재건을 선택하게 된다.

3.3.2. 12-13 시즌


결국 김진 감독은 첫해의 실패와 함께 재건속의 비상을 선택하게 된다.
2012-13 시즌은 에이스 문태영이 리그 규정에 따라 이적하게 되어 최악의 시즌을 맞을 것으로 우려되었다.
대구 오리온스 감독 시절 정들었던 제자들인 김현중오용준을 대학 후배인 전창진 감독이 있는 부산 kt 소닉붐으로 보내는 대신 오리온스 감독 재임 시절부터 눈여겨 보았던 포워드인 김영환과 KTF-KT의 찰거머리 가드 수비수였던 양우섭을 받는 2대2 트레이드를 통해 체질개선과 재건을 시작했다.
서장훈 또한 주장 김현중과 함께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무상으로 부산 kt 소닉붐으로 보내게 된다.
팀도 당시 백인선을 제외하면 20대의 젊은 팀으로 바뀌었으며 주장도 김현중의 후임으로 김영환을 선임하며 팀컬러를 입히기 시작한다.
12-13 시즌 중반까지는 이 트레이드를 통해 의외로 중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골밑 장악력이 검증된 로드 벤슨과 젊은 가드-포워드진을 앞세워 양궁농구 컨셉으로 바꾼 것이 잘 먹혔다는 평.
그러나 후반부로 갈수록 어이없는 작전 구사를 보여주며 도대체 경기에서 이기려는 마음이 있는 건지 의문을 갖게 만들었다. 신인 픽 먹으려고 6강 포기하고 그냥 대충대충 하는 게 아니냐고 LG 구단과 김진 감독에게 엄청난 비난의 화살이 쏟아지고 있다. [23]
로드 벤슨을 트레이드 한 대신 모비스의 3년 이해 향후 1 라운드 지명권과 양도한 것이다.
결국 같이 다음해를 위해 쉬어간 동부 그리고 kt와 함께 20승 34패 동률 속에 정규리그 8위로 진정한 비상을 위한 쉬어감이 되고 말았다.

3.3.3. 13-14 시즌


로드 벤슨을 트레이드 한 대신 모비스의 3년 이해 향후 1 라운드 지명권과 양도를 했는데 그 중 하나로 트레이드를 통해 김시래를 영입했다.
추가로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에서 강을준 시절 09-10 시즌 득점왕이었던 문태영의 형으로 알려진 국가대표 슈터인 문태종을 LG 창단 이후 역대 최고 FA 총액인 6억 8천에 영입을 하면서 대권도전을 노리기 시작했다.
외국인 드래프트에서 2순위로 러시아 리그 득점왕 출신의 포워드인 과 멤피스대 출신 센터인 크리스 매시를 선발했다.
추가로 12-13 시즌 비슷한 양상의 플레이를 보여준 LGkt는 2013년 9월 신인 드래프트에서 정반대의 결과를 얻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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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는 전체 1순위로 김종규를 잡았지만, kt는 삼성의 1.5%에 밀려서 5순위. 하지만 2013년 11월 6일 현재 kt, LG 둘 다 7승 4패~~
그러나, 김진 감독은 임기 만료 때 조급하지 않았다.
2년전 실패를 통해 임기만료인 2년뒤를 준비하고 있었다.
11-12 시즌 서장훈-문태영-김현중 트리오와 올루미데 오예데지 및 애런 헤인즈로 이어지는 실패를 거울삼아서 12-13 시즌부터 세대교체와 체질개선을 준비하면서 13-14 시즌을 기다렸다.
외국인 드래프트에서도 전체 2순위로 러시아 리그 득점왕 출신의 테크니션인 데이본 제퍼슨을 선발했고 이후 센터인 크리스 매시를 선발했다. [24]
토종선수단 또한 고려대 출신의 파워 포워드로 한 때 상무 시절 스몰 포워드로 대표팀에 승선했던 김진 감독이 오리온스 시절부터 유심히 보았던 주장 김영환을 중심으로 하프코리안 출신 최고의 슈터이자 FA 대박계약의 주인공이었던 문태종모비스에서 로드 벤슨을 보내면서 반대급부로 트레이드로 영입한 명지대의 어시스트 몬스터였던 김시래와 경희대 10 학번이자 국가대표 센터인 김종규까지 더해지면 우승후보가 되었다.
구슬이 서말이야 보배인데 김진 감독은 맞춤형 전술 & 전략으로 경기를 거듭하면 거듭날 수록 비상의 날개를 펼치기 시작했다.
13-14 시즌 김종규를 지명하기 전 개막전이었던 문태종의 친정팀이기도 한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와의 개막전에서 공교롭게도 문태종 선수의 천금같은 결승 3점포로 승리를 거두게 된다. 이 승리는 김진 감독의 KBL 통산 300승 경기였다.
김영환-문태종-김시래-김종규에 이어 러시아 리그 득점왕 출신의 데이본 제퍼슨과 골밑의 제왕인 크리스 매시와 함께 NBA LA 레이커스 연수 때 써먹었던 마침내 KBL의 트라이앵글 오펜스를 포함해서 맞춤형 전술과 전략을 찾아내면서 통해 속공과 3점포로 경기를 지배하게 된다.
시즌 초반에도 조직력에서 물음표가 붙었지만 기우였고 경기를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젊은 신바람과 함께 승부처에서 문태종의 결승 3점포까지 나오면서 신바람 비상을 이어가게 된다.
이와 함께 원정팀의 무덤이라는 창원체육관은 12월초부터 관중들이 몰리면서 입석이 판매되는 등 흥행몰이를 주도했다.
초대 이충희 감독과 2대 김태환 감독 그리고 4대 신선우 감독 시절 호성적 때의 팬들이 몰린 격이다.
12월초부터 LG 세이커스의 창원 홈 게임에서는 관중들이 구름처럼 몰리기 시작했다.
12월 25일 크리스마스 게임에서 전창진 감독과 조성민 선수가 있는 부산 kt 소닉붐을 상대로 성탄절에서 승리를 하면서 좋은 기운을 이어나가게 된다. 이 때 kt는 오리온과의 4대4 트레이드로 인해 장재석 대신 전태풍을 영입하면서 운이 따랐는데 4쿼터 막판에 신승을 하게 된다.
이날 창원체육관은 7000여명의 팬들이 현장을 찾으면서 모처럼 LG의 신바람 비상에 환호했다.
하지만, 젊은 팀의 특성상 기복이 있었다.
사실 5 라운드 중반까지는 3위였는데 무섭게 비상했다.
5 라운드 막판부터 연승을 달리기 시작했고 최대고비였던 서울 SK 나이츠울산 모비스 피버스를 넘어 창단 최고의 연승행진을 달리더니 12연승까지 거두게 된다.
2014년 3월 7일 울산동천체육관에서 열린 울산 모비스 피버스와의 경기에서 전력의 열세를 딛고 예상외의 10점차 이상으로 승리하게 된다. 이로인해 3승 3패 동률에 공방율까지 근소하게 앞서면서 첫 신화창조의 서막을 열게 된다.
마침내 2014년 3월 9일 창원실내체육관
크리스마스에 격돌했던 부산 kt 소닉붐과의 홈 최종전 경기에서 무난하게 승리했다.
이로 인해 울산 모비스 피버스를 2위로 밀어내고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이날 울산도 홈 최종전이었지만 마치 초상집 분위기였다. 중계도 프로농구 인기가 떨어진 시점에서 울산은 단편보도였지만 창원은 중계진이 찾았다.
이와함께 감독 커리어로는 2002-03 시즌 이후 무려 11년 만에 정규리그 1위를 탈환했다.
한 시즌 최다 창단 첫 13연승 그리고 17년만의 KBL 무관탈출
창원 LG '''창단 첫 정규리그 우승.'''
[image] [25]
이후 김진 감독은 LG 세이커스의 17년만의 창단 첫 KBL 정규리그 우승의 공을 인정 받으면서 구단으로부터 김태환 감독 이후 LG 세이커스 역대 감독으로 두 번째 재계약을 확정짓게 되었고 역대 LG 감독 중 유일하게 KBL 감독상을 수상하면서 명장으로서 잃었던 자존심을 되찾게 되었다.
KBL 4강 플레이오프에서 전창진 감독이 이끌고 있으며 조성민 선수와 송영진 선수가 중심이었고 시즌 중 트레이드로 영입한 전태풍이 있는 10-11 시즌 정규리그 우승팀(13-14 시즌 당시 정규리그 5위)이었던 부산 KT 소닉붐을 상대로 단기전 경험부족으로 인해 우려가 들었지만 3전 전승을 통해 팀은 13년만에 창단 두 번째로 KBL 파이널에 진출하게 된다.
그러나 KBL 파이널에서 당시 SK를 2년 연속으로 울렸던 모비스에게 2승 4패로 패하면서 LG의 창단 첫 정상 등극에는 아쉽게 실패하게 되었다.[26] 어쨌든 작년에 6강도 못 든 LG를 정규리그 우승으로 이끈 공로로 감독상을 11년만에 다시 수상했다.
비록 2013-2014 플레이오프 우승에는 젊은 선수들의 경험부족에 따른 고비를 넘지 못하면서 아쉽게 되었지만 LG 창단 이후 최고의 성적을 00년대만 보면 2000-2001 시즌부터 2003-2004 시즌에 이어 창단 10주년이었던 2006-2007 시즌 이후 오랜만의 호성적이었다.
2014년 03월 09일, 창원 LG 세이커스의 창단 첫 KBL 정규리그 우승 이후의 인터뷰는 이렇게 되었다.

"LG에서 기회를 줘서 오늘 이런 영광이 있었다. 그동안 자만했던 점도 분명히 있었던 것 같다. 깨달은 시간도 있었고, 공부할 수 있는 시간도 있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준비해 나갈 수 있는 자양분이 된 것 같다"

"명예회복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줘서 고맙다. 앞으로도 초심을 잃지 않고, 어린 선수들과 함게 항상 새롭게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임하겠다"

"좋은 선수들을 만나 행복한 시즌이었다. 명예회복을 할 수 있게 기회를 준 구단과 열렬한 응원을 보낸 준 창원팬들에게 감사하다"

"구단과 다음 시즌 얘기를 하고 있다. LG에 남을 것이다"

"KBL에서 가장 열정적인 팬들, 또 패기가 넘치는 우리 선수들과 코트에서 계속 함께할 수 있게 돼 매우 기쁘고 구단에 감사한다"


3.3.4. 14-15 시즌


[image]
LG 창단 이후 최고의 한 시즌을 보낸 뒤 김진 감독은 다시 KBL 총재직으로 돌아온 김상식 감독의 부친으로 유명하신 스승인 김영기 총재[27] 에게 2014-2015 시즌을 앞두고 총재가 된 정규리그 우승팀의 감독으로 격려를 받게 되었고(절대로 학력이 아닌 실력) 주축 선수들은 큰 변동없이 2014-2015 시즌을 맞이하게 되었다.
LG 구단에서는 정규리그 역대 팀 최다승(40승), 최다 연승(13연승) 기록과 함께 팀의 창단 후 첫 정규리그 우승을 이끄는 등 탁월한 지도력으로 팀을 젊음과 패기의 명문 구단으로 만든 공과 함께 3년 4억에 연봉 재계약을 2013-2014 KBL 파이널 이후 내부적으로 확정했고 2014년 05월 01일에 공식 재계약을 발표했다. 강양택 수석코치와 정재훈 코치도 같이 3년 재계약과 함께 팀과 함께한다. 프로농구 LG, 김진 감독과 연봉 4억원에 재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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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2015 시즌을 앞두고 2014년 08월 LG 세이커스는 정들었던 서울 방이 체육관 대신 형제 야구단인 LG 트윈스와 함께 훈련하게 될 이천 LG 챔피언스 파크 개관식에서 LG 트윈스양상문 감독님과 함께 LG스포츠단의 사령탑으로서 10년대의 신바람 비상을 이끌게 된다. [28]
그리고, 2014 인천 아시안게임에서 LG 창단 이후 전 LG 출신 [29]이 아닌 현 LG 출신이 2013-2014 시즌 창단 첫 정규리그 우승과 함께 무려 2명의 선수를 대한민국 농구 국가대표팀에 발탁되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귀화 출신 슈터 문태종 선수와 13-14 시즌 신인왕 센터인 김종규가 창단 처음으로 현 LG 소속으로 아시안게임 대표팀에 선발되었다.
여기서 2014 인천 아시안게임에서 한국농구는 안방에서 열렸던 대회로 12년만에 금메달을 획득했다. 2013-2014 시즌 신인왕에 올랐던 김종규는 병역면제[30]와 함께 면제를 받게된다.
하지만, 전년도 정규리그 우승팀에 대한 우승후보들인 원주 동부 프로미와 서울 SK 나이츠의 경계를 포함해서 2014 인천 아시안게임 금메달의 후율증은 꽤 길어지면서 슬럼프로 이어지더니 전년도 정규리그 우승팀은 순탄치 않았던 차기 시즌 초반을 보내게 된다.
2014-15 시즌에는 초반 2014 인천 아시안게임 대표팀에서 금메달을 했던 주역인 문태종김종규의 체력문제로 인해 조직력이 무너지면서 8승 14패로 전년도 정규리그 우승팀이 8위의 부진으로 인해 다시 팬들에게 비난을 받다가 2015년 들어서 모비스 피버스SK 나이츠원주 동부 프로미 등을 물리치고 '''11연승'''을 달리며 비판은 사라졌고 오히려 13-14 시즌 정규리그 우승팀이 맞는지 그 저력에 박수를 보냈다.
2015년 2월 4일 기준으로 2015년에는 한 번도 패하지 않는 신바람을 이어갔다.
이 당시 창원 LG는 프로농구 10개팀 중 유일하게 팀 공격력이 평균 80점을 넘어서면서 전체 공격력 1위를 기록했다.
2014-2015 시즌 정규리그는 전년도 정규리그 우승이 무색할 정도로 8위까지 추락했지만 11연승을 통해 1위에서 5위로 추락했던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31]와의 6강 플레이오프 홈코트 어드벤티지가 걸려있는 정규리그 4위라는 역전의 비상과 함께 극적으로 14-15 시즌 정규리그를 마무리하게 된다.
2014-15 시즌 6강 플레이오프에서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를 상대로 창원 홈에서의 1차전 압승에도 불구하고 창원 홈 2차전을 패하면서 고양 어웨이 3차전에도 겨우 승리하는 등 창원 홈 최종 5차전까지 가며 고전을 했지만 선수단의 투혼과 함께 2년 연속으로 4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게 된다.
하지만, 체력문제와 데이본 제퍼슨의 기행과 함께 13-14 KBL 파이널에서 아픔을 주었던 14-15 통합우승팀이자 KBL 플레이오프 3연패를 달성했던 모비스를 만나 여러 악재속에서도 투혼을 발휘했으나 최종 5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2승 3패로 또 고배를 마시게 된다. [32]
4강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용병 데이본 제퍼슨이 구설수에 올라 중도퇴출 당했고, 시즌 후 김시래가 상무에 입대하게 되고 문태종이 FA 계약만료에 따른 이적하는 등 예년보다 힘든 다음시즌을 예고하고 있다.

3.3.5. 15-16 시즌


14-15 시즌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에서 활약했던 전천후 빅맨인 트로이 길렌워터문태종의 FA 보상으로 2015 드래프트에서 정성우가 입단했지만 오히려 김시래의 공백을 절감했는지 의존도가 높았고 유병훈도 불미스런 징계로 인해 시즌 초반에 출전정지를 당하면서 개막 이후 시즌 초반부터 7연패의 부진으로 몰락을 겪게 된다.
2015-2016 시즌이 개막하고 20게임을 치렀는데 5승 15패로 압도적인 최하위로 힘든 시간을 겪게 된다.
선수층이 엷어진 문제가 크지만 그 동안 작전이나 전술 면에서도 상당히 많은 비판을 받고 있는데 이미 분위기가 상대편으로 다 넘어간 뒤에야 작전 타임을 부르는 등 전성기와 다른 작전타임 타이밍까지 놓치는 모습을 간간히 보이고 있다. 이 때문에 LG 팬들에게 거센 비판을 받고 있다. 20점차 넘게 이기고 있다가도 마지막에 뒷심 부족으로 어이없이 패배하는 양상이 3경기 연속으로 반복되기도 했다.
[33]~~#
그러나, 2016년의 시작과 함께 다시 귀신같이 승을 찍으면서 LG는 고춧가루 부대가 되었다.
대체 용병선수인 샤크 맥키식의 활약이 큰 듯. 결국 8위로 마무리했다.
2016년 02월 12일 주장 김영환은 삼성전에서 극적인 3점 버저비터를 터트리며 김진 감독의 신뢰에 보답했다.
그리고, 정성우 선수는 신인왕을 수상하게 된다.

3.3.6. 16-17 시즌


3년 재계약의 임기 만료인 2016-2017 시즌에는 2016 프로-아마 최강전 결승에 오르면서 여전히 부족하지만 기대감을 가지게 했다. [34]
외국인 또한 빅 포워드이자 스트레치 4 빅맨에 해당되는 레이션 테리[35]를 영입했지만 포스트 열세(골밑 몸싸움 부족)로 인해 중국 C 리그에서 산시 울브즈의 2년 연속 정규리그 우승을 이끌었던 제임스 메이스를 영입하면서 김종규 선수의 부담을 덜기 위해 노력을 했다.
하지만, 2016-2017 시즌에도 기복이 심한 경기력은 달라지지 않았고 김시래 선수의 공백은 컸으며 그 부담은 김영환 선수에게로 향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분신과 같은 주장 김영환 선수는 3점슛 22개 연속 실패를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구단 최고위층은 경기에 개입한 설이 있었다.)
우선은 6강에 들기 위해 구단의 언질 속에 kt와 트레이드로 KBL 대표 슈터인 조성민을 원치 않게 트레이드로 함께하게 되었고 구단은 꼬임에 넘어가면서 허훈이 나오는 2017 KBL 국내신인선수 드래프트 지명권도 함께 보내고 말았다. [36]
물론 조성민의 활약으로 초반에는 승리를 꽤 가져갔지만 김종규의 부상 이후 인삼공사와 전자랜드 상대로 대패를 기록하고 kt전에서 '''트레이드로 넘어간 김영환에게 충격적인 결승 버저비터를 맞게 되면서 6강 플레이오프를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김영환은 구단의 원망감을 표시하는 과도한 세레머니를 하게 되었고 LG 팬들은 분노했으며 스승인 김진 감독은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된다. kt 팬들도 처음에 자기 팀에서 자리를 못 잡았던 선수가 돌아오면서도 비난을 했는데 단숨에 바뀌고 말았다.
계다가 천적과 다름이 없었던 원주 동부에게는 '''시즌 5경기 전패'''를 기록하는 바람에 6강 진입에 위험하게 되었다.
게다가 데이본 제퍼슨 때도 그러했듯 외인 선수인 제임스 메이스에게 끌려다니는 듯한 행동을 수차례 보여줘서 선수 한 명 컨트롤도 못하는 비판을 받았다.
결국에는 3월 21일 6강 플레이오프에 모든 것이 걸린 안양 KGC인삼공사와의 경기에서 한 때 25점차까지 끌려다니는 등 무성의한 경기를 펼치며 63-79로 대패, 6강 탈락 트레직 넘버에 1만 남겨뒀다.[37] 다음 날 인천 전자랜드서울 삼성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면 자동으로 플레이오프 탈락이 확정되는 것. 결국에는 이날 전자랜드가 서울 삼성에게 81-78로 승리를 거두며 두 시즌 연속 플레이오프 탈락이 확정됐다. 동부에 또 져 6연패 압살이 확정되었다. 이 경기에서 지면서 전 구단 상대 승리를 2연속 실패[38]한 것은 구단 역사상 최초였다. 마지막 날 오리온스와의 경기에 패배하여 마침 동부에 승리한 SK에 밀려 8위로 추락했다. 이제는 부상이 있었지만 2년 연속 봄농구에 실패하면서 더 이상 두고볼 수 없다며 당장 사퇴하라는 비난의 목소리가 절정에 달했다.
결국 LG 구단은 2017년 4월 13일 재계약을 하지 않음을 발표하여 LG 역대 최장수인 6년의 감독사를 뒤로하고 사령탑에서 쓸쓸하게 물러나게 되면서 명장의 퇴장을 알리게 되었다. 김 감독은 스포츠단 본사인 서울 잠실야구장과 클럽 하우스인 이천 LG 챔피언스 파크[39]에서 자신과 함께했던 강양택 수석코치와 정재훈 코치와 외롭게 짐을 챙기고 떠나게 되었다. [40]
다음은 창단 첫 정규리그 우승 이후 퇴임하게 된 김진 감독님의 LG 세이커스 팬들에 대한 마지막 편지인사였다.

지난 6년간의 시즌들을 되돌아보면서 언제나처럼 변함없이 보내주신 창원 LG 세이커스 팬 여러분의 열정적인 성원에 감사를 드립니다.

챔피언이라는 창원 LG 세이커스팀의 새로운 역사를 이끌어내지 못해 세이커스 팬 여러분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점, 아쉽고 죄송합니다.

늘 선수단과 함께 해주시고 분에 넘치는 관심과 열정적인 응원으로 선수단에 힘을 주심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추가로, 김진 감독을 지원해 준 김완태 단장은 16-17 시즌 개막을 앞두고 갑작스럽게 사퇴를 하게 된다.
실제로 김진 감독의 퇴임 직전 김영환과 조성민이 포함된 kt 소닉붐과의 충격적인 트레이드 이후 김진 감독이 한 게 아닌 한상욱 단장의 주도로 나왔고 맞트레이드를 했던 kt 또한 당시 사령탑이었던 조동현 감독이 주도한 게 아닌 최현준 단장이 했던걸로 나왔다. 이 트레이드로 kt는 허훈과 양홍석을 모두 지명하게 된다.
어떻게 보면 LG 농구의 황금기를 같이했는데 LG 세이커스에는 큰 울림이었다.
고려대 농구부 출신을 살리는 LG 세이커스의 전통을 보면 서동철 KB 스타즈 감독과 전희철 SK 코치가 후임감독으로 물망에 올랐고 이외 이상범 KGC 인삼공사 감독과 위성우 우리은행 위비 감독이 후보군에 올랐지만 김완태 단장의 후임인 한상욱 단장의 선택은 코치경험이 없었던 2002 부산아시안게임 금메달의 주역으로 현역 말미 4년을 보낸 현주엽이었다. 하지만, 8년만에 선수에서 감독으로 돌아온 현주엽을 7대 감독으로 선임을 하면서 친정으로 돌아왔지만 돌아온 건 LG의 대몰락이었다. 이건 현주엽과 한상욱을 참고. 2016-2017 시즌 개막을 앞두고 창단 첫 정규리그 우승을 지원했던 김완태 단장은 갑작스럽게 사임을 하게 되고 그 후임으로 사무국장이었던 한상욱 단장이 승진을 했다.

4. 감독 퇴임 이후


보통 감독들은 퇴임을 하게 되면 방송 해설위원을 통해 감독 재취업 또는 농구 이론을 재정리한다.
하지만 김 감독은 방송 해설위원을 하지 않은 바람에 많은 정보가 있지는 않았다.
대신 NBA를 즐겨보는 농구인으로는 정보가 나와 있다.
평소에도 코치와 감독 재임 시절에도 미국 유학을 검토했을 정도였다.
감독 재임 기간에도 강양택 수석코치와 김지홍 코치와도 NBA 농구로 격이 없는 소통을 한다.
미국농구, 특히 런앤건을 사랑했고 유타 재즈의 제리 슬로언 농구를 보았지만 사실 NBA의 최고 인기팀이자 최고 명문인 코비 브라이언트LA 레이커스를 더 볼 정도로 한국농구에 있어서 NBA와 가장 유사한 지도자로 알려져있다.
LA 레이커스의 최고 스타인 코비 브라이언트를 만난 한국농구의 유일한 농구인이었다.
대구 동양 오리온스의 명장 시절에도 NBA를 봤으며, SK 나이츠 감독으로 자진 사퇴 이후 강양택 코치와도 NBA 견문을 넓히러 미국으로 유학 겸 여행을 떠나시면서도 NBA 내기를 했다.
더 놀라운 건 창원 LG 세이커스의 창단 첫 정규리그 우승과 LG 역대 감독으로 KBL 감독상 수상 이후 LG 그룹의 한 블로그에서 NBA 잡지를 보았던 김 감독의 자료가 나왔다는 거다. LG 세이커스, 송골매의 비상에는 이유가 있다
그리고 김진 감독의 퇴임 이후 LG는 더 비참한 몰락사를 겪게 된다.
그 이전 대구 동양 오리온스도 마찬가지였다.
대구 동양은 김진 감독이 떠난 이후 대학 선배인 이충희와 대학 후배인 김상식 그리고 고등선배였던 가 후임 감독이었지만 아무도 김진 감독의 업적을 따라가지 못했다.
동양 팬들에게 이충희와 는 흑역사였고 김상식은 팬들이 비판을 했지만 후회를 하고 있는 편이다.
대구 팬들에게 봄농구는 2006-2007 시즌이 마지막이었고 김승현의 허리디스크 수술과 김병철의 노쇠화에 그리고 외국인 악재를 끝내 극복하지 못하면서 대구에서 4년간 양궁순위인 10-9-10-10으로 암흑기였다.
결국 2010-2011 시즌 이후 대구체육관에서 더 이상 KBL을 볼 수 없게 되었고 추일승 감독은 살아남기 위해 대구체육관의 훈련시설을 지적하면서 구단과 함께 고양으로 연고이전을 단행하면서 대구 팬들에게는 끝내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 암흑기도 2012-2013 시즌에 겨우 마무리하게 된다.
이후 오리온 팬은 대구 팬과 고양 팬으로 양분화가 되었고 더 이상 예전 대구 동양 오리온스 시절의 절대적인 응원을 기대하지 못했다. 고양 연고 이전 이후 주말에도 응원열기가 뜨겁지 못한 편인데 아직도 옛 팬들은 대구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다.
대구 동양의 팬들이 김진 감독이 서울 SK 나이츠와 창원 LG 세이커스 감독이 되어서도 대구 동양 시절의 추억을 회상하며 따라갈 정도다.
본격적으로 김진 감독이 떠난 창원 LG 세이커스도 이 비극을 피하지 못하게 된다.
2002 부산 아시안게임 대표팀 외에 인연이 깊지 못했던 대학 후배 현주엽이 후임 감독으로 부임했는데, 혹독한 지도자로서의 경력 자체가 없었다. 프로에서 코치는 둘째쳐도 모교인 고려대 농구부의 감독설까지 나왔으나 코치도 하지 못했다.
그로 인해 초보티가 나도 너무 심하게 나면서 더 부각이 되더니, 오죽했으면 LG 팬들은 너무 속상해서 여기에는 대학이자 실업 시절 후배였던 서동철을 더 인정하게 되었을 정도였다. 참된 LG 팬들이나 참된 kt 팬들이 모두 김진 농구의 후계자라는 극찬을 보냈다.
실제로 LG 구단에서는 이상범위성우를 후임 감독으로 올렸지만 비고려대 출신이었는지 역시 두 감독은 고사를 했고 LG 세이커스라는 팀 자체가 동양 오리온스와 함께 고려대 농구부 출신이 맡는만큼 전희철서동철도 검토했으나 구단이 고사를 했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고려대 농구부 감독 취임설이 있었으나 아마든 KBL이든 감독보다 코치 경험 자체가 없는 현주엽을 선임하는 큰 누를 끼치면서 LG 팬들에게 큰 상처를 주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LG 역대 단장들과 과거 구단 직원들은 다른 직원보다 2016-2017 시즌부터 사무국장에서 승진한 창단멤버 출신인 한상욱 단장과 사무국장에 대한 비판을 하면서 안타까움을 전하기도 했다. 이 부분은 현주엽의 감독 부임 이후 인터뷰에서 솔직히 한상욱 단장과의 선수 시절 인연을 직설적으로 말했다.
농구팬들은 조성민을 트레이드로 영입했으면 기존의 김시래김종규 콤비가 여전한 걸 보면 LG 프런트가 이들을 살릴 수 있는 있는 감독으로 서동철 감독을 LG 팬 포함 KBL 팬들이 추천을 했는데 LG는 선수시절 스타 출신 및 감독으로서 우승경험이라는 이름값 문제로 인해 하지 않았다. 여기에 김영환도 같이 있었으면 금상천화였다.
재임기간 2년 말년에는 FA로 풀린 문태종의 오리온 이적을 시작으로 아마 시절부터 대표팀까지 쉴세없는 차출로 인한 김종규의 부상, 김시래의 입대, 유병훈의 불법토토 도박으로 인한 출장정지를 넘어 당시 외국인들의 도미노 같은 부상 때문에 성적은 다시 추락했다. 힘겹게 2015-2016 시즌에는 5승 15패로 LG 창단 첫 꼴찌 위기였는데 당시 김완태 단장은 팬들에 대한 애정과 격려를 부탁하며 신뢰를 통해 20승 34패로 최하위에 탈출하면서 8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문태종의 이적과 김시래의 상무 입대를 감안하면 실패는 아니었다.
하지만, 2016-2017 시즌 개막을 앞두고 김완태 단장은 비시즌 중에도 활동을 하셨으나 시즌 개막 1달을 남겨놓고 돌연 사퇴를 하면서 창단 프런트 직원이었던 한상욱 사무국장이 단장으로 승진하면서 팀방향성은 거꾸로 갔다.
김영환 선수는 3점슛 22개 연속실패를 이유로 kt 소닉붐으로 충격적인 트레이드 재복귀를 당했고 조동현 감독이 장악하지 못한 KTF-kt의 11년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 슈터였던 조성민 선수를 그것도 2017 KBL 드래프트 1 라운드 픽까지 주면서 김진 감독 몰래 트레이드를 추진했다. 이 트레이드는 당시 kt 최현준 사무국장(향수 서동철 감독 선임 때 단장승진)과 LG 한상욱 단장이 실무진에 성적부진압박을 받으면서 몰래 짜고 쳤다.
그 결과 2017년 02월 24일에는 적으로 창원에 온 김영환의 충격적인 버저비터를 당하면서 LG는 연패에 빠지더니 창단 20주년에 정규리그 8위의 부진의 책임을 물어 2017년을 끝으로 연장 재계약에 실패하면서 팀을 떠나게 된다. 심지어 창단 20주년 기념경기에서 김진 감독과 김시래 선수 및 김종규 선수에 대한 인터뷰조차 없었고 당시 2대 김태환 감독과 조성원 선수 그리고 4대 신선우 감독과 현주엽 선수만 인터뷰를 했다. 여기서 김영환 선수가 트레이드 되지 않았으면 추가될 가능성이 있었다.
김진 감독은 퇴임 이후 이 트레이드는 내가 한게 아니라며 당시 OSEN 서정환 기자에게 크게 화를 냈다. 침착하기로 유명했던 전임 감독이라는 점에서 KBL 팬들은 물론이고 그 전성기 시절 LG 팬들도 퇴임 이후 놀랄 정도였다. 김완태 단장 또한 퇴임 이후에도 이 부분을 지적했다. 추가로 한상욱 단장은 2년뒤 김종규를 FA 때 놓치면서 김완태 단장과 LG 팬들에게 역대급 디스를 또 당하게 된다. 한상욱 단장은 직원들을 두고도 활용조차 못한 것이다. 그것이 김진 후임의 LG 사령탑이이었던 현주엽이었다. 추가로 현주엽이 성적부진으로 사퇴한 이후 후임이 대학에서도 매번 패했던 팀 MVP 출신인 조성원으로 바뀐 이후 김시래마저 충격적인 트레이드를 했다. 결국 자신의 재임시기에 만들었던 김영환,김종규,김시래 트리오는 8년도 채 못간채 해체를 당했다. 그만큼 희생을 한 증거였다.
그런데, 후임자가 감독 데뷔 시즌에서부터 크게 삽질을 하고 있어서 뜻밖에 김진이 졸지에 재평가를 받기도 한다... 만 2년 차에 똑같이 제임스 메이스를 보유하고도 3위까지 치고 올라가서 다시 의문의 1패를 당하고 있었다가 3년차에 팀을 또다시 심하게 망치고 계약만료 이후 물러나면서 김진>현주엽이었음이 최종적으로 밝혀졌다. 여기서의 스토리는 이렇게 나온다.
LG의 후임 감독이 될 수 있었던 서동철 KB 스타즈 감독은 kt 소닉붐 감독이 되었다. 당시 사무국장이었던 최현준 kt 단장은 당시 임종택 kt 단장이 너무 못해서 리빌딩에는 적합함을 말했다. 사실 LG도 조금의 검토는 했어야 했다.
실제로 김진 감독의 농구와 거의 비슷한 서동철 감독은 높이가 고질병인 부산 kt 소닉붐에서 허훈 선수로 인해 쏠쏠한 재미를 보게 되고 잃었던 김영환마저 어떻게 된건지 몰라도 kt에서도 주장이 되면서도 재미를 보았다. 양홍석의 경우 서동철 감독의 혹독한 채찍과 당근으로 빠른 성장세를 보였다.
참고로, 김영환 선수는 김진 감독에 대한 존경을 고백했다. 그리고, 같은 주장 출신의 모교 대선배이자 오리온스의 레전드인 김병철 수석코치도 실제로 존경을 했으며 본인도 그리움을 표시했다. 실제로 김 감독과 비슷한 스타일인 서동철 감독 덕인지 잘 모르겠으나 회춘하듯이 30대 중반에도 불구하고 kt의 10년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조성민보다 더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었는데 과거 LG 주장 시절에 못지 않았다. 사실 조성민조동현현주엽 사이의 강훈련 속에 상처투성으로 좋지 못했던 경기력을 보인 걸 보면 대조적이었다. [41]
2017 KBL 국내신인선수 드래프트에서 이미 조성민의 영입댓가로 내준 드래프트 지명권은 LG의 공이 2순위로 추첨되어 2순위 픽이 kt로 넘어가버리면서 후임인 현주엽은 흥분을 했고 또 한 번 LG 팬들의 뒷목을 잡게 만들었다. [42]
하지만 후임으로 들어온 현주엽이 외국인 선수에서부터 시작해서 거의 모든 면에서 초짜인 티를 내며 심하게 무너지고 있어서, 그래도 외국인 선수는 잘 뽑던 김진을 은근 재평가하기도 한다.
참고로, 현주엽이 2년차에 본인이 마지막 시즌 때 썼던 치트키로 김종규와 트윈 타워였던 제임스 메이스를 데리고 우격다짐으로 3위와 힘겹게 4강까지 치고 올라가기도 했을 정도로 김진 감독이 본 외국인의 눈은 적중했다.[43]
사실 한 때 지휘봉을 잡았던 12-13 시즌 이후 7년만에 17-18 KBL 파이널에 진출한 서울 SK 나이츠애런 헤인즈의 부상으로 인해 문경은 감독은 김진 감독에게 조언을 구했으며 그 과정에서 제임스 메이스를 추천했고 17-18 시즌 기적의 정규리그 우승과 함께 이해 통합우승을 원했던 원주 DB 프로미를 극적으로 넘으면서 SK는 18년만에 KBL 플레이오프 우승을 하게 되었는데 김진 감독 또한 다른 농구인들과 농구기자에 비해 DB보다 SK의 우승을 더 높게 평가했다. 역시 외국인 보는 눈은 거의 귀신이었다.
이 장면을 본 현주엽은 1년전 서울 잠실야구장에서의 LG 7대 감독 취임식 이후 따로 김진 감독에게 전화를 통해 머리숙여 정중히 인사드린 이후 조언을 받았다. 결국 방송해설위원 시절에 제임스 메이스를 비판했는데 17-18 SK 나이츠의 KBL 파이널 시절 때의 경기력을 보고 즉시 제임스 메이스를 영입하며 김종규와 함께 LG 트윈타워로 그나마 선전했다.[44]
현재 LG 팬들은 김진 감독의 선임과 선택이 맞았음을 인정하기 시작했고 캥거루였던 스타 출신인 조성원 감독의 선임과 함께 무너진 분위기와 신바람이라는 팀 컬러 개편차원에서 13-14 시즌 정규리그 우승 멤버들이 모두 떠나면서 그리움을 표시하고 있다. [45]
즉, 방송해설과 예능으로 인기를 얻은 후임인 하마를 더 미워하고 있고 오죽했으면 서궁사를 상대팀 감독이었지만 같은 농구스타일인지 몰라도 더 지지하는 역함수가 나왔다.
동양 오리온스 시절 지지했던 대구 팬들도 연고이전과 김 감독을 힘들게했던 프런트는 원망을 해도 오히려 김 감독을 LG 팬들보다 더 지지를 하고 있다.[46]
LG 감독 퇴임 이후에는 건강한 모습으로 동아리 또는 동호회 농구의 일일선생이자 일일강사로 재능기부 활동을 통해 활약을 하고 있으며 동양 시절부터 인연이 있었던 정재훈 코치가 모교인 한양대의 감독이 되면서 자신의 모교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한양대 농구부의 선수들(사실 농구부 학생들)를 시작으로 원 포인트 레슨을 A부터 Z까지 다양하게 일일 농구강의를 이어가고 있다.[47]
참고로, KBL 플레이오프 2개팀 우승은 최인선 감독이 유일하지만 KBL 정규리그 2개팀 우승은 현재까지 2명[48]인데 그 중 하나가 바로 김진 감독이다.
3년전 대학 후배인 전창진 감독이 2003-2004 원주 TG 삼보 엑서스의 KBL 첫 정규리그 우승 이후 2004-2005 원주 TG 삼보 엑서스의 KBL 통합우승과 2007-2008 원주 동부 프로미의 KBL 통합우승 이후 2006-2007 KBL 파이널 이후 성적부진이었던 KTF 매직윙스의 후신인 부산 kt 소닉붐에서 2010-2011 창단 첫 정규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전창진 감독은 TG 삼보-동부와 kt라는 두개의 팀에서 정규리그 우승을 했다.
김진 감독은 2001-2002 대구 동양 오리온스의 KBL 통합우승 이후 2002-2003 대구 동양 오리온스의 2년 연속 정규리그 우승을 달성했고 11년뒤 2013-2014 창원 LG 세이커스의 17년만에 창단 첫 정규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동양과 LG에서 모두 정규리그 우승으로 해냈다. 사실 두개의 팀에서 플레이오프 우승은 고사하고 정규리그에서도 우승을 하는 건 어려운 일인데 이건 명장의 흔적이다.
후발주자로 KBL 플레이오프 우승과 KBL 정규리그 우승을 팀마다 따로 해보았던 이상범과 한 팀에서 코치와 감독으로 모두 KBL 통합우승에 성공한 김승기에 이어 SK의 레전드로 KBL 정규리그 우승과 KBL 플레이오프만 따로 우승해본 문경은이 도전하고 있지만 아직도 해내지 못한 업적이다.
자신은 오늘의 명장까지 학력과 실업에서 인연조차 없었지만 상무 농구단과 동양 오리온스에서 인연이 되었지만 박광호 감독님에게 32연패 시절의 마음고생이 컸는지 가장 감사함를 표시했고 최명룡 감독 또한 큰 인연이 없었는데 자신을 감독으로 시험까지 주면서 감독대행을 거쳐 동양 오리온스 감독으로 내부승진할 때 감사함을 표시했다. 실업 시절 김인건 감독님과 대학시절 은사였던 박한 감독님에게도 고마워했다. 당시 동양은 김진 코치의 내부승진보다 최고위층에서 이충희 LG 초대 감독을 영입할려 했으나 정태호 단장이 반대했으며 동양 3대 감독으로 승진시켰다. 이후 김진 감독님에 떠나면서 이충희는 오리온스 4대 감독이 되었지만 비극으로 끝나게 된다. 김진 감독이 도전했던 SK도 최인선 이후의 가능성을 주었지만 현대-KCC의 명장인 신선우 감독이 LG 4대와 김진 후임의 SK 6대 감독이 될 때 몰락했다. 그만큼 동양-LG의 명장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이 돌보지 못했던 아들인 김윤 선수는 공교롭게도 감독으로서 퇴임 이후 2017 KBL 국내신인선수 드래프트에서 감독이 아닌 학부모로 출석을 했는데 가장 안타까운 모습을 보이면서 농구팬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지휘봉을 잡았던 창원 LG 세이커스는 걸렀고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도 냉정했다. 다행히도 김윤 선수는 3라운드로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에 지명되면서 취업을 했다. 어머니는 기뻐하셨지만 아버지인 김진 감독은 눈물과 함께 미안함을 드러냈다. 하지만, 정작 D 리그에서도 가능성을 보여주지 못하면서 2년만에 은퇴를 하게 된다. 감독 시절 많이 미안했는지 공부하는 농구인이 되길 바랬는데 프로의 벽은 높았다. 고등학교를 중간에 전학가게 되었는데 대학을 위한 진학이었는 평이 있었다. 농구 팬들은 조성원 감독과 김시래 선수가 있는 명지대학교였으면 출전시간을 통해 농구선수로서의 가능성이 있었으리라는 평이 있었지만 끝내 부친과 같은 길이었지만 출전이 어려운 고려대학교를 선택하면서 제2의 농구인생을 준비하게 되었다. 이건 김동광의 아들인 김지훈 선수도 그랬다. 김동광 감독의 경우 부친논란 속에 감독직을 내려놓는 아픔이 있었고 복귀할 때 매니저였던 아들 김지훈에게 다른일을 찾으라는 냉정함을 보였다. 참고로, 고려대 농구부 출신의 농구인들은 모교에서 교생실습을 하는편이다. 김지훈의 경우 교사자격증을 취득하면서 아마농구 지도자로 활약하고 있다. 이외 스토리는 고려대학교 농구부가 포함된 아마농구 스토리에 나와있다.
감독으로 물러난 이후 행정가가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자신의 대학 후배인 전창진 감독이 불미스런 일로 인해 감독이 아닌 재정위원으로 보도되기도 했다. KBL 영구제명에 따른 KBL 자격회복회의였던 KBL 재정위원회에서 별명이 스님이었는지 법전을 꼼곰히 보면서 자신도 감독으로서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고심을 많이했다. 과거 경쟁했던 후배가 명장이지만 농구인으로서 안타까움이 들었는지 심사숙고를 했다. 과거 OB 선배들이 주축인 KBL 재정위원회의 KBL 재정위원으로서 출석하는 모습까지 고심을 했다. 결국 전창진 감독은 KBL 회원으로서 자격회복과 함께 부산 kt 소닉붐 감독 퇴임 이후 전주 KCC 이지스의 감독으로 우여곡절 끝에 4년간의 마음고생과 함께 KBL 감독으로 돌아오게 된다. 한 때 전창진 사건으로 인해 보도되는 모습을 보면 농구팬들이 안쓰러운 모습에 안타까움을 보이기도 했다. 전창진 감독의 적응을 도울 수석코치로 한 때 인연이 깊었던 강양택 수석코치도 스승의 퇴임 이후 전창진 감독을 보좌하면서 3년만에 KBL에 돌아오게 된다.

5. 통산 감독 성적


'''연도'''
'''소속팀'''
'''경기수'''
''''''
''''''
'''정규시즌'''
'''플레이오프'''
2000-01
대구 동양 오리온스/대구 오리온스
22
6
16
10위[49]
-
2001-02
54
36
18
1위
'''우승'''
2002-03
54
38
16
1위
'''준우승'''
2003-04
54
32
22
3위
'''6강 PO'''
2004-05
54
26
28
6위
'''6강 PO'''
2005-06
54
28
26
6위
'''4강 PO'''
2006-07
54
31
23
4위
'''4강 PO'''
<rowcolor=#FF0000> '''통산'''
'''346'''
'''197'''
'''146'''
0.569
-
'''연도'''
'''소속팀'''
'''경기수'''
''''''
''''''
'''정규시즌'''
'''플레이오프'''
2007-08
서울 SK 나이츠
54
29
25
5위
'''6강 PO'''
2008-09
54
20
34
8위
-
2009-10
25
8
17
- [50]
-
<rowcolor=#e1002a> '''통산'''
'''133'''
'''61'''
'''72'''
0.459
-
'''연도'''
'''소속팀'''
'''경기수'''
''''''
''''''
'''정규시즌'''
'''플레이오프'''
2011-12
창원 LG 세이커스
54
21
33
7위
-
2012-13
54
20
34
8위
-
2013-14
54
40
14
1위
'''준우승'''
2014-15
54
32
22
4위
'''4강 PO'''
2015-16
54
21
33
8위
-
2016-17
54
23
31
8위
-
<rowcolor=#c30452> '''통산'''
'''324'''
'''157'''
'''167'''
0.485

<rowcolor=#373a3c> '''총계'''
'''797'''
'''415'''
'''388'''
0.517
'''V1'''

6. 코칭 스타일


한국농구에 있어서 NBA의 영향을 받는 지도자가 있었는데 그 부분을 가까이 할려는 노력을 했다.
2-3 존 디펜스와 사이드 라인 트리 오펜스 그리고 패스트 브레이크 오펜스를 보면 마치 NBA의 마이크 댄토니처럼 평균득점 100득점을 찍고도 남는 엄청난 공격력을 선보이면서 KBL에서도 공격농구의 향수를 통해 흥행을 유도했다. [51]
그리고, 농구발전을 위해 밑에서도 농구하는 사람들에게도 가능한 농구라는 종목을 함께 뛰면서 나누는 몇 안되는 한국농구인이다.
NBA로 말하면 Take Cares다. 즉, 농구를 통해 재능기부를 하는 점이다.

6.1. 장점


감독으로서 최고의 장점은 2-3 존 디펜스(한글로 2-3 지역방어)를 KBL에 가장 잘 녹였고 오펜스에서도 패스트 브레이크와 세컨 브레이크를 잘 살리는 전술 겸 전략가의 모습을 보였다.
오펜스 패턴 중 사이드 라인 트리와 혼(혼즈 오펜스) 그리고 기브 앤 고 및 컷인 전술은 명장으로서 가지고 있었다.
김진 감독의 작전타임은 강을준처럼 어록가지고 장난치지 않은 건 엄청난 일이다. 가드 출신 중에도 김태환과 대스승이신 김동광도 이랬다.
대신 김진 감독은 간단한 영어를 바탕으로 선수단에게 이해를 쉽게 했다.
설명을 들어보면 "셋(숫자 3이 아닌 세트 오펜스의 줄임말)"을 하거나 다른 가드 출신 감독이 주로 사용하는 "헤드" 같은 용어로 포인트 가드와 슈팅 가드에게 오펜스를 출발하게 한다. 실제로 3점 위주의 고집이 나오면 자신도 슈터인지 선수단에 "컷(커트인의 줄임말)을 해라" 또는 "슈터를 봐줘"와 "너(슈터인 김병철과 오용준 그리고 김영환) 여기 있어"는 말을 항상 한다.
심지어 선수들이 급한 나머지 3점만 쏘거나 패스로 에러를 하면 타임아웃을 절묘하게 부르면서 해당 선수에게 짖궂은 쓴소리를 하되 패턴으로 방향을 제세한다.
"지금 게임이 포인트야. 공격적으로 해야돼. 태술이, 성윤이, 민수, 자시(클라인허드) 그리고 경은이가 여기있어. 니(경은)가 해."
쓴소리를 하되 상대의 매치업과 팀의 문제점을 같이 본 전술과 전략을 통해 패배할 수 있는 경기를 뒤집으면서도 선전하기도 한다.
00년대 초반 동양 오리온스와 2002 부산 아시안게임을 보면 더블팁과 로테이션 디펜스 이후 패스트 브레이크는 상대가 알고도 못 막을 정도로 전술과 전략에서도 뛰어났으며 LG 세이커스에서도 런앤건이 나오면서 당시 2년간의 전성기였던 창원은 마치 6년간 대구의 모습 그대로 절정이었다.
추가로 가드 라인을 유형을 보면서 키울 듯 하나 창조적인 모습을 배려를 한다.
실제로 김진 감독님은 런앤건을 사랑했다.
김태환 감독도 런앤건이지만 다른 경우였으며 슈터인 조성원조우현만 쓰고 강동희가 오기전까지 포인트 가드를 잘 쓰는 편이 아닌데 김진 감독은 자신도 김병철과 같은 슈팅 가드 출신이지만 포인트 가드에 대한 소중함을 가지고 재임기간 중 하나의 장점이 있으면 그 부분을 살린다.
런앤건에서 가미하면 김태환보다 김진이다.
선수가 신이 날 수 있도록 달리면서 넣은 농구를 좋아했고 큰 에러가 없으면 포인트 가드슈팅 가드든 외국인 또한 스코어러든 공격이 필요할 때는 배려를 많이 해주시는 스타일이다.
이 영향을 받은 선수들은 감사했다.
포인트 가드를 보면 이렇다.
김승현김시래는 사실 비주류 대학[52]의 포인트 가드였지만 김진 감독님의 영향을 받으면서 KBL 올스타 레벨의 리딩 가드로 성장을 했다. 스스로 큰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감독의 배려 없이 창조적인 경기가 나오지 못한다. 사실 김승현의 패스와 김시래의 스피드를 따라갈려면 남은 선수들도 집중을 해야하는데 에러를 해도 김진 감독님의 배려와 함께 코트에서도 존재감을 보여주었다. 두 선수 모두 어시스트 왕 출신으로 KBL에서 몇 안되는 올스타 리딩 가드로 판타지 플레이어다.
슈팅 가드를 보면 이렇다.
김병철김영환을 보면 모교 출신 제자들이지만 성향을 보면 김진 감독을 닮은 점이 있다. 3점슛이 포함된 공격력이 강하고 해결사 본능도 있다. 영웅심리[53]가 강한지 4쿼터 막판에 맡기면 꼭 해내는 슈터들이다. 체력이 뛰어나면서도 집중력도 강했다. 이들은 김진 감독보다 더 뛰면서 빛나게 했고 실제로 영웅이 되었다. 두 선수 모두 주장으로서 선수단의 단합과 하나를 만들었는데 이것도 김진 감독님의 리더쉽이다.
그리고, 선수들에게 아이들이라는 말을 하면서 자신을 낮추면서 겸손함과 함께 인터뷰를 하시는 편이다.
실제로 김진 감독님은 눈앞의 이득보다 제자들에게 승리가 중요하지만 성장을 자신도 부족해도 유도를 하신다.
외국인 또한 포스트(골밑)가 중요한지 아이솔레이션(고립공간)이 중요한지를 보고 토종 선수들이 어려울 때 외국인들의 기술과 해결로 재미를 보기도 했다.
가장 중요한 건 외국인 스카우트에는 역대급 장점을 보여주었다.
동양 창단 코치 시절을 보면 박광호 감독이 작전지시를 했는데 보통 코치들은 감독 밑에서 정중동이다. 당시 기아의 최인선 감독과 실업 삼성 시절 대선배인 박인규 코치는 마치 총감독과 감독처럼 서로의 역할을 바꾸기도 한다. 추가로 나래의 최명룡 감독도 코치들과 의견조율을 하기도 한다. 반대로, 김동광 감독은 자신이 1인 3역을 한다. 당시 강정수 코치는 간단히만 설명하고 전술과 전략 앞에 얼음이었다. 하지만, 김진 감독의 경우 코치 시절부터 외국인들과 영어로 토킹을 하거나 혹은 흥분할 때 자제할 수 있도록 달래기도 했다. 외국인을 영어로 설명하기 쉽지 않은데 사실상 1인 3역(외국인 스카우터-외국인 코치-외국인 통역) 이상을 한 격이다. 그 덕분에 외국인들과의 격이 없는 소통이 가능했다. 현재 KBL 지도자 중 영어를 잘하는 지도자를 보지 못했는데 고려대 출신만 기준으로 보면 모교 대선배이신 김동광 감독의 경우 직설적으로 영어로 토킹 및 보드 랭그리지까지 했다. 자세한 건 김동광의 코칭스타일이 포함된 해당 문서 참고.
그 동안 해왔던 외국인으로 코치 시절 토니 매디슨과 키이스 그레이를 시작으로 키넌 조던, 무스타파 호프, 루이스 로프튼, 토드 버나드, 토시로 저머니[54]와 함께했다. 32연패 시절 그렉 콜버트와 존 다지도 포함되었다. 과거 영상을 보면 외국인들을 영어로 소통했다.
감독 시절에는 마르커스 힉스를 시작으로 라이언 페리맨, 바비 레이저, 아티머스 맥클래리, 네이트 존슨, 아이라 클라크, 리 벤슨, 피트 마이클, 자시 클라인허드, 테런스 섀넌, 사마키 워커, 올루미데 오예데지, 애런 헤인즈, 데이본 제퍼슨, 크리스 매시[55], 트로이 길렌워터, 샤크 맥키식, 마리오 리틀, 제임스 메이스까지 KBL에서 한가닥 했던 외국인들이 모두 김진 감독의 영향과 함께 KBL의 역사를 빛내기도 했다.
팔색조 전술과 전략 및 선수의 성격과 유형을 통해 신뢰의 모습으로 기적같은 명승부를 만들면서 주인공을 선수로 만든다.

6.2. 단점


단점으로는 요리사로 말하면 재료를 잘 모으지만 정작 요리솜씨가 부족한지 쓰는것만 그냥 쓴다. [56]
포인트 가드와 슈팅 가드에서 권한을 주지만 이들의 능력이 평균치 미만이면 경기력이 딴판으로 가는 경우도 있었다. 실제로 KBL 드래프트에서 어중간한 포워드와 센터 대신 가드들은 어중간해도 왠한하면 뽑고 간다.
그러나, 이들의 정신과 기술 및 세밀함을 잘 못 올리는 약점도 있었다.
위에도 언급되었지만, 포인트 가드슈팅 가드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외국인에 대한 과한 의존도로 인해 가끔씩은 패장 때 인터뷰를 보면 "졸전"을 계속 말했다. 원래 남탓을 안하는 성향인데 당시 경기력의 선수단에 짖궂은 소리였는지 아니면 자신이 초첨을 잠시 잃었는지 해석하기 쉽지는 않다.
마지막으로 골밑 농구을 생각보다 잘 못한다.
명장이라면 골밑을 강조하는데 선배인 최인선 감독과 김동광 감독은 높이가 낮아도 센터형 외국인으로 골밑을 제압하면 경기력이 더 좋았다. 스크린 전술과 전략이 생각보다 좋지 못했다. 라이언 페리맨과 크리스 매시를 잘 활용한 편은 아니었다. 최인선 감독과 김동광 감독의 경우 외국인들이 키가 크든 작든 수비든 공격이든 골밑을 제압하면 스크린과 파워를 통해 승리하는 법칙을 밀고 갔다. 그러나, 김진 감독은 높이를 높여도 골밑형 외국인보다 기술형 외국인을 선호하면서 골밑을 일정부분 내주는 경우도 있었다. 이건 토털 농구의 신선우 감독도 그랬다.
이 부분으로 인해 전창진유재학보다 명색이 KBL 통합우승과 아시안게임 금메달 감독이었는데도 평가는 높지 못했다. 통산승률이 5할 1푼 7리였다. '''통산 성적은 415승 388패'''였지만 동양 시절 197승 149패 이외는 패가 더 많았다. LG에서도 11-12 시즌을 제외해도 12-13 시즌 재건으로 인해 쉴드지만 15-16 시즌과 16-17 시즌의 쇠락기로 인해 157승 167패에 그쳤다. 명장들은 통산승률이 5할 4푼이 넘어가는데 아쉬운 부분 중 하나다. 전창진유재학에 밀린 비판이 있는 신선우의 경우 자신의 슬럼프였던 SK 나이츠 시절을 제외하면 통산승과 승률이 더 높았다. 실제로 추일승의 경우 통산승률이 5할도 되지 못한점을 보면 위안거리 중 하나다. [57]

6.3. 작전


농구는 전술의 게임이다. 김진은 감독으로서의 등락이 컸지만, 리즈시절 그의 전술을 짚어볼 만하다. KBL에서 한 시즌을 통합우승을 포함해서 2년 연속으로 정규리그 우승을 하고 20년만에 아시안 게임에서 중국을 이긴것과 전성기가 끝난 비판에도 불구하고 KBL 무관의 팀에서 창단 첫 정규리그 우승을 한 것은 선수덕으로 치유하기에는 부족하며 놀라운 전술이 숨어있었다.

6.3.1. 더블팁과 로테이션 수비


당시 KBL에서는 (이충희 감독이 처음 선보였던) 더블팁 수비와 전면 강압 수비가 서서히 도입되는 중이었다. 농구는 조던이 하늘을 날아도, 슛성공률은 샤킬 오닐이 월등히 높다. 즉 누가 뭐래도 골밑 슛이 성공률이 높고, 그에 대비되어 골밑 공격을 더블팁으로 막는 수비가 도입되는 중이었다.
더블팁의 공략은 골밑 선수를 2명이 막게 되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가드가 3점을 쏘는 식으로 수비를 무너뜨리는데, 김진 감독은 외곽 가이드 수비를 옆 선수가 함께 막음으로써, 공이 돌아가는 것에 맞추어 수비수도 마크맨을 돌아가면서 막음으로써 로테이션 수비가 탄생하게 된다. 물론 동양에서 김진 감독에 의해 처음 도입된 것.

6.3.2. 아시안 게임 중국전 격파


일부 한국 농구의 팬들은 운으로 표현하지만 하지만, + 서장훈, 현주엽, 문경은으로도 넘지 못한 20년의 만리장성이다. 또한 중국은 NBA 스타인 야오밍까지 포함된 최강의 멤버. 그런 중국을 비슷하게 경기를 이끌어가다가 마지막 이긴 것은 감독의 작전을 빼고는 논하기 어렵다.
  • 야오밍: 더블팁과 로테이션 수비.
야오밍은 큰 키임에도 더블팁 수비로, 로테이션 수비( 2명의 선수 중간에서 패스를 봐가며 선수를 막는다)에 상당히 당황하며 공격이 무뎌지고, 인터셉트도 상당히 당한다.
  • 전면강압수비: 중국은 제대로된 강압 수비를 처음 겪어본듯하며 후반 막판 실책을 남발하여 또 다른 패인
  • 스크린: 당시 한국의 외곽 슈터들이 마음 놓고 3점을, 골밑 돌파를 가능하게 한 것은 동료들끼리의 스크린의 덕이다
  • 커팅 플레이: 야오밍을 밖으로 끌어내고, 순식간에 골밑으로 패스를 받아서 득점을 한다 (대부분의 선수들끼리, 고른 커팅 득점은 감독에 의해서 충분히 많은 연습을 해서 준비해 온 것)
또한 김승현을 꽁꽁 숨기고 있다가 최대한 늦게 투입하였고 그에 대한 아무런 정보가 없는 중국은 김승현의 압박 수비와 패스에 많이 휘둘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상기의 모든 작전이 중국전에 다 나왔다. 그로 인해 장신의 중국을 격파할 수 있었던 것. 다만 김진은 그 많은 작전들이 선수들 모두에게 전달되어, 다음 시즌부터는 몸에 익힌 선수들이 여러 팀에서 고루고루 상기 작전을 쓰며 동양의 우승에는 악재로 작용했다.
동양의 통합우승 시절에도 식스맨들을 디펜스 위주로 영입할 때도 우려를 표시했으나 결론적으로 숨은 전술과 전략이었다.
LG의 창단 첫 정규리그 우승 시절에도 2년전 포지션 중복으로 인해 조직력이 실종되었지만 젊은 선수들의 성장을 유도하면서도 문태종과 김영환으로 고비를 넘기도 했다.
여튼 리즈 시절 김진의 전술과 전략에 이은 작전을 정말 탁월하다고 부를 만하고 창원 LG 세이커스에서도 시련 끝에 해낼 정도로 농구인들의 신뢰를 받기도 한다.

7. 비판



7.1. 코트의 신사? 1994 한기범 폭행사건


1994-95 농구대잔치를 앞두고 삼성전자는 전 대회에서 연세대를 우승으로 이끈 주역인 New 에이스 문경은중앙대 4강 신화의 주역 터보가드 김승기를 보강했고, 거기다 상무에서 제대한 센터 이창수까지 가세하면서 언론에서는 연세대, 기아자동차와 함께 삼성전자를 강력한 농구대잔치 우승후보로 꼽았다.
농구대잔치를 한 달 앞두고 열린 실업농구 코리안리그 2차대회[58]에서부터 확 달라진 삼성전자의 모습이 드러났는데, 김승기-김현준-문경은-이창수-박상관의 강력한 주전 라인업에 김진, 김대의, 허영, 서대성, 서동철, 강을준 등 탄탄한 벤치까지 갖춘 삼성은 예선리그 6연승을 달렸고 언론들은 이번 코리안리그에서 '젋어진 삼성'이 '노장들 중심인 기아'를 잡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보니 기아--은 늙지도 않는지 여전히 삼성전자를 압도했고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삼성을 압도하며 두 팀이 나란히 6승 1패가 되어[59] 결승에서 재격돌하게 되었다.
결승전 초반엔 삼성이 10점차 이상으로 앞서나갔지만 후반부터 역시나 이 경기를 압도하기 시작했고, 조바심이 난 삼성전자 선수들은 거친 수비를 하며 기아 선수들을 자극, 여기에 기아 선수들도 맞대응하며 게임은 1994 NBA 파이널 뉴욕 닉스-휴스턴 로키츠 경기 저리 가라할 만큼 거칠어졌다. 경기 막판 삼성전자 센터 이창수가 기아 한기범의 팔꿈치에 맞아 눈밑이 찢어지는 부상을 입는데, 이창수는 화를 참지 못하고 눈밑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한기범에 달려들었고 양팀 선수들은 난투극 일보직전까지 갔다. 이후 경기가 기아의 승리로 끝나고 한기범이 자신에게 (고의든 아니든) 맞은 이창수에게 사과하려고 삼성 선수단 쪽으로 갔는데, '''악수를 청하려 손을 내민 한기범에게 김진이 죽빵을 날려버렸다!!!''' 평소 '코트의 신사'라고 띄워주던 김진의 행동에 당시 SBS 중계진도 벙쪘고, 맞은 한기범이 더 대응하지 않은 채 휴지로 쌍코피를 틀어막으며 벤치에 앉아있던 게 전국에 그대로 생중계되었다.[60]

7.2. 상위 드래프트 픽을 위한 탱킹 의혹


앞서 2012-2013 시즌 김종규를 픽하기 위해 탱킹을 했다는 게 농구 팬들 사이에선 정설로 굳어지는 모양새다. 그 이전 자신의 동생과 같은 전창진은 이미 더 영리하게 줄을 섰고 전창진 사단에 있는 허재강동희도 같이 줄을 섰는데 모든 비난을 뒤집어 쓴 아픈 스토리도 있다. 그래서 2014년 드래프트부터는 3~10위까지 동일한 확률로 드래프트 제도가 변경이 되자 드래프트 운이 없기로 유명한 전자랜드kt의 팬들은 김진에 대한 감정이 매우 안 좋다.
실제로 2012-2013 시즌 경희대 10학번 트리오인 김종규,김민구,두경민의 경우 KBL 10년을 좌우할 스타 플레이어라는 점에서 보통 3년 계약기간의 감독들이 자신의 목을 내놓고 하기는 쉽지 않다. 어떻게 보면 김진 감독은 물론이고 전창신 사단도 함께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KBL의 문제점을 함께 드러냈다.
추가로 이상범 감독의 경우 KGC 재임 시절 당초 리빌딩을 생각하지 않았으나 당시 사무국장이 참고 견뎌달라는 소식과 함께 울며겨자먹시 식으로 성공했다. 당시 이상범 감독은 사표를 품고 있었다. 원조 탱킹이라는 비난은 사실 이상범에 더 해당된다. 김진 감독이 SK 감독 재임 시기에 주희정을 트레이드로 영입하면서 김태술을 내준것도 연관이 있다. 이상범 감독은 결국 김태술을 공익근무로 대처하고 양희종은 상무에 입대에 성공하면서 2년간 KBL 드래프트를 영리하게 노렸다. 2010 KBL 드래프트에서는 박찬희와 이정현을 모두 지명했고 2011 KBL 드래프트도 황금세대였는데 중앙대 52연승 콤비인 오세근과 김선형 중 극적인 1순위로 오세근을 지명하며 KGC의 창단 첫 플레이오프 우승을 이끌었다. 어떻게 보면 2년전도 탱킹이었는데 아픔을 홀로 안고간 격이었다.
한편 2016년 드래프트에서 모비스가 극적으로 1픽이 걸리면서 이종현을 지명하자, KBL이 또 드래프트 제도를 바꾸면서 2017년 드래프트 로터리 픽으로 급부상할 허훈을 뽑기 위해 또 탱킹을 하는 게 아니냐는 비아냥이 나오기도 한 다. 만약 이렇게 할 경우 KBL에게 청원을 해서 이미 영구제명된 강동희와 최형일 단장이 있는 KCC가 전창진을 영구제명에서 구제했는데 심지어 김진을 농구판에서 영구제명을 시켜야 한다는 극단적인 의견도 나오는 모양새도 있었다.

7.3. 외국인선수 뒷돈 의혹 및 주전고집


창조적인 가드들과 뛰어난 외국인과 함께 런앤건이자 신바람 농구를 했지만 그림자도 따른다.
대구 오리온스 시절의 마지막 외국인이었던 리 벤슨과 피트 마이클을 시작으로 테런스 섀년과 애런 헤인즈데이본 제퍼슨 시절에도 때도 그랬지만, 트라이아웃 제도로 회귀한 이후 드래프트에서는 그저 그런 선수를 뽑아 퇴출시키고, 그 다음에는 A급 선수를 뒷돈주고 데려오는게 아니냐는 의혹이 최근 생기고 있다. 2015-16 시즌 , 길렌워터의 무리한 출전이 있었고 대처 외국인이었던 샤크 맥키식은 그저 교체 선수가 잘하는거 같으니 타 팀 팬의 입장에서도 수긍할만 했지만, 2016-17 드래프트에서도 제임스 메이스라는 특급 선수를 영입하는 등 똑같은 현상이 발생하자 아예 대놓고 트라이아웃 제도의 맹점을 이용해 자유계약 시절 수준의 용병을 데려오는게 아닌가하는 의혹이 돌고 있는 것이다. 탱킹과 같은 드래프트 비화를 놓고 비판적 의견이 많은 만큼 외국인 문제와 관련해서 구설수가 많이 생겨난 감독은 SK 5대 감독 겸 LG 6대 감독SK 6대 감독 겸 LG 4대 감독 이외에는 없을 것이다.
그 외에도 에이스 선수를 지나치게 혹사시킨다는 의견이 있다. 대표적인 예로는 역시 가드 출신이었는지 김승현, 김태술, 주희정, 김시래 였다. 특급 외국인 선수들에 대한 의지만 더해지는 모습이 간혹 나오기도 했다. 실제로 자신도 믿는 선수를 끝까지 믿는 고집이 있는데 팬들도 이 고집은 명장이지만 지적을 했다. 실제로 A급 또는 S급 포인트 가드가 없으면 대구 동양 시절부터 보았듯이 경기력에서 고전했다. 자신의 포지션 외에도 이런 좋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동양 창단 코치-감독 시절 코치로 함께했지만 떠나게 된 전희철을 시작으로 SK 감독 시절 그 이전 감독그 이후 감독 시절에도 뜨거운 논란의 주인공이었던 방성윤김민수에 이어 LG 시절에도 그 후임 감독이 더 혹사시켜 쓴 김종규는 열외로 둔다. 물론 벤치멤버들을 그래도 고르게 쓰는 편이지만 올인할 때의 강약조절은 아쉬움을 남겼다.

8. 여담


  • 그의 아들은 전직 농구선수였으며 2017년 현대모비스에 입단했지만 2019년 1군에서 뛰지도 못하고 은퇴한 김윤이다.
  • 동명이인의 배우 때문에 '좌회전 킴' 이라는 별명도 있다. 최초로 별명을 고안한 사람은 블로거 겸 기자 이준목.[61]
  • 김진 감독의 현역 시절 별명은 ‘코트 위의 신사’였다. 말끔한 외모에 플레이가 깔끔하고, 심판에게 항의하는 일도 거의 없어 붙여진 별명이다. 감독이 되어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팬들이 붙여준 별명이 ‘스님 진’이다. 침착함과 냉정함을 잃지 않는 모습에서 나왔다.
  • 가정에서는 빵점짜리 아버지라는 소리가 있었다. KBL 프로농구 코치-감독으로 오래하면서 모든 KBL 감독들이 가정을 돌보기 어려운데 2001-2002 대구 동양 오리온스 감독으로 KBL 통합우승 이후 자신도 인정을 하면서 가족에 미안해했다. 가장 안타까운 건 김윤 선수의 뒷바라지를 못해준 점. 이건 대학 대선배로 김동광 감독의 아들인 김지훈도 그랬다. 동양 김진 감독 농구장에선 1등 집에서는 빵점, #
  • 자신을 명예회복 해준 창원 LG 세이커스 감독 재임 시절 13-14 시즌 창원 홈 개막전에서 300승을 달성한 이후 가슴을 울리게 한 인터뷰가 있었다. 김진 감독 300승 기념 영상
  • 2001-2002 동양 오리온스의 KBL 통합우승과 2002-2003 동양 오리온스의 KBL 정규리그 우승 이후 12년뒤인 2013-2014 LG 세이커스의 창단 첫 정규리그 우승 이후 감격의 인터뷰. 2002 부산 아시안게임 대표팀 감독 시절 제자였던 신기성 해설위원이 함께하셨다. 신기성은 비록 LG에서 선수와 지도자를 하지 못했지만 향후 방송해설 때도 이런 멘트를 했다. "이것이 창원 LG의 농구입니다." 우승으로 이끈 창원 LG 김진 감독 인터뷰
  • KBL 감독으로 떠난 2년뒤 한 농구잡지 미디어의 장문 인터뷰가 나와있다. 코트의 신사 김진, 농구는 제 인생입니다
  • KBL 감독 퇴임 이후 인스트럭터로 농구유망주를 지도했고 저소득층의 어려운 농구동호회도 지도를 했다. 전술집으로 플레이북을 저서했다. 이 부분은 모교 대선배이신 김동광 감독의 농구이론저서인데 농구로 모든것을 공유하는 테이크 케어로 농구팬들에게는 추천하는 농구전술저서다. 추일승 감독의 경우 위닝디펜스 현지 영어를 번역했고 KBL 감독 재임시기에 농구로 심장을 뛰게하라라는 저서를 냈다.

9. 관련 문서



[1] 감독 병행[2] 2001-2002 KBL 통합우승 이후 인터뷰[3] 2013-2014 KBL 정규리그 우승 이후 인터뷰[4] '신일고에도 농구부가 있었나'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실제로 있었다'''. 그러나 1975년 창단한 야구부에 투자가 집중되면서(창단 1년 만에 전국대회 우승을 했으니. 2009년 자율형 사립고 전환 후에는 투자가 줄어들었지만...) 농구부는 관심에서 멀어졌고, 결국 해체되었다. 2000년대 초반에 재창단해 주태수, 최윤호 등을 배출하기도 했으나 이내 다시 해체되었고, 그 반대급부로 대진고등학교가 농구부를 창단했다. 그러나 이 팀도 몇 년 지나지 않아 해체되었다.[5] 오세웅은 1992-93 농구대잔치를 끝으로 다소 일찍 은퇴했다. 은퇴 후 일선 지도자로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2010년대 농구팬들에게는 인지도가 상당히 떨어지는 편.[6] 삼성전자의 농구대잔치 마지막 우승이었다. 결승에서 유재학, 김유택, 한기범이 이끌던 기아산업을 2승 1패로 꺾고 우승했다.[7] 정규리그 맞대결에서 삼성전자는 고려대에 패했었다. 당시 고려대는 김병철-양희승-이지승-전희철-박재헌 등이 주축이었다.[8] 아래 "비판" 항목 참조.[9] 기존의 창단멤버로 호흡했던 전희철과 김병철에게 휴식을 주면서도 수비와 속공을 강조하면서 식스맨들의 영입을 통해 부담을 덜게 했다. 다만 김병철에게는 자신이 슈팅 가드 출신이라서 그런지 포인트 가드 시절에 좋지 못했던 모습으로 인해 주장직을 주면서 책임감을 가지도록 만들었다.[10] 2002년은 국내에서 열린 월드컵 및 아시안 게임 외에 '''대구 연고 프로 팀 2개 우승'''이라는 최초의 기록이 나온 해다.[11] 트레이드 팀으로는 신선우 감독의 KCC 이지스와 이상윤 감독-김태환 감독의 SK 나이츠였다[12] 이 오작동 때문에 역전을 당하는데, 오작동이 아니었다면 동양이 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13] 이 과정에서 침착하기로 알려졌지만 그 동안 쌓이고 쌓였는지 광고판을 걷어차기도 했다.[14] 이런 과정은 97-98 시즌부터 KBL 프로농구에 데뷔하면서 향후 맡게 된 창원 LG 세이커스도 초대 이충희 감독 시절부터 KBL 인기구단으로 성장했는데 김태환 감독 시절 경쟁을 하면서 KBL 최고 인기구단으로 발돋움을 했던 시절이 있었도 2011-2012 시즌부터 2016-2017 시즌까지 LG 6대 감독 재임 시절 런앤건을 포함해서 신바람 농구로 KBL 최고 인기를 자랑하는 창원 LG 세이커스 팬들의 자존심을 키워주었다.[15] 김남기 감독은 따로 설명을 할 수 없는게 불의의 구설수가 나왔는데, 퇴진 이후 명지대학교 감독 시절에 성추행이라는 누구든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 농구팬들에게 지명도가 높지 못하지만 몰락은 급. [16] 이충희 감독은 이후 2013-2014 시즌 농구명가이자 고향팀이기도 한 전창진 감독과 가 포함된 그의 참모들이 피땀흘려 만들었던 원주 동부 프로미도 그렇게 몰락하는 충격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17] 이 시기에 오리온스가 암흑기에 빠진 것은 김진 감독이 물러난 이유도 있지만 자유계약에서 트라이아웃으로 바뀐 용병 제도와 김승현 이면계약 파문을 비롯한 심용섭 전 단장의 간섭이 가장 큰 원인이었고 12년간 정들었던 오리온스를 떠나 SK 나이츠로 도전하게 만든 빌미를 제공했다. 2006-2007 시즌 계약 1년을 남겨놓고 결렬된 뒤 SK가 바로 최고대우로 동양의 명장을 데리고 간다.[18] 강양택 코치와 김지홍 코치 모두 알고보면 김진 라인이다. 수석코치를 차기 감독으로 만들었던 전창진강동희김승기를 동부 프로미의 코치로 두면서 강동희는 동부의 차기 감독이 되고 김승기는 향후 KT 소닉붐으로 이적할 때 수석코치를 두었으며 향후 KGC 인삼공사 감독으로 승진했다. 이것이 전창진 라인이다.[19] 일명 문경은 시절부터 본격화 된 잠학콜[20] 이로 인해 중도 사퇴하였다가 신선우 감독이 취임하였지만 신선우 역시 김선형을 발굴한 것 외에는 별 효과가 없었는지 2시즌만에 물러났다. 그 다음 감독인 문경은이 2012-13 시즌에 애런 헤인즈를 영입해서 정규리그 우승, 플레이오프 준우승을 일구며 청산하는가 싶었는데, 헤인즈가 나가고 나니 역시나 9위로 추락하였다. 하지만 17~18 시즌 헤인즈를 다시 영입하면서 우승에 성공했다.[21] SK 스포츠단 연말 인사단행 분위기가 있었으며 본인은 슬럼프로 인해 힘들어하면서 자진사퇴를 스스로 결정했다. 강을준 LG 5대 감독은 위로를 하기도 했다. 후임 감독은 신선우였다. 하지만, SK는 12연패를 당했다.[22] 11-12 시즌 중 허병진 단장이 김승현 영입 실패 및 당시 성적부진으로 인해 떠났으나 후임이 된 김완태 단장님은 현장을 배려하면서 2년뒤 13-14 시즌 창단 17년만에 정규리그 우승으로 김진 감독을 배려했다.[23] 경희대 10학번 빅3를 노리는 쉬어가기다. 김종규를 얻기 위해 미리 준비한 허재의 KCC와 김민구나 두경민을 얻기 위해 쉬어간 강동희의 동부에 이어 박상오의 FA 이적과 서장훈의 아름다운 은퇴로 쉬어간 전창진의 kt도 해당되었다. 그리고, 김동광의 삼성은 정석으로 갔는데 이후 성적부진으로 이어졌다.[24] 1순위는 원주 동부의 허버트 힐이었는데 당시 동부 감독이 강동희나 김영만이 아닌 이충희였다.[25] 바로 이 장면. 17년만에 LG 세이커스의 KBL 무관의 한을 풀었다. 그에게는 농구의 국민감독이자 우승청부사라는 긍정적인 평을 얻게 되었다.[26] 이때 LG 주전 라인업은 준수한 빅맨이었던 크리스 매시, 당해 정규리그 MVP를 수상하게 된 문태종과 전 시즌부터 주장으로 맡았던 김영환을 중심으로 젊고 재능있던 김시래와 김종규에 13-14시즌 최종보스(?)였던 데이본 제퍼슨으로 구성됐는데 훗날에도 간간이 회자될 정도로 대단한 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준우승에 그쳤는데, 비록 모비스 우승에 문태영의 맹활약과 함지훈의 김종규 참교육(?)이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긴 했어도 김진 감독의 경기운영능력에도 문제가 있었다는게 당시 팬들의 생각이었다.[27] 배재고와 고려대를 졸업한 김영기 KBL 신임 총재는 국가대표로 활약한 경기인 출신이다. 1956년 멜버른올림픽과 1964년 도쿄올림픽에 국가대표로 출전했고, 1984년 LA 올림픽 한국 선수단 총감독을 역임하기도 했다. KBL 총재의 역사와 같았으며 2014-2015 시즌에 다시 돌아온 김영기 총재는 대한농구협회 이사와 부회장, 대한체육회 부회장을 지냈다.[28] 김진 감독은 2013-2014 시즌 정규리그 우승을 포함해서 2년 연속 4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했고 양상문 감독은 2014 시즌 중 부임해서 최하위에서 4위로 2년 연속 포스트 시즌 진출을 포함해서 2016 시즌에도 포스트 시즌을 하면서 지도력을 인정받게 된다.[29] 2002 부산 아시안게임 코칭스테프와 선수단에서 LG 출신은 김진 감독과 현주엽 선수 그리고 조상현 선수였다. 그 시절 김진 감독은 대구 동양 오리온스의 현직 감독이었고 현주엽 선수는 코리아텐더 맥스텐 소속이었고 2001-2002 시즌 이후 상무에 입대를 했으며 조상현 선수 역시 2001-2002 시즌 이후 SK 나이츠 이후 상무에 입대를 했다.[30] 현주엽 선수는 코리아텐더 맥스텐 소속이었고 2000-2001 시즌 이후 상무에 입대를 하면서 상무 소속이었고 조상현 선수 역시 2001-2002 시즌 이후 SK 나이츠 이후 상무에 입대를 한 뒤 상무 소속이었다. 이 시절 금메달에도 불구하고 2002 부산 아시안 게임의 금메달과 함께 병역면제의 혜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2년뒤 2014 인천 아시안 게임에서 이 흑역사는 바뀌었다.[31] 당시 팀 명칭 고양 오리온스였고 이 명칭은 15-16 시즌부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팬들은 13-14 시즌부터 15-16 시즌까지 유니폼이 보라색에 회사로고인 오리온 그룹이 유니폼에 새겨지면서 부른 명징이다.[32] 14-15 시즌 KBL 통합우승 포함 KBL 첫 플레이오프 3년 연속 우승으로 역대급 팀이었던 울산 모비스서울 SK 나이츠원주 동부 프로미가 같이 우승후보로 경쟁을 했으나 넘을 수 없는 태양이었다. 마침내 15-16 시즌 4강 플레이오프에서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가 3전 전승으로 왕조를 하야 시키면서 이해 14년만에 KBL 플레이오프 우승을 달성하게 된다.[33] 2015년 9월 17일 동부 VS LG 전 프리뷰이다.[34] 결승전은 상무였다. 1년전 추일승 감독이 이끌었던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가 2015 프로-아마 최강전에서 KBL 팀으로 유일하게 정상에 올랐다.[35] 만수라 불렸던 유재학 감독의 흑역사 외국인 중 하나다. 김진 감독의 설명을 보면 팀 동료와의 신뢰가 좋았다. 외곽슈팅이 뛰어난 반면 골밑 수비를 못했다. 이 선수를 잘 써먹은 건 김승기 감독[36] 이 트레이드는 각종 농구기사와 농구 커뮤니티에서 보면 김 감독이 하기보다 구단에서 먼저 했던게 알려졌고 트레이드도 LG보다 kt가 우선추친을 했다.[37] 재미있는 건 시즌 개막 미디어데이 때 10개 팀 감독 중 '''유일하게''' 김진 감독만이 KGC를 우승후보로 꼽았다는 점이다. 실제로 안양 KGC는 16-17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하여 플레이오프 준결승에 직행했고 통합 우승을 달성하게 된다.[38] 15-16시즌에는 울산 모비스 상대로 한 경기도 승리하지 못했다.[39] 김진 감독은 2014년 08월 형제 야구의 대학동문이자 부산 출신인 양상문 감독님과 이천 시대 첫번째의 LG 스포츠단 사령탑이었다.[40] 2016-2017 시즌 개막전에 창단 첫 정규리그 우승 시절의 구단 단장은 이 시즌 개막전에 갑작스럽게 정들었던 구단과 팀을 떠나게 되었다. 예전 동양 시절 정태호 단장이 떠난거처럼 된 분위기였다.[41] 물론 허훈은 kt 역대 최저성적인 10승 44패를 당했던 조동현이 뽑았고 조성민의 트레이드도 LG 프런트가 먼저 했지만 자세히 알고보니 kt 프런트가 이미 조성민을 먼저 내 놓았다. 2017년 01월 31일 트레이드 이후 김 감독은 이렇게 회고를 했다.[42] kt에서는 연고 고등 출신인 양홍석을 원했지만 발표는 허훈을 더 원한 설이 뜨기도...[43] 한마디로 현주엽은 지도자로서 복사하여 붙여넣기씩으로 전임 감독의 유산이라는 거센 비판이 있기도 했다.[44] 이것은 현주엽이 그야말로 복사하여 붙여놓기식 농구였다. 사실 LG 팬들에게 현주엽이라는 슈퍼 스타에게 절대로 좋은 감정이 아니다. 오히려 부임 초기와 김시래 선수의 상무 입대로 인해 고전했던 그 시절은 비판했지만 김진 감독님을 더 머리숙여 고마워한다.[45] 19-20 시즌 종료 이후 13-14 시즌 정규리그 우승 멤버 중 유일하게 생존한 선수는 감독생활 중 모험으로 걸었던 포인트 가드인 김시래 선수였다. 하지만, 20-21 시즌 중 삼성으로 충격적인 트레이드를 겪으면서 13-14 시즌 정규리그 우승멤버들은 8년도 지나지 않은 채 모두 이별했다. 18-19 시즌 이후 김종규는 FA로 이적을 했고 19-20 시즌 이후 김시래보다 1년전 영입했던 양우섭유병훈도 모두 FA로 이적했다. 정규리그 우승멤버가 아니지만 이후 입단한 김진 감독과 강양택 수석코치의 제자로는 신인왕 정성우과 임기만료 때 같이 했던 박인태 정도가 있다.[46] 대구 동양 시절 프런트는 심용섭 단장이고, 창원 LG 시절 프런트는 공교롭게도 창단 멤버였던 한상욱 단장(13-14 시절 사무국장)으로 팬들이 알렸다. 심용섭 전 동양 단장은 이충희와 김상식의 흑역사에 있었고 추일승 감독은 끈기로 버티면서 떠난 이후 오리온을 재건하는데 성공했다. 감독이 장수하기 어려우며 지원도 열악한 과자업계 팀인 동양-오리온에서 소처럼 묵묵하게 기다리면서 최선을 다한 이후 구단의 신뢰를 받으면서 15-16 플레이오프 우승을 했다. 공교롭게도 김진 감독은 대구 동양의 영웅이었는데 추일승 감독은 고양 오리온의 영웅이 된 격이다. 한상욱 LG 단장은 창단 시절부터 스타 출신 농구 선수를 감독으로 두며 대만 리그 감독이었던 이충희 초대 감독 영입에 공이 컸지만 지도자 경험이 전무한 현주엽 감독 선임으로 인해 큰 비난을 받고 있다. 현주엽 선임의 최대 지목자로 최고 스타인 김종규 사태와 함께 KBL 최고인기인 LG의 과거 역사를 하루아침에 몰락시키면서 결국 전희철 코치와 서동철 감독을 놓친 비판을 받고 있다. 실제로 LG 세이커스 감독 부임 이후 대구 연고 팬들이 김진 감독을 따라 LG 팬이 되기도 했다.[47] 명장이라서 그런지 농구인들 대다수가 놀라워했다.[48] 후배 전창진 감독이 3년전에 해냈다.[49] 감독대행[50] 시즌 중 사퇴[51] 00년대 초 향후 자신이 맡았던 정규리그 우승팀인 LG 세이커스는 00-01 시즌 김태환 감독을 중심으로 조성원과 조우현의 일명 조조쌍포와 백인 스코어러인 에릭 이버츠와 함께 KBL 역대 유일의 팀 평균 103.3점이라는 역대급 공격력을 보였다. 그 부분으로 인해 팀 공격력이 2위 아니면 3위였는데 김태환이 이끄는 LG의 마지막 시즌이었던 03-04 시즌에는 KBL 유일의 팀 평균득점 90점대 돌파를 하게 된다. 대구 동양(이 시즌부터 명칭은 대구 오리온스지만 팬들과 지도자들은 동양을 더 언급한다) 03-04 시즌 팀 평균 90.7점으로 당당히 팀 공격력 1위를 달성했다. 03-04 LG는 팀 평균 87.5점으로 팀 공격력 3위. 이후 LG 세이커스에서 14-15 시즌에도 그대로 이어지면서 달성했는데 KBL의 제도문제 및 수비농구가 득세하는 가운데서도 런앤건을 이어갔다. 팀 유일의 평균 80점대 돌파와 함께 14-15 시즌 LG는 팀 평균 80.1점으로 팀 공격력 1위를 달성했다. [52] 일명 대학 빅4를 의미하는데 한국농구로 보면 고려대, 중앙대, 연세대, 경희대를 의미한다. 김승현 선수는 동국대 출신이고 김시래 선수는 명지대 출신이다.[53] 이건 강을준이면 영웅이 나올 수 없음.[54] 02-03 동양 감독 시절 대처 외국인 포함[55] 세계 최고의 축구선수인 리오넬 메시는 아니다.[56] 대표적으로 야구로 보면 쓸놈쓸인데 이건 형제사 야구에서 같이 감독이었던 양상문과 같다. SK 감독 시절에 선수를 살리려고 하나 조급증이었는지 몰라도 다양함이 떨어지는 지적 및 선수를 잘 못살리는 경우도 있었다. 김경문은 제외하자. 더 심한 고집이었다.[57] SK 감독 자진사퇴 이후 한 때 농구포털 사이트의 투표를 보면 전창진과 유재학의 두 감독만 최고투표 후보였다. 신선우의 경우 원채 골밑만 고집하기 보다 토털 바스켓볼의 신봉자로 포지션 개념을 파괴했으니 스타일 상 김진과 비슷해서 최고명장 투표는 열외.[58] 실업 8팀(기아자동차, 삼성전자, 현대전자, SBS, 상무, 기업은행, 산업은행, 한국은행)의 풀리그 이후 상위 2팀간이 결승전을 펼치는 방식이었다.[59] 기아는 첫 게임에서 한국은행(!!)에게 패했다. 허재가 술 먹고 뛰다 금융팀에 졌네 하는 이야기들의 예시로 꼽히는 대회긴 한데, 실제로 술 마신 것 같진 않았고 다들 엄청 방심한 데다 한은 김상준, 김재득의 3점이 워낙 잘 터졌다.[60] 그리고 결승전에서 파울트러블로 오래 뛰지 못한 한기범은 코리안리그 2차대회 MVP가 된다.[61] 참고로 배우 김진은 가명이고 본명은 김경진이며 배우 이전에 좌회전이라는 3인조 댄스 그룹에 속했다. 예행연습이라는 노래가 좌회전의 대표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