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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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대한민국의 전직 농구 선수이자 농구 지도자. 프로농구 창설 이전 아마추어 시절 최고 권위 대회였던 농구대잔치 최다 우승(5회) 감독이자, KBL 챔피언결정전 2회 우승 감독으로, 한국 농구계에서 손에 꼽을 수 있는 불세출의 지도자이다. 기아자동차 농구단과 SK 나이츠의 전성기를 이끈 명장이기도 하다.
2000년대 중반 대장암 투병으로 인해 감독 생활을 중단하였고, 이후 완치되었음에도 감독으로 복귀하지 않고 휴식기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4]
2. 선수 시절
1974년 실업 농구팀인 산업은행 남자 농구팀에 입단하여 1982년까지 선수 생활을 하였다.
3. 지도자 시절
3.1. 코치 시절
1984년부터 1985년까지 산업은행 농구팀의 코치를 지냈다.
1986년 기아산업 남자 농구팀이 창단되자 기아산업의 코치로 옮겨 방열 감독을 보좌하였다.
3.2. 기아자동차 감독 시절
1990년 방열 감독이 사퇴하자 뒤를 이어 감독이 되었다. 기아자동차의 감독으로 있으면서 허동택 트리오, 허동만 트리오[5] 를 주축으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사실 좋은 성적 수준이 아니라, 90년 부임 후 93-94 농구대잔치 전까지 전대회 우승 및 94-95, 95-96 농구대잔치 우승을 거두었다. 당시 NBA에 필 잭슨과 시카고 불스가 있었다면 한국에는 최인선과 허동택 트리오의 기아자동차가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물론 최희암-이상민-서장훈의 연세대와 박한-전희철-김병철의 고려대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지만 최인선 감독과 전술 능력으로 비교할 수 있는 지도자는 당시만 해도 그의 전임인 방열 감독이나 현대전자의 고 정광석 감독 말고는 없었다. 삼성전자의 김인건 감독은 덕장에 가까웠다. 그리고, 당시 코치였던 박인규 코치가 감독처럼 작전지시를 하는 모습까지 배려를 이어갔다.
3.3.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 감독 시절
1997년 KBL(한국프로농구)이 창설되면서 프로 팀으로 전환된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의 초대 감독이 되었다.
프로 원년 시즌부터 우승후보였다.
허동택만 빅4의 건재와 포스트를 책임져줄 빅맨인 클리프 리드의 존재만으로도 상대는 공포를 떨었다.
처음에는 허재의 1996 애틀랜타 올림픽 음주사건으로 인해 패배도 있었지만 빠르게 추스렸다.
결국 1997 원년 시즌 김동광 감독과 이상범 그리고 제럴드 워커의 안양 SBS 스타즈와 최명룡 감독과 정인교 그리고 제이슨 윌리포드가 이끄는 원주 나래 블루버드의 추격을 따돌리고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첫 시즌인 1997 시즌 챔피언결정전에 무난히 진출하며 진출하여 원주 나래 블루버드(현 원주 DB 프로미)를 4승 1패로 꺾고 첫 플레이오프 우승과 함께 KBL 통합우승을 달성하면서 마침내 KBL 챔피언에 올랐다.
하지만, 이 기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창단팀이었던 이충희 감독과 양희승 선수 그리고 버나드 블런트라는 외국인 스코어러가 등장한 창원 LG 세이커스의 돌풍과 신선우 감독과 이조추 트리오 그리고 조니 맥도웰의 대전 현대 다이넷의 우승후보 도약과 함께 97-98 시즌 정규리그 3위에 그치게 된다.
1997-98 시즌 4강 플레이오프에서 창단 돌풍의 창원 LG 세이커스에 3승 1패로 앞서면서 2년 연속 KBL 파이널에 진출했다.
하지만, 세월은 더 이상의 KBL 챔피언을 허락하지 않았다.
대전 현대 다이넷(현 전주 KCC 이지스)과의 챔피언결정전에서는 허재의 부상 투혼에도 불구하고 7차전 끝에 준우승을 거뒀다.
최인선 감독과 허동택만 그리고 클리프 리드는 끝내 눈물을 흘리면서 기아 팬들에게 왕좌의 내리막을 알리게 된다.
이후 1997-98 시즌 종료와 함께 기자회견으로 충격을 준 허재의 이적과 정인교가 오더니 함께 자신을 보좌했던 박인규 코치에게 감독직을 물려주고 그동안의 공을 인정받은 이후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의 기술고문으로 추대됐다.
하지만, 1998-99 시즌 또 준우승에 그치면서 박인규 감독이 물러나고 정인교 또한 트레이드로 이적하며 기아 왕조는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3.4. 청주/서울 SK 나이츠 감독 시절
잠시 명목상 기아 엔터프라이즈 기술고문과 SPORTS TV 해설가로 활동하던 중 예상보다 빠르게 감독으로 돌아왔다.
1998년 11월 27일 KBL 창단팀이었던 청주 SK 나이츠(현 서울 SK 나이츠)가 안준호 감독을 경질하면서 청주 SK 나이츠의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자신을 보좌할 코치로는 연세대 코치였던 박건연 코치가 맡게 되었다. 하지만, 시즌중에 부임한 나머지 안준호 초대 감독 시절 포지션 중복을 끝내 해결하지는 못했다.
당시 SK는 서장훈의 우선입단과 KBL 최초 드래프트의 1순위인 현주엽이 모두 입단했지만 융화는 없었고 토니 러틀랜드가 가드를 볼 정도로 가드의 존재감이 희미하는 모습까지 장악력은 보이지 않았으며 전술과 전략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역시 최고의 전술과 전략가는 바로 처방전을 잘 내렸다.
1999-2000 시즌을 앞두고 취약점이었던 포인트 가드에 KBL 드래프트로 황성인의 선발과 외국인 드래프트로 재키 존스와 로데릭 하니발을 선발하면서 우승후보로 도약하게 되었다.
하지만, 융화의 길은 순탄치 않았다.
결국 누구보다 팀 플레이 속의 융화를 강조했던 최인선 감독은 이원재 단장에게 목을 내놓을 각오로 트레이드를 추진하게 된다.
바로 서로 자존심 싸움을 했던 서장훈과 현주엽의 포지션 중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결단을 내리게 된다. 이건 신의 한수.
올어라운드 포워드로 매직히포라는 별명이 붙은 현주엽을 광주 골드뱅크 클리커스(현 부산 kt 소닉붐)로 보내고 반대로 슈터인 조상현을 받아온다.
이건 바로 크리스마스 빅딜이었다.
이후 SK 나이츠는 포지션 밸런스가 잡히면서 안정적인 팀으로 변모하게 된다. 그리고 1999-2000 시즌 창단 첫 정규리그 2위로 마무리하게 된다.
4강 플레이오프에서 무난하게 승리를 거두면서 창단 첫 KBL 파이널에 진출하게 된다.
상대는 바로 기아 시절 아픔을 주었던 라이벌인 신선우 감독이 이끄는 대전 현대 걸리버스[6] 였다.
마침내 2년전 기아 시절 자신을 내려오게 했던 라이벌인 현대를 꺾고 우승을 차지하며 신선우 감독을 상대로 복수에 성공하게 된다.
청주 SK 나이츠의 창단 첫 KBL 플레이오프 우승이자 당시 중계했던 한명재 캐스터는 밀레니엄 챔피언의 등장이라는 말과 함께 프로농구의 새로운 챔피언을 이렇게 표현했다.
물론 최인선 감독은 허재와도 재임 중 힘들어했지만 팀 속에 허재를 살린 감독이라는 점에서 서장훈을 장악한 최인선 감독의 리더쉽에 농구팬들은 최고라는 극찬을 보내게 된다.
팬들은 기아 시절의 복수 그리고 SK 시대의 첫 서막을 연 최인선 감독님의 전술과 전략 그리고 융화와 신뢰를 다시한번 주목하게 된다.
이후 2000-01 시즌과 2001-02 시즌에도 플레이오프에 진출해서 신산이라 불렸던 KBL 최고 명장이지만 알고보면 계산적인 신선우(대전 현대 걸리버스, 전주 KCC 이지스)의 킬러로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게 된다. 사실 신선우 멤버 중 이상민과 조성원은 감사했지만 이외는 아니라는 설이 있다.
최인선 감독도 다른 부분보다 신선우 감독과의 라이벌전에서 승리를 가장 기쁘게 회고하고 있다.
명실공히 SK 나이츠의 리즈 시절을 이끈 감독. 안준호는 의문의 1패.
하지만, 외국인 악재로 인해 김동광 감독과 주희정 선수 그리고 강혁 선수가 이끄는 수원 삼성 썬더스와 김진 감독과 김병철 선수 그리고 김승현 선수가 등장한 대구 동양 오리온스의 등장과 함께 전성기에서 내려오게 된다.
대구 동양 오리온스와의 2001-2002 챔피언결정전에서는 최종 7차전까지 갔으나 준우승에 그쳤다. 기아 시절부터 이어진 외국인이 말썽을 또 부린 것이다. 당시 센터였던 에릭 마틴은 평범했고 로데릭 하니발은 플레이오프에서 부상을 당했던 게 크다. 기아 시절 저스틴 피닉스의 돌출행동이 또 일어나게 되었다.
이후 최인선 감독은 명장에서 내려오게 된다.
2002-03 시즌 에이스 서장훈이 FA로 잔류에 실패하면서 당시 최고액이었던 4억이 넘는 금액과 함께 삼성으로 이적하면서 전력이 급격하게 약화되면서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여담으로 당해 시즌을 앞두고 서장훈의 보상선수로 받아온 우지원을 울산 모비스 오토몬스(현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로 트레이드하면서 김영만과 재회하게 된다. 그러나, 시즌 중 김영만을 다시 창원 LG 세이커스로 보내고 조성원을 데려온다. 시즌 종료 후 구단에서는 지금까지의 성과도 있고 해서 최인선 감독에게 1년 계약 연장을 제의하였으나 거절하고 물러나게 된다. 이후 SK 나이츠는 본격적으로 암흑기를 맞이하게 된다.
예전만큼 전술과 전략을 발휘하지 못하면서 지휘 중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마음이 여린 모습까지 보이면서 농구팬들을 안타깝게 했다.
사실 최인선 감독 이후 SK 나이츠의 플레이오프 진출은 6년뒤인 대구 동양 오리온스의 2001-2002 KBL 통합우승 신화와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금메달 신화를 이끌었던 김진 감독이 2007-2008 시즌 6년만에 플레이오프를 이끌기도 했다. 추가로 SK 나이츠가 연속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적이 문경은 감독이 이끌었던 2012-13, 2013-14, 2014-15 시즌을 빼면 없기도 하다. 문경은은 12-13 시즌 SK 나이츠의 창단 첫 KBL 정규리그과 17-18 시즌 18년만에 KBL 플레이오프 우승을 이끌면서 암흑기를 벗겼다. 추가로, 자신을 넘은 김진 감독 또한 SK 나이츠의 흑역사를 잠시 벗겼던 감독이었으며 한 때 감독 후보에 있었던 창원 LG 세이커스에서 김태환 감독도 해내지 못했던 13-14 시즌 창단 첫 KBL 정규리그 우승으로 명장의 클래스를 증명했다.
3.5. 통산 감독 성적
3.6. 종합
결과론으로 허재와 서장훈의 이적은 90년대 한국농구 최고의 명장이라는 최인선 감독의 커리어를 일찍 마감하게 된 비극과도 같다. 실제로 최인선 감독이 떠난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는 98-99 시즌을 끝으로 기아라는 이름과 함께 전성기는 끝나게 되고 서울 SK 나이츠 또한 동양-LG의 명장인 김진 감독이 부임하기 이전 이후 봄농구 조차 오르지 못했다. 99-00 시즌부터 01-02 시즌까지 3년 연속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으나 6년뒤인 07-08 시즌에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는데 6강에 그쳤다. 추가로 자신과 동갑이었던 김태환 이후 창원 LG 세이커스 감독 후보군에 있었으나 건강문제로 인해 무산되면서 박종천과 신선우가 맡게 되었다. 한 때 이상범 감독을 경질한 안양 KGC 인삼공사에서 기술고문을 맡았으며 차기 감독설까지 뜨기도 했으나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반대로, 김동광 감독의 경우 안양 KT&G 카이츠에서 경질된 2006년 이후 6년뒤인 2012년에 서울 삼성 썬더스 감독직에 재복귀를 하며 60대에도 KBL 감독직을 맡았다. 이후 방송해설과 KBL 경기이사 및 심판위원장 그리고 경기본부장을 맡으면서 방송해설을 계속맡았다. 건강이 이래서 중요한 듯. 본인도 수석코치직을 원했는데 무산된 점을 아쉽게 생각하고 있다.
4. 해설가
이후로는 건강상의 문제[7] 로 현장에서 사실상 은퇴, 이후 iTV 경인방송과 슈퍼액션[8] , MBC ESPN과 SBS ESPN 등지에서 해설가로 활동하였다.
해설가로서는 기술적인 측면과 전술적인 측면에서 상당히 자세하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어 최고의 해설로 꼽혔다. 다만, 만담이나 개그와는 영 거리가 멀고 언제나 톤이 일정해 다소 지루하게 들릴 수 있는 것이 단점.
2014년 2월 이상범 감독이 경질되고 안양 KGC 구단이 파격적인 행보를 보이는 와중에 최인선 해설위원이 KGC 감독을 맡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사실 기술고문직인데 와전된 부분도 있었다. 그러나 KGC 구단은 프런트로 있었던 이동남을 감독대행 자리에 앉혔다.
2014년 12월 18일에 새롭게 프로농구 중계에 참여하는 skySports의 해설위원으로 영입되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이후 skySports에서 2014-15 시즌 말까지 프로농구 해설을 했다.
해설자로서는 주로 이론과 실기가 겸비된 전술과 전략을 푸는 방법으로 농구팬들에게 잘 설명했다. 반대로, 김동광의 경우 전술과 전략보다 수비와 태도 위주라는 점은 함정.
5. 사건 및 사고
1996 애틀랜타 올림픽 농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다가 음주 파동으로 인해 코치 등과 함께 자격정지 처분을 받은 흑역사가 있다. 이 때 허재 또한 음주로 인해 KBL 원년 출범 때 흑역사가 있었다. 최인선 감독은 6개월, 김남기 코치는 3개월 자격정지를 당했다. 허재도 징계를 받았다. 그리고 기아에서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1997-98 시즌 챔피언결정전 7차전을 앞두고 심판 3명과 전화로 접촉한 사건으로 벌금 300만 원을 선고받은 일이 있다.
6. 기타
SK 나이츠 감독 퇴임 이후 슈퍼액션 해설위원 시절 손대범 기자와 함께 해설을 하면서 타임아웃이라는 NBA 농구저서 책에서 전략노트를 제공하며 농구팬들에게 글로 볼거리를 주었다. 그만큼 머리가 해박하시다.
KBS의 스포츠 소재 예능 프로그램인 우리동네 예체능에서 예체능 팀의 감독을 맡아서 농구 생초짜들을 가르쳤다. 이 시절 모비스의 레전드인 우지원과 함께 지도했다.
근황이 가장 최근에는 2018년 12월 농구잡지에 나오기도 했다. 한국농구의 과거-현재-미래를 해박하게 설명하셨다. 전 농구감독 최인선 “한국농구, 스타를 키워야 합니다”
7. 관련 문서
[1] 현 SBS SPORTS[2] NBA 중계해설[3] 현 MBC SPORTS +[4] 농구 감독이 받는 스트레스가 그만큼 엄청나다는 것을 방증한다.[5] 허재, 강동희, 김유택, 김영만은 모두 중앙대학교 후배들로, 당시 기아자동차 농구단은 중앙대학교 출신이 주류를 이뤘다.[6] 1999-2000 시즌을 앞두고 팀명을 현대 다이넷에서 현대 걸리버스로 변경하였다.[7] 2005년에 대장암 3기 판정을 받고 암 투병 끝에 완치한 것으로 보인다. 보통 5년 내로 재발하지 않으면 완치로 보는 게 암인지라...[8] 당시에 NBA 농구중계 해설을 맡았다. 경기 도중에 '최인선의 전력노트'라는 꼭지가 나온 바 있다.(몇몇 내용은 손대범과 함께 지은 <TIME OUT>에 수록되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