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엘로 산치오
1. 개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이자 건축가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와 함께 '''르네상스 3대 거장 중 한 명 (traditional trinity of great masters)'''이다.
2. 일생 및 평가
우르비노 공국의 궁정화가의 아들로 출생했다. 10대 초반에 부모를 모두 여의고, 1499년 페루자에서 페루지노에게 배웠다. 1500년부터 그림을 의뢰받기 시작하였고, 1504년부터 피렌체에서 활동하였다. 1508년 로마로 건너가 교황 및 가톨릭교회의 의뢰로 많은 작품을 남겼다.
성실함과 사교적인 성품을 가졌다고 알려져 있으며,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많은 작품의 의뢰를 받아 훌륭히 마무리지었다.[1] 르네상스의 절정을 이룬 화가답게 그의 그림은 고전 미술의 완성이다. 단정한 선과 형태, 명료한 색상, 기품 있는 인물의 자세 연출, 배치와 구도의 극한에 다다랐으며, 르네상스 미술의 최고 덕목이자 서양 미술사에서 오랫동안 교과서처럼 여기는 '우아한 아름다움(Grazia)'의 원형을 만들었다. 다만 라파엘로를 성모 등 이상화된 인물에 특화된 화가로 기억하는 것은 잘못된 것으로 그가 남긴 교황이나 추기경들의 많은 초상화의 반례가 있다. 로마-바티칸 뿐 아니라 우피치나 루브르 등 유럽 여행을 하며 여느 유명한 미술관을 가더라도 라파엘로의 작품은 꼭 확보해두고 있다.
37세 생일에 요절하였다. 로마의 판테온에 묻혔고, 그의 묘비에는 당대의 유명 학자이던 피에트로 벰보 추기경이 아래와 같은 묘비문(사진 참조)을 남겼다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참조).
여기는
생전에 어머니 자연이
그에게 정복될까
두려워 떨게 만든
라파엘로의 무덤이다.
이제 그가 죽었으니
그와 함께 자연 또한
죽을까 두려워하노라.
(원문: Ille hic est Raphael timuit quo sospite vinci, rerum magna parens et moriente mori.)
3. 작품
한때 성 베드로 대성당 공사에 참여해 성당의 평면을 그리스 십자가에서 라틴 십자가로 바꿨다.
또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린 '앙기아리 전투'의 스케치 모작도 있다. 모작이지만 상당히 중요하게 취급 받는데,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림에 색을 칠하다가 물감이 제대로 굳지 않아서 그림 전체를 망쳐 버리고, 라파엘로가 그린 이 스케치 모작만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4. 이모저모
자화상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상당한 미남으로 당시 여성들의 인기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유약하고 모성애를 자극하는 외모와는 별개로 그는 여색을 매우 밝혔다고 하는데 오죽하면 당대 건축가인 바사리는 자신의 저서 <미술사 열전>에서 연애의 열병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게 아닐까라는 견해를 피력하기도 하였다. 사후 그의 유해는 로마 판테온에 안치되었다.
죽을때까지 독신이었지만 정부(情婦)가 있었는데, 마르게리타 루티라는 여인으로, 라파엘로보다 10~17살이나 연하였으며[8] '라 포르나리나'(제빵사네 딸)이라는 별칭을 가진 사람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얼마나 지속되었는지는 알려진 것이 없지만, 라 발레타가 1516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기 때문에 1516년부터 관계가 시작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또한 많은 작품의 성모 마리아 모델은 그녀가 한 것으로 추정. 그런데 사랑하면서도 당시 세간의 비난을 받으면서 동거 관계만을 유지한 데는 이유가 있는데, 라파엘로는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냈던 '''메디치 비비에나 추기경'''[9] 의 조카딸과 약혼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결혼 상대가 높으신 분인 추기경의 조카딸인 데다 추기경 역시 라파엘로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절친하게 지냈던 형이라(라파엘로 본인이 초상화까지 그려줬을 정도다.) 차마 파혼하고 자기보다 훨씬 미천한 제빵사 집 딸과 결혼할 수는 없었고, 그렇다고 사랑하는 여인을 떠나보낼 수도 없었던 그는 따라서 약혼을 해놓고도 결혼을 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미혼으로 버틴 것이다.[10] 가장 마르게리타를 그렸을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되는 작품은 '라 포르나리나'인데, 그녀의 왼손에는 약혼반지가 끼어져 있으며 팔에는 'RAPHAEL URBINAS(우르비노의 라파엘로)'라는 글씨가 새겨진 리본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라파엘로 사후에 제자들이 스승의 명예를 위해 반지를 덧칠로 지워버리는 바람에 이 사실은 500년이 지난 2001년에서야 복원과정에서 밝혀지게 된다,[11] 그리고 라 포르나리나보다 3년 먼저 그려진 라 발레타도 라 포르나리나의 모델과 외모가 같아서 동일인인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한편 마르게리타 루티는 라파엘로가 죽은 후 수도원으로 들어갔다고 하며, 이후의 일생은 기록이 없어 확실하지 않지만, 수도원에 들어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일생을 마친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라파엘 전파라는 후대의 화파의 라파엘이 바로 라파엘로이다. 그 외에 천재 화가인 피카소가 8살 때 본인은 라파엘로보다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한 드립의 희생양이 되었다(...).
유로화 이전 이탈리아 50만 리라의 주인공이 되었다. 기사 보기
5. 매체에서의 출연
- 핑크레이디 클래식 : 미남이었다는 설정을 반영하여, 상당한 미형 캐릭터로 그려지지만 재수없는 자뻑 설정이 추가되었다(...)
- 화관의 마돈나 :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존경하여 그에게 그림을 배우러 가던 중 남장한 레오노라와 잠깐 안면을 트기도 한다. 여기서도 자뻑 기믹이 추가되어서, 자기 이름을 들어본 적 없냐는 질문에 레오노라가 모른다고 답하자 '촌놈이군'이라며 혼잣말을 한다.
- 냉정과 열정 사이 : 설정상 남자 주인공 준세이랑 도플갱어 수준으로 닮았다고 한다. 영화에서는 딱히 라파엘로와는 닮지 않은 타케노우치 유타카가 준세이 역을 맡았지만, 그래도 타케노우치 유타카 정도면 충분히 미남이기 때문에...
- 존잘시대 : 실제 기록을 반영하여 그의 실제 성격 그대로 상냥하고 겸손한 성격의 캐릭터로 구현되었다. 외형도 고동빛이 도는 흑발에 녹색눈의 잘생긴 미남이다. 우르비노 공국 출신이며 다 빈치를 존경하고, 바사리와도 안면이 있다. 미켈란젤로와는 사이가 그렇게 좋지는 않은 듯 하다.
- Why? 미술 편 : 주인공의 조력자인 상당히 중요한 캐릭터로 등장한다. 유령(...)으로. 그런데 금발 삐죽머리+파란눈으로 생긴 게 실제와 딴판이다.
[1] 레오나르도의 많은 미완성작품들, 미켈란젤로가 교황 및 추기경과 수시로 충돌하던 모습과 대비되는 라파엘로의 특징이다.[2] 마태오 복음서 3장 1-12절, 마르코 복음서 1장 1-8절, 루카 복음서 3장 1-18절, 요한 복음서 1장 19-28절[3] 엔제리너스 커피에서 많이 보았던 2명의 아기 천사가 그림 아래에 보인다. 엔젤리너스 커피 로고 디자이너가 이우일인데, 그답게 코믹한 리터칭을 가한 듯.[4] 윗 그림인 <시스티나의 성모>를 의뢰한 교황이다.[5] 마태오 복음서 17장 1-9절, 마르코 복음서 9장 2-10절, 루카 복음서 9장 28-36절[6] 우르비노 공국의 페데리코 공작의 아들. 페데리코 공작(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가 그린 옆 얼굴로 유명하며, 용병대장 출신으로 우르비노의 군주에 올랐다. 당시의 탁월한 예술 후원자 중 한명이다. 물론 우르비노 출신의 라파엘로도 후원하였다.[7] 곰브리치가 극찬한 그림이다. '라파엘로는 그림이 불안정하거나 균형을 잃지 않게 하면서 화면 전체에 끊임없는 움직임을 만들어내고 있다. 인물들을 배치하는 이러한 탁월한 솜씨, 구도를 만드는 최고 극치에 달한 그의 숙련된 솜씨로 인해 후대의 미술가들이 라파엘로를 그처럼 찬양했던 것이다.'[8] 마르게리타 생년이 정확하게 전하지 않아 차이가 있지만 1493~1500년경에 출생한 것이 정설로 여겨지고 있다.[9] 본명은 베르나르도 도비치로, 본디 극작가였지만 1513년 추기경으로 지명되었다. 여담으로 라파엘로가 사망한 해이자, 사망하고 7개월 후인 1520년 11월 9일에 비비에나 추기경 역시 50세로 세상을 떠났다.[10] 하지만 마르게리타를 만난 것이 약혼하고도 2년 후였던 것을 감안하면 그냥 결혼에 뜻이 없었던 것일수도 있다.[11] [im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