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오 2세
1. 개요
가톨릭교회의 제216대 교황. 16세기 초,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의 경쟁이 심화될 시기에 율리오 2세는 교황령의 영토 확장을 위해 '전사 교황'이라고 불릴 정도로 전쟁을 많이 일으킨 전쟁광이었다. 또한 로마시의 개발과 예술가의 후원에 심혈을 기울여 거대 교회 건축인 성 베드로 성당과 천장화 천지창조 등이 만들어지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2. 생애
가난한 양치기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추기경이던 숙부의 도움으로 신부가 되었으며, 숙부가 교황 식스토 4세로 즉위하자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 자신이 직접 태어난 집안 자체는 몰락해서 가난해도 원래 델라 로베레 가문이 명망 높고 강력한 로마 귀족 가문 중 하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 이후 전임인 비오 3세가 재임 기간을 1달도 못 채우고 사망하는 바람에 뒤이어 교황이 되었다[1] .
3. 전사 교황
3.1. 교황 즉위 이전
교황이 되기 전 델라 로베레 추기경이던 시절에 정치적으로는 숙부덕을 보지 못하고 찬밥신세였다고 한다. 숙부 식스토 4세는 자신의 누이의 아들들을 선호해서 고종사촌들이 잘나가는걸 지켜만 봐야 했다고... 역시 종조부가 교황 갈리스토 3세였던 로드리고 보르지아 추기경과 대립하는 사이였고, 교황 선출에서도 경쟁했다.
그러나 숙부 덕에 수입이 많은 교구와 직위를 차지하고 스페인 추기경들의 몰표를 받은 보르지아 추기경이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되자 신변의 위협을 느껴 프랑스로 도망, 샤를 8세를 선동하여 교황령을 침공하게 하기도 한다.
이후 알렉산데르 6세가 프랑스와 협상하고 델라 로베레 추기경과도 화해의 제스처를 취하자 이를 받아들이지만, 알렉산데르 6세가 사망하자 그 아들 체사레 보르자로 대표되는 보르자 가문을 박살내는데 온 힘을 쏟아 결국 성공한다.
3.2. 1503, 교황 즉위 이후
교황이 된 이후에는 군사력을 통해 교황령의 확대를 꾀했고, 이에 '전사 교황'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결국 비극으로 끝나고 만다.
중세 이래 이탈리아는 여러 도시국가들과 공국들로 나뉘어져 분쟁이 지속 중이었다. 그 와중에 1494년 프랑스가 이탈리아를 침공하였고 이에 신성로마제국, 스페인의 아라곤 왕국이 프랑스를 저지하기 위해 이탈리아에 간섭하려 하였다. 율리오 2세는 이러한 혼란한 상황을 이용하여 이탈리아에서 교황령의 영토 확대를 적극적으로 도모했다. 이점은 이전 교황들도 마찬가지였지만 이전 교황들이 주로 돈을 이용한 비교적 온건(?)하고 소극적인 방식을 사용했다면 율리오 2세는 성직자라는 본분에 아랑곳하지 않고 직접 손에 피를 묻혀가며 적극적으로 전쟁을 일으켰다는 점이다.
3.2.1. 베네치아 공화국과의 전쟁
먼저 이탈리아 내의 강대국으로 이탈리아 북동부에 세력을 쌓아올리고 있던 베네치아 공화국을 치워내기 위해 프랑스와 스페인의 아라곤과 함께 1509년에 캉브레 동맹을 결성하여 베네치아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다. 전쟁에서 크게 활약하여 베네치아의 세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3.2.2. 프랑스와 전쟁
하지만 프랑스 루이 12세 사이의 분쟁이 생기게 되었고, 이에 1510년 캉브레 동맹을 해체시키고 적이었던 베네치아와 스페인과 신성 동맹을 맺고 프랑스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스페인의 남부 이탈리아 지배(1504년에 정복)를 인정해야만 했고 또한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 스페인의 영향력은 급격히 커졌다.[2]
3.2.3. 결과
율리오 2세는 캉브레동맹 전쟁과 신성동맹 전쟁을 연이어 치루며 어제의 친구를 오늘의 적으로 어제의 적을 오늘의 친구로 삼는 등 철저히 이해타산적인 모습을 보였으나 전쟁 중에 사망하고 말았다. 결국 전쟁은 전쟁 전 상태로 되돌리기로 합의되면서 종전되었다.(...) 그리고 이탈리아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이 축소되었지만 그가 끌어들인 스페인이 영향력이 이탈리아 북부에서 강해졌고 결국 이탈리아 전쟁은 다시 재개되었다. 그리고 이탈리아 전쟁 와중인 1527년 카를 5세의 군대가 로마를 약탈하고 교황을 포로로 잡았다.
4. 전략적 한계
율리오 2세는 무력을 통해 이탈리아에서 교황의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으나 이는 애초에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었다.
- 교황령 자체의 국력의 한계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군사력이 미약하던 교황령은 성전(聖戰)을 명분으로 이탈리아 중소도시국가들의 군대를 빌리거나 용병을 고용하거나 했는데, 그런 군대들은 프랑스나 스페인, 신성로마제국 같은 대국의 군대와는 도저히 상대가 되지 못했다. 도시국가 수준의 이탈리아 국가들이 중앙집권화되기 시작한 큰 국가들에게 밀려나가는 시기에 율리오 2세는 잘못 싸웠던 것.
- 또한 한 나라의 힘을 빌려 다른 나라를 공격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작전을 쓴 것은 좋았지만, 그 '오랑캐' 가운데 하나가 배신하고 자신을 공격할 때의 대비는 전혀 해놓지 않았던 것이 패인이라고 할 수 있다.[3] 사실 율리오 2세가 보여준 정치적 목적 자체는 결국 (평생의 정적이자 원수였던)알렉산데르 6세와 거의 일치했다고 볼 수 있다. 두 사람 모두 교황의 권위와 권력을 바탕으로 교황령의 확대를 시도했다. 문제는 '종교적 권위만으로도' 교황에게 강한 영향력이 보장되던 중세 교황권의 전성기가 지나가고 서유럽 각국들이 중앙집권적인 영토형 대국으로 거듭나는 시대적 상황이었다는 점이다.
5. 예술가 후원
[image]
(라파엘로를 율리오 2세에게 소개시키는 브라만테를 그린 그림)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와 절친한 친구였으며, 그 밖에도 브라만테와 그의 제자인 라파엘로 산치오를 포함한 예술가들도 크게 후원하여 예술을 중흥시키기도 하였다. 라오콘을 사들인 것이 그의 재위 4년째인 1506년이었는데, 이때부터 교황들은 예술품을 본격적으로 수집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1506년은 '''바티칸 미술관이 시작된 해'''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특히 숙부 식스토 4세가 지은 바티칸 시스티나 경당에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에게 유명한 천정화 천지창조를 그리게 하였으며, 브라만테에게는 성 베드로 대성당의 재건축과 벨베데레 궁전의 건축을, 라파엘로 산치오에게는 <아테네 학당> 같은 벽화, 자신의 초상화, 바티칸의 건축 일부를 비롯한 여러 가지 작업을 의뢰했다.
율리오 2세는 성 베드로 대성당을 신축하면서 그 중앙에 위치할 자신의 영묘(무덤)에 쓸 조각상들을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에게 의뢰하였다. 그 조각상들이 바로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모세 상, '죽어가는 노예' 상, '반항하는 노예' 상들이다. 그러나 영묘 건설 계획은 흐지부지되었고 대신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에게 시스티나 경당의 천장화를 그리도록 강제했다.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천직을 조각가라고 생각했고 그전까지 프레스코화를 그려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강제로 천장화를 그리게 하는 것을 탐탁치 못하게 생각했으며, 율리오 2세가 전쟁 때문에 돈이 없어 미켈란젤로가 이미 구매한 영묘 조각에 쓸 대리석 대금을 지불하지 못한 적도 있어 미켈란젤로의 큰 불만을 샀다. 그래서 미켈란젤로는 반항하며 고향 피렌체로 도망갔다가 율리오 2세가 보낸 사람이 어르고 달래서 겨우겨우 로마로 돌아가기도 했으며 천장화 작업 중간 공개 문제를 두고 율리오 2세에게 대들었다가 빡친 교황에게 지팡이로 머리를 맞기도 했다. 당시 예술가의 낮은 지위를 생각하면 큰 벌을 받을만한 일이지만, 율리오 2세는 미켈란젤로의 재능을 아껴서 벌하지는 않았다. 다만 이후에도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와의 관계에 애증이 얽혔기 때문에 율리오 2세가 자주 바가지를 긁어대었다. 그러나 당시 율리오 2세의 입장에서도 고작 을에 불과했던 이 예술가가 어떤 무례한 행동을 해도 결국은 용서해주는 일을 반복했기에 그 역시 예술가의 지위를 향상시키는 데에 큰 역할을 한 셈이다. 영화 <고통과 환희(The Agony and the Ecstasy, 1965)>는 이런 미켈란젤로와 율리오 2세의 애증 관계에 집중한 영화다.
6. 성 베드로 대성당 신축
[image]
<브라만테,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에게 바티칸과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을 주문하는 율리오 2세>, 에밀 장 오라스 베르네, 1827년, 캔버스에 유채, 프랑스 파리 루브르 미술관[4]
율리오 2세는 옛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을 개축하는 선에서 끝내려고 하다가 계획이 마음에 안 든다며 폐기해 버리고는 아예 처음부터 훨씬 웅대한 건물을 새로 지으려고 하였다. 이러한 큰 건축적 야심은 여러 곳에서 도전받는 가톨릭의 위상을 고전에 기초한 르네상스적인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통해 재정립하려고 했던 시대적인 요구에 따른 것이다. 또한 15세기 초의 로마는 심각할 정도로 황폐화되어[5] 로마 전체를 새롭게 재개발하는 것이 교황청은 물론 로마 시의 숙원 사업이 되어 있었으며 새 성 베드로 대성당은 그 계획의 핵심이었다.
새 성 베드로 대성당의 초기 설계는 율리오 2세의 총애를 받던 건축가 도나토 브라만테가 맡았으며, 당초에는 율리오 2세의 영묘가 성당의 중앙에 자리잡을 예정이었으나 영묘는 흐지부지되었다. 브라만테의 설계에 따라 중앙부에 거대한 기둥벽(pier)들을 올리며 옛 성당은 필요한 만큼만 조금씩 철거하던 중 율리오 2세가 사망하였다. 율리오 2세가 사망하자 노쇠한 브라만테는 다른 건축가들로 교체되었으며, 설계는 이후의 건축가인, 브라만테의 제자였던 라파엘로 등이 전면적으로 변경했다.
흔히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비가 재정을 악화시켜 면죄부를 팔게 만들어 교회 분열을 불러오고 개신교를 탄생시킨 원흉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 이러한 것들은 후임 교황 레오 10세의 사치와 전쟁질로 인한 재정 파탄 문제가 더 컸다.
7. 평가
'르네상스' 라는 말을 학술 용어로 고착시킨 대학자 야코프 부르크하르트는, 율리오를 ''' '교황령의 구세주' ''' 라고 평가했다. 그런데 부르크하르트는 대학자이긴 하지만 문화사 중에 미술사 전공으로 주전공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이니 예술을 사랑하고 예술가들을 후원한 율리오 2세에게 좋은 평가를 할 수밖에 없었다.
율리오 2세와 동시대 인물로 교황령 소속 관료로 근무한 적도 있는 역사가 프란체스코 구이차르디니는, 율리오의 외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 '치명적인 동맹, 치명적인 무기.' ''' 애초에 16세기에는 프랑스나 신성로마제국은 거대화된 관료 국가가 되어서 이탈리아 중부 손톱만한 영지의 국력인 교황령 자체로는 도저히 상대하거나 조종할 위치는 진작에 지나갔었다.[6][7]
또한 교황 역사상 레오 9세와 함께[8] 스스로 갑옷을 입고 정벌에 나선 둘뿐인 사례다. 문제는 그것이 세금을 안내는 신자들을 상대로 했다는 점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이에 온건한 가톨릭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는 갑옷 입은 군인 교황이 천국에서 문전박대 당했다는 익명의 비판극을 발표했고[9] , 종교개혁 시기 개신교 진영에선 전쟁에 미쳐서 피에 굶주린 흡혈귀란 비판까지 받았다.
[1] 이전 항목에는 비오 3세가 '반 보르자 가문 운동' 을 시작했다고 했지만, 출처가 의심스러운 내용이다. 일단 비오 3세는 재위기간이 1개월 미만이라는 데에서 알 수 있듯 즉위할 때 이미 병이 깊은 몸이었기에 보르자 가문을 어떻게 할 수 있을 턱이 없었으며, 그래서였는지 체사레 보르자의 교회군 총사령관이라는 직위와 로마냐 공작이라는 직위를 그대로 인정해 주었다.[2] 이는 스페인 출신의 교황 알렉산데르 6세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3] 이런 면에서 보면, 오늘날에는 흑역사 취급받는 알렉산데르 6세를 비난할 수 없게 된다. 율리오와는 달리 알렉산데르는 아들 체사레 보르자와 협력하여 최대한 자주적으로 진행하려 했고 로마냐 공국이라는 새로운 국가를 창건하여, '오랑캐가 자신을 공격할 때의 대비' 를 착실히 해나가고 있었기 때문.[4] 헌데 설계도는 라파엘로 시대의 성 베드로 대성당 설계도이다. 실제 있었을 광경을 그린 것은 아니라는 것.[5] 교황청이 아비뇽으로 이전하면서 로마시 인구가 격감하여 10만 인구 중 2만여로 줄었고, 귀환 당시 건물 사이로 여우가 굴을 파고 밤중엔 성벽 사이로 늑대가 출몰하며 주요 건물들은 거의 허물어져간 상태였다고.[6] 중세 교황권이 세속 군주보다 높던 시절은 황제가 제국 내 정적들인 공작들의 반발을 이용하거나, 황제 가문인 호엔슈타우펜 왕가가 어이없게 남계가 단절되어 명맥이 끊겼을 때나 가능했다. 세속 군주들은 황제나 왕만 되었다 하면 신앙심이 줄어드는(?) 기적을 보여왔다. 사실 중세 초기엔 동로마 황제와 그의 대리인 라벤나 총독에게 들볶였고 랑고바르드족이니, 고트족이니, 노르만이니 하는 오랑캐(?)들도 이탈리아를 노렸기 때문에 세속적인 보호는 황제에게 더 의지하거나 영향력 하에 놓인 기간이 길었다.[7] 현재에 와선 개인의 정치적 능력을 제외하면 르네상스 시대 최악의 교황으로 비판받는 알렉산데르 6세보다 더 못한 평가를 내리는 자도 있다. 알렉산데르 6세는 개인적인 정욕과 공사 분간이 안 된 경우라면, 율리오 2세는 교황보다는 세속 군주나 장군이 더 어울릴 사람이라는 것이다.[8] 11세기 초 교황 레오 9세가 스스로 토벌군을 이끌고 정벌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노르만인들이 남이탈리아를 침략해서.. 그런데 노르만인들은 가톨릭으로 개종한 상태였다! 남이탈리아에 교황 소유의 장원이 많았기 때문이었는데 전투 결과 사로잡혔지만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9] 생전에는 레오 10세와의 친분으로 교회에서 존경을 받았고, 해당 희극도 익명으로 발표했으나 사후에 에라스무스의 저작임이 드러나서 이 때문에 사후에 파문당했다. 더불어 기록까지 말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