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게이 코롤료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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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최초의 우주인 유리 가가린(좌)과 소련 우주개발의 아버지 세르게이 코롤료프
'''이름'''
러시아
세르게이 파블로비치 코롤료프
(Сергей Павлович Королёв)[1]
우크라이나
세르히 파울로비치 코롤료우
(Сергі́й Па́влович Корольóв)
'''직업'''
천문학자, 물리학자
'''국적'''
러시아 제국 [image]
러시아 공화국 [image]
소련 [image]
'''출생'''
1907년 1월 12일
러시아 제국, 지토미르
'''사망'''
1966년 1월 14일(만 59세)
소련, 모스크바
'''정당'''
소련 공산당
'''가족'''
크세니아 빈센티니(첫번째 부인)
니나 이바노브나 코텐코바(두번째 부인)

1. 개요
2. 초기이력
3. 시련
4. 재기
5. 소련의 우주개발을 이끌다
6. 사망
7. 그의 사후 및 평가
8. 코롤료프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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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과 독일의 베르너 폰 브라운, 중국의 첸쉐썬과 함께 추앙받는, 소련의 우주 개발을 이끈 소련 우주 개발의 아버지. 이들은 남다른 과학적 재능뿐만 아니라 여러 과학자들의 공동연구를 성공적으로 조율하는 리더쉽, 그리고 우주개발에 회의적인 정치가들을 구워 삶아 거액의 국고를 끌어 올 수 있는 특별한 정치력까지 갖추어 그 국가의 우주기술 수준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렸다. 이 세가지 능력 중 하나만 없었어도, 그 나라의 우주개발을 끌어올리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소련 과학기술사에서 이론물리학의 레프 란다우, 수학의 안드레이 콜모고로프, 므스티슬라프 켈디쉬, 핵물리학의 이고르 쿠르차토프[2] 등 역사를 풍미한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 인물들이 적지 않지만 소련이라는 나라의 위상을 드높인 공로로 치면 그의 앞에서는 모두 데꿀멍할 정도의 업적을 남겼다. 전성기 때도 미국의 70% 밖에 안되는 국력을 가졌던 소련이 미국의 라이벌이라고 인식된 것은 군사적인 면도 있겠지만 바로 우주경쟁의 초반기에 소련이 미국을 한 발자국씩 앞섰기 때문이고, 그것을 이끈 사람이 바로 코롤료프이다.
비록 달착륙 경쟁은 N1 로켓의 거듭된 실패로 아폴로 11호에게 패배하는 굴욕을 맛보았지만[3], 그의 이름과 그가 만든 작품들은 인류 역사에 지워지지 않는 족적을 새겼으며[4] 그의 위대한 걸작 R-7 로켓은 이미 태어난지 60년이 지난 2017년 현재에도 수많은 개량형이 지속적으로 제작되어 러시아의 우주 과학을 견인하는 주력 우주 발사체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5]

2. 초기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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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시절 ..중년에는 몸이 불지만, 젊을 때는 꽤 미남. 여자관계도 꽤 복잡했다고..
제정 러시아 시절인 1906년 지금의 우크라이나에 위치한 도시인 지토미르에서 태어났다.[6] 어릴 때부터 수학에 재능이 있었으며, 오데사에서 공부했다. 학창 시절부터 시대를 앞서가는 취미를 가지고 있었는데 바로 비행. 항공에 관련된 학문을 독학하면서 글라이더 서클에 가입해서 직접 글라이더 시제기를 만들기도 하였다. 이 취미는 1924년 키예프 공대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항공공학을 공부하게 되면서 그의 직업이 되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선택했으니 잘하는 건 당연한 일. 이후 2학년을 마치고 모스크바에 있는 바우만 모스크바 국립 공과대학교로 전학하여 1929년 항공기 설계공학으로 학위를 받았다. 그의 지도교수는 유명한 항공기 설계자 안드레이 투폴레프였다. 나중에 폭격기나 수송기만을 전문적으로 설계하는 투폴레프 설계국의 설립자가 된 그 사람이다.

3. 시련


졸업 후 항공기 설계국에서 일하면서 틈틈히 취미로 로켓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1930년에는 파일럿 자격증까지 땄으며, 당시 소련에서 로켓 연구로 가장 유명했던 '반작용 [7] 연구 그룹'으로 전근되었다. 이 조직은 시대에 앞서서 로켓무기나 글라이더 유도폭탄 등등을 연구하고 있었다.
BBC에서 방송한 다큐멘터리[8]에 소개된 그의 과거는 순수하게 로켓을 좋아하는 '''덕국 청년''' 베르너 폰 브라운과 그 본질이 다르지 않다. 이런 실험적 연구에는 당연히 실패가 뒤따르기 마련이지만, 이는 NKVD가 '''"이새퀴들 결과는 못 내면서 국고를 엉터리 실험으로 탕진하고 있네. 반동 아냐?"'''고 이들을 의심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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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코롤료프의 절친이었으나 나중에 원수가 된 발렌틴 글루시코(1908~1989). 그러나 이자도 코롤료프를 고발한 후 얼마 뒤 대숙청에 걸려 수용소를 가게 되었으나 열렬한 공산주의자 였고 고위층과 인맥도 있어서 금방 풀려났다. [9]
코롤료프의 실험을 회의적으로 보았던 그의 동료였던 발렌틴 글루시코는 그를 국고낭비 혐의로 고발했고[10], 1938년 한창 서슬퍼렀던 대숙청 기간 중에 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받고 수용소로 끌려갔다. 처음에는 악명높은 굴라그에 끌려가서 모든 치아를 잃는 등의 고생을 했지만, 그래도 인재는 인재인지라 후에 기술자나 과학자만 모아놓는 특별 수용소에서 복무기간을 채우게 되었다.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에 따르면 체력이 약해서 여자들이 목욕하는 동안 속옷을 지키는(!) 일도 했다고 한다. 아니 희대의 과학자에게 속옷 경비원이라니 .. 흠좀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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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라그 죄수시절의 머그샷
이런 특별 수용소는 굴라그에 비하면 대우는 한결 좋았고, 반동으로 찍힌 기술자는 그곳에서 연구를 계속하게 되었다.
이런 소동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앞서있던 소련의 로켓연구는 나치 독일에 뒤쳐지는 결과를 빚었고, 독일이 먼저 탄도미사일 V2를 개발하게 된다. 이에 반해 소련이 가지고 있던 로켓은 그저 유도장치도 없는 단거리 로켓 카츄샤가 전부였다.[11] 가정에도 불행이 닥쳐서 코롤료프가 강제수용소에 있는 동안 조강지처와는 멀어지고 나중에 이혼하게 되었다. 이를 단순히 아내의 의지력이 약했다 생각하면 안된다. 어찌됐든 코룔로프는 강제수용소에 갇힐 정도의 '범죄자'였고 이런 경우에는 NKVD에서 지속적으로 수감자의 가족을 감시하고 압박한다. 안그래도 얼굴도 못보고 들쭉날쭉하는 유형기간 때문에 자칫 평생 보지도 못하는 남편인데 많은 부인들이 이러한 압박에 굴해 이혼도장을 찍게 되었다. 1944년에 사면되어 연구소로 돌아왔다. 당시 코롤료프를 고발한 발렌틴 글루시코는 독일군을 점령한 소련군에 파견되어 V2로켓을 보고 이것을 제대로 분석할 수 있는 것은 코롤료프 뿐이라고 상부에 보고하여 코롤료프는 V2의 기술 습득을 위해 독일로 파견되었다.

4. 재기


소련은 V2기술자들을 고용하기 위해 배급 확대와 많은 연봉 등 여러가지 특전을 내걸고 백방으로 노력했으나[12] 베르너 폰 브라운을 비롯한 개발자급 인재들은 대부분 미국에 투항했다. 소련이 구할 수 있었던 기술자들은 V2공장에서 일하던 제조직공 정도였고, 소련에 투항한 개발자급 인재는 V-2의 유도장치를 개발한 전기공학자 헬무트 그뢰트룹(Helmut Gröttrup) 뿐이었다. 소련은 로켓의 구조면에서는 상당한 노하우를 가지고 있었으나 로켓의 두뇌에 해당하는 유도장치에 대해서는 거의 백지상태나 다름 없었는데, 그뢰트룹은 그 부족했던 부분을 채워주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소련으로서는 가장 필요한 인재를 확보한 셈이었다.[13][14]
코롤료프는 이렇게 소련으로 온 독일 기술자들과 함께 V2를 개량한 새로운 로켓을 개발하였고, 1947년 R1 (V2의 카피판), R2를 개발하는데 R2는 V2의 두배의 사정거리를 보였다. R2가 두배의 사정거리를 가지게 된 이유는 지금은 흔하지만 당시에는 아주 기발한 로켓모터를 다 태우면 무게만 먹는 로켓모터는 때버리고 노즈콘만 날라가서 꼬라밖는 분리 로켓이기 때문이다. 그는 개발을 계속하여 1954년에 나온 R5는 사정거리가 1200km나 되었으며 처음으로 실전배치된 중거리 미사일이 되었다. 사실 이런 시험은 잦은 실패를 했었기 때문에, 코롤료프는 항상 이번이 당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라는 경고와 상부로부터 받는 압력에 시달리며 개발했다.[15]
R2의 성공 이후 KGB는 코룔로프와 핵심연구팀들이 미국의 첩보원들로 부터 암살을 당할까 우려해 코롤료프의 모든 신상정보를 최고급 기밀 처리 및 삭제처리를 해서 살아는 있지만 존재하지 않는 사람으로 만들어서 관리를 했다. 때문에 베르너 폰 브라운도 그가 사망 이후 국장으로 치루어지는 장례식을 신문으로 접했을때 그의 이름과 업적을 알 수 있었다.
1957년 4월에는 1938년의 혐의가 부당하다는 재심을 받아 완전 복권되고, 소련은 이 로켓 천재를 팍팍 밀어주게 되었다. 마침내 그는 R-7로 1957년 8월 세계 최초의 대륙간 탄도 미사일을 발사했다. 카자흐스탄 바이코누르 우주기지에서 발사된 이 로켓은 수천킬로를 날라가 캄차카 반도에 있던 표적을 정확히 맞추었다. 이것으로 독보적인 위치에 올라 더 이상 실패를 걱정하지 않는 위상이 되었다. 코롤료프는 R-7 로켓으로 '''1957년 10월 4일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를 발사하여 우주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5. 소련의 우주개발을 이끌다


세계 최초의 대륙간 탄도 미사일이며, 스푸트니크 쇼크의 주인공인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궤도에 올린 발사체이자 미국에게 충격과 공포를 선사한 R-7은 그의 위대한 작품이다.[16] R-7에 사용된 엔진인 RD-107은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한 개의 엔진에 4개의 연소실과 2개/4개의 자세제어용 노즐이 붙어있는 구조였다. [17] R-7 로켓은 이렇게 만든 엔진 1개를 5개로 묶어서 사용했는데,[18] 이렇게 한 이유는 당시 소련이 대추력 엔진을 개발할 기술이 부족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설계 자체가 우수한 건 말할 나위 없어서, 몇 가지 개량을 거쳐 2010년대인 아직까지도 사용되고 있을 정도이고 요즘 들어서 4다발로 묶은 주 엔진을 더 강한 대추력 엔진 1개로 만든 개량형이 나오고 있다.
소련은 물론이고 미국 역시 그 이전이나 이후에도 이렇게 많은 주엔진을 조율하여 안정적인 발사체로 만들어 낸 적이 없는걸 보면 그의 천재성이 독보이는 독창적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거기다 R-7은 그 이후 산화제와 연료, 엔진을 끊임없이 개량하여 여전히 소유즈의 1단 로켓으로 쓰인다.
이후 다음 프로젝트로 인간을 우주로 보내기 위한 우주선 개발을 시작했다. 이를 위해 만들어 진 것이 1957년에 발사된 스푸트니크 2호이고, 여기에 실린 개가 바로 그 유명한 라이카이다. 그러나 라이카는 발사한 지 얼마 안 돼 죽고 말았다.
이후 코라블-스푸트니크 계획을 마련하여 5번의 발사를 했고, 계속 생물체를 태워 보내는 실험을 하여 데이터를 모아 우주에서 생물의 생존 가능성을 탐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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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토크에 탑승한 유리 가가린과 교신하는 코롤료프
그렇게 모은 데이터로 1961년 4월 12일에는 유리 가가린을 태운 보스토크 1호를 발사하여 마침내 역사 상 최초로 인간을 우주로 보냈다. 유리 가가린을 태운 우주선을 발사하는 기록영화를 보면 기밀 유지를 위해서인지, 세르게이 코롤료프는 등장하지만 모습을 거의 비추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검은 중절모에 검은 양복을 입고 빨간 끈을 소매에 매고 가가린을 배웅하는 사람이 바로 코롤료프인데, 얼굴이 나오는 장면은 전혀 없다.[19]
이후에는 탐사를 위한 프로젝트를 시작했는데, 이때 달 탐사선으로 설계된 것이 그 유명한 소유즈 우주선이다. 현재는 달 탐사선이 아니라 궤도 우주선으로 쓰이고 있지만... 미국이 우주왕복선을 개발하고 퇴역시키는 동안 우직하게 50여 년 동안 계속 개량되어 사용되고 있는 코롤료프의 걸작이며 2020년 드래곤 V2이전까지 우주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우주선이었다.
코롤료프는 소련 내 다른 설계국과의 극심한 내부경쟁 때문에 과중한 업무에 시달렸다. 대표적인 라이벌로 ICBM개발자인 블라디미르 첼로메이, 미하일 얀겔이 있는데, 네델린 참사(Nedelin catastrophe)라는 흑역사가 있어서 유인우주선 계획에서 배제되고 ICBM 개발에만 집중했던 얀겔[20]과는 전에 코롤료프와 함께 일한 인연도 있고 해서 관계가 좋은 편이었으나, 첼로메이와는 달 탐사에서 각기 다른 프로젝트를 이끌고 있는데다 서로 정부 예산을 먼저 따내기 위해 엄청난 경쟁을 했다. 게다가 컴퓨터, 전자공학, 재료공학, 엔진기술 등 전반적으로 소련의 과학기술이 미국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해결해야 할 문제는 미국보다 훨씬 많았고, 이는 코롤료프의 업무를 가중시켰다. 또한 미국 전역을 공격할 수 있는 대륙간 탄도 미사일이 개발된 뒤 소련은 코롤료프에 대한 지원을 축소하였다. 여담이지만 첼로메이가 만든 위성발사용 로켓 UR-500 프로톤 로켓도 걸작 로켓으로 현재까지 러시아가 위성 발사용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동안 미국은 국책연구소로 우주개발을 하고, 거기에 JPL이라는 걸출한 대학연구팀이 있었던 데다가 군 쪽의 입김이 덜 들어가 민간 주도로 연구가 가능했으며, 케네디가 소련과의 체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그 유명한 "우리는 달에 갈 것입니다" 연설을 한 이후 사실상 무제한의 연구지원 을 받아서 결국 열세였던 우주 개발 분야에서 소련을 앞질러 버렸다. 반면에 소련의 우주 개발은 철저히 군 중심으로 돌아갔고, 그 소련군은 미국에 핵폭탄을 배달하는 핵미사일에나 관심이 있었지, 달 탐사같은 것에는 그리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기에 이는 코롤료프가 한정된 예산으로 최대한의 효율을 내기 위한 과로에 시달리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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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롤료프의 라이벌 블라디미르 첼로메이(1914~1984)

6. 사망


달 탐험에 필요한 로켓은 출력이 R-7보다 훨씬 커야 했는데, 이를 위해서는 대형 로켓 엔진의 개발이 필수적이었다. 미국은 폰 브라운이 새턴-5로 이를 달성한 반면에 소련은 계속 삽질을 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발사체 설계자 코롤료프와 로켓 엔진 권위자인 글루시코의 사이가 나빠서 좀처럼 엔진의 연료에 대해 합의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코롤료프는 다른 엔진 설계자인 니콜라이 쿠즈네초프[21]와 함께 N-1로켓을 설계하게 되었다. 특히 미국보다 우주경쟁에서 뒤지면 정부가 우주개발 예산을 깎을까봐 노심초사했고, 이것이 그를 과로로 이끈 요인이 되었다. 내부 장기에 모두 암이 퍼져 이미 오래 살기 힘들었으나, 1966년 수술 중 수술대에서 사망. 그가 죽자 소련의 우주개발은 그의 대리였던 바실리 미신이 이끌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코롤료프의 라이벌이었던 브라운도 65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로 1977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로써 미소 1세대 우주경쟁의 거두들은 안타깝게도 일찍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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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롤료프의 후임으로 OKБ-1 (Опытное конструкторское бюро-1. 제1 설계국, 또는 코롤료프 설계국 ) 의 국장을 맡은 바실리 미신. 코롤료프 밑에서 부국장을 하다가 코롤료프 사후 승진했다.[22][23]
코롤료프가 개발하려 했던 N-1로켓은 설계상 새턴5보다 출력이 세긴 했지만, 1단이 무려 30개가 넘는 엔진을 달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기술로 이를 조율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고, 계속 폭발사고를 일으켜 4번의 실패를 했다.[24] 이 틈에 새턴5 로켓을 이용한 미국의 아폴로 11호는 달 착륙에 성공했고,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는 이미 늦었다고 판단하여 소련의 달 유인탐사 계획을 취소했다. 그리고 실패한 바실리 미신 (1917-2001) 은 소련 우주개발 책임자에서 잘렸다. 여담이지만 소련은 1980년대가 되어서야 새턴 V의 F1엔진과 동등 내지 우월하고 달탐험에 필요한 출력을 얻는 RD-170 엔진을 개발하게 된다. 그리고 1980년대에는 N1의 출력을 넘는 에네르기아 로켓을 개발하여 우주전투위성 폴류스와 비운의 우주왕복선 부란을 각각 한번 쏘아 올린다. 일부 밀덕들이 현재 막장상태인 러시아의 상황만 보고, 당시의 우주기술을 포함한 소련의 기술력이 별볼일 없었다는 식으로 주장하지만, 1980년대 시점에서는 적어도 3위 그룹 (유럽, 일본, 중국) [25]과 넘사벽으로 차이가 나는 세계 2위는 되었고, 미국에 비해 앞선 것도 상당히 많았다. 부란의 경우는 당시 미국도 리스크가 커서 못하던 무인우주비행을 실시했고, 우주정거장 살류트와 미르 운용 같은 일도 미국이 못하던 일이었는데[26] 소련은 미국의 몇분의 일 비용으로 이를 이루어냈는데, 이 또한 당시 소련의 앞선 기술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커다란 단일체의 스카이랩과 비교하여 미르라는 혁신적인 모듈형 우주정거장은 미국에 비해 부족한 소련의 예산과 기술력으로도 중요한 성과를 내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은 현재도 소련시절 개발된 러시아제 RD-180엔진(위에서 언급한 RD-170의 연소실을 2개로 줄인 모델) 을 군용으로[27] 계속 수입하고 있다. 기사 여러 성과와 소련 붕괴 이후 20년이 지난 지금의 현황에서 볼 수 있듯이 소련의 항공우주기술 만큼은 적어도 붕괴 시점까지 미국과 선두를 다투었다 할 수 있다.

7. 그의 사후 및 평가


베르너 폰 브라운과의 비교는 오랜 논쟁 떡밥이다.
세르게이 코롤료프가 개발한 소련의 기술이 나치 독일의 기술을 그대로 복제했을 뿐이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지만, 전혀 사실이 아니다. 위에서 지적한 바대로 베르너 폰 브라운을 비롯한 개발자급 대부분은 소련이 아니라 미국에 투항하여 소련은 개발진은 헬무트 그뢰트룹을 빼면 한 명도 구하지 못했고 그저 시제품 및 부품 생산직공들을 획득하는 데 그쳤다. 베르너 폰 브라운도 소련 투항자들이 별 볼 일 없는 단순 제조직공들이었다는 사실을 듣고 소련이 우주개발에서 진전을 보이지 못할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코롤료프를 비롯한 소련의 로켓기술자들이 로켓기술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가 없었다면, 이런 시제품을 가지고도 단순카피에 그쳤을 것인데, 코롤료프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몇 걸음 더 나아가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을 쏘아 올렸다. V-2의 복제형인 R-1, R-2 같은 경우는 엔진 하나만 쓰였는데, 소련의 고유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 R-7은 여러 엔진을 묶는 클러스터링 기술이 쓰였고 이는 코롤료프가 전쟁 전부터 구상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R-7이 궤도에 올린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가 83kg인데 반해서, 폰 브라운이 개발한 레드스톤으로 쏘아올린 인공위성 익스플로러는 겨우 14kg이었다.
미국은 베르너 폰 브라운 한 사람이 주도권을 잡고 로켓 설계를 해 나간데 반해 소련에는 코롤료프, 첼로메이, 글루시코, 얀겔 등 굇수급 로켓 개발자가 넷이나 되었고 이들이 서로 화합하지 못한 것이 문 레이스의 패인 중 하나가 되겠다.[28][29][30]
이후 코롤료프와 원수지간인 글루시코가 바실리 미신이 경질된 코롤료프 설계국의 수석 설계자로 임명되었고, 글루시코는 달 탐사보다는 우주 정거장 미르나 소련판 우주왕복선 부란 개발에 힘쓴다. 그런데 글루시코가 이렇게 우주 정거장에 힘쓴 덕분에 오늘날 러시아가 ISS 돌리면서 NASA와 우주관광객들에게 삥을 뜯을 수 있는 걸 보면 새옹지마가 따로 없다.
달 착륙 경쟁에서 승리하자 미국도 달 탐사에 흥미를 잃게 되었고, 20호까지 로켓을 만들어 두고도 17호에서 아폴로 계획을 종료한 뒤 실용적인 우주왕복선 개발에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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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과학계의 삼거두. 왼쪽부터 코롤료프, 가운데는 소련의 핵개발을 주도한 이고르 쿠르차토프, 맨 오른쪽은 로켓핵무기의 물리-수학적 이론적 계산을 도맡았던 므스티슬라프 켈디시.[31]
소련 우주개발 계획에서의 중요성과 미국이 보내는 암살자 위협으로부터의 과잉보호 때문에 모든 신상정보와 역할은 극비기밀이었으며, 대외적으로는 '수석 개발자(Chief Designer)'로만 간간히 언급되었고, 사후에야 존재가 공개되었다. 성대한 장례식 후에 소련의 국가영웅들만 모셔지는 붉은 광장크렘린 벽 묘지에 안치되었다. 당시 서방에는 그의 존재가 거의 안 알려져 있었던지라 미국 영화 필사의 도전(Right Stuff)에서는 소련 로켓이 미국을 앞설 때마다 껄껄껄 웃는 모습으로 잠깐씩 비춘다.
현재 베르너 폰 브라운와 함께 발사체 계통 엔지니어들의 양대 주신이 되고 있는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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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받은 훈장을 가득 담은 진열장 앞에 자랑스럽게 선 코롤료프의 유일한 혈육, 나탈리아 코롤료바 박사.
따님 되시는 나탈리야 코롤료바(Наталия Королёва, 1935~)[32] 할머니도 우주개발 분야에 종사하고 있다. 소유즈의 발사 때면 으레 스타 시티나 바이코누르를 찾아 승무원들을 격려하신다.

8. 코롤료프 시



1996년 공적을 기려 모스크바 주의 칼리닌그라드[33]가 코롤료프 시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여기에는 로켓 및 우주선 생산업체인 세르게이 코롤료프 로켓 및 우주 주식회사 《에네르기아》 본사 및 러시아 연방 우주국의 관제센터가 위치하고 있다.

[1] 참고로 영어로는 그의 이름을 Korolyov가 아닌 Korolev로 표기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ё를 위의 부호가 빠진 채로 읽은 것인데 ё가 들어가는 러시아 인명을 표기할 때 꽤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2] 소련 핵물리학의 레전드로는 체렌코프 현상을 규명하고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파벨 체렌코프, 일리야 프랑크, 이고르 탐이나 원폭의 아버지 이고르 쿠르차토프, 차르 봄바의 아버지 율리 하리톤, 안드레이 사하로프 등을 들 수 있다. 사하로프의 경우 차르 봄바 이후 핵무기 개발 회의를 느끼고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주장하고 소련 반체제 운동에 투신하였다가 귀양살이를 하고 노벨평화상을 받는등 인권운동가로도 높이 평가받는다.[3] N1은 그의 죽음 이후 후계자이자 보좌관이였던 바실리 미신과 쿠즈네초프가 개발하였다.[4] 상기 요약을 보면 알겠지만 R-7 로켓의 존재 자체부터 이 로켓으로 한 모든 일이 세계 최초다![5] 물론 '''전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로켓'''의 타이틀을 함께 달고 있다. '''완전체'''라는 단어를 괜히 쓰는게 아닐 정도로 로켓 공중폭발 시 승무원 모듈 비상사출장치 등에 개량을 거치면서 더더욱 신뢰성과 안전성이 강해졌다.[6] 후일담에 의하면 코롤료프는 처음엔 스스로를 우크라이나인이라고 생각했지만 나이가 먹어서는 그런 거에 관심없이 그냥 러시아인이라 자각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우크라이나 출신으로 서기장이 된 니키타 흐루쇼프의 영향이라고도 한다. 어쨌든 독립국 우크라이나가 없던 시대를 살아간 우크라이나인들에겐 딱히 이상할 것은 없는 부분.[7] 로켓의 운동은 뉴튼이 발견한 작용-반작용의 결과인데, 이때문에 로켓공학의 선구자였던 콘스탄틴 치올콥스키는 로켓운동을 "반작용운동"이라고 이름붙였다.그래서 이 연구그룹도 이렇게 이름이 붙은 것이다. [8] 2008년 1월 EBS에서 '우주 전쟁(Space Race)'라는 제목으로 더빙판을 방영하였다. 미소 양국의 로켓개발을 주도하는 폰 브라운과 코롤료프의 이야기를 교차적으로 보여준다. 각각 폰 브라운은 김일, 코롤료프는 이정구.[9] 실제로 발렌티 글루시코는 달 탐사와 우주선 개발에 힘쓰는 코롤료프와 달리 장거리 탄도미사일같은 군용로켓 개발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스탈린, 흐루쇼프, 브레즈네프 등 소련 고위층과 군부에게 많은 지지를 받았다.[10] 본래 코롤료프의 재능을 질투하기는 했으나 고발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NKVD의 지독한 고문과 협박, 회유에 넘어가 코롤료프를 신고한다. 그리고 그때부터 둘은 철천지 원수지간이 되어버렸다.[11] 카츄샤 로켓은 독소전쟁에서 큰 활약을 하기는 했지만, 기술적으로 보면 조선시대의 신기전과 다를 바 없는 유치한 수준이었다.[12] 소련에 끌려가긴 했어도 전쟁포로 취급이 아니라 매우 좋은 대우를 받았다. 그리고 이들이 대부분 서독으로 가길 원했기 때문에 계약기간이 끝난 1953년 이후 2년간 붙잡아두긴 했지만 1955년 동독이 아닌 서독으로 보내줬다.[13] space race 다큐에서 영입 하는 장면이 묘사 되는데. 연회를 열어 보드카를 잔뜩 먹여서 만취상태로 만들고 집으로 보내서 재웠다가 새벽에 강제로 소련으로 끌고 갓다. [14] 그뢰트룹은 이후 1953년 동독으로 간 뒤, 서방의 도움으로 서독으로 탈출했다.[15] space race 다큐에서 이걸 묘사했는데 우수한 대우를 받으면서 연구하는 폰 브라운과 달리 비가 오면 물이 새고 춥기까지 한 가건물에서 역설계하는 소련 연구팀과 매번 공중폭발 하는 로켓을 보며 부들부들 거리는 KGB 요원이 코롤료프에게 윽박지르고 있었다.[16] 스푸트니크 제작 당시 팀을 수습할 때 했던 명대사가 있다. 스푸트니크 항목 참조.[17] 1개의 터보펌프에 4개의 연소실이 장착되어 있고, 자세제어용 노즐이 부스터에는 2개/메인 로켓에는 4개씩 붙어있는 구조이다.[18] 엔진을 클러스터링 한다고 한다.[19] 이 역시 KGB가 코룔로프의 신상보호를 위해 철저히 기밀처리를 해서 그렇다. KGB의 과잉보호 때문에 이 대행사에 얼굴도 못 비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20] 걸작 ICBM인 SS-18 사탄의 개발자이다.[21] 흔한 성이라서 소련 해군의 아버지인 니콜라이 쿠즈네초프 제독과는 아무 상관 없는 인물이다.[22] OKБ는 숫자대신 초대 원장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며, OKБ-45가 유명한 수호이 설계국, OKB-155가 미그(미코얀-구레비치) 설계국이다.[23] 코롤료프와 달리 바실리 미신은 개인 연구자로서는 탁월했지만, 프로젝트 관리자로서는 능력이 부족했다. 나름 열심히 일했고, 그가 N-1 프로젝트 때 남긴 연구일지는 "미신 다이어리"라고 해서 현재 웹으로 공개되어 있으며. 링크 이것은 A-4용지로 총 천페이지 가까이 되는 방대한 것으로서, 그가 N-1프로젝트를 성공시키기 위해 얼마나 머리를 짜내 노력했는지는 이 노트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하지만 특히 코롤료프와 같은 관리능력은 갖지 못했으며, 성격도 개차반이었는지 유리 가가린이나 알렉세이 레오노프와 같은 우주비행사들과도 사이가 나빴다. 대기권 돌입시 낙하산이 펴지지 않아 코마로프가 희생된 소유즈 1호와 우주복 대신 체육복 차림으로 내려오다가 세명의 우주비행사가 순직한 11호 참사 때 조사보고서에서 그의 실책이 공식적으로 나열되었을 정도로 종합적인 관리능력이 부족했다. 특히 술을 너무 좋아하는게 탈이어서 니키타 흐루쇼프조차도 야인시절 펴낸 회고록에서 그를 깠을 정도. 결국 4번의 실패 외에도 술 때문에 거의 폐인이 된 상태에서 병원신세를 지다가 잘렸다. 그럼에도 꽤 장수해서 소련이 망한 지 10년후인 2001년 사망. 거대 프로젝트 과학에서 관리자로서의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준 예가 되겠다.[24] 반면에 미국의 새턴-5는 강력한 F1엔진 5개로 모든 추진력을 감당했다.[25] 중국이 우주개발에 대한 투자를 의욕적으로 늘리고는 있지만, 여러가지 운영 상황은 아직까지는 소련의 1980년대 수준보다도 낮으며, 소련이 붕괴한 후 20년이 훨씬 넘는데도 우주기술 3위의 중국이 20-30년전의 소련 레벨이하라는 것은 소련이 그만큼 대단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우주개발도 경제력이니만큼 현재의 상태가 20-30년간 계속된다면 장기적으로는 중국이 러시아를 앞설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사실 당시 미소는 국가 자존심을 건 우주 경쟁 때문에 경제를 생각하지 않고 과도하게 우주기술 개발에 매달린 탓에 비정상적으로 기술 개발속도가 빨랐다. 그렇게 보면 자기 경제력에 맞게 수십년에 걸친 장기 계획을 세워 우주개발을 하는 중국이 정상적이다. 이렇게 비정상적으로 돈을 퍼붓던 냉전 이후 미소 모두 예산 삭감크리를 맞아 러시아는 소련 시절의 라인업을 업그레이드하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으며, 미국도 우주왕복선 퇴출 및 차세대 발사체 개발이 계속 연기-변경되는 처지이다.[26] 기술적으로는 가능했겠지만 챌린저 참사로 예산이 싹싹 썰려나간데다 SDI도 망해서 도저히 수지를 맞출 수가 없었다.[27] 정확히는 ULA의 아틀라스 V 메인 엔진인데, 아틀라스의 주요 업무가 군사위성이나 가끔 NASA, NOAA 탐사선 쏘는 거다.[28] 코롤료프 사후에도 첼로메이와 얀겔은 서로 자신이 개발한 로켓을 ICBM으로 제식 채용해 달라고 싸웠고, 이를 중재하기 위해 아래에 나온 므스티슬라프 켈디시가 나섰으나 두 사람이 만든 로켓이 모두 고성능인지라 우열을 가리지 못하고 모두 제식 채용되는 결과가 나왔다. 그러나 이러한 중복 투자는 소련 국방예산에 큰 부담을 지워주는 결과가...[29] 사실 처음에 미국도 이렇게 여러군데서 로켓개발을 하다가 계속 실패하는 삽질을 했다. 특히 미공군 등에서 폰 브라운에게 태클을 많이 걸었는데 어디 감히 나치 부역자가 미국인을 우주로 보내는가 라는 묘한 차별의식 때문이었다. 하지만 계속된 삽질로 빡친 아이젠하워가 NACA를 NASA로 바꾸고 모든 로켓 개발역량과 인력이 싹 정리되면서 소련을 역전하게 된다.[30] 그리고 애당초 미국은 소련보다 돈도 많은 데다가 세계 각지에서 인재를 끌어모을 수 있고, 재료공학이나 전자공학같은 관련 기술이 소련보다 훨씬 더 뛰어났다. 이렇게 소련이 갖지 못한 여러 장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거국적으로 스페이스 레이스에 나선 미국이 유리했다. 오히려 소련은 국토가 잿더미가 되고 인구의 1/10이 학살된 처참한 처지에서 벗어난지 얼마 안된 1950년대 (2차대전 당시 거의 피해가 없던) 미국을 앞서 나갔고, 여러가지 관련 기술이 뒤떨어졌음에도 이를 어떻게 땜빵하여 우주기술에서 미국과 선두다툼을 한 것을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런 불리함을 오직 자신의 재능과 노력으로 극복한 이가 바로 코롤료프이기 때문에 국가적 영웅으로 추앙을 받아도 모자람이 없다.[31] 응용수학자로서 천재적인 재능을 가졌지만, 주로 우주개발에 관련된 문제를 연구했기 떄문에 수학계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리하여 소련의 대표적 수학자로는 이분보다는 위에서 언급된 콜모고로프가 꼽힌다.[32] 참고로 영어나 러시아어로 검색하면 같이 나오는 유명 러시아 여가수 나타샤 코롤료바(Наташа Королёва, 1973~)가 있는데, 코롤료프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며, 이분의 본명은 나타샤 블라디미로브나 포리바이(Ната́лия Влади́мировна Порыва́й) 이다.[33] 쾨니히스베르크였던 칼리닌그라드와는 다른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