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터스 F1
1. 개요
영국 옥스퍼드셔에 본사를 둔 팀으로 톨만, 베네통, 르노를 계승한다. 룩셈부르크의 벤처 캐피털 기업인 지니 캐피털이 팀을 소유했었으며, 2010년 르노 F1팀에 로터스가 르노와의 타이틀 스폰서 협약을 맺어 2011년에 로터스-르노 GP로 이름을 변경하였고, 2012년 시즌에는 로터스가 르노 F1 팀을 인수하여 다시 로터스 F1 팀으로 개칭하였다. 이에 르노는 엔진 서플라이어로 남고 로터스에게 엔진을 공급해준다. 2012년 4월에는 로터스 그룹과의 재정 지원은 종료하지만 팀 이름에 관해서는 2017년까지 로터스의 이름을 사용할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후 로터스의 성적 하락과 르노의 변심 등으로 인해 2015년에 르노가 F1 복귀를 선언해서 이 팀을 다시 인수하였고, 2016년부터 팀명을 르노 스포트 F1으로 바뀌었다. 르노 스포트에 대해 자세한건 여기로.
2. 역사
2.1. 원조 로터스
1954년 콜린 채프먼이 로터스 엔지니어링으로부터 분사시켜 설립한 F1팀이다. 채프먼이 레이스카 설계에 참여하고, 종종 직접 시운전 하기도 했다. 1958년 모나코 GP에 그레이엄 힐이 운전하는 로터스 12 경주차로 첫 F1 데뷔를 하였다. 1961년 미국 GP에서 스털링 모스 경이 로터스 18을 몰고 우승하는것을 시작으로 총 74번의 GP 우승과 7번의 컨스트럭터 챔피언쉽을 따냈다. 창립부터 1967년까지 코벤트리 클라이맥스[1] 엔진을 썼다. 이후 레이스카에 '''가스터빈을 박아넣는(!)''' 똘끼짓[2] 을 저지르다가(...) 코스워스 DFV를 쓰기 시작했다.[3]
1970년대까지 브리티쉬 그린 색상의 리버리를 칠하다가 타입 72 부터 로터스가 존 플레이어 & 선즈[5] 라는 이름의 담배 회사로부터 스폰서를 받게 되어 검정색 바탕에 금색 띠로 장식한 리버리로 출전했다. 다만 서브리미널 때문에 회사명은 John Player Special 이라고 돌려 썼는데[6]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블랙 뷰티'''라고 불렸던 이 흑금 리버리는 F1 역사상 가장 멋있는 리버리 중 하나로 손꼽힌다.
타입 72는 로터스 사상 최고의 성적을 거둔 차량으로 요헨 린트가 1970년[7] , 에메르손 피티팔디가 1972년 이 차로 월드 챔피언을 먹었다. 1978년에는 마리오 안드레티가 타입 78/79를 몰고 챔피언을 차지했는데 이것이 팀의 마지막 F1 챔피언쉽 우승이었다.
80년대부터 하락기를 맞아 윌리엄스, 맥라렌에 밀려 컨스트럭터 챔피언을 거두지 못했다. 그래도 나이젤 만셀 (1980~1984년) 아이르통 세나 (1985~1987년), 넬슨 피케 (1988~1989년)등 쟁쟁한 드라이버들이 많이 거쳐갔다. 1982년 콜린 채프먼이 심장마비로 사망하면서 1983년 시즌에 투입된 타입 93 터보가 그가 설계한 마지막 경주차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90년대 들어 넬슨 피케마저도 베네통으로 이적하면서 하락세가 가속화되었다. 람보르기니 엔진도 써보고, 신인 미카 해키넨도 데려오면서 해볼 건 다 해봤지만 차량 성능은 여전히 개판이었고, 1994년 조니 허버트를 드라이버로 혼다 엔진을 채용하며 마지막으로 분투했지만 단 하나의 포인트도 획득하지 못하고 그해 호주 GP를 끝으로 로터스라는 이름은 사라진다. 팀은 제임스 헌트의 형인 데이비드 헌트에게 팔렸고, 퍼시픽 팀과 합병되어 1995년 한 해를 더 뛰었으나 별 소득 없이 퍼시픽 팀조차 F1에서 철수한다. 결국 팀이 1998년 해체되면서 오리지널 로터스 팀은 명맥이 완전히 끊어진다.
2.2. 로터스-르노 GP
2.2.1. 2011년
당시 수장이었던 에릭은 로버트 쿠비차-비탈리 페트로프의 드라이버 라인업으로 테스트에 나섰고, 엠버서더로 장 알레시를 고용해 홍보의 가속페달을 밟았다. 하지만 시작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한다. 바로 로버트 쿠비차 문서에도 쓰여있듯이, 쿠비차가 랠리 중 심각한 사고를 당한 것. 팀은 부랴부랴 대타를 구해야만 했고, 결국 닉 하이트펠트를 그의 자리에 앉혔다.
성적은 시즌 시작 후 페트로프와 하이트펠트는 포디움 각각 한 번씩을 빼곤 2% 아쉬운 모습을 보여줬고, 하이트펠트는 시즌 중 팀을 나가게 되었다. 그의 빈 자리는 브루노 세나가 채웠다. 그리고 팀은 또 다른 로터스와 이름을 둔 싸움 끝에 승리하며 2012년부터 '로터스'라는 이름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2.3. 로터스 F1
2.3.1. 2012년
2012년 포뮬러 1의 가장 큰 화두는 바로 키미 래이쾨넨의 F1 복귀였다. 2011년 시즌 중 키미가 영국 옥스퍼드셔의 윌리엄스 본부에서 목격되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당시 드라이버였던 루벤스 바리첼로가 이를 부인하면서 일단락 되는 듯 했다. 하지만 2011년 11월 29일, 키미는 F1 복귀를 선언했고, 그곳은 바로 로터스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F1 커리어 1기에서 끝을 아쉽게 한 키미를 의심하는 눈초리도 분명히 있었지만, 어쨌든 전직 드라이버 챔피언인 데다가 명백한 스타 드라이버들 중 한 명인 키미의 복귀를 반기는 반응이 대부분을 차지했다.[9]
키미는 그런 의심의 눈초리를 한 사람들에게 보란듯이 성적을 내기 시작했다. 복귀 첫 그랑프리인 호주에서는 17위에서 7위로 뛰어오르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복귀한지 4번째 그랑프리만에 바레인에서 2위로 골인하며 복귀 첫 포디움에 올랐다. 그 후에도 중국 그랑프리를 제외하곤 쏠쏠히 포인트를 벌어들이며 로터스에게 큰 힘이 되어주기도 했다. 키미의 활약 말고도 또 빛났던 것은 바로 세컨드 드라이버인 그로장의 활약. 그는 2009년 르노 팀 소속으로 F1에 데뷔했지만[10] 그 다음 해 비탈리 페트로프에게 자리를 빼앗겼지만, 다시 GP2로 돌아가 우승컵을 들고 로터스로 승격되었고 포텐이 터졌다. 비록 불안정했지만 포디움도 3번 올라가 봤고, 여러 멋진 추월 장면들을 보여주는 등 제 몫을 톡톡히 해냈다.
2.3.2. 2013년
시작은 좋았다. 키미는 개막후 1-7-2-2-2 라는 엄청난 성적을 거두며 1위인 페텔을 4점차로 쫓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팀에 재정난이 오고 만 것이다. 키미는 몇 달 치 봉급을 받지 못했다고 후의 인터뷰에서 말하기도 했다. 게다가 후반부 그랑프리를 페텔이 계속 싹슬이하면서 키미는 자연스럽게 순위 경쟁에서 탈락해버렸고 심지어 팀 분위기에도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바로 인도 그랑프리에서의 충돌이다.
6그리드에서 출발한 키미는 뒤에서 맹렬하게 달려오고 있던 그로장을 뒤에 두고 달리게 되었는데, 그로장은 당연히 키미를 추월하려 들었고[11] , 직선 주로에서 앞서갈려고 했지만, 키미가 위험한 움직임을 보이면서 두 차 모두 리타이어 할 뻔한 상황까지 가기도 했다[12][13] . 당시 로터스의 피트에서는 더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는 그로장을 밀어주기 위해 키미에게 욕까지 하면서[14] 그로장에게 순위를 양보하라고 소리쳤고, 성깔하면 어디 안지는 키미도 욕으로 응수했다.[15] 어찌됐건 키미는 싱가포르에서 입은 등 부상이 심해져 수술을 받아야 했고, 페라리와 계약까지 하면서 팀에서 나가버렸고 잠시동안 같은 핀란드 드라이버인 헤이키 코발라이넨이 대타로 뛰었다. 그렇게 페라리로 복귀한 키미는 승승장구하게 된다.
2.3.3. 2014년
팀의 수장이었던 에릭은 팀을 나가고 그 자리를 로페즈가 맡게 되었다. 재정난에 빠진 팀을 구하기 위해 나선 사람은 바로 앤드류 루한이라는 영국의 사업가. 파스토르 말도나도를 영입해 스폰서인 PDVSA를 들여오면서 자금난에 허덕일 일은 없어졌지만 F1은 고사하고 모터스포츠 자체에 경험이 없는 사람이 수뇌부가 되면서 당연히 고용한 운영진도 영 실력이 별로였고 결국 이 멍청한 운영의 끝은 당연하게도 좆망이었다. 19번의 그랑프리 중 벌어들인 포인트가 딸랑 10점 밖에 안된다.
2.3.4. 2015년
20년 동안 르노와의 연계를 끊고 F1에서 가장 뛰어난 엔진인 메르세데스 엔진을 사용하기 시작한 그들은 작년의 드라이버 라인업을 유지한 채 출전했지만, 2012/2013 시즌의 전성기를 다시 찾을 순 없었다. 그래도 부진했던 작년보다는 포인트도 더 따냈고, 벨기에 GP에서 그로장이 3등으로 피니쉬하며[16] 포디움에도 올라보며 체면치레를 했다. 하지만 팀의 재정난이 회복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고, 시즌 중에 레이스 주최자에게 내지 못한 청구비용 때문에 찬밥신세도 당하는 등 여러 수모를 겪었다. 결국 르노의 변심으로 팀이 르노에 다시 인수되면서 운영팀 입장에서는 어떻게 보면 다행이긴 하다.
3. 둘러보기
[1] 영국의 엔진 전문 제작사로, 당시 여러 팀들에 엔진을 공급했다.[2] 로터스 56 모델. 프랫 & 휘트니에서 개발한 ST6 엔진을 넣었다. 원래는 인디카 오벌 서킷 출전용으로 만든 것이다. 다만 겸사겸사 F1에도 발을 담갔었는지 1971년 시즌에 에메르손 피티팔디가 몬차 서킷에서 이 차를 몰고 8위를 따냈다. 굿우드 페스티벌 오브 스피드에서도 간혹 모습을 보이곤 하는데 자동차에서 '''제트기 소리'''가 들리는 모습이 압권. [3] 왜 코스워스 엔진인가 하면, 코스워스의 창립자인 마이크 코스틴과 키이스 덕워스는 한때 로터스 직원으로 채프먼 밑에서 일했었기 때문.[4] 드라이버는 마리오 안드레티.[5] 통칭 플레이어즈. 영국 노팅엄에 위치한 담배 회사로 특유의 검정색 바탕에 황금색 그림이 그려진 담배곽으로 유명하다. 현재는 그렇게 유명하지는 않지만 나름 매니아가 있는 브랜드.[6] 한편으로 로터스 팀은 포뮬러 1 역사상 처음으로 레이스카를 광고판으로 활용해 상업적 스폰서쉽을 F1에 처음으로 들여온 팀이기도 했다.[7] 그러나 이탈리아 GP에서 연습주행 도중 전륜 브레이크 조인트가 부러지며 스핀하여 배리어를 충돌하는 사고로 사망,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해 이미 5번의 GP 우승으로 포인트 선두였기에 사후에도 F1 월드 챔피언에 올랐다.[8] 로버트 쿠비차도 왜 있는지는 후술.[9] 애시당초 2009년을 끝으로 페르난도 알론소를 영입하기 위해 페라리가 2010년 연봉까지 미리 지불하는 것을 조건으로 은퇴를 했던 만큼 본인도 F1에 복귀할 의사가 충분히 있었을 것이다.[10] 당시 그로장은 리저브 소속으로 부상으로 결장한 리우찌를 대신하여 출장했다. 하지만 그 경기에서 인상적이지 못했고 풀시즌 참전하지 못한채 다시 리저브로 복귀했다.[11] 당시 타이어는 그로장의 상태가 훨씬 좋았다.[12] [image][13] 당시 그로장은 키미가 챔피언십 경쟁에 들어선 것도 아니었으므로 그냥 열심히 달리다가 기회가 보이길래 키미를 추월하려 했을 뿐이고, 키미는 단순히 그냥 브레이킹이 늦어 실수했다고 나중에 진술했다. 당시 그로장과 키미 둘 사이의 관계는 오히려 전혀 나쁘지 않았다.[14] Kimi, Get out of the fucking way! (키미, 씨발 당장 길을 내줘!)[15] Don't Shout there, Fucker. (거기서 소리지르지 마라, 씹새끼야.)[16] 로터스 팀의 매튜 카터 CEO는 당시 메르세데스가 그로장의 차에 다른 엔진 세팅을 이용해 벨기에에서 페텔의 페라리를 압박하길 원했다. 2015 시즌 벨기에 GP는 페라리의 900번째 그랑프리였으므로 우승은 커녕 포디엄에라도 오르지 말도록 압박을 가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특별히 엔진 세팅중에서 가장 파워풀한 모드인 스트랫 7 모드를 쓸 수 있게 허락해주었고, 실제 성능도 이전보다 각 섹터별로 빨라서 랩타임이 0.8초 정도 차이난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후 로터스는 다음 레이스에서 메르세데스에게 스트랫 7 모드를 쓸수있게 요청했었지만, 그것은 그날 경기에서만 국한된 것이며, 다시는 그 레이스 세팅에 접근할 수 없게 되었다고 밝혔다.